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있는 산을 돌아온 곳(퇴촌)인데

바람에 연기는 상방으로 접하는 구나

옛날에 놀던 곳은 뒤섞이어 찾아볼 수 없으며

세상 사람들은 본래 많이 바쁘다

 

고요한 방에 중과 이야기하기 아주 알맞으며

가을 등불 밝은데 빗소리에 밤은 깊어지는 구나

이어 생각하여도 보진자만 생각하니

밝은 시대였는데 역시 깊이 숨어 살았구나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이 세심정에 남긴 글이다. 이식은 본관 덕수이며, 자는 여고, 호가 택당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광해군 2년인 1610년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후일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벼슬은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정구, 신흠, 장유와 더불어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수정을 맡아 하였으며, 저서로는 <택당집(澤堂集)>과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 등이 있다.

 

세심정은 양평군 지평에서 341번 도로를 따라 용계계곡 방향으로 가다가, 덕촌리에서 좌측으로 들어간다. 마을에는 펜션들이 들어서 있으며, 다리를 건너 우측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 양평군 항토유적 제23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산137번지에 해당한다.

 

눈이 내리는 날 찾은 세심정

 

육각형으로 지어진 세심정, 2평 남짓한 세심정은 490여 년 전에 지어진 정자이다.

세심정에 걸린 현판. 용문선생은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아침부터 날이 잔뜩 흐리더니, 오후가 되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눈길에서 몇 번이나 혼이 난 적이 있는지라, 답사를 포기할까도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미 세심정이 가까운 곳까지 찾아왔는데, 그냥 돌아가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여기저기 길을 물어보지만, 세심정을 알려주는 사람들이 없다. 몇 번을 물은 끝에 겨우 세심정으로 향했다.

 

급기야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저만큼 정자가 하나 보인다. 세심정이다. 주변에는 노송 몇 그루가 서 있고, 앞으로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다리를 건너 세심정을 올려다본다, 눈발이 점점 세차진다. 마음이 바빠 낙엽 쌓인 돌계단을 오른다. 벌써 낙엽 위로 쌓인 눈이 미끄럽다. 세심정 위로 올라 정자를 본다. 이렇게 작은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난세에 찌든 마음을 씻어냈을 정자 주인의 마음을 읽어본다.

 

490년 전에 지어진 작은 정자 세심정

 

처마를 길게 빼낸 세심정은, 육각형의 기둥으로 처마를 받쳤다


세심정은 명종 16년인 1521년 조선조 중종과 명종 때의 학자이며 정암 조광조의 수제자로 명성을 얻은 조욱(1498 ~ 1557)이, 기묘사화로 정암과 그 문하들이 화를 당할 때 화를 면하고 낙항하여 지은 정자라고 한다. 조욱은 마침 모친상을 당하자 용문산중에 복거하여 그 마을 이름을 퇴촌(退村)이라 하고, 이 정자를 지어 세심정이라 이름하고, 당호를 스스로 '세심당'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정자는 6각형으로 지어졌으며, 선생의 마음을 닮은 것인지 고졸하다. 이곳에 은거한 후로 사람들은 조욱을 '용문선생'이라 칭했다고 한다. 야산 기슭에 이 세심정을 지어놓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는 조욱. 세심정 안에는 현판이 몇 개 걸려있다. 아마 선생의 평소 학문을 그리던 나그네들이 지어놓은 글일 것 같다.

 

정자 안에는 <세심정 기>를 비롯한 몇기의 게판이 걸려있다.


연당과 아우러진 세심정의 조화

 

세심정은 육각형의 정자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일곱 개의 주추 위에 육각의 기둥을 세우고, 정자의 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난간 밖으로 다시 툇마루를 깔았다는 점이다. 따로 입구를 내지 않고, 여섯 면 모두 난간을 둘렀다는 점도 특이하다. 정자는 야산의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노송과 고목들이 정자를 쌓고 있다. 그리고 앞쪽 계단 밑으로는 연당이라 부르는 연못이 있다.

 

연당은 석축으로 주위를 쌓았다. 정방형으로 조성한 연당은 정면이 16m에 측면은 11,5m 정도의 연못이다. 가운데는 섬을 만들고 그 위에 노송을 심어 멋을 더했다. 지금은 주변이 온통 펜션들로 들어찼지만, 처음 이 세심정이 지어졌을 때는 앞면이 트여있어 경관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세심정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눈이 점점 함박눈으로 변했다. 마음이 급해 더 이상은 지체를 하지 못하고, 정자를 내려와 돌아가려다가 안내판을 본다. 안내판에 이상한 점이 있다.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을 두른 후, 다시 툇마루를 내었다

세심정의 앞에 자리한 연당. 중앙에는 섬을 만들고 노송을 심어 멋을 더했다.

 

 

조욱은 1498년 8월 21일에 태어나, 1557년 12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자는 경양, 호는 우암이며 본관은 평양이다. 조선 중종 때 문과에 급제를 하고도 벼슬에 나아기지 않고, 용문산으로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조욱의 높은 학식과 인격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를 '용문선생'이라 불렀다. 후일 명종 때 현사로 뽑혀 벼슬을 하면서, 이황, 서경덕과도 가깝게 지냈다. 시와 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용문집>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내판에 적힌 연대가 맞질 않는다.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이런 일이 허다하다. 글자가 틀린 안내판, 연대가 맞질 않는 안내판. 찢기고 더럽혀진 안내판, 외국어로 번역을 해 놓았는데 내용이 안맞는 안내판, 딴 때 같으면 한 마디 하겠지만 세심정에 올라 마음을 씼었는데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저 허~ 웃고 떠날 수 밖에.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는 번암면 소재지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남노령이 주산을 이룬 대성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중엽에 홍성 장씨들이 이주해 집단마을로 취락이 형상되었다. ‘노단이란 노나라에서 태어난 공자의 집터와 같은 명당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노단 마을 도로변 대성산 자락에는 겹처마 우진각으로 지은 육각형의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정자는 길에서 보면 조금 위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낮은 담장에 일각문을 내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를 오르는 길 한편에는 반계정(磻溪亭)’이라 음각한 돌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도 깨어진 바위에 반계정이란 글이 쓰여 있다.

 

 

 

바위에 새겨져 있던 반계정 표석

 

원래 이 깨어진 바위에 새겨진 반계정이란 글씨는,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우측 도랑끝의 암벽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1978 ~ 198019번 도로의 개설로 인하여 방치되어 오던 것이라고 한다. 2007년 반계정 아래에 있는 우물을 정비하던 중, 본 표석이 발견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씨가 새겨져 있는 바위를 원 상태로 복원을 하고자 했으나, 오랜 시간 풍화로 인해 보존하기가 어렵자, 탁본을 하여 현재의 돌에 그대로 새겨 넣었다고 한다. 200710월의 일이다. 계단을 올라 일각문 안으로 들어선다. 안에는 육각형으로 지은 누정이 있다. 정자로 오르는 계단은 장대석을 겹쳐 놓았다.

 

 

 

취헌의 정자 반계정

 

취헌 장안택 선생은 자는 사유이고 아호는 취헌이다. 선생은 만인을 구제하는 제세구휼을 일생의 업으로 삼고 몸소 실천을 하였다고 한다. 취헌 선생의 이러한 마음은 전국 각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구제를 하던 장안택 선생은 급변하는 세태의 변천을 개탄하며, 세상을 등지고 자연에 몸을 묻고자 생각했다.

 

그래서 지은 것이 대성산 바위 암벽 아래에 반계정이다. 지금이야 앞으로 도로가 나 있지만, 아마 이 정자를 지었을 때는 바위와 앞으로 흐르는 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자였을 것이다. 선생은 이 정자에서 자손들을 교육시키며 여생을 보냈다. 반계정이란 바위와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상징하는 뜻이다.

 

 

취헌 장안택 선생은 조선조 철종 14년인 1863년에 태어났다. 선생은 조선 후기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사업가이다. 부친은 동몽교관인 장석룡이며, 조부는 남요 장홍규이다. 선생은 조부로 부터 예의범절과 학문을 닦았다. 선생의 집은 장부자집으로 통했다. 종손인 선생은 적선을 많이 하였다.

 

고종 31년인 1894년 갑오농민혁명 때는, 관군에 쫓긴 농민들이 장수 번암까지 피신해 이곳 번암면이 농민군들의 집결장소가 되었다. 선생은 농민군으로 인해 민폐가 일어나자, 이들에게 술과 고기 등 음식을 베풀어 민폐를 줄였다. 관군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음식을 베풀어 민폐를 줄이기도 했다.

 

 

자손들이 기억하는 반계정

 

반계정 뒤편 암벽에는 장안택, 반계정이라고 음각한 글이 있다.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자 병준이라 새개 넣었다. 조상의 정자를 기리기 위해 후손이 새겨넣은 글씨이다. 이 반계정은 1800년에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장수군의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최근에 보수를 한 듯하다.

 

정자는 육각의 모든 면에 문을 달았다. 아직은 보수 중인 듯 문은 모두 떼어내 한 편에 쌓아놓았다. 정자 안에는 반계정 운이란 선생이 지은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취헌이란 편액이 있다. 정자는 입구를 뺀 전면에 난간을 둘렀다.

 

 

우진각으로 지은 정자는 밑 안으로는 장초석으로 된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운 뒤 누마루를 깐 정자를 올렸다. 그리고 겹처마를 받치기 위해 활주를 세웠는데, 아래편은 육각형의 장초석을 세운 후, 그 위에 육각형의 기둥을 받쳤다.

 

취헌 장안택 선생. 평생을 자선사업가로 살다간 마음을 담고 있는 반계정. 아직은 주변이 부산스럽기는 해도, 그 위에 올라 선생의 마음을 담아간다. 세상이란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에 소재한 반계정. 소나무에 둘러싸인 이 정자는, 반계(盤溪) 정상규 선생이 지은 정자라고 전한다. 반계선생은 자신도 생활이 어려웠으나, 남을 돕기를 좋아하였다. 항상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남의 어려움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선생이기에, 어려움이 더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은 정자를 개울 위에 짓고 세상을 피해 살았다고 한다.

 

장수군의 답사를 하면서 우연히 찾아간 반계정. 반계정은 비지정 문화재로 입간판 하나가 서 있지 않다. 산서면 사계리에 소재한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34호인 창원정씨 종가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정자이다. 반계정 주변에는 키가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자리를 하고 있어 고풍스런 모습이다.

 

 

 

축조한지 100년이 지난 반계정

 

반계정은 1909년에 지어진 정자로 전해진다. 100년이 조금 지난 세월이다. 일각문 앞으로는 밭이 있고, 뒤로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꽤 많은 물이 흘렀다고 한다. 그만큼 운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반계정은 몇 년 전에 보수를 했다고 한다. 담은 기와와 돌, 황토를 섞어 쌓았는데, 정자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모습이다.

 

일각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으로 구성된 반계정이 있다. 반계정은 정자에 오르는 계단이 중앙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측 편에 장대석을 쌓아 올렸다. 마루는 누마루를 깔고 밑으로는 네모난 돌을 주초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반계정에는 몇 가지 특이한 것이 눈에 띤다.

 

 

모서리에 붙은 한 칸의 방

 

우선은 반계정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정면의 기둥은 둥근 기둥을 사용한데 반해, 뒤편으로는 네모난 기둥을 사용했다. 그리고 뒤편 우측으로 방을 몰아서 붙여놓았다. 계단을 오르면 바로 우측에 한 칸의 방이 있다. 방은 정자의 마루를 접한 부분에는 두 짝 문을 두고, 외부로는 한 짝 문을 옆으로 뉘여 달아냈다.

 

정자의 앞부분은 누마루를 깔고 방의 우측 한 칸에도 마루를 깔았는데, 앞쪽의 누마루보다 약간 층이 지도록 하였다. 계단과 벽면을 뺀 남은 부분에는 모두 난간을 둘러놓았다. 방은 온돌방으로 꾸며 한 겨울에도 이곳에서 지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반계 정상규 선생은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전해진다.

 

 

도난당한 선생의 일생

 

반계정에 대해서 조금 자세하게 알고 싶었으나, 아무런 안내판이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반계정 옆에서 나무를 심고 계시는 분에게 말씀을 드려보았더니, 마침 반계선생에 대해서 알고 계신다고 하신다.

 

저 반계정은 언제 지어졌나요?”

“100년이 조금 지났어요. 정 상자 규자를 쓰시는 어르신이 세상을 피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사셨죠.”

정자 주변 경치가 아주 좋아요

예 저 소나무들이 저희가 어릴 적에는 흔들고 놀던 나무였는데, 그동안 저렇게 큰 고목이 되어버렸네요

어르신 춘추가 어떻게 되셨나요? 죄송합니다.”

올해 여든 여섯이 되었네요.”

반계정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아쉽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반계집이란 선생님의 문집이 세권이 있었는데 도난을 당했어요. 그 책에는 반계정에 대한 내용도 다 들어있다고 하는데.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죠

 

 

더 이상 어르신께 질문을 할 수가 없다. 말씀을 하시면서도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다. 괜히 종가집 핑계를 대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알 수 없는 반계선생의 일생이 더욱 가슴 아프다. 뒤돌아보는 반계정 담 너머로 선생의 송서(誦書)가 들리는 듯하다.

몇 번인가 찾아가보려고 마음을 먹었던, 양평의 보산정을 찾아 길을 나섰다. 보산정을 꼭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이 정자를 처음 지은 것이, 고려 우왕 1년인 1375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는 것 때문이다. 고려의 어지러운 정세 속에 무안 박씨의 선조인 간의내부 송림공이 이곳으로 낙향을 하여, 시회장(詩會場)으로 보산정을 지은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옛 정취를 잃은 정자

 

보산정은 양평군 단월면 보통리 산33 부안천변의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는 대성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입향조가 14세기 후반에 터를 잡아, 대대(大垈) 즉 '한터'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무안박씨가 25대 이상을 이어 살고 있는 곳이다.

 


 

이 정자는 송림공이 정자를 지은 후, 송림공의 6대 손인 이조참판을 역임한 박원겸의 수학당으로 사용을 하기도 했다. 그 뒤에 저명한 유림의 학자들과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시회장으로 활용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현 건물은 1955년에 마루를 축조하고, 1974년에 무안박씨 종중에서 기둥과 벽 등을 시멘트로 복원하였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아름다운 절경에 자리한 역사가 있는 소중한 정자를, 시멘트로 복원하여 아름답고 고풍스런 옛 정취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1955년에 마루를 축조하고, 1974년에 무안박씨 종중에서 기둥과 벽 등을 시멘트로 복원하였다.

 
보산정이 서 있는 한터는 무안 박씨들이 25대 이상을 살아오고 있는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다.


눈길이 아름다운 보산정

 

보산정이 있는 한터는 역사가 깊은 곳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단월면의 면소재지인 이곳은 둘레 6 ~ 8m 는 됨직한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보산정은 면소재지로 들어가는 길 우측 편 동산에, 부안천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주변으로는 노송이 자리를 하고 있다. 입구는 돌담에 일각문을 세워놓았다. 양편으로는 노송이 우거지고, 눈이 쌓인 길을 걸어 올라간다. 돌계단에는 아직도 눈이 녹지를 않아, 그대로 얼어붙어 미끄럽다. 자칫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낭패를 당할 것만 같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면서 좌측을 보니 밑으로는 무안천이 흐르고, 경사진 비탈에 노송이 가지를 뻗고 있다. 여기저기 잔 소나무의 가지들이 부러져 있다. 아마 지난 번 내린 눈으로 인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부러졌는가 보다.

 

정자 위로 오르니 현판들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최근에 새로 쓴 현판들이다. 현판에 쓰인 날짜를 보니, 2006년에 써 붙인 것이다. 아마 그 해에 이곳에서 시회라도 열렸는가 보다.

 

보산정으로 오르는 일각문. 보산정은 무안천변의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눈이 쌓여있는 보산정으로 오르는 길. 양편에 송림이 우거져 있다.

이 현판에도 용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려의 끝남을 서러워하는 시가 마음을 아프게 해

 

그 현판의 글 중에 하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고려 500년 사직을 이별하고, 이곳으로 내려 온 송림공의 마음을 표현한 듯하다.

 

500년 도읍터에 날은 저무는데

우러러보던 까마귀는 뉘 집에 머물런가.

임 떠난 외로운 신하는 편한 곳에서

서산 저편 올라 큰소리 외쳐 보고 싶구나.

 

아마 송도를 떠난 송림공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이곳에 와서도 늘 임금이 계셨던 송도를 바라보고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600년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나그네의 눈에 들어오는 주변은 그 풍광이 그대로 남아있건만, 임을 그리던 마음들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보산정의 안에는 현판이 걸려있다. 새롭게 조성한 현판들이다.

보산정의 천정에 단청으로 그려놓은 용.

 

정자의 현판에도 용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정자의 천정에는 청룡과 황룡이 뒤엉켜 있다. 아마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이리 표현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25대 이상을 살아오는 무안박씨의 문중에서, 입향조의 마음을 헤아려 이렇게 그려 넣었을 것이다. 보산정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무안천에 내려앉은 철새들의 울음소리가 찬바람을 녹여낸다.

와선정(臥仙亭), 신선이 누운 자리일까? 아니면 경치가 너무 좋아 신선이 내려와 이곳에서 잠을 잔 것일까?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 골띠말. 좁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마을 끝 계곡가에 자리 잡은 와선정이 있다. 정자 건너편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쯤 주차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다리를 건너면 와선정이 돌담에 둘러싸인 채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내려다보이는 와선정은 흡사 골짜기에 누워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와선정이라고 했을까? 날이 추워서인가, 골짜기를 흐르는 물이 얼음으로 변했다. 와선정은 사철 경계가 다 다르다고 한 말이 문득 생각이 난다. 여름철 이 노송들과 함께 주변의 느티나무가 어우러지면, 또 다른 풍광을 만들어 낼 것만 같다.

 

 

다리를 건너려고 보니 글이 있다. 2004년도에 이 다리를 축조하면서 곁에 세워둔 비다. 다리에는 오현교(五賢橋)라 적혀있다. 이 정자를 지은 태백오현(太白五賢)을 상징하는 다리다. '병자호란(1636)에 벼슬도 버리고 太白山下 춘양에 은거하면서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켜 온 태백오현의 덕을 기리고 교유회동의 정을 추모하기 위하여 아름다운 다리를 놓고 오현교라 이름 짓다'라고 적혀있다.

 

다리를 건너 와선정으로 다가간다. 와선정은  태백오현이라 칭하는 손우당 홍석(洪錫, 1604~1680), 두곡 홍우정(洪宇定, 1595~1654), 포옹 정양(鄭瀁, 1600~1668), 잠은 강흡(姜恰, 1602~1671), 각금당 심장세(沈長世, 1594~1660)가 이곳에 은거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와선정이란 이름은 주변의 경치에서 따왔다고 한다. 즉 사덕암이라는 바위는 덕을 기리고, 은폭이라 하여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폭포는 은색인데, 그 밑 바위가 신선이 누운 것 같다고 하여 와선정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강흡은 법전의 버쟁이에, 정양은 춘양 도심촌에, 홍우정은 봉성에 은거를 하였다. 그리고 심장세는 모래골에 있었으며, 홍석은 춘양 소도리에 머물며 와선정에 모여 회동을 하였다.

꾸미지 않은 간단한 현판도 태백오현의 심성을 닮았다

 

태백오현은 모두 이 와선정에서 10리~30리 거리 내에 은거를 하였다. 강흡은 법전의 버쟁이에, 정양은 춘양 도심촌에, 홍우정은 봉성에 은거를 하였다. 그리고 심장세는 모래골에 있었으며, 홍석은 춘양 소도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은 날마다 이곳 와선정에 모여 회합을 갖고, 풍류를 즐겼다.

 

와선정은 계곡 쪽만 놓아두고 돌담으로 둘렀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계단이 있다. 계단을 내려서면 와선정의 출입구다. 현판은 그저 퇴락한 옛것 그대로 걸려있다. 안은 문을 잠궈 들어갈 수가 없지만 누마루방이다. 아마 여름 한철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정면과 측면 모두 두 칸 정도로 지어진 정자는 사방에 문을 내었다. 문수산에서 발원한 초계천이 시원한 산바람을 몰고 들어올 수 있도록, 사방을 모두 열어젖히고는 했나보다.

 

와선정은 난간을 두르고 계곡물이 흐르는 쪽으로는 모두 뮨을 내었다.

  
방은 온돌을 놓지않고 누마루로 깔았다.

 

정자는 난간을 둘러놓았다. 사방에 난 문을 열면 은폭과 사덕암, 그리고 흐르는 물과 늙은 노송, 맑은 물이 흘러가는 모습. 그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정자다. 태백오현은 이곳에 모여 시름을 달랬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 경계에 눈을 떠 스스로 신선이 되고 싶어 했을 것이다. 봉화는 군내에만 100여 개가 넘는 정자들이 있다. 와선정은 그 많은 정자 중 빠지지 않는다. 실록이 우거진 여름 철, 다시 한 번 이곳으로 발길을 옮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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