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학정(天鶴亭), 동해안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다소곳이 숨을 죽이고 있는 작은 정자 하나. 밑으로는 동해안의 여울 파도가 암반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겹다. 이 작은 정자를 벌써 너 댓 번은 찾아간 듯하다. 왜 그리 이곳을 찾을 때마다 느끼는 감흥은 달라지는 것인지. 아마도 그 계절이 다르기 때문인가 보다.

 

속초에서 7번 국도를 따라 고성으로 향하다가 보면, 길가에 천학정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교암리 마을에서 동해안 쪽으로 낮은 산이 하나 서 있다. 그리고 계단을 잠시 오르면 거기 절벽 위에 납작하게 숨죽이고 있는 천학정을 만나게 된다. 이름 그대로 이 천학정은 하늘과 더 가까이 가려고 뛰어 오를 듯 절벽 위에 자리한다.

 

 

500년 역사, 숨죽이고 있는 정자

 

천학정은 1520년인 중종 15년에 군수 최청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기록으로 보면 이미 지금 만나는 정자 이전에, 이 자리에 천학정이 있었다는 이야기니 500년이 넘었다는 것이다. 고성군 토성면 교암리 바닷가에 서 있는 고성팔경 중 한 곳인 천학정은 기암괴석의 해안 절벽에 정면 2, 측면 2칸의 겹처마 팔각지붕의 단층 구조로 지어졌다.

 

천학정 북쪽으로는 능파대(凌波臺)가 자리한다. 천학정과 아우러지는 능파대. 아마도 파도를 굽어보고 있으니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능파대 위에 올라 천학정을 바라다본다. 어느 곳에서 바라다보아도 아름다운 정자이긴 하지만, 능파대에서 바라보는 천학정은 그야말로 선계에 있는 정자를 보는 듯하다.

 

 

동해안 일출의 명소 중 한 곳인 천학정. 전학정은 그동안 전해지던 역사가 깊은 옛 정자는 어떤 이유로 사라진 것일까? 다만 1884년 소실되었던 것을, 1928년 당시 면장의 발기로 1931년 교암리에 사는 마을 유지 세 사람이 재건을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옛 기억을 더듬어 지어냈겠지만, 그래도 옛 모습을 보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연과 하나가 된 정자 천학정

 

22, 통일전망대를 거쳐 속초로 길을 잡아 내려가다가, 문득 천학정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한 겨울의 찬바람이 부는 날, 천학정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할 것이지? 교암리 마을 안 천학정을 오르는 길목주변에는 얼음이 가득 얼었다. 미끄러지는 길을 피해 바닷가로 난 산책로를 오른다. 천학정으로 오르는 좌측으로는 능파대가 높다라니 솟아있다.

 

 

천학정에 올라 동해를 굽어본다. 그저 절로 글 한 수 지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절경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자랑을 하지 않는 정자라서 더욱 좋다. 멀리 여울파도가 벼랑을 항해 치닫는다. 금새 벼랑에 부딪친 파도는 하얀 물보라를 남기고 사라져버린다. 이런 아름다움이 있어 이곳에 천학정을 마련했나보다.

 

천학정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서 있다. 정자가 곧 자연이요, 자연이 곧 정자가 아닐런가? 그 속에 때에 절은 속인(俗人) 하나 앉아있기가 미안하다. 밖으로 나와 능파대로 오른다. 동행을 한 스님이 정자에 앉아 경치에 취한다. 그 또한 자연이다. 그렇게 천학정은 동해를 바라보며, 스스로 동해와 어우러진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정자들이 나름대로 자연과 동화되어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주인의 마음을 닮는다고 한다. 처음 이 천학정을 지은이도 자연과 닮아 살았을 것이다. 천학정이라는 이름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아마도 신선이 되어 한 마리 학의 등에 올라 파도치는 동해 위로 훨훨 날고 싶었을 것이다. 2월의 찬바람이 이는 날 찾아간 천학정. 동해안 작은 정자는 그렇게 자연을 닮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경북에서 충북으로 넘어오는 길목인 조령 삼 관문에서 소조령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계류가, 20m의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수옥폭포. 단원 김홍도가 초대 현감으로 부임하기도 했다는 이곳은 '옥을 씻는다'고 할 만큼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다. 명절 연휴에 꼭 가보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는 길목에 이 폭포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이다.

 

정자에서 바라본 한 겨울의 얼어붙은 수옥폭포
 

사극 다모와 여인천하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수옥폭포는, 지난 해 MBC 대하드라마 '선덕여왕'의 촬영지이기도 해서, 그 유명세를 타고 있다. 여름철에야 폭포의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하지만 폭포가 꼭 여름에만 아름다울까? 겨울철에 보는 폭포의 모습은 또 어떤 아름다움이 있을까? 그 모습을 보기위해 설 연휴에 찾아들었다. 여름철 주변 암반과 노송들이 어우러진 폭포는 절경이다. 하지만 설이 지난 명절에 찾는 수옥정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 해 줄까? 

 

연풍현감 조유수가 지은 옛 수옥정

 

폭포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 여름이면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며 흥을 돋우고, 겨울이면 빙벽으로 변하는 폭포를 보면서 술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곳. 수옥정은 바로 그런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정자이다. 정자가 처음 지어진 것은 숙종 37년인 1711년이다. 당시 연풍현감 조유수가 청렴했던 삼촌인 동강 조상우를 기려 정자를 짓고, 정자의 이름을 '수옥정(漱玉亭)' 이라 했다. 이는 폭포의 암벽에 적힌 글이 증명을 한단다.

 

물이 언덕에 부딪쳐 흐르는 모습이 옥 같다는 뜻이니, 가히 이곳의 경치와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당시의 수옥정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의 수옥정은 예전 수옥정이 있던 자리에, 1960년에 팔각정으로 새롭게 꾸몄다. 한 겨울 노송의 가지에는 하얀 눈이 쌓여, 그 무게로 가지들이 적당히 밑으로 처져있다. 엊그제 내린 눈을 치우지 않아 눈을 밟고 걷는 기분이 좋다. 발 밑에서 들리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이 눈길을 하염없이 밟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눈이 쌓인 노송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수옥정의 겨울정취


오늘의 수옥정은 암벽에 얼어붙은 빙벽과 그 틈새로 녹아 흐르는 물줄기 그리고 노송에 쌓인 눈꽃과 함께 서 있다. 이 수옥정을 조선조에 처음으로 연풍현감 조유수가 지었다고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도 이 수옥폭포에 자리를 잡은 사람이 있다. 전하는 말로는 고려 말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머물렀다고 한다.

 

공민왕은 이 수옥폭포가 바라보이는 곳에 작은 정자를 지어 소일했다고 하니. 나름 수옥정의 역사는 오래다. 공민왕이 이곳에 와서 행궁을 지었다는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자 하나 쯤은 지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바위 틈 사이에 얼어붙은 고드름

 
신비하고 아름다운 빙벽

 

얼어붙은 수옥폭포의 신비함

 

수옥폭포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류의 두 곳은 깊은 소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로 올라가 확인할 수가 없으니 안타깝다. 밑에서 바라보는 폭포 하나만 갖고도 이렇게 절경이다. 밑에 소는 얼음이 얼어있고, 중간에 바위의 틈새 사이에도 천정에 고드름이 달려있다. 암벽에 얼어붙은 빙벽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가 부족하다.

 

수옥폭포에는 얼음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두라마 여인천하와 다모, 그리고 최근에 선덕여왕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날이 풀리면서 조금씩 녹기 시작한 얼음이 물이 되어 소리를 내며 폭포 아래로 흐른다. 그 또한 여름 시원한 물줄기와 다른 정취이다. 폭포주변 나무에도 고드름이 달렸다.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신비한 겨울철의 장관을 연출한다. 겨울에 보는 폭포의 신비함. 매번 많은 폭포들을 찾을 때마다,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것만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겨울에 만난 폭포는, 우리가 알지 못한 또 다른 풍광을 맛보게 한다. 아마 이 풍광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또 다른 수옥정의 모습과 함께.

경기도 광주시에 소재한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동문을 지나 조금 위편 좌측으로 정자가 서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 정자를 ‘지수당’이라고 하며,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지수당은 삼면이 연못으로 되어 있어, ㄷ 자형의 연못이 정자를 둘러쌓고 있는 형태이다.

 

이 지수당이 서 있는 연못 위쪽에는 또 하나의 연못이 있다. 중앙에 인공섬을 만들어 놓은 이 연못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또 하나의 연못이 더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있다. 이 지수당은 조선조 현종 13년인 1672년, 부윤 이세화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

 

남한산성은 지형이 서쪽이 높다. 그래서 성안의 모든 물은 동문인 좌익문 옆에 있는 수문으로 흘러 동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광주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동쪽에 아름다운 계곡이 형성이 되어 있는 것도, 이렇게 동쪽으로 물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 지수당의 위편에 있는 연못에서 지수당 앞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도, 지수당이 서 있는 ㄷ 자형태의 연못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수당의 연못은 땅을 깊이 파고 축대를 쌓아 조성을 하였다.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그 한편에 정자를 지은 특이한 형태이다. 한 겨울에 찾는 정자의 모습은 어떠할까? 눈이 온 다음 날 찾아간 지수당 주변에는 눈이 쌓여있다. 연못의 물은 얼어붙었고, 정자 안 누마루에도 한편에 눈이 쌓여 있다.

 

 

지수당 동편입구 쪽에는 커다란 비가 서 있다. 부윤 이세화의 송덕비라고 한다. 정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남한산성이고, 정자가 평지에 자리하다보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다. 정자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정자 주변으로만 돌아보아도 지수당을 느끼기에는 어렵지가 않다.

 

눈 쌓인 지수당, 또 다른 멋이

 

지수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매몰이 되었던 것을, 근래에 고증을 통해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지수당은 그렇게 화려한 정자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남한산성 내에 상권이 형성되지 않고, 주변에 세 개의 연못이 더 있었다고 하면 그 모습은 사뭇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자는 연못의 한 면을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그 위에 낮은 기단을 놓고 정자를 세웠다. 정자 주변에는 낮은 난간을 두르고, 동, 남, 북쪽으로는 댓돌을 놓고 입구를 내었다. 주초석은 네모난 돌을 사용했으며,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집으로 마련을 한 지수당은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가 있다.

 

멀리 떨어져 지수당을 바라본다. 아마도 주변이 이렇게 변하지 않았을 당시 지수당을 바라다보았다면, 그 누구라서 글 한 수 적지 않았을까? 그저 평범한 정자이긴 하지만, 당시를 돌이켜보면 꽤나 운치 있는 정자였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더구나 군영이 있는 산성 안에 이런 정자가 있었다면, 그 정자가 군사들에게 주는 감흥은 색다른 것이었지 않았을까?

 

 

부윤 이세화는 멋을 아시는 분이었을 것이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남한산성의 치욕이 채 가시기도 전인, 30여년이 지난 후에 이런 정자를 지었다는 것도 의미가 깊다. 아마도 이런 지수당을 건립을 한 것도, 그런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 눈길을 걸어본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밟히는 눈의 감촉이 좋다. 정자는 사시사철 색다른 맛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한 겨울에도 정자를 찾아 나서기도 하지만.

아침부터 때 아닌 비가 추적거리며 내리기 시작한다. 날을 잡아 정자 기행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쉽게 발길을 떼지 못한다. 그러다가 정오를 넘기고 결국은 길을 나섰다. 처음 계획은 영덕까지 내려갈 생각이었으나, 빗발이 점점 거세지는 것이 계획대로 여정을 마무리할지가 걱정이다.

 

요즈음은 이상 기온인 많다가 보니 어디를 선뜻 나서기도 쉽지가 않다. 조금만 흐려도 길을 나선다는 것이 망설여지는 것도 그런 까닭인데, 블러거라고 밝히신 분이 몸소 정보까지 주어가면서 정자 기행을 돕겠다고 하니 비가 온다고 망설이고만 있을 수가 없어 나선길이다. 어차피 길을 나섰으니 내려가면서 여기저기 들러보리라 마음을 먹고, 태백산 신흥사와 영은사를 거쳐 주지스님께서 주시는 차 한 잔 마시고 시간을 뺐기다 보니 생각 밖으로 시간이 지나버렸다.

 

 

바쁜 답사의 길, 그러나 여유로움도 만끽해

 

걸음이 더욱 바빠진다. 7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는데 길이 좋다. 요즈음은 어디를 가도 길이 좋아서 고속국도와 지방국도를 적당히 이용을 하면 생각 밖으로 빠른 길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왕 늦어진 길이니 국도를 따라가면서 동해의 풍광에 젖어보리라 마음을 먹고 구 길로 접어들었다.

 

가는데 까지만 간다고 마음을 먹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삼척시는 동해 바닷길을 달리는 7번국도 여기저기에 정자 모양을 한 쉼터를 만들어 놓아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내려가는 길에 몇 번인가 길을 멈추고는 했지만.

 

 

삼척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해신당이다. 남근을 깎아 바치는 해신당은 몇 번 들려보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관람을 해보자고 작정을 하고 입장권을 끊었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이라 이미 날이 어둑해졌다. 해신당을 둘러 본 후 마음에 미련이 생겨 전시관 안내를 보는 분에게 혹 이곳에 정자가 없는가 물어보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물었는데 이분, 여기저기 전화를 걸더니 한곳을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그것도 일일이 약도를 짚어가며 메모를 해주시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오늘은 정자 한 곳도 찾아가지 못하나보다고 포기를 하던 차에 이렇게 안내를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를 해야 할 일인가.

 

어둠이 깔린 빗길에 만난 정자

 

 

낮에 내려간 길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보니 날이 저문다. 해신당에서 30여 분을 달려 올라와 정라항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농협 건물을 끼고 우측을 바라보니 문화재 안내판이 보인다. 알려준 길은 조금 더 지나야하지만, 비는 쏟아지고 마음은 바쁘니 어찌하랴. 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간다. 안내판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려 한달음에 계단을 오른다.

 

작은 육향산 위에 있는 척주동해비와 평수토찬비, 비각과 함께 모여 있는 작은 정자 하나. 계단 밑에는 평수토찬비가 있고, 계단위에 척주동해비와 지은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육각으로 된 정자가 보인다. 현대적인 모습이다. 육향정(六香亭), 말대로라면 여섯 가지 향기가 있는 정자라고 풀이를 해야 하는데 무엇이 여섯 가지의 향기일까?

 

비는 점점 세차게 쏟아진다. 카메라 렌즈에 물이 묻어 찍기가 어려울 정도다. 불빛도 없는 육향정의 주변이라 겨우 사진 한 장을 찍고 뒤돌아서야 하다니. 그러나 저 멀리 고깃배의 불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낮에 보는 동해바다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 82-1에 소재한 육향정 앞에 자리한 척주동해비의 비문은 삼척 부사 허목이 지은 것으로 현종 3년(1662)에 건립한 비다. 일명 퇴조비라 불리듯이 조류의 피해를 막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비의 규모는 높이 170cm, 높이 76cm, 두께 23cm이다. 이 비가 훼손을 당하면 다시 피해를 입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비를 신령하게 여겼으며, 이를 탁본을 떠 집에 모시기까지 했다고 한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평수토찬비 비문 역시 삼척 부사 허목이 짓고 쓴 것이다. 중국 형산비의 대우수전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으로,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다. 현종 원년(1661)에 목판에 새기어 읍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240여년 후인 광무 8년(1904) 칙사 강홍대와 삼척 군수 정운철 등이 왕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 72cm, 두께 22cm이며, 비각의 전면에 ‘우전각’이라는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빗길에 찾아간 육향정. 비오는 날 바닷가 비린내에 코끝이 간지럽다. 그렇게 하루 종일 비오는 길을 찾아다닌 이곳저곳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많은 좋은 분들을 만났다. 이렇게 어우러지면서 정자 기행을 마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충북 괴산군 괴신읍 검승리에 가면 ‘애한정(愛閑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정자는, 박지겸(1549~1623)이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지은 정자 겸 학동들을 가르치는 서당이었다.

 

조선조 중기의 유학자인 박지겸은 본관은 함양으로 자는 익경, 호는 애한정이다.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왕을 의주까지 모시기도 했으나, 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해지자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애한정이라 하였다. 애한정은 그 뒤 원 정자 뒤에 새롭게 조성이 되었다.

 

 

몇 차례 중수를 한 애한정

 

애한정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옮겨지었고, 숙종 38년인 1712년과 44년인 1716년에 중수를 하였다. 그 후 1979년에 크게 보수를 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애한정은 새롭게 축조한 현재의 애한정 앞에, 예전의 애한정이 그대로 남아있다.

 

애한정을 오르려는데 앞에 작은 전각 하나가 풀숲에 가려져 있다. 계단은 있으나 풀들이 자라 가리고 있다. 풀숲을 헤치고 올라가니, 고종 28년인 1891년에 건립한 박상진의 효자문이다. 박상진은 애한정을 창건한 박지겸의 9대손이다. 낙향한 선비가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을 테니, 그 9대손인 박상진 또한 생활이 궁핍했는가 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박상진은 품을 팔아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부친이 술을 즐겨했으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계속 술을 드실 수 있도록 하였단다.

 

 

피를 내어 부친을 간구한 효자 박상진

 

후에 부친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부친의 병 구환을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부친을 연명케 하였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피눈물로써 3년 상을 마쳤으며, 그의 나이 85세에 이르렀어도 부모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효심을 충청도 선비들이 예조에 보고하자, 나라에서는 그의 효행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동몽교관조봉대부>란 벼슬을 추증하고, 효자 정문을 세웠다. 애한정을 오르다 보면 계단 우측에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녹음을 자랑한다. 위로 오르면 담장에 둘러싸인 원래의 애한정이 있다. 보수를 하여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뒤편에는 현재 애한정의 현판을 단 정자가 있는데, 아마 이곳에 걸렸던 현판을 옮겨간 듯하다. 원 애한정과 옮겨지은 애한정을 잘 보존해 놓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애한정이 역사 속에서 변화한 형태를 알 수가 있다. 바람직한 문화재의 보존이란 생각이 든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했던가? 오늘 갑자기 애한정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홀연히 마음을 비우고 낙향을 하여, 학동들을 가르치면서 「애한정기」와 「애한정팔경시」 등을 쓴 박지겸과, 부친의 병환을 고치려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낸 효자 박상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다.

 

없는 살림 가운데서도 이렇게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 애한정의 주인들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은, 요즈음 세태가 하도 어이없게 돌아가서인가 보다. 어린 생명을 다치게 하는가 하면, 나라 살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돈 버는 일에 눈이 벌게,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자신의 배만 채우겠다는 생각들로 온통 나라가 검어지는 듯해서다.

 

대선이 2일 남았다. 대선 도전하는 사람들, 우선 이곳부터 가서 마음을 내려 놓고 오기를 바란다. 그 자신들이 과연 이 애한정에서 무엇을 느끼고 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이 가서도 깨닫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은 이미 이 나라의 국민을 이끌고 갈 아무런 자질도 없다는 것일게다. 요즈음에는 윗물은 맑아도 아랫물이 똥물일 때가 비일비재한데, 윗물까지 맑지 않다면 그 아랫물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작은 시골 정자 하나가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알려주고 있지만, 우리들은 그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오늘 이곳 애한정을 가슴속에 담는 것도, 나리들께서 꼭 이 시골의 작은 정자 애한정과 효자문을 찾아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