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 산 27번지, 태학산의 해선암 뒷산 기슭 큰 바위에 높이 7.1m나 되는 거대한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이 마애불을 해질녘 찾아가면 백제의 미소라는 서산 마애삼존불과는 또 다른, 고려의 은은한 미소를 만나볼 수 있다.

바위를 깎아 돋을새김으로 처리한 삼태리마애불은 고려시대 거대마애불의 완벽한 예술품이라고 평가를 할 만하다. 불상의 전체적인 형태나 얼굴 모습, 옷주름의 표현 등에서 고려시대의 불상 양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마애불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보물 제407호로 지정된 삼태리마애불의 얼굴 부분은 바위의 주변을 깎아내 돋을새김으로 조각하고, 몸의 부분은 선각처리를 하였다. 이는 고려 후기 마애불의 일반적인 양식으로, 이 마애불이 만들어진 시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즉 거대한 마애불이라는 점, 그리고 일부를 돋을새김 하여 부분 강조를 한 점 등, 고려 마애불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 학술적인 면이 아니라고 해도, 삼태리마애불은 지역적 연고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통일신라 후기 이후 이 지역의 특징이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백제의 미소 못지않은 고려의 미소.

민머리 위에는 둥근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다. 삼태리마애불의 특징은 바로 이 머리상투 부분이다. 큰 바위에 솟아나게 만든 이 상투부분이 거대한 바위 위로 솟아나 있어, 흡사 큰 바위에 조각을 한 마애불을 갖다 붙인 듯한 느낌이 들게 조성하였다. 살이 오른 넓적한 얼굴과 길게 치켜 올라간 눈, 커다란 코와 작은 입으로 인해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그 근엄한 표정 중에서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보인다. 해질녘에 찾아가면 그 신비의 미소가 더욱 느껴진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는 삼태리마애불. 아마도 이 마애불을 조성한 장인의 마음이 그렇게 여러 차례 변화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긴 시간 이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점차 마음의 문을 열어간 듯하다. 삼태리마애불은 참으로 특이하게 생겼다. 목이 짧아서 목에 있어야 할 3줄의 삼도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는 것도 특이하다. 법의는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묵직하게 처리하였다. 상체와 양쪽 옷자락은 세로선의 옷주름을 표현하였고, 하체에는 U자형의 옷주름을 새겼는데 옷주름은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지역적 특성이 강한 마애불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했으며 오른손은 왼손 위에 손등이 보이도록 하였다. 이런 수인은 고려시대의 미륵불에서 나타나는 수인과 같은 것이어서 이 마애불이 미륵불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은, 경기도 안성과 충청도 충주, 천안 등에서 흔히 나타나는 미륵신앙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삼태리마애불 역시 지역 특성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애불의 윗부분 바위에는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미륵불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거대한 마애불을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세상에서 찌든 시름을 다 잊게 된다. 그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겼으면서도,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를 지켜내고 있는 삼태리마애불. 해질녘 바라다본 마애불의 미소에 마음속에 가득한 세상을 향한 미음이 봄눈 사라지 듯 한다. 마음이 답답하고 미음이 가득하다면, 이 삼태리마애불을 찾아가 고려의 은은한 미소를 바라보기를 권한다.

‘마애불’이란 커다란 바위 암벽의 면에, 부조나 선각 등으로 불상을 새긴 것을 말한다. 마애불이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마애종이 있다는 것은 그리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은 듯하다. 마애종이란 암벽에 새긴 종을 말하는 것이다.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산32에는 바로 이 마애종이 있다.

석수동 산 32번지라고 해서 산을 연상할 필요는 없다. 석수동 마애종은 주차장이 있는 평지에 남서쪽을 향한 암벽에, 장방형의 목조 가구와 그 안의 종을 새긴 것이다. 현재 누각을 지어 이 마애종을 보호하고 있으며,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마다 안내판을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한다. 아마도 이들에게도 마애종이라는 것이 낯설기 때문인가 보다.


종의 모양을 세밀하게 표현 해

누각 안 바위 암벽 면에 새겨진 마애종의 모양은 오랜 세월 풍화로 그리 선명하지는 않다. 상단의 보 중앙에는 쇠사슬을 달아 종을 걸어 둔 모양을 새겨 표현하였다. 그런데 그 모양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동종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굵은 쇠사슬로 매단 종의 상단은 용뉴와 음통이 확연하게 표현을 하였다.

종의 상단에는 장방형 유곽을 2개소에 배치하였는데, 그 안에 각각 9개의 원형 유두가 양각되어 있다. 이 또한 일반적인 종에서 볼 수 있는 모습 그대로이다. 종신의 중단에는 연화문이 새겨진 당좌를 표현하고, 하단에는 음각선으로 하대를 표시하였다. 아마도 이 마애종을 새긴 장인이 종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을 치고 있는 승려, 생동감 있게 표현 해

종의 오른쪽에는 종을 치고 있는 승려상을 조각하였다. 이 승려상의 모습은 지금의 승려들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마애종을 조각하였을 당시의 모습도 지금과 같았던 것일까? 다만 그 법의의 형태가 현재의 승려복이기 보다는 흔히 부처상에서 보이는 그런 법의와 흡사하게 표현을 하였다. 긴 막대를 사용하여 종을 치는 모습은 당장이라도 종소리가 울려 퍼질 듯하다. 목조 가구의 위쪽에는 3개소에 화반을 표시하였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안양시 석수동의 마애종은 현존하는 마애종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종의 세부 표현에 있어 청동제와 다를 바 없어, 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주변의 중초사지 유적과 연관성을 생각해 볼 때, 고려시대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이 곳은 이 마애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근에는 고려시대의 절터인 중초사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 중초사지는 그동안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자료에만 남아 있던, 안양사 7층 전탑 터가 2010년에 확인되기도 했다. 그 이전 2009년에는 이 일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안양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기도 헸다. 이곳 일대에 고려시대에 안양사가 위치한 곳이라는 것이다.

저 마애종이 울리면 새 세상이 올까?

한참 마애종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돌아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이야기를 하는 말소리가 들린다.

“저 마애종이 울리면 세상이 바뀌려나?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네. 사람들이 좀 편하게 사는 세상이 왔으면”



뒤를 돌아다보니 등산객인 듯한 사람들이 안내판을 보면서 하는 소리이다. 속으로 그 말에 백배 공감을 한다. ‘제발 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아마도 이 마애종을 바위에 새긴 장인도 그런 마음으로 새긴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저 종을 치고 있는 스님의 모습이, 지금이라도 종을 칠 듯한 자세이다.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마곡산 줄기 부처박골에 가면, 마애보살좌상을 선각한 바위 옆에 또 하나의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고려중기 이후에 조각된 것으로 설명이 된, <소고리 마애삼존석불>이 있다. 바위 밑에는 누군가 치성을 드린 듯 촛불이 커져있다.

이천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삼존석불을 바라보다가 한참이나 웃었다. 그 모습이 지금까지 보아오던 마애불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마애삼존석불을 보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우리가 흔히 즐겨있던 손오공의 이야기인 서유기가 삼존불 안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 만의 생각이겠지만, 이 삼존석불 안에 서유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애삼존석불은 중앙에 본존불을 크게 돋을새김 하였다. 높이는 203cm인데 얼핏 보니 서유기의 손오공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혹은 다시 보면 저팔계와도 닮았다. 원래는 손오공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누군가 코를 쪼아내서 저팔계와 비슷한 모습도 하고 있다.

마애삼존석불이 서유기를 본뜬 것은 아닐까

서유기는 중국 명대의 장편소설이다. 오승은이 지은 책으로 승려인 현장이 천축국인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온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 이야기다. 서유기에 나오는 현장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로, 602년에 태어나 664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현장을 따르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각각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삼장법사를 따라 불경을 구하러 인도를 가면서 81차례나 모험을 한 끝에 불경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소고리 마애삼존석불을 보다가 갑자기 서유기가 생각이 나는 것은 왜일까?


이 마애삼존석불은 소고리 부처박골에서 산을 향하고 있다. 모두가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두 다리를 결가부좌한 좌상이다. 본존불과 양편이 협시불, 모두 손을 가슴으로 모았다. 좌협시 보살은 60cm, 우협시 보살은 93cm의 크기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본존불은 손오공, 좌협시 보살은 사오정, 우협시 보살은 삼장법사를 닮았다.

마애불의 추정연대가 혹 1500년 이후는 아닌지?

고려중기 이후라고 하면 1150년 이후가 된다. 만일 이 마애삼존석불이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한 것이라면, 손오공을 주인공으로 한 서유기를 지은 시기와는 연대가 맞지를 않는다. 마애삼존석불의 문화재 설명문에는 막연히 고려 중기 이후로만 적고 있다.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마애삼존석불이 혹 150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서유기를 지은 오승은은 1500년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혹 명대의 이 책을 보고, 누군가 그 서유기의 이야기를 마애불로 표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삼존석불은 아무리 보아도 서유기를 도식화해서 만든 작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마애삼존석불의 본존불을 보면 콧구멍을 뚜렷하게 표현했다. 눈이나 생김새도 손오공을 닮았다.

얼핏 보아도 일반적인 부처의 상이 아닌 손오공이라는 생각이다. 함께 동행을 한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중앙에 본존불을 보면 무엇이 생각나느냐고. '손오공'이라는 대답이다. 그렇다면 나만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남들도 왜 대뜸 손오공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삼존불 안에 손오공, 사오정, 삼장법사가 있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진 본존불. 고려조나 조선조의 마애불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전혀 다른 조각의 형태. 그리고 토우 등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 등, 이 삼존석불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다. 이목구비도 도식화 되어있으며, 일반적인 불상조성의 규범에서 벗어나 있다. 그저 관 위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과 같은 두광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협시보살의 형태도 마찬가지다.

좌협시 보살을 보면 높은 관을 쓰고 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삼장법사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고 있다. 본존불과 좌협시 보살이 삼도를 표현한데 비해, 우협시 보살은 삼도가 없다. 머리는 맨머리인데 두건 같은 것을 쓰고 있다. 서유기의 사오정과 같은 모습이다. 마애삼존석불을 돋을새김한 바위도 이 지역에서 보이는 바위와는 재질이 다르다.


바위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있다. 옆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의 돌과는 전혀 다른 석질인 듯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바위가 여기 와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저 마애삼존불이 내 눈에는 서유기의 인물들 처럼 보이는 것일까? 그동안 너무 많이 돌아다녔더니, 이젠 머리까지 이상하게 되어가는가 보다.

인근에는 없는 석회암같이 구멍이 뚫려있는 바위. 그리고 서유기의 손오공, 삼장법사, 사오정과 같은 인물의 표현. 이 마애삼존석불을 떠나면서도 머릿속이 혼돈스럽다. 왜 저것이 서유기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래서 늘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얻기 위한 여정이 계속되는 것이지만.

이천에 있는 설봉산. 설봉산에는 사적인 설봉산성을 비롯해, 향토유적인 영월암 등이 있다. 영월암 대웅전 뒤편 암벽에 새겨진 보물 제822호 마애여래입상을 보기 위해 산을 올랐다. 설봉산에 올랐다. 한 낮의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설봉산은 그리 높지는 않은 산이지만, 차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길을 한 낮에 걷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어깨에는 무거운 카메라 가방까지 메고 있으니, 다리가 더 무겁다. 물도 준비하지 않은 채 산을 오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하게 목이 탈 때쯤 영월암 입구에 도착했다.


천년 세월 설봉산을 지킨 마애불

목이 타던 차에 영월암 입구에 있는 샘에서 물을 몇 대접이나 마셨는지. 한숨을 돌리고 난 후 대웅전을 비켜 뒤로 오르니, 커다란 자연 암벽에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이 마애불은, 머리 부분과 손 부분은 얇게 돋을새김을 하였고 나머지는 선으로 음각하였다.

높이 9.6m의 거대한 이 마애불은 ‘마애여래불’로 명칭을 붙였지만, 민머리 등으로 보아 ‘마애조사상’으로 보인다. 둥근 얼굴에 눈, 코와 입을 큼지막하게 새겼다. 두툼한 입술에 넙적한 코, 지그시 감은 눈과 커다랗게 양편에 걸린 귀. 그저 투박하기만 한 이 마애불에서 친근한 이웃집 어른을 만난 듯하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모두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왼손을 안으로 향했다.

고려 전기에 조성이 되었다고 하면 천년 세월을 이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전국을 돌면서 우리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만나는 문화재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



고려시대 특유의 거대마애불인 영월암 마애불

높이 9.6m의 거대마애불. 고려시대의 마애불은 하나같이 커다랗게 조성이 되었다. 아마도 국가적으로 북진에 대한 염원을 그린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얼굴과 두 손만 부조로 조성을 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우편견단의 형식으로 조성한 법의는 몸 전체를 감싸며 유연한 사선으로 흘러내린다.

이러한 옷의 주름이나 팔꿈치가 직각으로 굽혀진 것은 고려시대 마애불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마애불은 그 형태로 보아 조사상이나 나한상으로 보기도 한다. 천 년 세월을 온갖 풍상에 저리도 의연하게 서 있는 마애불. 머리 부분은 암벽의 상단에 조각이 되어 올려다보면 몸에 비해 조금은 작은 듯도 하다. 전체적인 균형은 조금 비례가 맞지 않은 듯하지만, 저 단단한 암벽을 쪼개고 갈아 내어 저런 걸작을 만들었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마애불을 돌아보다가 돌계단에 주저앉는다. 산으로 오르며 흘린 땀이 시원한 바람에 말라간다. 마애불을 떠나 내려오면서 드린 대웅전. 그 어간문 앞에 서서 손을 모으고 이리 훼손이 되지 않은 모습으로 천년을 지켜왔음을 감사를 드린다.

답사를 하는 길은 늘 바쁜 걸음이다. 하나라도 더 문화재를 만나야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경기도 가평에서 여주, 양평을 거쳤다. 원주에서 횡성으로 올라오는 길에 갑자기 치악산 좁을 길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길을 벗어났다. 원주 공군비행장 맞은편 소로로 길을 접어들어 치악산 쪽으로 가다가 보면, 소초면 소재지가 나온다.

주말에는 항상 밀리는 영동고속도로이다. 올라가는 차들이 심상치가 않다. 아무래도 길이 막힐 것 같아 길을 서둘러 돌아 나오는데, 마애공양보살상의 안내판이 있다. 길옆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암벽이 없다. 마애보살상이란 암벽에 새긴 것이라 바위만 찾아본다. 낮은 등성이 있는 산 어디에도, 마애불을 조각할 만한 바위가 보이지를 않는다.



길에서 조금 아래 개울가에 솟은 바위 암벽에 선각된 마애불, 선각을 해서 멀리서는 알아볼 수가 없다 


개울가에 자리한 바위, 그곳에 마애불이

원주시 소초면 평장리. 산 밑을 바라다보니 돌계단이 있고 그 밑 기슭에 암벽하나가 솟아 있다. 세상에 저 밑에 저렇게 숨어있었다니. 암벽에 보살좌상 1구가 선각 되어 있다. 높이 3.7m, 넓이 6.2m 크기의 암벽에 가득히 조각하였는데 보살의 높이는 3.5m이다. 이 보살은 측면상으로서 머리에 보관을 썼는데, 하단에 좌우로 관대가 보인다.

보발의 표현이 부드러우며 상호는 원만한 상으로 양미안과 비량 등은 잘 남아 있으나, 입은 파손되었다. 삼도가 돌려지고 천의는 편단하였으며, 오른발을 구부려서 앉고, 왼발은 직각되게 펴서 왼손을 받치고 있다. 각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고려 전반기로 추정 된다. 이 보살입상에서 특이한 것은 왼손을 넓게 펴고, 그 위에 연꽃등의 공양물을 올려놓아 오른손으로 이것을 잡고 있는데 이러한 형상은 흔한 것이 아니다.



이 작은 동산 한편 물이 흐르는 작은 골짜기 한편에 다소곳이 앉아 천년을 보내다니. 암벽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음각을 한 선이 굵지가 않아서 언뜻 눈에도 띠지 않는다. 그렇게 천년 세월을 이곳이 앉아 역사의 변화를 보면서, 묵묵히 한손에 받친 공양물을 부처님께 올리는 저 보살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리려고 했을까?

총탄을 맞은 마애공양보살, 역사의 아픈 흔적

작은 계곡 앞에 철버덕 주저앉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바라다만 보고 있다. 무엇인가 우리에게 암시를 하는 것은 아닐까? 저 손에 들고 있는 공양물이 혹 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아줄 정신적인 먹을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세상에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향해, 나에게로 와서 배를 채우라는 고함소리는 아니었을까? 그렇게 눈을 들어 앞을 바라다보는 마애공양보살상은, 말없이 한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만 같다.

이 보살상의 입은 심하게 파손이 되었다. 누가 일부러 무엇인가 단단한 것으로 찍은 듯하다. 그도 마애보살상은 우리에게 암시를 하려고 한 것 같다. 시끄러운 세상, 그저 입단속 잘하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입만이 아니다. 얼굴에도 신체 부위에도 총탄을 맞은 흔적이 나 있다. 아마도 전쟁 중에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나보다.



이렇게 훼손이 된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사람들에 의해 훼손이 되고, 전쟁 통에 부서지고, 그것도 부족해 별별 이유로 훼손이 되어가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9호로 지정이 된 이 평장리 마애공양보살상은 이렇게 아픈 역사를 보듬고, 천년 세월을 개울가에 무릎을 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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