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전 굴뚝, 아미산 굴뚝은 아름다움의 정점

 

요즈음에 짓는 집들은 무엇인가 하나가 허전하다. 집을 아무리 줄러보아도 이가 빠진 듯 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바로 요즈음 집의 구조상 예전과 같이 집 뒤 켠 처마에 맞닿아 있는 굴뚝이 없기 때문이다. 굴뚝은 아궁이나 화실(火室)에 들어오는 바람을 막거나 연소된 물질을 외부로 내보내는 불연성(不燃性)의 연결체이다.

 

연소에 필요한 공기를 공급하고 연도(煙道)를 통하여 나온 연기나 가스 등을 하늘 높이 뿜어내게 만든 구조물로써 독입굴뚝과 벽붙이굴뚝이 있다. 구조재에 따라 분류하면 토관류굴뚝·벽돌굴뚝·철재굴뚝·철근콘크리트굴뚝 등이 있다. 굴뚝은 원형으로 하는 것이 공기학상으로도 바람직하고, 정사각형도 많이 쓰이며, 직사각형은 정사각형보다 강한 소용돌이가 생기므로 좋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또 굴뚝에는 다른 열기구가 접속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나라 집은 대개 온돌을 사용한다. 하기에 적당한 산소 공급과 연소가 원활하게이루어지지 않으면 연기가 아궁이로 새어 나오기 때문에 굴뚝을 높게 만들어서 연기를 위로 올려 보내야 한다. 연기는 기체이며 기체의 성질은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이것은 바람이 부는 원리와도 같은데, 태풍은 기압이 매우 낮은 지역에서 발생한다.

 

   

경복궁에 잇는 자경전 굴뚝은 그러한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보물 81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자경전 십장생굴뚝은 자경전 뒤꼍 담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 이 굴뚝은 담보다 한 단 앞으로 돌출시켜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전돌로 쌓아 담에 덧붙여 놓았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와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었다. 지붕면 위에는 10개의 연가(煙家)를 얹어, 자경전 건물의 10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여기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시설하였다.

 

굴뚝은 너비 381cm, 높이 236cm, 깊이 65cm이고, 제일 아랫부분 좌우에는 불가사리로 알려진 서수를 만들어 배치하였고, 그 위로 장방형 공간을 구획하여 해··구름·바위·소나무·거북·사슴··바다·포도·연꽃·대나무·백로·불로초 등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윗부분에는 가운데에 용(나티), 그 좌우에 학을 새겨 놓았다. ·바위·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長壽),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富貴), 나티·불가사리 등은 악귀(惡鬼)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상징되고 있다.

 

십장생을 이와 같이 장식하는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도자기·문방구류·베개모·자수·회사 등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원단에 궁궐에서 십장생도(十長生圖)를 걸어놓는 풍습이 있었다. 이 십장생굴뚝은 교태전(交泰殿) 뒤뜰 아미산(峨嵋山) 굴뚝과 같은 종류의 무늬를 갖고 있으나 아미산 굴뚝이 평면이 6각형인 독립 굴뚝임에 비해 이 굴뚝은 담장에 딸린 장방형 굴뚝인 점이 다르다. 현재 굴뚝 상부에 반투명한 소재를 사용하여 보호시설로 지붕을 꾸며 놓았다.

 

 

보물 811호인 경복궁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침전(寢殿)이었던 교태전(交泰殿)의 구들과 연결되었던 굴뚝이다. 교태전은 왕비의 중궁전(中宮殿)으로 태조 3(1394)에 창건되었다. 그 후 명종 8(1553)에 소실되어 1555년에 재건되었으며, 선조 25(1592) 임진왜란으로 다시 소실되어 고종 4(1867)에 재건되었다. 고종 13(1876) 또 다시 소실되었고 고종 25(1888)에 복구되었다. 원래의 교태전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 현재의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지만, 굴뚝은 고종 당시 경복궁을 재건할 때의 것이다.

 

아미산은 교태전 일곽 뒤뜰에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가산(假山)이다. 아미산에는 2벌 대의 장대석 석축이 네 층으로 쌓였고, 그 위에 괴석(怪石)의 석분(石盆)과 석지(石池) 등 석조물이 배치되었는데, 수석 1기는 1단에, 석분석지는 123단에 있고, 굴뚝은 3단에 있다. 굴뚝 3기는 3단에 나란히 있고, 나머지 한 기는 동쪽 조금 뒤편에 있으며, 주위에는 화초들이 심어져 후원이 조성되어있다.

 

그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4기의 육각형 평면을 한 굴뚝들이다. 굴뚝들은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 또는 31단으로 쌓였고, 육각의 각 면에는 당초무늬··박쥐·봉황·나티·소나무·매화·대나무·국화·불로초·바위··사슴·나비·해태·불가사리 등의 무늬가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각 무늬는 조형전(造形塼)을 구워 배열하였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화면을 구성하였다. 육각의 각 면은 네 가지 종류의 무늬로 구성되었는데, 굴뚝 제일 아랫부분은 벽사상(闢邪像)으로 불가사리를 부조한 사각형의 벽돌을 끼웠고, 그 위의 직사각형 회벽에 십장생·사군자 또는 만자문(卍字文)을 조각했으며, 그 위에 다시 봉황과 귀면 등이 부조된 네모반듯한 벽돌을 끼웠고, 윗부분은 회벽에 당초문(唐草文)으로 구성하였다. 이들 무늬 위로는 목조 건축물의 소로와 창방첨차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지붕을 이었으며, 정상부에는 점토로 만든 연가(煙家)를 각 4기씩 두어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기능은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이지만, 그 형태나 위치가 정원과 어우러져 뛰어난 조형미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이 굴뚝은 우리나라의 축조물에서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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