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벚꽃 만개한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을 찾아가다

 

그동안 문화재답사를 그렇게 오래 다녔으면서도 정작 꽃이 만개하는 봄철을 이용해 다닌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봄철에는 각종 행사가 많다보니 정작 문화재답사는 행사가 시작되기 전인 철 이른 3월이나 봄꽃이 다 지고난 후 돌아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모처럼 꽃이 만개한 안양 중초사지를 찾아갔다고 벚꽃이 만개한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의 모습을 보고 문화재답사도 꽃이 만개할 때가 제대로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에 소재하고 있는 중초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때의 사찰로 당시의 큰 절이었던 황룡사의 항창이 절주통으로서 이 당간지주의 불사에 참여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절이다. 2012년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유유산업이 문을 닫았을 때인데 414일 찾아간 이곳은 김중업건축박물관으로 개관을 하여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중초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중초사는 적지 않은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4호로 지정된 중초사지당간지주의 중초사지 당간지주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보력 2(신라 흥덕왕 1, 826) 세차 병오년 8월 초엿새 신축일에 중초사(中初寺) 동쪽 승악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일을 시작하여, 9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이듬 해 정미년(827) 230일에 모두 마쳤다. 이 때의 주통은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다. 상화상은 진행법사이며, 정좌는 의설법사이고, 상좌는 연숭법사이다. 사사는 둘인데 묘범법사와 칙영법사이다. 전내유내는 둘인데 창악법사와 법지법사이다. 도상은 둘인데 지생법사와 진방법사이며, 작상은 수남법사이다고 적고 있다.

 

당시 중초사에는 다양한 직분을 갖고 있는 승려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국통 밑에 주통과 군통이 있었는데 중초사에 주통이 있었다는 것은 중초사가 작은 사찰이 아닌 위치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 절의 살림을 맡아하는 원주(정좌), 교육을 담당하는 교무(사사), 자금의 츨납 및 사무를 관장하는 재무(상좌) 등이 있었다는 것은 다양한 소임을 맡은 승려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중초사에서 승악(현재의 관악산을 뜻하는 것으로 보임)에서 86일 돌을 취하여, 28일에 두 개의 돌을 두 무리가 나누어 중초사로 운반을 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91일 중초사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초사는 동문선(東文選),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흥지도서(興地圖書), 가람고(伽藍考)같은 문헌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후기에 이미 폐사된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배경으로 한 당간지주 작품이네

 

보물 제4호인 당간지주와 함께 서 있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인 안양중초사지삼층석탑. 이 삼층석탑은 기단부에 1층의 몸돌만이 남아 있고, 그 위에는 지붕돌만 포개어져 있는 형태이다. 중초사터에 남아 있는 이 삼층석탑은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고, 1960년 옛 터에 유유산업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1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부는 2·3층 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3개 포개져 있다. 기단과 1층 몸돌의 4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매우 두꺼워 급한 경사를 이루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희미하게 들려있으며, 밑면의 받침은 1·2층은 4, 3층은 3단을 두어 간략화 되었다.

 

 

주변에 꽃이 만개한 나무에서 벌써 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벚꽃과 함께 서있는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은 어느 방향에서 사진을 촬영하던지 예전과 다르다. 흡사 차디찬 석재가 생명을 얻은 듯하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그동안 담아내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한다. , 가을. 꽃이 피거나 단풍이 물들 때 문화재답사를 해야 제격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저 아름답다. 어느 곳에서 촬영을 하던지 벚꽃이 핀 가지가 조금만 들어가도 분위기가 다르다. 바븐 일정 중 잠시 시간을 내어 찾아간 안양 중초사지에서 만난 문화재 두 점. 기분 좋은 답사를 하면서 앞으로는 주변 환경을 먼저 생각해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가장 아름다운 문화재를 만나기 위함이다.

 

모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정조의 뜻 담겨있어

 

정조대왕이 도성의 궁을 나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을 찾아가는 길은 두 가지 길이 있다. 그 하나는 현재의 용산에서 한강을 건넌 후 노량진과 동작 - 사당 - 과천을 가쳐 수원으로 오는 길이고, 또 하나는 현재의 노량진을 거쳐 시흥 - 안양을 지나 수원으로 향한 길이다. 그 당시 주로 행행을 하는 길은 사당 - 과천을 지나는 길이었지만 동작에서 사당을 거쳐 과천의 길은 워낙 가파른 고개가 있어 어가행렬이 많이 지체되고는 했다.

 

이런 이유로 정조대왕은 부친의 묘를 찾아가는 행행길을 한강 배다리를 지나 시흥행궁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안양을 지나 수원으로 행하는 길을 이용했다. 이 길에는 안양천이 있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했다. 당시 능행길의 다리는 목조로 가설했다가 왕의 어가가 지나면 다시 철거하는 방법을 택했다.

 

효심이 남다른 정조대왕은 부친의 능을 찾아오기 위해 정조 19년인 1795년 당시 경기관찰사인 서유방에게 안양천에 석교를 놓을 것을 명했고, 서유방은 안양천에 3개월의 공사 끝에 7개의 홍예가 있는 석교를 완성했다. 정조는 이 다리를 만안교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백성을 어여삐 여긴 정조대왕은 이 만안교라는 이름을 모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다리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모든 이들을 편안하게 하는 다리 만안교

 

12일 오후 안양으로 향했다. 안양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함이지만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찾아오기 위해 안양천에 다리를 놓았다는 만안교(萬安橋)’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는 만안교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2679 삼막천 위에 소재하고 있다.

 

정조대왕은 이 만안교를 건너 수원 화성행궁으로 오곤 했는데 이 다리는 석조로 조성했지만 그 규모가 작지 않다. 만안교의 길이는 31.2m, 폭은 8m로 당시 정조대왕의 어가행렬이 말은 탄 기마병들이 지나기에 충분하도록 축조한 것이다. 현재 이 만안교는 1980냔 국도의 확장공사로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460m 떨어진 안양교 사거리의 교차지점에 소재하고 있던 것을 이건한 것이다.

 

안안교 곁에는 서유방이 글을 짓고 조윤형이 글을 쓴 만안교비가 서 있다. 효심이 남다르던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지나던 길에 내를 건너기 위해 축조했다는 만안교. 다리 위에 올라서면 정조대왕의 효심이 느껴진다. 정조대왕은 부친의 묘를 얼마나 다니고 싶었으면 가교(假橋)인 목교가 아닌 단단한 셕교를 축조할 것을 명했을까?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무지개돌다리 만안교

 

만안교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교(무지개다리)로 알려져 있다. 만안교의 주변을 돌면서 꼼꼼히 살펴본다. 물이 흐르는 방향의 하단부를 삼각형으로 조성한 돌을 유속방향으로 놓아 큰 물살에도 교각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성하였다. 홍예를 받치고 있는 교각 역시 정교하게 조성해 짜임새가 독특하다.

 

상판에 놓은 석재도 큼직하게 마련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도 버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하나하나가 정조대왕의 치밀함을 그대로 들어낸다. 화성을 축성할 때도 일일이 돌아보고 문제점을 해결하던 정조대왕이다. 백성을 아낀 정조대왕은 화성 축성 시 원래의 계획을 바꾸면서까지 백성의 안위를 먼저 살폈던 것이다.

 

 

그런 정조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는 만안교. 봄날 찾아간 안양시 소재 만안교에서 다시 한 번 정조대왕의 마음을 읽는다. ‘만년동안 사용할 수 있는 다리혹은 모든 백성이 편안한 다리라는 만안교는 7칸의 홍예를 가진 아름다운 석교의 모습을 200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음 아픈 보물 제794호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사면불상을 모셔놓은 전각 잎에서 나무살창 안으로 보이는 사면석조불상을 바라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면불상이고 백제시대 유일한 사면불상이라는데 사면불상의 얼굴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불상이 유실되어버린 얼굴을 갖고 있다고 하면 그 어느 불교문화재보다 뛰어난 작품이었을 것이다.

 

지난 4일 서산과 예산을 답사하면서 맨 끝으로 찾아간 곳이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 뒷산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794호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이다. 1983년 화전리 미륵당이라 불리는 뒷산에서 발견된 이 사면석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면석물로 백제권에서 발견된 유일한 사면석조불상이다.

 

화전리 사면석조불상은 당시 도괴되어 땅에 묻힌 상태여서 많이 손상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특히 서면불상은 마멸이 가장 심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원래부터 반듯하지 않은 석주의 가장 넓은 면에는 사면불의 본존으로 보이는 높이 120cm 정도의 불좌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나머지 면에는 동면입상 130cm, 북면입상 168cm 정도의 석조불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뛰어난 광배문양 등 수작으로 보여

 

사면석불을 각 면을 돌아보면서 찬찬히 살펴본다. 보면 몰수록 마음이 아픈 것은 도대체 이 사면석불의 얼굴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6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이 사면석불은 머리와 손은 따로 조각하여 부착했다. 이렇게 손을 따로 제작하며 석불을 조성하는 방법은 세심히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쪽면에는 여래좌상의 주존불을 조성하고 동··북면에는 여래입상을 조성하였다. 남쪽면의 여래좌상은 양쪽 발을 무릎에 올려놓은 결가부좌 한 자세인데 가슴부분에 광배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여래좌상의 법의는 양편어깨를 덮었고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어깨부분을 원형기법으로 조성하였다.

 

 

동쪽과 북쪽의 여래불은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어깨를 덮은 법의가 U자형으로 발목까지 흘러내렸다. 대좌와 머리부분의 두광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서쪽면의 여래입상은 마모가 가장 심하여 원래 모습을 정확히 알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조각수법은 다른 여래입상과 비슷하게 조성하였다.

 

이 석조사면불상의 곳곳에 표현된 불꽃문양과 연꽃문양은 백제 특유의 양식이며 각 상의 주위를 마치 감처럼 파서 원각상에 가깝게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발견 당시 땅 위에 노출되어 있던 서면을 제외하고는 머리와 양손을 잃었을 뿐 원래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백제권의 불상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사면석조불상 보면 볼수록 마음만 아파

 

사면석조불상이 있는 화전리 뒷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문화재가 있는 곳을 향했다. 아래서부터 사방불을 모셔놓은 전각이 보인다. 전각 앞에는 누군가 작은 바위 위에 돌을 쌓아 탑을 만들어놓았다. 아마도 이곳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하나씩 올려놓고 간 것인 듯하다.

 

넓은 목책 창살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아는 사면석불. 그 앞에 설 때까지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백제권에서 유일한 사면석불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조성된 사방불이라는 점에 더 큰 기대를 하고 찾아갔다. 하지만 사방불을 보는 순간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불의 머리부분과 손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소중한 사방불이 어떤 이유로 머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며칠을 검색을 하면서 혹 이 사방불의 머리부분 유실에 대한 자료가 있을까 해서 찾아보았지만 어느 곳에도 그런 내용을 밝힌 것은 없다. 손의 경우 따로 조각을 해서 끼워 넣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땅 속에 묻혀있었기 때문에 유실될 수도 있지만 머리부분의 유실은 이해할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방불, 그리고 백제권 유일한 사면석조불상이라는 이 사면석불을 보면서 마음만 더 무거워진다. 경주에 있는 보물 제121호인 굴불사지 사면석불은 한 곳의 얼굴부분만 사라지고 삼면의 석불은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하지만 화전리 사면석조불상은 어쩌다 이렇게 심하게 훼손이 된 것일까? 지난 44일 답사를 다녀온 후 며칠을 안타까워한 예산 화전리 사면석조불상. 앞으로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이렇게 마음 아픈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m0.2km인가? 이 분들 정신 나갔구먼?

 

하루에 문화재 담사를 한다고 하면 얼마나 할 수 있을까? 나름 그동안 문화재답사를 꽤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로서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거리와 시간, 얼마나 집중을 했는가에 따라서 답사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늘 이런 점이 궁금했는데, 한 번 답사를 제대로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4일 오전 일찍 수원을 출발하여 서산으로 향했다. 주 목적은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국보 제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들러보리라 마음먹고 나선 길이지만 하루에 얼마나 많은 문화재를 답사할 수 있는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는 시간 40분 정도를 제외하고 오가는 시간을 제하면 6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찾아가고 오르고, 걷고, 촬영하기를 반복했다.

 

그 시간동안 답사를 마친 문화재는 국보 1점과 사적 한 곳, 보물 7, 중요민속문화재 2, 지방유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 5점 등 총 15점을 만났다. 6시간 만에 이 많은 문화재를 만나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뛰고 걷고, 오르기를 반복했다. 답사를 하는 동안은 몰랐는데 막상 집으로 돌아오니 파김치가 따로 없다. 생전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하루 만에 만난 적은 없었다.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많은 문화재를 돌아보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서산 여미리 석불입상, 거참 묘하게 생겼네

 

서산에서 가장 먼저 만난 문화재는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 산1에 소재한 충남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는 서산 여미리 석불입상이다 도로변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뒤편에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아름다운 소나무 때문에 쉽게 눈에 띤다. 도로애서 불과 20m 정도 안쪽에 자리하고 있어 길가에서 바로 접근할 수 있다.

 

몇 사람의 관광객이 석불입상 주변으로 다가가 안내판을 읽고 있다. 요즈음 들어 문화재 답사를 하다보면 예전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문화적 인식이 높아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문화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다.

 

수령 300년 수고 25m 정도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여미리 석불입상 뒤 소나무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나무이다. 석불입상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문화재지만 이 소나무 한 그루가 뒤에 서 있어 석불입상의 분위기를 한 층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잘 자란 소나무의 위편 가지는 마치 용틀임을 하듯 휘어지면서 자랐는데 생육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뒤편에 멋들어지게 자란 소나무와 주변 정리가 잘 된 여미리 석불입상을 처음 본 순간 , 묘하게 생겼네라는 느낌이 든다. 유인원처럼 신체의 아래편에 긴 팔을 조각한 이 여미리 석불입상은 화강암으로 조성한 높이 3.1m로 고려시대 지방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미리 석불입상은 화강암에 조성했는데 뒤편을 보면 정으로 쪼아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자국이 거칠게 남아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쓴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한데 목 부분은 부러졌던 것을 이어 붙였다고 한다. 지방 장인의 솜씨로 보이는 여미리 석불입상은 조각수법이 간략하고 형식적이다.

 

 

20m0.2km,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나?

 

안내판에 보니 이 석불입상은 1970년대 현 위치에서 1km정도 떨어진 용장천에 묻혀있던 것을 주민들이 발견해 옮긴 것이라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냇가에서 5km 정도 상류에 두 구의 불상이 있었는데 그 중 가운데 한 구가 떠내려 온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르고 그저 전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 여미리 석불입상은 화강암 단면에 돋을새김으로 팔을 조성하였는데 신체 아래편에 팔을 조성했다. 비례가 맞질 않아 긴 팔의 유인원처럼 조형했다. 조금은 신체비례구조가 맞질 않아 이상하게 보이긴 하지만 이 석불입상을 조성한 지방장인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인 것일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 문화재 하나하나가 그렇게 소중할 수 없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 나오다가 안내 이정표를 보니 이해할 수 없다.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서 석불입상의 거리는 불과 20m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런데 이정표에는 0.2km라고 적혀있다. 어떻게 문화재 안내 이정표를 세우면서 이런 실수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서산시 문화재 관계자는 이런 것 하나 확인도 하지 않고 세운 것일까?

 

 

0.2km200m가 된다. 그 위에 선정묘는 0,1km라고 표기했다 어림잡아 거리가 100m는 되어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바로 코앞에 서 있는 여미리 석불입상은 0.2km라고 표기하는 우를 범했을까? 문화재 답사를 하다보면 이런 경우를 종종 발견한다. 문화재 관계자들조차 우리 문화재에 대해 세심하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그래도 20m0.2km라고 적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서산시 문화재 관련자들. 이곳에 한 번이라도 나와 확인은 한 것일까? 이런 실수는 두 번 다시 해서는 인된다. 서산시는 하루 빨리 이런 잘못을 바로잡기 바란다.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지나친다고 해서 이런 잘못이 무조건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원 곳곳에 세워진 솟대 볼 수 있어

 

무술년 정월 초, 설 연휴에 찾아갔던 수원전통문화관 마당에 서 있는 솟대’. 솟대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의 상징이다. 솟대 앞에 서 있는 설명문을 보면 솟대는 마을의 안녕과 수호, 풍요를 기원하는 상징물로서 물새들을 장대 위에 세워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겼습니다. 물새는 예로부터 곡식과 식수가 메마르지 않도록 비를 가져다주며, 마을을 홍수나 역병 같은 재해로부터 구원하는 수호신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뒤이어 또한 철새로서의 물새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신조로 여겨져 하늘에 인간의 꿈과 소망을 전하는, 지상과 천상을 잇는 영혼의 전달자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솟대는 단순히 마을의 안녕이나 풍농이나 풍어를 기원하는 것만으로는 솟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우리민족은 음력 정월 초, 3일부터 정월 대보름 사이와 음력 10월 상달이 되면 길일을 택해 마을의 안녕과 풍농, 풍어 등을 위한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마을대동제를 지냈다. 이는 아주 오래 전 삼한시대부터 전해진 유풍으로 하늘에 감사하는 의식으로 행해진 의식이다.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東盟) 등은 모두 이런 대동의 의식이었다.

 

마을대동의 안녕과 가가호호 집안의 안택을 기원하는 마을제사는 장승제, 성황제, 거리제, 산신제 등으로 이는 모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가내의 안과태평을 위해 모든 이들이 모여 기원하던 우리민족의 공동체 의식이었다. 그 대동의식 중 하나가 바로 솟대를 깎아 세우고 정월에 길일을 택해 제를 지내던 거리제였다.

 

 

솟대는 대개 누석탑, 장승과 함께 세워

 

수원을 돌아보면 곳곳에 서 있는 솟대를 볼 수 있다. 천천로 서호천 변에 서 있는 솟대공원, 그리고 수원전통문화관 경내와 평동 오목공원 등 곳곳에도 솟대가 서 있다. 물론 이 솟대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세운 것은 아니다. 일종의 교육용 솟대로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평동 오목공원에 세운 솟대는 장승과 함께 조성했으며 지난 해 528일 장승과 솟대를 새로 마련하고 상송장승고유제를 열었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고유제가 이어질지 기대가 된다.

 

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긴 장대나 긴 돌 위에 얹은 마을의 수호신이다. 솟대는 대개 마을의 입구에 세워, 마을에 들어오는 액을 미리 예방한다는 뜻으로 세운다. 솟대만을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돌탑, 장승 등과 같이 세우기도 한다. 솟대는 정월 열나흘날 밤에 새로 깎아 세우고, 주민들이 모여 정성스럽게 마을제를 지낸다. 솟대를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여 솟대, 짐대, 돛대, 새대, 설대 등으로도 부르고, 그 기능으로 세분하여 수살, 진목, 추악대, 표줏대 등으로도 부른다.

 

이러한 솟대는 참나무나 돌로 만들어 마을입구에 세우고, 그 위에는 오리를 만들어 올려둔다. 대개는 솟대 위에 한 마리를 얹는 수도 있지만, 끝을 갈래지게 해 두 마리를 올리기도 한다. 이 위에 올리는 새는 마을마다 달라, 기러기나 까마귀를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새의 종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위에 새를 올리는 것은 멀리 날고, 높이 날 수 있는 새를 올림으로써 먼 곳에서부터 오는 액을 사전에 미리 막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전통은 지켜질 때 가치가 있다

 

우리민족이 역사 속에서 그 많은 외세의 압력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공동체문화 때문이다. 일제는 그런 공동체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해 1920년대 문화말살정책까지 행하면서 우리문화를 말살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런 외압 속에서도 우리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켜온 것은 바로 공동체문화였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 전통을 한낱 박물관에 들어가 있어야 할 것으로 치부하는 문화사대주의자들은 이제 반성해야 한다. 정월이 되면 일 년의 안녕을 기원하고 10월이 되면 자연에 감사하던 각종 마을의 제의식. 그런 마을제가 다시 되살아나기를 기원한다. 이 나라가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 공동체를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전통문화관 경내에서 만난 솟대를 보면서 무술년 한 해 우리의 것을 되찾고 잃어버린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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