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이 넘는 세월을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문화재들을 만났다. 그렇게 만난 문화재들이 3,000점 가까이 되지만, 아직도 내가 갈 길은 멀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전하고 있는 문화재 중 극히 일부만을 만났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런 나를 두고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하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시간들이도 돈 써가면서 이런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누가 경비를 대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수입의 대다수를 이렇게 문화재를 답사하고 소개를 하기 위해 써버린 세월이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길거리에 뿌린 경비만 해도 집 몇 채 값이 날아갔다. 하지만 이 답사를 멈출 수가 없는 것은, 바로 답사에서 만나게 되는 소중한 문화재들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만날 수 없는 수많은 문화재들

 

숱한 문화재들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 안에는 국보급 문화재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동안 우리는 많은 문화재를 돌려받지 못한 체, 안타까움만 더하고 있다. 일부의 사람들은 양으로는 10%를 빼앗겼지만 질로는 90%를 도둑맞았다고 표현을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래 국보급 문화재들이 열강에 수탈당해 아직도 제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절골에 소재한 보물 제17호 정토사법경대사 자등탑비를 보면 그 아픔이 더하다. 대사자등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강탈당하고, 그 비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보물 제17호 정토사법경대사 자등탑비는 충주호로 인해 수몰지역내 정토사지에 있던 것을, 1983년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 현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탑비는 커다란 지붕을 만들어 보호각을 삼고 있다. 정토사법경대사 자등탑비는 고려 태조 26년인 943년에 법경대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비이다.

 

 

탑비만 보아도 훌륭한 문화재

 

법경대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불교에 대한 공부를 하여 20세에 출가를 하였다. 906년에는 당으로 건너가 도건대사 밑에서 수행을 하다가, 고려 태조 7년인 924년에 귀국하여 국사로 추대되었으며 정토사를 창건하였다. 63세인 태조 24년인 941년에 입적을 하자, 생전의 업적에 따라 법경(法境)’이라는 호를 내렸다. 비는 그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최언위가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 구족달이 썼다.

 

법경대사 자등탑비는 통일신라에서 고려초로 넘어가는 비분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받침인 거북이의 모습은 당시의 전통적인 형태인 용머리에 거북 몸을 갖고 있으며, 비위에 얹은 머릿돌에도 금방이라도 살아나올 듯한 용 조각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비에는 볍경대사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충주호변에 자리한 동량면 하천리 마을에 자리한 법경대사 자등탑비를 보면서, 그 비 하나에도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선조들의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탑을 받치고 있는 거북의 머리인 용두는 여의주를 물고 금방이라도 승천을 할 것만 같다. 앞뒤의 발은 대지를 웅켜 잡듯 힘이 넘친다.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를 보면서 문화적인 자긍심을 느낄 수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저 돌덩어리에 불과라다고 알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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