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성군 황룡면 황룡리에 가면, 전라남도 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된 요월정원림이 있다. 500~600년이 지난 소나무들이 여기저기 서 있는 이 숲은, 그야말로 원림(園林)’이라는 명칭이 부끄럽지 않은 곳이다. 아니 그보다 원시림(原始林)’이라고 표현함이 옳을 듯도 하다. 그만큼 노송과 각종 나무들이 어우러진 숲이다.

 

전남 장성군의 몇 군데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찾아간 요월정원림. 휴일이라 그런지 숲 앞 황룡강가에는 여기저기 자리를 펴고 앉아서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황룡강을 앞에 두고 서 있는 이 숲은 약 4,500평 규모로 그리 큰 숲은 아니다. 그러나 숲 안으로 들어가면, 아주 오랜 옛 이야기를 들을만한 곳이다

 

 

숲과 강과 정자가 한데 어우러지다

 

길을 지나다가 이름이 생소하여 들린 요월정원림. 사실은 이 숲보다는 정자가 있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숲길로 들어서니, 초여름 더위를 가시게 하는 바람과 숲의 내음이 코를 간질인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답사를 할 때는 늘 바삐 걸음을 옮기지만, 이곳은 그렇게 바쁜 걸음을 걷게 하지 않는다.

 

도로변 가까이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숲 안으로 들어서면 깊은 산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나는 그런 자연림이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니 황룡강을 굽이보고 있는 노송들이 보인다. 아래쪽을 보니 그 긁기가 꽤나 됨직하다. 이곳의 소나무들은 수령이 500 ~ 600년이 되었다고 한다.

 

 

500년 가까이 된 요월정, 살림집처럼 꾸며

 

이 숲 안에는 조선 명종 때에 공조좌랑을 지낸 요월정 김경우(1517~1559)가 말년에 낙향하여 지은 정자가 있다. 산수를 벗하며 음풍농월하기 위해 건축한 요월정이 바로 그 정자이다. 앞으로는 황룡강이 흐르고 주변에는 수령 100년이 지난 자미나무와 배롱나무 들이 서 있다. 아마도 이 요월정은 1550년 이후에 지어진 듯하다.

 

요월정은 1811년에 1차로 중건하였으며, 1925년 후손 김계두가 재중건하였다. 요월정은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던 곳이다. 당대의 명사인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웅정 등이 이곳에서 시를 읊고 글을 남겼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요월정은 정자이기 보다는 차라리 살림집처럼 꾸며 놓았다.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고자 한 김경우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정자는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꾸미고 사방에 활주를 달아 지붕을 받치고 있다. 측면으로 보면 앞으로 툇마루를 놓아 세 칸인 듯 보이나, 전체적인 넓이는 두 칸 정도이다, 다만 처마를 앞으로 내밀어 세 칸으로 보인다. 요월정은 전면은 모두 문을 달았다. 두 개의 방으로 들인 요월정은 ()’에 가까운 살림집의 형태이다.

 

 

황룡은 조선제일, 한양은 천하제일입니다

 

이곳에 전하는 말로는 김경우의 후손인 김경찬이, 이 정자의 경치를 찬양하여 조선 제일 황룡리라 현판하였다 한다. 이에 나라에서 장성 황룡이 조선제일이면, 한양은 어떠하냐는 질문을 해왔다. 자칫 대답을 잘못하면 곤욕을 치루기도 하겠지만, 그 보다도 목숨도 잃을 판이다. 김경찬은 바로 답을 내었다.

 

장성 황룡은 조선제일, 한양은 천하에 제일이다라는 답으로 화를 면했다고 한다. 정자 앞으로는 황룡강이 흐르고 주변은 오래된 노송과 숲으로 우거진 곳. 이곳에서 시를 읊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갔던 사람들.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자연과 하나가 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점에 새삼 머리를 숙인다.

 

숲길을 천천히 걸어본다. 이 시간에는 답사의 바쁜 걸음도 잊고 싶다. 아래쪽으로 흐르는 황룡강에 낚싯대를 늘여놓고 세월을 낚고 싶다. 아마도 이 노송들도 그런 마음에 강 쪽으로 가지를 두었는가 보다.

 

 

정자나 누각이라고 해서 꼭 경치 좋은 계곡이나 바닷가, 혹은 강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절마다 누각을 지어 그곳에서 강론을 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알려주는 장소로 사용을 하기도 했다. 전국의 사찰에는 이러한 누각이 상당히 많이 보존이 되어 있다.

내가 그 중에서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백암산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 경내에 있는 쌍계루를 좋아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쌍계루는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에 ‘교루(橋樓)’라고 하여 최초로 지어졌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당시에는 다리 위에 지어졌던 것으로 추정한다.


물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누각

지금도 쌍계루 앞에는 물이 고인 곳이 있고, 그 물은 계곡에서 흘러드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뒤 고려 공민왕 19년인 1370년 폭으로 인해서 교루가 부서졌다.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에는 파손된 교루를 청수스님이 중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도전이 ‘백암산정토사교루기’를 지었다.


백양사 들어가는 길. 절을 찾아 가는 길부터 마음이 편안해진다.

고려 우왕 7년인 1381년에는 목은 이색이 교루의 이름을 쌍계루라 하고 ‘백암산정토사쌍계루기’를 지었다. 1980년에는 쌍계루가 복원이 되었는데, 그 후 몇 차례 중수를 하였다.



백암산을 뒤로 한 쌍계루와 쌍계루 현판

지금 시를 써 달라 청하는 백암사 스님을 만나니
붓을 잡고 생각에 잠겨도 능히 읊지 못해 재주 없음이 부끄럽구나.
청수스님이 누각을 세우니 이름이 더욱 중후하고
목은선생이 기문을 지으니 그 가치가 도리어 빛나도다.
노을빛 아득하니 저무는 산이 붉고
달빛이 흘러 돌아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서 시달렸는데
어느 날 옷을 떨치고 그대와 함께 올라보리.

포은 정몽주가 당시 이곳에 머물면서 청수스님의 권유로 지은 시이다. 여기서 백암사는 지금의 백양사를 말하는 것이며, ‘옷을 떨친다’는 말은 관복을 벗는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정몽주는 결국 이 시를 남겨놓고 선죽교에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났으니, 그 혼이라도 이곳에 들렸을 것만 같다.


최근 새로 보수를 한 쌍계루. 전체적인 보수를 마쳐 옛 모습을 되찾았다.

쌍계루 전각에 올라 보다.

쌍계루, 말 그대로 두 개의 물줄기가 있는 곳에 서 있는 누각이라는 소리일 것이다. 아마 백암산에서 흘러드는 물줄기가 이 쌍계루를 휘감아 도는 것은 아니었을까? 처음 교루라 이름을 붙인 것도, 후일 이색이 쌍계루라 이름을 붙인 것도 물과 연관이 지어지는 이름이다. 지금도 쌍계루 앞에는 고여 있는 물속에서 물고기들이 한가롭게 유영을 즐기고 있다.



쌍계루 위 누각에는 포은 정몽주의 시를 비롯해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이층 누각을 오르면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그 중 정몽주의 시판에 눈에 띤다. 아직도 이곳을 그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주변을 돌아보는데, 낯선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난간에 머문다. 혹시 포은 선생의 넋이 저리 새가되어 쌍계루를 찾은 것이나 아닌지. 오랜만에 찾은 쌍계루는 그렇게 말없이 지난 역사만을 알려주고 있다.

난간에 앉아 쉬는 작은 새 한 마리. 포은 선생의 방문은 아니었을까?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 147-2에 소재한 수북정. 한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이곳을 찾았다. 시원한 백마강 줄기가 앞을 흐르는 이 수북정은 원래는 백제 때에 있던 누각이라고 한다. 백마강에 내려다보고 있는 수북정은 부소산의 남서쪽 자온대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충남문화재자료 제10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수북정(水北亭)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정자이다. 조선조 광해군 때 김흥국이 세운 것으로 정자 이름을 그의 호를 따서 수북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수북정과 백제 때에 있었다는 수북정과는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일까? 정자 명칭을 보아서는 백마강의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절경에 자리 잡은 수북정이 이렇게 소란해

 

수북정은 절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정자 한편으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강가에는 기암괴석이 솟아 나있다. 몇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공사를 하느라 백마강의 물은 흙탕물로 변하고, 부여와 규암을 연결하는 다리가 앞으로 생겨, 연신 찻소리가 귀를 찢는다. 이곳이 이렇게 변할 것을 누가 알았으랴. 다만 고목을 주변에 두고 서 있는 수북정만이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이젠 예전의 그 정취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잘 조경이 된 계단을 따라 수북정 위로 오른다. 주초를 약간 높게 놓고, 그 위에 입구를 뺀 주위를 난간으로 두른 정자이다. 긴 처마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사방에 기둥을 받친 모습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앞쪽으로는 수백 년은 묵었을 커다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수북정은 그렇게 말없이 백마강을 굽어보고

 

수북정을 건립한 김흥국은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경인(景仁)이요 호는 수북정(水北亭)이다. 선조 22년인 1589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홍문관 정자·정언·북평사를 거쳐,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영변, 회양, 한산, 양주 등의 방백을 지내기도 했으며, 광해군 말년에는 김유 등에게서 반정을 도모하자는 권유를 받기도 하였으나, 이미 광해군의 녹을 먹었기 때문에 그리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 후 고향에 낙향하여 수북정을 짓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유현으로 천거되어 부제학을 지냈으며, 독학을 하고 시문을 좋아하여, 당시의 거장 김장생, 신흠 등과 교분을 쌓았다.

 

 

수북정집이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한 김흥국. 그의 생각에는 이 수북정이 남다른 정자였을지도 모른다. 정자 옆으로 길게 늘어선 백제교 위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무더운 여름 날 귓가에 울려 짜증스럽다. 이곳에서 고향으로 은거를 하여 후학을 지도하고, 마음이 맞는 지인들과 교분을 쌓고 싶어 하던 수북정. 아마 그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기라도 했다면 이렇게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지는 않았을 것을. 비로 인해서일까? 아니면 또 다른 비통에 잠겨서일까? 벌겋게 변한 백마강 물이 아우성을 치는 듯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와 정자 안을 헤집고 다니면서 소란을 피운다. 그렇지 않아도 짜증스러운 날인데, 지나친 소음으로 버틸 수가 없다. 길을 돌아내려오면서 고개를 돌려 수북정을 올려다본다. 그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자태를 잃지 않은 정자, 수북정. 그 모습이 바로 정자의 주인의 심성을 닮아 있는 것만 같다.

 

해를 바라보고 서있는 관동팔경 청간정에 오르다

 

실로 100여일 만에 갖는 여유로움이다. 징검다리 연휴가 시작되는 29일 여주도자기축제장을 찾아 지인을 만난 후, 바로 우리나라 최북단이라는 고성군으로 향했다.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에 지난해 조성하다 완성을 하지 못한 마애불을 올해는 어떻게 해서라도 제 모습으로 조성해 놓고 싶어서이다.

 

속초 시내를 접어드니 꼼짝할 수가 없다. 징검다리 연휴로 인해 전국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대체 차를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속초시에서 볼 일을 포기하고 고성으로 향했다. 고성으로 가는 도중 관동팔경의 한 곳이라는 청간정을 들려볼 생각에서 서둘러 길을 잡았다. 청간정에도 모인 사람들도 여느 때와는 다르다. 그 동안 몇 번이고 이 정자를 찾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청간정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에 소재한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는 청간정은, 조선조 명종 15년인 1560년에 군수 최천이 크게 수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청간정은 고종 18년인 188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8년 면장 김용집의 발의로 현재의 정자로 재건하였으나 한국전쟁 당시 전화를 입어 다시 보수하였다고 한다.

 

 

관동팔경의 한 곳으로 일출명소가 된 청간정

 

현재 청간정은 관동8경 중 한 곳이요, 설악일출 8경의 한 곳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천천히 청간정으로 오르는 계단을 오른다. 벌서 이곳을 몇 번이고 들렸지만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다. 주변정리를 말끔하게 해놓고 산책로까지 만들어놓았다. 관람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좋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금 어수선해도 옛 정취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 변화가 오히려 버겁게 느껴진다.

 

요즈음 어느 곳을 가던지 관광자원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인위적으로 바꾸어 놓는 작업을 한다. 하지만 그런 작업이 과연 꼭 필요한 것일까?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자꾸만 바뀌고 달라지는 모습이 오히려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런 나를 보고 세상에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하는 지인들도 있지만, 워낙 속이 좁은 것인지 이해심이 부족한 것인지 몰라도 난 있는 그대로가 좋다. 그저 파도소리도 예전 그대로요, 바람소리도 예전 그대로이다. 청간정 엎에 숲은 이루고 있는 산죽나무가 바람에 잎을 부딪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예전 그대로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청간정을 오르는 길에 만나는 노송들의 모습도 예전 그대로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편하게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산책로를 내고, 바닥을 돌로 깔아 비가 내리는 날에도 질척거리지 않게 만들었을 뿐인데 왜 눈에 거슬리는 것일까? 울퉁불퉁 발바닥이 아프던 길이 가지런하게 바뀌었으면 오히려 반가워야 할 텐데, 나는 그것마저 부담스럽다. 흙냄새, 풀냄새가 없어져서인지, 아니면 잘 정리된 주변환경이 갑자기 낯설어서인지 모르겠다.

 

 

“아저씨,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청간정은 정자라고 하기보다는 누각이다. 중충으로 꾸며진 청간정의 원래 모습은 어땠을까? 도대체 감이 오질 않는다. 이 아름다운 동해안 바닷가에 지어진 정자. 이 청간정에 올라 시인묵객들은 어떤 노래를 한 것일까? 1953년 5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지시로 정자를 보수 하였다고 하는 청간정. 현재 청간정 전면에 게시된 현판도 이 전대통령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그 뒤 1980년 8월 최규하 전 대통령이 동해안 순시를 할 때 풍우로 훼손되고 퇴색한 정자를 보수토록 지시해, 동년 10월 1일 착공하여 다음해 4월 22일에 준공을 보았다고 하는 청간정. 당시 공사비 1억3천만원으로 정자를 완전히 해체하여 새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청간정은 초석은 민흘림이 있는 8각 석주로 사용하였다.

 

 

2층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을 오른다. 정자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해안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느라 시끄럽다. 먼 곳에서 이곳을 찾아온 듯 40~50대 여인 몇 명이 이야기를 하느라 소란을 피우더니 “아저씨,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라면서 휴대폰을 내민다. 누구에게든지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듯한 당당함이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면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이다. 자신들끼리 돌아가며 찍어도 될 텐데, 한 사람이라고 빠지면 안되는가 보다. 카메라를 받아 동해안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촬영해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확인을 하더니 “사진 잘 나왔네”라면서 정자를 떠나버린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예의도 없고 고마움도 모른다는 것이 더 화가 치민다.

 

이 아름다운 경관에 노여움이라니?

 

한무리의 사람들이 떠나간 청간정에 순간 적막이 찾아든다. 앞에 바라다 보이는 동해의 파도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 소리를 듣고 싶어 찾아온 곳이 아니던가? 저 아름다움 때문에 이곳을 관동팔경이라고 했을까? 순간 노여움이 눈 녹듯 사그라진다. 이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보며 노여움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벌써 14~15년은 지났나보다. 동해안 7번국도로 따라 관동팔경 답사를 떠난 적이 있다. 3박 4일을 쉬지 않고 달려 관동팔경에 속해있는 정자를 모두 돌아보았다. 그 때 만났던 정자들이 아직 눈에 선하다. 청간정을 못 잊는 것은 바로 관동팔경 중 한 곳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그 경치가 빼어나 ‘수일경’이라 부르지 않았는가?

 

이 정자를 떠나면 혹 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파도소리, 바람소리, 대나무 잎 소리를 꼼꼼히 기억해낸다. 정자를 돌아 나오는 길에 만나는 노송들의 모습까지 일일이 기억한다. 언제 또 다시 이곳을 들릴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달라지는 주변환경 때문에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또 다른 모습이 되어있지는 않을지 그도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지은 건물을 일컬어 정자라 표현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정자의 종류는 정()과 누() 그리고 대() 등으로 구분이 된다. 정은 단층으로 지어지고 방을 마련하는 건물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누()란 사방을 시원하게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자연과 어우러져 쉴 수 있도록 경치 좋은 곳에 지은 건물을 말한다.

 

전북 남원시 천거동에 소재한 보물 제281호 광한루가 처음 지어진 것은 조선시대 이름난 황희 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이다. 처음에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고 한다. 왜 하필이면 남원에 유배가 되었을 때 이러한 정자를 지었을까? 그리고 광한루(廣寒樓)라는 이름은 세종 16(1434) 정인지가 고쳐 세운 뒤 바꾼 이름이다.

 

 

 

 

황희 정승이나 정인지가 광통루나 광한루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그 안에 속내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만 같다. 즉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님을 향한 춘향이의 마음에 비유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 있는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1638)에 다시 지은 것이며,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운 것이다.

 

광한루 앞에는 연못이 있다. 연못을 면해 남향으로 지어진 광한루는 그 위에 오르기만 해도 춘향이나 이몽룡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가 있을 듯하다. 광한루의 규모는 정면 5, 측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는데, 여름에는 사방이 트이게끔 안쪽으로 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호남제일루라 칭한 광한루에는 정조 때 붙여지은 건물이 있어 멋을 더하고 있다. 누의 동쪽에 있는 정면 2, 측면 1칸의 부속건물은 주위로 툇마루와 난간을 둘렀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뒷면 가운데 칸에 있는 계단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광한루. 넓은 인공 정원이 주변 경치를 한층 돋우고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이 광한루를 돌아보다가 괜한 생각을 해본다.

 

 

 

 

황희 정승(1363(공민왕 12)~1452(문종 2))은 역대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손꼽힌다.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 알려졌다. 1416년 세자 양녕대군의 폐위에 반대했으며, 1418년에는 세자의 폐위가 결정된 후 태종의 미움을 사서 서인으로 교하에 유배되었다가 곧 남원으로 이배되었다.

 

광한루라는 명칭은 정인지가 붙였다고 했으니 춘향전이라는 소설이 그 뒤에 만들어진 것이란 생각이다. 광한루를 지은 황희 정승이나 광한루라는 이름을 붙인 정인지나 조선시대의 문인이자 정치가다. 이런 광한루에서 이몽룡이라는 걸출한 인물 하나가 나온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호남제일루인 광한루원에 첫눈이 내렸다. 명성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첫눈이 쌓인 광한루원은 영화촬영 한 장면이라도 찍었다면 그 아름다움을 더 자랑할 듯하다. 그래서 이곳은 늘 사랑이야기가 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사진 남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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