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란 갈기를 세우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 보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사자가 아니라 모나지 않은 얼굴로, 네발을 딛고 상체를 세운 체 앉아있는 모습에서 오히려 친근감이 든다. 홍천군 홍천읍 희망리 홍천읍사무소 앞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540호인 홍천 괘석리 사사자삼층석탑의 모습이다.

 

이 탑은 원래 홍천군 두촌면 괘석리에 있던 탑이었으나,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네 마리의 돌사자가 있어 ‘4사자탑이라 부르고 있다. 사사자탑은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제천 빈신사지 사사자 삼층석탑과 경남 한안군 주리사의 탑 등이 유명하다.

 

 

뛰어나지 않고, 소박한 사사자탑

 

홍천 희망리의 사사자 삼층석탑은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을 조각하였다. 그 안에는 꽃무늬조각이 장식되어 있어, 이 탑이 고려시대의 석탑이라는 특징이 잘 담겨 있다. 위층의 기단에는 각 모서리에 돌사자 한 마리씩을 두어 넓적한 윗돌을 받치게 하였는데, 이러한 형태가 사사자 삼층석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사방을 비스듬히 밖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의 바닥과 천장에는 연꽃받침대가 놓여 있다. 아랫면에는 무엇인가 놓여있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네 마리의 사자가 호위를 하고 있던 석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층 기단에 놓인 네 마리의 사자는, 많이 마모가 되어서인지 모나지 않고 오히려 친근한 모습이다.

 

 

강원지역 고려 탑의 형태를 구루 갖춰

 

아래 기단이 네 마리의 사자를 표현하느라 넓게 자리한데 비해, 탑신부는 좁게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새겼고, 가파른 경사면 탓인지 얇고 밋밋하다. 네 귀퉁이는 살짝 위로 치켜져 올렸으며, 탑의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만 남아 있다.

 

몸돌에는 양 우주를 새겼으며, 지붕돌은 전체적으로 곳곳에 파손된 부분이 있다. 세월이 흘러 닳은 흔적이 보이지만, 대체로 원래의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탑이다. 기단에서 보이는 안상 조각수법과 네 마리의 돌사자, 연꽃받침 및 지붕돌의 3단 받침 등에서 고려시대 후기 강원지역 석탑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난다.

 

 

사사자의 중앙에 있던 석불은?

 

49일 오후 6시가 다되어서 홍천읍에 도착을 했다. 마음이 바쁜 탓에 아는 길도 이리저리 돌아야 하다니. 늦은 시간 답사는 괜히 사람의 마음을 분주하게 만든다. 그래도 겨울보다는 해가 한결 길어지는 바람에, 조금은 느긋하다.

 

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을 볼 때마다 아쉬운 점은, 바로 네 마리의 사자가 호위를 하고 있던 무엇이다. 그 중앙에 보면 자국이 나 있는데, 도대체 어떤 석불을 모셨던 것일까? 그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아마도 지장보살을 그 안에 모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탑의 주인이 된다는 사사자 삼층석탑의 중앙에 모셔졌던 석불. 앞으로 이 사사자 삼층석탑을 몇 번을 더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 안에 혹 네 마리의 사자가 호위를 하던 석불의 존재를 알아낼 수 있으려는지. 온전치 못한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늘 가슴 한편이 허전하다.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 가면 계곡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한 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곳이 있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 소()가 있어, 이 소를 용소(龍沼)’라 부른다. 소 옆에는 장수 양악탑이라고 부르는 5층 석탑이 서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탑을 세운 시기가 2천 년 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탑의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탑이 서 있는 주변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이 탑을 심방사 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심방사라는 절이 언제 적에 이곳에 있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양악리 일대에는 향고 터, 동헌 터 등의 자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고려 말기에 이 부근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로 만들어진 탑

 

이 양악리 탑은 높이가 2m 정도로 크지 않은 탑이다. 주변에 많은 암반이나 석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은 석탑을 조성했다는 것은, 이 탑이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탑은 장소로 옮기는 과정에서 파손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탑의 원형을 알아 볼 수가 있다.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있으며, 누군가 탑 위에 둥근 강돌 하나를 올려놓았다.

 

탑은 그 생김새가 딴 지역의 석탑과는 다르다. 1층의 몸돌은 사다리꼴로 만들어졌으며, 2층부터 4층까지는 각 측의 지붕돌인 옥개석 위에 몸돌을 붙여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다. 몸돌 밑에는 아래 단의 지붕돌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탑의 모양은 소박하게 표현을 하였다.

 

 

심방사 탑을 찾아 양악리를 돌다

 

몇 번인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들린 곳이지만, 이번에 들린 양악리는 여러 가지 모습을 만날 수가 있었다. 양악리는 애국지사요 한글학자인 건재 정인승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 마을에는 건재 기념관과 재실, 동상 등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

 

심방사 탑의 이정표를 보고 들어갔지만, 정작 탑은 찾을 수가 없다. 마을을 돌다가 만난 주민에게서 탑의 위치를 파악하고서야 탑을 찾을 수 있었다. 탑은 마을 반대쪽 계곡의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소 옆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 크지 않은 탑이기에 마을에서 보면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전설로 남아있는 심방사

 

양악리 오층석탑은 양악마을과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마을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으로 격전지였던 흔적이 있다고도 한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마을에는 옛날에 한 도사가 살고 있어, 학을 길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마을이름을 양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을 앞에 산을 학산이라 부르고, 이웃마을로 가는 고개를 학고개라고 부른다.

 

이 오층석탑은 원래 백제의 심방사라는 절에 있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전화로 심방사가 소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탑을 옮기거나 없애면 흉년이 든다고 하여, 마을에서 보존을 하고 있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특이한 양악탑. 심방사라는 절이 어떤 절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암벽을 흘러 소로 떨어지는 물소리만 들린다. 그 물소리를 들으면서 오랜 세월을 자리를 지켜 온 석탑. 지금은 그 위로 저수지 공사를 하느라 중장비의 굉음만 시끄럽다. 그렇게 또 다른 소리를 들어가며 탑은 묵묵히 오늘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도탑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같지가 않다. 부도탑 보다는 오히려 석등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논산시 부적면 탑정리 산 5에 소재하고 있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논산 탑정리 석탑을 보고 느낀 소감이다. 탑정리 석탑은 탑정저수지 북쪽 제방 끝에 서 있는 탑으로, 원래의 자리는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탑정리 석탑을 옮긴 이유는 일제 시대에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탑이 있던 자리에 물이 차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탑은 고려시대의 탑으로 보고 있으며, 탑의 전체 높이는 283cm에 기단부의 높이가 184cm이다. 탑신의 높이는 54cm에 지나지 않는다. 이 탑을 부도탑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석등으로 보아야 하느냐를 놓고 한참이나 망설였다.

 

 

태조 왕건이 지었다는 어린사(魚鱗寺)’

 

사료에 의하면 연산현 서쪽 17리에 탑정리가 있고, 탑정리에 어린사(魚鱗寺)가 있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남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에, 이곳에 주둔하여 어린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변에 성을 쌓았다고 하나, 지금은 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탑은 왕건이 개국사찰로 세운 개태사에 속해 있던 많은 암자 중, 적사암의 대명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문헌상 기록은 없다.

 

이 탑을 보면서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한다. ‘어린사라는 절 이름을 들으면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그저 감탄을 할 뿐이다. 고려 초에 왕건이 이곳에 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곳의 지형이 평지이거나 높지 않은 구릉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이곳에 절을 지으면서 어떻게 이곳에 호수가 들어찰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천년 후에 이곳에 저수지가 생길 것을 미리 알았다.

 

탑정호는 충남 논산시 부적면과 가야곡면에 걸쳐 있는 저수지를 말한다. 1941년에 착공을 하여 1944년에 완공을 한 인공호수로, 그 규모가 상당하다. 면적은 1522천 평에 달하며, 제방길이는 573m이고, 둘레가 20km이나 되는 거대한 저수지이다. 이 저수지가 들어선 곳에 어린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魚鱗)’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물고기와 물속에 사는 온갖 것들을 말한다. 결국 어린사는 물고기가 많은 절이라는 표현인데, 당시에는 이곳에 물고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고쳐 초기에 왕건은 이곳이 천년 후에 저수지가 들어설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지명을 찾아보면 상당히 많이 있다. 용인시 이동면에 있는 이동저수지 인근에도 이와 같은 지명이 있다. ‘어비리라는 곳이다. 논밭이 즐비한 이곳이 고기가 살이 찐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용인 어비리는 이동저수지가 들어서 그야말로 물고기가 살이 찐다는 지명이 맞아 떨어졌다. 어린사 역시 그렇게 절 이름에, 이미 이곳이 저수지가 들어설 것을 예측한 것이다.

 

석등과 같은 형태의 탑정리 석탑

 

탑정리 석탑은 지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그 위로 받침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탑의 구성을 보면 하대석, 간석, 중대석, 탑신부와 옥개석으로 되어있다. 이런 형태는 어디서도 볼 수가 없는 모습이다. 흡사 석등과 탑을 합쳐 놓은 듯한 형태로 보인다.

 

더구나 이 탑의 탑신 아래의 받침 부분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등 양식이다. 8개의 연꽃잎을 양각하여 장식하였다. 혹 이 탑이 별개의 탑신을 올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즉 화사석이 들어설 자리에 있는 지금의 탑신이, 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 화사석 대신 놓아 둔 것은 아니었을까?

 

더구나 일제시대에 저수지를 조성하고, 그들에 의해서 옮겨졌다고 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헌상으로 확실하다면 무슨 걱정을 할까? 문헌도 없고, 받침이나 간주석의 형태 등으로 보면 부도이기 보다는 석등이라야 맞는다는 생각이다. 탑정리 석탑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석탑을 보라갔다가 어린사라는 절이 더 궁금해지는 날이다.

정림사지는 백제가 부여로 왕도를 천도한 후(538~660) 백제의 중심사찰이었다. 정림사지의 발굴에서 찾아낸 기와의 명문 중에는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唐草’라는 글귀가 발견이 되어, 고려 현종 19년인 1028년에는 이 절을 정림사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정림사의 건물배치는 일탑식 가람배치로, 이러한 일탑식 가람배치는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세련된 솜씨를 보이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번지 정림사지 안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오층석탑. 국보 제9호인 이 오층석탑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6세기 말에 세워진 석탑이다. 이 탑의 특징은 탑의 모서리에 세운 배흘림기둥이나, 넓은 지붕돌 등을 따로 짠 것들이다. 이런 형태의 석탑은 목조건축의 구조를 모방한 것이다.

 

이 탑에는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그 몸돌에 자신의 공적을 적어 놓았다고 한다. 아마도 전국에 이렇게 많은 탑들이 전란을 통해 얼마나 많은 훼손을 가져온 것일까? 나라를 지키지 못한 백성들이 갖는 슬픔이기도 하다.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 이후 충청남도 지역에는, 흡사한 형태의 탑이 많이 조성되었다. 그만큼 이 탑의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탑을 돌아보다가 절로 탄성을 지르다.

 

장중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마당에 가득 쌓인 눈이 땅을 질퍽이게 만들어 신에 가득 흙이 묻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무겁다는 것도 잊은 채 탑 주위를 몇 번이고 돌아본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보면 볼수록 그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좁고 낮게 만든 1단의 기단위에 오층의 탑신을 세운 정림사지 석탑. 소정방의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글귀 때문에, 한 때는 ‘평제탑’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무지를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다. 이 탑의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돌을 끼워 놓는 방법을 택했다.

 

 

탑신부의 각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와 아래는 좁고 가운데는 불룩한 것이 목조건물에서 보이는 배흘림기둥과 같은 형태이다. 몸돌의 덮개석인 지붕돌은 네 면의 귀가 날아오르듯 솟아올라, 그 귀퉁이 하나만으로도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현재 남아있는 단 두기의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알려져 귀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는다.

 

 

절제된 조형미, 그리고 배흘림기둥을 모방한 석조 조형의 편안함. 지붕돌 밑을 받치고 있는 돌들의 한쪽 면을 비스듬히 경사지게 조성해, 석질의 딱딱함을 없앤 조형미. 이런 것들을 종합해보면,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얼마나 뛰어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비록 돌로 쌓은 석탑이지만, 석탑에서 느끼는 차가움이 없다. 그리고 정리마지 오층석탑에는, 딴 시대의 석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숱한 문화재를 찬탈해간 일제는, 우리의 수많은 문화유산에 어지간히 욕심을 내었던 것만 같다. 그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예, 조선 전체를 들고 가지 그랬어!”라는 말이다. 그런 말이 하고 싶을 정도로 일제는, 우리 문화재를 수도 없이 일본으로 가져갔다.

 

전북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발산초등학교 뒤뜰에 서 있는 보물 제276호인 발산리 오층석탑. 지금은 오층은 사라지고 사층만 남아있다. 이층의 기단위에 세운 이 오층석탑은 원래는 완주군 고삼면 삼기리 봉산사 터에 남아있던 석탑이다. 이 석탑을 군산 개정면에 농장을 갖고 있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오층석탑

 

아마도 처음에는 이 석탑도 오층이었을 것이다. 그런 탑의 맨 위층이 사라졌다는 것은, 다 들고 갈 수 없어, 그 위층만 가져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석탑은 신라 탑의 모양을 본 따 제작한 우수한 석조공예품이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간결하게 정리가 된 고려 탑의 조형미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 탑은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졌으나, 그 후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를 옮겨 딴 곳에 터를 잡고 있지만, 이 석탑과 석등은 제 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 소재가 분명한 것을 이렇게 엉뚱한 곳에 놓아둔다는 것이 조금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옥개석의 아름다운 곡선에 반하다.

 

발산리 오층석탑은 받침돌은 신라 석탑을 모방하였다. 네 개의 기둥을 새긴 몸돌인 탑신석과 머릿돌인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을 하였다. 삼단 받침으로 꾸민 지붕돌은 끝이 약간 위로 치켜져 있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백제탑의 양식이 화려하고, 신라탑의 모습은 장중하다고 한다. 고려 초기의 석탑의 형태를 보면 이런 백제탑과 신라탑의 형태를 모방해,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탑의 형태를 창출해 내었다.

 

 

그 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지붕돌인 옥개석의 추녀 끝이다. 마치 한옥의 처마가 치켜 올라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내듯, 그렇게 엷은 곡선을 그리고 있다. 자칫 딱딱한 석조 조형물인 석탑을, 그 곡선하나가 여유로움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지붕돌에서 보이는 처마 끝이 올라간 곡선이 고려탑의 특징이다.

 

투박한 이층기단을 몸돌이 살려내다

 

발산리 오층석탑은 이층의 기단 위에 오층을 올린 탑이다. 이층의 기단 중 아래기단은 삼단의 낮은 단으로 쌓았는데, 그 낮은 기단 안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하였다. 고려의 석조물에서 보이는 안상은 보이지 않는다. 상층 기단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한 장의 돌로 표현을 하였다. 상층 기단의 몸돌에는 우주를 표현하고, 지붕돌인 덮개돌은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그런 형태가 탑의 몸돌과 구분이 된다.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을 한 오층석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그 꾸밈새 안에는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자칫 기단의 투박함이 몸돌이 표현한 부드러움에 묻혀있다. 돌을 이용한 탑을 조성하면서도, 나름 그 아름다움을 창출해 낸 고려탑. 그 처마 선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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