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에 자리한 소석고택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3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부농의 상징으로 멋을 자랑하는 소석고택은, 기와에 새겨진 명문을 확인한 결과 조선조 고종 22년인 1885년에 지어졌다. 소석고택의 건물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안채에 수직축을 맞추어 사랑채를 놓았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곳간채를 배정해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었다. 행랑채와 광채는 1920년경에 없어졌다고 한다.

 

안채의 뒤편으로는 넓은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사이에는 너른 안마당이 있어, 전체적으로 집안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소석고택을 찾은 날은 쌀쌀한 날씨였다. 옷깃을 여미고 찾아간 소석고택은, 초강천을 옆에 두고 너른 평지에 자리한다. 주변에는 초강초등학교가 있어 찾기에도 수월하다.

 

 

안채 다락방을 아궁이 위에 둔 까닭은?

 

소석고택의 안채는 'ㅡ' 자형으로 되어있다. 안채는 경기도 이남의 남부가옥에서 보이는 평면구성으로 안방, 윗방, 2칸 대청, 건넌방의 차례로 배열되었다. 그런데 이 안채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2칸 대청을 지난 건넌방의 다락이다. 이 다락은 밑에 불을 때는 아궁이를 두고 있다. 아궁이 위에 다락을 만들었다. 다락은 큰 창을 내었다.

 

이렇게 아궁이 위에 다락을 내는 까닭은 바로 습기를 제거하는 목적이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 그 온기가 올라 다락을 건조시키는 것이다. 창이 큰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안채는 대개 부녀자들이 기거를 하는 곳으로, 이 아궁이 위의 다락에 옷가지 등을 보관하면 늘 뽀송뽀송하다는 것.

 

 

 

 

 

집 하나를 지으면서도 세심한 곳까지 배려를 한 것이 바로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이자 실효성이다. 이러한 것을 점차 생활이 불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버리고 있는 우리들의 주거문화가 참담하기까지 하다.

 

H자형의 사랑채의 멋스러움

 

우리 고택 중 와가의 멋은 바로 지붕이다. 버선코로 비유되는 처마 끝은, 그야말로 멋스러움이다.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위로 치켜 올려진 것은 무한한 발전을 이끌어 낸다. 모든 일에 대한 희망에 견주기도 하는 이 처마 끝의 멋이야말로 한옥의 특징이다. 소석고택의 사랑채는 H자 형으로 구성이 되었다.

 

 

 

 

 

남편에는 돌출된 누마루를 놓았다. 삼면을 기둥만 세워 시원하게 조망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누마루에 앉아 시를 짓기도 하고, 벗들과 어울려 술 한 잔에 시름을 덜어내기도 했을 것이다. 간단한 난간으로만 치장을 한 누마루는, 그대로 선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누마루와 반대편에 있는 서편의 방 옆에는 커다란 문을 달았다. 이 문의 용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여름철에는 문을 열어 초강천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겨울이면 문을 닫아 찬바람을 막아내는 구실을 했다. 기단으로 쌓은 돌 하나하나에서 소석고택이 부농의 상징임을 알 수 있도록 꾸몄다. 어느 곳 하나 빠짐이 없는 소석고택의 사랑채는 한옥의 멋을 그대로 살린 아름다움이다.

 

 

 

 

 

곳간은 둘, 지붕은 하나의 색다른 건축

 

소석고택에서 돋보이는 또 하나의 건축물은 바로 곳간채다. 안채와 사랑채가 와가로 지어진데 비해, 곳간채는 초가로 꾸며졌다. 그것이 소석고택의 전체적인 조화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이 곳간채는 지붕이 하나인데 곳간부분은 둘로 나뉘어져 있다. 무슨 이유에서 이렇게 했을까?

 

서향으로 지어진 소석고택의 곳간채는 뒤주처럼 가로로 널판을 끼워 맞추고 있다. 이 곳간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각 칸마다 세로로 중인방을 넣고, 널판을 가로로 끼워 벽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곳간채는 바닥은 널마루로 깔고 천정 또한 널판자로 마감을 하였다. 이렇게 분리를 해 놓은 것은 한 곳은 곡간으로, 한 곳은 뒤주로 사용한 것은 아닌가 한다.

 

 

 

 

 

안채와 사랑채를 가르는 돌담과 측간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건물만큼 돌담을 쌓았다. 그것은 부녀자들이 기거하는 안채와 남정네들이 드나드는 사랑채를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서편 'ㄱ' 자로 꺾인 부분에 측간을 지었다. 측간은 초가로 지어졌으며 널판자로 벽을 만들었다. 1칸으로 지어진 이 측간을 사랑채 뒤에 두고, 담장을 막은 것도 소석고택이 그저 건축물을 놓은 것이 아니라, 세세한 것까지도 신경을 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뒤쪽에 측간을 내어 냄새를 방비하기도 했지만, 담을 두어 자칫 불편한 모습과 소리를 안채에서 듣지 못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우리 고택을 둘러보면 하나하나가 철학이다. 그리고 자연과 동화를 하면서 그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러한 자연과 동화되는 심성이 아름다운 집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집을 짓는 마음이 그립다.

 

초가로 된 한옥 한 채가 서 있다. 수덕사라는 고찰의 일주문 곁에 자리하고 있는 이 고택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산41에 소재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인 이응로선생사적지’. 이 집은 한 때 여관으로 사용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수덕여관이라는 간판을 아직도 달고 있다.

 

이 수덕여관은 동양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높인 화가 고암 이응로(19041989) 화백이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수덕여관은 이응로화백이 1944년 구입하여 한국전쟁 때 피난처로도 사용하였으며,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으로 옮긴 곳이다. 또한 이응로화백이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고택이다.

 

 

수많은 고초를 받은 이응로화백

 

1904112일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출생한 이응로화백은, 향년 84세인 19891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마비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최종국적은 프랑스였다. 이응로화백은 동양화, 서양화는 물론 판화까지도 두루 재능이 뛰어났다. 홍성에서 출생을 하였지만 어린 시절은 예산에서 주로 성장하였다.

 

이응로화백은 1923년 당시 경성부에서 유명한 서예가이자 서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 사군자, 묵화 등을 배웠다. 이듬해인 1924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묵죽(墨竹)’을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며,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상을 수상하였고, 1946년 단구미술원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하기도 했다.

 

 

1948년에는 홍익대학교 주임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62년 프랑스 파리 파케티 화랑에서 콜라주전을 열었다. 1965년에는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차지해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67년에는 한국 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독의 동베를린에 갔다가,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프랑스 정부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 일로 인해 국내 화단과는 단절되다시피 했으며, 주로 스위스와 프랑스 등에서 수십 차례의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7년 문헌화랑에서 신작 무화(舞畵)’로 개인전을 열었으나, 또다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와는 완전 단절이 되었다.

 

 

여류화가 나혜석도 살다간 수덕여관

 

수덕여관은 이응로 화백이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가 세상을 뜰 때까지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1988년까지 이곳에 머물렀던 이응로 화백은 집 앞에 있는 바위에 1969년 동백림 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고향산천에서 삼라만상의 성쇠를 추상화하여 표현한 작품 두 점이 남아있다.

 

이 수덕여관은 수원출신인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나혜석이 수덕사에서 3년간 머물렀다고 하지만, 사실은 수덕사의 경내가 아닌 이 수덕여관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이 수덕여관이야말로 우리 미술사에 남녀 거장이 묵었던 곳으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곳이다

 

 

방이 많은 것은 여관으로 운영했기 때문

 

수덕여관은 자형의 초가집이다. 정면으로 보면 중앙에 출입문을 두고 한편으로 정자와 같은 높임마루를 들였다. 마루 밑에는 창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엌이나 창고로 사용한 듯하다. 원형을 복원하였다는 수덕여관은 정면 5칸에, 측면은 한편은 6.5, 또 한편은 4칸으로 꾸며졌다.

 

집을 돌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우측의 날개채는 모두 6개의 방을 드렸다. 아마 이곳에서 손님들이 묵었을 것이다. 객방의 방문 앞에는 툇마루로 연결을 하였으며, 중앙에도 방이 있다. 정자마루를 올라갈 수 있는 이 방은 사랑채 대용으로 사용이 된 듯하다. 좌측 날개채는 안채의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좌측은 넓은 툇마루를 놓았으며, 뒤편으로는 장독과 우물이 있다. 이 고택의 앞으로는 덕숭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시원하게 소리를 낸다. 한 여름 더위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기에 좋은 환경이다. 아마 이응로 화백이 이 집을 사들인 것도, 주변의 경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이 수복여관 앞에 더덕구이 집들이 즐비했어요. 그 때만 해도 상당이 싼 값에 더덕구이를 먹을 수 있었죠. 개천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더덕구이에 동동주 한 잔하면, 세상시름을 다 잊을 수가 있었으니까요

 

오랜만에 수덕사를 찾아왔더니 입구에 늘어선 점포들로 인해 절의 분위기까지 달라졌다는 관광객의 푸념이다. 수덕여관을 한 바퀴 돌면서 찬찬히 살펴본다. 대문 앞에 꽃을 피운 배롱나무 한 그루가 초가집과 딱 어울린다. 한 많은 세상을 살다간 노화백의 시름도 모르는 체 피어있는 배롱나무 꽃. 그리고 이곳이 수원출신 비운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묵었다는 것을 모르고 무심하게 흐르고 있는 개울의 물. 세월은 그렇게 잊히는 것인가 보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일. 언젠가 찾아갔던 유관순 열사 생가지. 어릴 적 유관순 열사를 보고 유관순 누나라고 호칭을 했다. 아마 당시 여자아이들이 줄넘기를 하면서 불러대던 유관순 열사의 노랫말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꽃다운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에도 만세운동을 주도해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열사의 죽음이 모든 국민 전체가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이 마음이 아파 고무줄놀이를 하는 소녀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놀고는 했다. 그런 유관순 열사를 다시금 기억하게 만든 것은 201931일이 바로 3.1만세운동 100주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적 제 230호 생가지를 돌아보다.

 

열사의 생가지는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338-1에 소재한다. 이곳은 현재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어있다. 생가가 아닌 생가지라는 것은,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임을 의미한다. 집은 그 당시의 것으로 복원을 했지만 당시의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여름이 시작되는 날 찾아간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 집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초가 담장 밖에 서 있고, 사립문 안으로는 자형의 안채와 맞은편에 헛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광과 부엌, 안방이 있고, 꺾인 부분에 대청과 건넌방이 있다. 집이라야 모두 5칸 남짓하다. 맞은편에는 2칸의 헛간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집에서 어린 한 소녀가 나라를 위해 홀연히 떨치고 일어나, 아우내 장터에서 목청을 높여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목숨을 잃은 곳이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차마 우산을 쓰기도 죄스럽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점점 죄스럽기만 해 고개를 떨어트리고 만다.

 

열사의 집은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 서야

 

천안은 독립을 상징하는 고장이다. 그리고 그 상징의 한 가운데에 유관순이라는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해 숨져간 충혼이 있다. 19021216일 이곳에서 태어난 열사는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191931일 기미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 온 열사는 유림들과 학교, 교회 등을 찾아다니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41, 아우내 장터에서는 3천여 명이 참가한 호서지방 최대의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날 가족들은 일경의 총칼에 무참히 살해되었고 열사는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 최종판결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끊임없이 만세시위를 하다가 갖은 고문에 못 이겨 1920928일 순국하였다.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다.

 

19021117(음력)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현재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梯) 사이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에서 가장 먼저 개신교에 입문한 사람은 작은 할아버지 유빈기로 한글 성경을 파는 매서인이 되어 선교사를 이끌고 귀향했다고 한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개신교를 받아들이면서 일가친척들도 개신교인이 되었다.

 

열사는 공주에 왔던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54월에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으로 편입했다. 당시 이화학당 교비생으로 추천받아 공부하게 되었으며, 19183월 보통과를 졸업하고, 19184월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화학당에서는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의 주선으로 선후배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어 행복한 시기였다.

 

아우내 장터에 모인 3천여 명 사람들이 장거리를 뒤덮었다. 조인원이 한성에서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꺼내어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이렇게 아우내 장터의 독립선언식을 가진 것이다. 열사를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그런 열사의 모습이 곳곳에서 열린 것이다.

 

석오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생가지를 가다

 

천안시 목천읍 동리 79-2에는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가 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던 석오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31일은 3.1만세운동 100년이 되는 날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동녕 선생의 존재는 남다르다. 이곳 천안은 이동녕 선생 외에도 유관순 열사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동녕 선생은 천안 목천 동리에서 태어났다. 이동년 선생의 생가는 충남 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어있다. 원래는 9칸 반의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생가지 조성을 하면서 바꾼 것으로 보인다.

 

말끔하게 조성 된 이동녕 선생 생가지

 

이동녕 선생은 이병옥의 장남으로 1869년에 태어났다. 1904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상설 등과 북간도로 망명하여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1907년에 귀국하여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10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강영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의 일을 함께 보았다. 1928년에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이사장이 되고,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 당수로 활약하였다. 1940년 중국 사천성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으며, 그곳에 안장하였다가 1948년에 효창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생가지 주변은 정리가 잘 되어있다. 그 집 앞에 선생이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엷은 미소를 띠우고 계시다. 물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조성된 선생의 모습이다. 집을 배경으로 한 선생의 모습이 찾는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려는 듯하다.

 

원래 집의 모습은 자형의 안채에 사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집의 구조를 대충은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더욱 9칸 반이었다고 하면 그 집이 어떤 형태로 지어졌었는가는 지역마다 갖고 있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대충 알 수가 있다.

 

현재 이동녕 선생의 생가는 앞으로 대문채인 광채가 - 자로 있고, 뒤편에 자형의 안채가 놓여있어 튼 자형으로 공간구성을 하였다. 현재 안채는 중앙에 세 칸 대청이 있고,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부엌과 안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끝에 다락방인 듯한 반 칸 정도의 방을 드려 모두 4칸으로 구성을 하였다. 대청 좌측으로 보이는 곳도 네 칸으로 구성을 했으며, 대청에 달아낸 부분에는 사랑방을 드렸고, 부엌과 방, 그리고 개방된 마루방을 놓았다.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를 뒤로하고 길을 나선다. 갈 곳은 많고 걸어야할 길도 멀다. 그리고 하루 만에 돌아본 3.1절을 되새길 수 있는 여행지. 3월 한 달은 이렇게 의미있는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

 

화홍문 옆 한옥게스트하우스 매홀을 찾아가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명당에 집을 지으면 자손이 번창하고 가세가 늘어난다고 하여 꼼꼼하게 명당을 찾아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아무리 세월이 변했다고 하지만 명당을 선호하는 우리 습속은 변하지 않는다. 명당의 기본 조건은 바로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한다. 즉 뒤로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앞으로는 물이 흘러야 한다는 것이다.

 

수원에도 과연 그런 명당자리가 있을까? 수원에서 그런 명당의 조건을 갖고 있는 곳이 바로 수원화성 성 안쪽이다. 현재 행궁동 일대가 그런 명당자리에 속한다. 뒤로는 팔달산을 두르고 앞으로는 수원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명당자리에 수원시 지정 한옥 게스트하우스가 문을 열었다고 하여 24일 오후 찾아가보았다.

 

밖에서 얼핏 보기에도 명당자리에 들어섰다. 그동안 전국을 답사하며 수많은 고택을 보아온 나로서는 집 근처에만 가도 느낌이 다르다. 바로 명당인가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그 기운은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곳에 자리한 한옥게스트하우스 예홀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한옥 객실과 한옥 카페까지 갖춘 게스트하우스

 

매홀은 삼국시대 고구려가 수원을 관할했던 475, 고구려 20대 장수왕(394-491) 시절부터 통일신라 35대 경덕왕(742-765) 16년에 이르기까지 수원의 옛 지명이었다. ‘물골이라는 의미인 매홀(買忽)’이라고 불렀으며, 이후 매홀의 지명을 한문 식으로 바꾼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었다.

 

한옥게스트하우스 매홀은 객실 6실에 1층과 2층 모두 거실과 한편에 2층으로 된 한옥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객실 한 옆으로는 숙박을 하는 손님들이 회의를 할 수 있는 공간(매홀재)이 마련되어 있다. 그동안 수원시에 소재한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돌아보았지만 매홀처럼 숙박을 하면서 쓰임새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 집을 자랑하고 싶다.

 

객실은 모두 화장실과 샤워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방안에 마련되어 있으며, 긴 복도와 계단을 통해 1층과 2층 객실이 연결되어 있어 일행이 많을 경우 매홀 전체를 전세를 낸다고 해도 사용이 편리하다. 모든 객실은 와이파이가 작동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업무를 보기에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화성팔경 중 삼경을 만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수원은 아름다운 곳을 정해 수원팔경이라 이름 붙였다. 그 하나는 북지상련(北池賞蓮)이요, 다음은 용지대월(龍池待月)이다. 그리고 팔달청람(八達晴嵐)과 화산두견(花山杜鵑), 광교적설(光敎積雪), 서호낙조(西湖落照)를 꼽았으며, 화홍관창(華虹觀漲)과 남제장류(南堤長柳)를 더해 수원팔경이라 했다.

 

한옥게스트하우스 매홀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수원팔경 중 삼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방화수류정 앞 용연에서 떠오르는 달을 맞이할 수 있는 용지대월(龍池待月), 화홍문 7개의 수문에서 물이 흐르며 낙차를 만들어 물보라가 이는 화홍관창(華虹觀漲), 그리고 남제장류(南堤長柳)를 만날 수 있다. 남제(南提)는 화홍문에서 화산능까지 이르는 수원천의 긴 제방양편에 늘어서 있는 수양버들을 일러 長柳(장류)라고 불렀다.

 

한옥게스트하우스 매홀이 더 장관인 것은 2층 객실에 올라 창을 열면 바로 눈앞에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이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의 멋 또한 장관이다. 어느 게스트하우스가 이 멋진 광경을 따라갈 것인가? 행궁동 일대에 마땅한 객실이 없어 늘 수원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엉뚱한 곳에서 잠을 재우곤 했는데 이젠 그런 걱정 하나는 덜게 생겼다.

 

 

최고의 산책 코스를 갖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매홀

 

수원시 지정 한옥 게스트하우스 매홀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바로 최고의 신책코스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매홀을 나와 수원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을 돌아본 후 방화수류정과 각건대를 둘러보고, 동암문과 장용영 군사들이 훈련을 하던 연무대(동장대)에 들리면 뒤편 아름다운 담장과 개인화가인 불랑기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동북공심돈과 창룡문을 지나 포를 쏘던 포루와 돌출된 방어기지인 치, 그리고 적의 침입을 미리 알아볼 수 있는 포루와 동남각루, 남수문을 만날 수 있다. 남수문 앞에는 정조대왕이 조성한 성밖시장인 220여년이 지난 글로벌명품 수원남문시장이 자리하고 있어 이 시장을 돌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가족이나 단체가 왔다고 하면 수원남문시장은 가히 최고의 산책로이다. 지동 순대타운을 비롯해 팔달문시장 통닭거리, 그리고 남문고객센터 2층에서 금박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남문시장에서 즐겼다면 오후 4시가 지나면 문을 여는 청년상인들이 운영하는 푸드트레일러와 영동시장 2층에 자리한 청년몰 또한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매홀로 돌아가는 길은 수원천 산책로를 따라 돌아갈 수 있다. 매홀의 이용료는 평일에는 8만원, 주말에는 10만원 정도이며, 숙박을 한 손님들이 요구할 때는 한옥카페에서 조식을 호텔식 브런치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최고의 명당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수원시 지정 한옥 게스트하우스 매홀. 수원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곳이다.

 

가을이 내려앉기 시작한 계절에 떠난 무작정 여행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다. 16, 무작정 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갈 곳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떠나는 여행, 얼마 만에 맛보는 자유로움인가? 1시간여를 달려 찾아간 곳은 여주시였다. 여주시 여주읍 명성로 71(능현리)에 소재한 명성황후 생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옆에는 서울서 옮겨온 감고당이 있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비인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閔維重)의 묘막으로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복원돼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인 1851년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 32년인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복원이 되었다고 하지만 집안을 돌아보면 여염집치고는 잘 정돈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양편으로 행랑채가 늘어서 있다. 여흥민씨는 우리나라 역사 상 8명의 왕비를 낸 유서 깊은 문중이다. 그런 여흥민씨의 집터는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

 

 

 

전형적인 중부지방 민가로 지어진 집

 

행랑체보다 높게 터를 잡고 있는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랑채가 자리하고 안으로 안채가 자리한다. 사랑채는 남자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높게 앉은 사랑채 밖으로는 집 앞에 널려진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지는 부분에 작은 협문을 내어 별당채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별당채는 일자형 초가로 방과 대청이 있는데 이 별당채가 바로 명성황후가 8세까지 자랐던 집이다.

 

명성황후는 파란만장한 한국근대의 격동기 속에서 갑오동학혁명 이후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다가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사주를 받은 일본 낭인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되었다. 현재는 명성황후 생가 앞에 기념관을 짓고 일본에서 생가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명상황후 생가 옆에는 민가마을을 조성해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을 마련했다. 음식이나 기념품, 전통혼래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는 이곳은 늘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명성황후 생가 정비를 하면서 서울에 있던 감고당을 옮겨오고 민가마을을 마련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주변에는 연못과 공터를 마련하고 앞으로는 넓은 주차공간을 마련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두 명의 황후가 살았던 집 감고당

 

현재 여주 명성황후 생가 곁에 있는 감고당은 이 자리에 있던 가옥이 아니다. 원래 감고당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편에 있었다. 그 후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다가, 쌍문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마침 여주군은 명성황후 생가의 성역화 작업 당시였기에 2006년 현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수차례 이전을 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변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감고당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건축구조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가옥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감고당의 편액은 1761년 영조대왕이 효성이 지극한 인현황후를 기려 친필로 써서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감고당은 조선조에 두 명의 황후가 기거하던 집으로 유명하다. 숙종임금의 계비인 인현황후(1667~1701)가 장희빈과의 갈등으로 물러나면서, 복위가 될 때까지 5년간을 이곳 감고당에서 기거하였다. 또한 명성황후가 8세에 서울로 올라간 뒤 왕비로 책봉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렇듯 감고당은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가옥으로 유명하다.

 

 

감고당 옆에 서 있는 소원바위

 

감고당과 옆 민가마을 뒤편에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사람들은 소원바위라고 부른다. 명성황후의 부친 민치록은 스승인 오희상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오씨와 사별한 후 재혼을 한 부인이 바로 나중에 한창부부인이 된 한산 이씨다. 이들 부부사이에선 12녀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걱정하던 부부는 집 인근에 소재한 바위를 찾아가 정성으로 자녀를 점지해 주기를 빌었다.

 

정성이 효험을 보았는지 민치록이 53세 되던 해에 딸을 얻었는데 그가 바로 나중에 명성황후가 되었다. 명성황후가 태어나던 날인 18511117일 새벽, 붉은 빛이 비치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했다고 전하는데 어린 여자아이가 나중에 큰일을 할 것을 예견하는 전조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소원바위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명성황후 생가와 소원바위, 김고당을 돌아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서운하다. 한국민속촌을 찾아가면 99칸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다. 바로 수원 팔달산 밑 남창동에 자리하고 있던 집이다. ‘99칸 집이라고 부르는 이 가옥은 철종 12년인 1867년에 유학자인 이병진 선생이 건축했다고 한다. 수원 화성 내 팔달산 아래 지은 이집은 (현 수원시 남창동 95번지 일대) 1973년에 원형 그대로 민속촌으로 옮겨 복원시켜 놓은 것이다.

 

그동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전국에 산재한 고택 200여 채를 돌아보았다. 그 많은 집을 보면서 늘 마음 한 편에 아쉬움이 바로 이 거대한 고택이 옛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돌아보기 위해 수원화성 안을 찾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가을에 떠난 여행,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를 돌아보면서 다시 생각나게 만든 것이 바로 남창동 99칸의 양반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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