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를 해 놓고 나서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 보면 소개를 빠트리는 것이 가끔 생긴다. 그 문화재가 딴 것에 비해 뒤떨어져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가 보면 시기를 놓치는 수가 있다. 경남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에 소재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7호인 거창 무릉리 정씨고가가 바로 그런 경유이다.

 

무릉리 정씨고가를 찾아간 것은 오래 전 62일이었으니, 벌써 한참이나 지났다. 정씨 고가를 찾던 날은 초여름 비가 참 후줄근하게 내리던 날이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은 답사를 하기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거기다가 바람까지 불어 우산을 가누기도 힘든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빗속에서 만난 무릉리 고가, 사랑채에 반하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한편은 광으로 사용하고, 한편은 방을 드려 예전에는 이곳에 하인들이 사용한 듯하다. 그리고 대문과 같은 높이에 사랑채를 지었는데, 대문 쪽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높은기둥을 놓았다. 안채 쪽은 축대를 높이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렸는데, 현재는 담벼락을 쌓은 이곳도 예전에는 축대 위에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무릉리 정씨고가의 사랑채의 형태가 남다르다. 이곳 사랑채는 정형초의 호를 따서 산수정이라고 부른다.

 

무릉리 정씨 고가는 조선조 숙종12년인 1686년에 장사랑을 지낸 산수정 정형초가 건립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924년에 중수한 것으로, 건물구성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안사랑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헐리고, 일부는 변경된 구조로 남아있다. 전체적인 건물배치는 경사지에 기단을 높게 축조하여, 대지의 안쪽 높은 곳에 안채, 바깥쪽 낮은 곳에 사랑채를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자 형으로 꾸몄는데, 대문 쪽은 두 칸 개방마루를 높게 놓고, 안채 쪽으로는 한 칸의 방과 한 칸의 정자마루로 꾸몄다. 사랑채를 높게 하기 위해서 높은 기둥으로 받쳤으며, 앞에는 돌로 계단을 쌓아올렸다.

사랑채의 대청은 측면과 후면을 판자로 닫아 판문을 내고, 앞쪽으로는 난간을 들렀다. 덤벙주초에 자연스런 나무로 기둥을 마련하였으며, 한쪽은 팔작으로 꾸미고 한편은 맞배로 꾸민 특이한 형태이다.

 

 

남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안채의 꾸밈

 

안채는 축대를 쌓고 그 위를 평지로 돋아 집을 지었다. 계단을 올라 중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비켜 서 안채가 자리를 한다. 무릉리 정씨고가의 안채는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는 보기드문 자형 평면의 3량 구조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정면 4, 측면 2칸의 자형 평면에 양끝에 협칸을 앞으로 돌출시켜, 자형 평면외부에 마루를 두르고 계자난간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안채는 상당히 변형이 온 듯한 상태이다. 우선 대청마루에 문을 달아낸 것도 그렇지만, 문을 모두 현대식으로 고쳐놓았다. 고가에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찾아도 기척이 없다. 안채는 그냥 중문채에서 잠시 사진을 찍고 돌아선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는데, 아직도 찾아야 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31호로 지정이 된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29에 소재한 엄찬 고택은,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의 외손 엄찬의 고택으로 알려진 집이다. 원래 이 집은 문간채가 있었지만 현재는 문간채는 사라지고, 사랑채와 중문을 들어서면 광채와 자형의 안채가 광채와 연결되어 자형의 집을 구성하고 있다.

 

넓은 마루가 시원한 사랑채

 

현재 엄찬 고택은 사랑채와 행랑채가 연결된 중문을 사이로 출입이 가능하다. 사랑채는 3칸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두 칸은 넓은 툇마루를 놓아 시원한 느낌이 든다. 아마 예전에는 이 사랑마루에서 앞의 경치를 바라보며, 글을 읽고는 했을 것이다. 중간에 한 칸은 좁은 툇마루를 놓았는데, 이어진 부분은 안채에서 드나들 수 있는 부엌이다.

 

 

 

중문 밖으로는 한 칸의 행랑방과 광이 마련되어 있다. 이 광은 집의 구조로 보아 마구간으로 사용된 듯하다.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으로는 - 자형의 광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광채는 행랑방을 합하여 모두 여덟 칸으로 마련이 되었는데, 그 중 좌측 세 칸은 문을 달아 놓았다.

 

자형의 안채는 겹 마루를 놓아

 

전체적으로 대지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그대로 사용한 엄찬 고택은, 남쪽으로 중문을 두고 동쪽으로 본채를 두었는데,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의 우진각으로 꾸몄다. 이 엄찬 고택의 특징은 안채의 대청마루다. 모두 세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대청은 겹 마루를 놓았다. 중간에 기둥을 두고, 그 밖으로 또 마루를 덧낸 형태이다.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드렸는데,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부엌과 다락, 그리고 연이어 방을 세 개를 놓았다. 안방과 윗방으로 구분이 되는 이 방은 그리 크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이 안채에서 특이한 것은 바로 사랑채와 이어지는 부엌이다. 이 부엌은 중문과 연결이 되어 있는데, 아궁이가 이단으로 되어있다. 즉 경사가 진 대지를 그대로 이용하다가 보니, 아궁이가 깊어서 아래쪽은 가마솥에 불을 때는 아궁이로 하고, 그 위에 방을 데우는 아궁이를 따로 두었다.

 

자연을 그대로 이용해 지은 고택

 

성삼문의 외손 집이라고 해서 그 집이 잘 보존이 되어야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이 엄찬 고택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이 될 만큼 그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집이다. 안채의 뒤편에 있는 굴뚝은 중후한 멋을 나타내고 있고, 마당은 업은 편이다. 아마도 예전에는 이곳에 문간채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을 밑에서 바라보는 엄찬 고택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두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행랑채 앞에 자리를 하고 있어, 운치가 있어 보인다. 모두 여덟 칸으로 되어있는 광채는 한 눈에 보아도 이 집이 예사롭지 않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안으로 들어가 살펴본 집은 여기저기 엉망이 되어 있었다.

 

1670년대에 지어졌다는 엄찬 고택. 그저 성삼문의 외손이 살고 있던 집이라고 장황하게 안내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소중한 문화재로 지정을 했으면, 잘 보존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사랑채 넓은 마루에 앉아 앞을 내다본다. 멀리서 경운기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담은 건물 대지의 경계선이나 설치물의 주위에 두른 구조물을 말한다. 담은 순우리말이며, 한자로는 원(垣)·장(墻)·원장(垣墻)·장원(墻垣)·장옥(墻屋), 우리말과 한자가 합쳐진 말로는 담장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그중 경미한 재료로 만들어지거나 안이 보이게 만들어진 것을 울·울타리·바자울[笆子籬]·울짱·책(柵)·장리(牆籬)라 한다. 반대로 성벽·성곽과 같이 대규모인 것도 있다. 담의 기능에는 공간의 구획, 외부로부터의 침입이나 들여다보는 것의 방지, 화재 등의 위험방지, 위엄과 존엄성을 나타내는 것 등 여러 가지 기능이 있다.(출처 / 다음 백과사전)

 

담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생나무를 심는 생울이 있는가 하면, 싸리나무 등을 엮어 막아놓은 울타리가 있다. 진흙에 짚을 썰어넣어 이겨서 만든 흙담도 있고, 널판지로 계를 두른 판장과 판담이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돌담, 영롱담, 꽃담 등 담은 그 재료 등으로 담장의 구분하고 있음을 본다.

 

 

 

담장의 용도는 과연 경계이고 차단일까?

 

그러나 정말로 이 담이 경계를 막고 설치물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담장이 이웃과의 경계를 가르는 용도로 쓰이는 것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담은 경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고 이름이다. 그리고 외부와의 차단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결성을 위한 보호적인 차원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먹을 것을 담장 너머로 전해주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이 차단이라면 이해가 안된다. 우리의 담은 바로 나눔이요, 소통이다.

 

 

 

 

 

민초들의 담과 가진자들의 담은 극과 극이다

 

우리 민가의 담을 보면 막힘이 아니다. 문이라고 해보아야 싸리를 엮어만든 문이다. 그리고 담장이라고 해보아야 어른 키의 목밑이다. 누구나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옆집과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보호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민가의 담장이다. 사대부가의 높은 벽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면 왜 우리 민가의 담은 이렇게 낮은 것일까?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소통이다. 사대부가들이 숨길 것이 많다면 민초들은 숨길 것이 없다. 어느 집이나 터놓고 돌아다녀도 잊어버릴만한 것도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담을 높게 두를 이유도 없고, 안이 안 보이게 문을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바람 정도만 막아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저 허전함만 가리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은 같은 민초들끼리는 서로 피가 통하기 때문이다. 숨기고 감추고 속이는 그러한 담장이 아니라, 소통하고 열고 보여주는 그런 것이 바로 민초들의 담장이다.

 

역사는 늘 담으로 사람들을 구분했다

 

민가의 담을 보면 끝이 없다. 그저 이집에서 저집으로, 또 그 다음집으로 담이 연결이 된다. 낮은 처마 밑으로 두른 담장은 그보다 많이 낮게 만든다. 나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나를 숨길 것도 없고 은밀히 숨어서 할 일도 없다. 그런데 이런 담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즉 담은 어느 시대에서나 소통과 단절로 대두된다.

 

 

 

 

 

소통은 민초들이요, 단절은 가진자들이다. 가진자들은 보여주기를 꺼린다. 그리고 늘 은밀히 안에 틀어박혀 궁리를 한다. 대개는 그 안에서 서로 목소리를 죽여 몹쓸 짓을 연구한다. 그리고 더 많은 몹쓸 짓을 생각해 낸다.

 

민초들의 담장은 스스로 낮춘다. 스스로가 부끄러움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저 있는 대로 행하고 먹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진자들은 항상 숨기려고만 든다. 그러한 검은 사고들이 담장을 높게 만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이 위엄이라고 생각들을 했기 때문이다. 소통과 보여줌, 숨김과 차단. 이것은 긴 세월 속에서 변하지 않고 전해진 우리 담장의 철학이다.

 

 

 

 

 

담은 공유를 하는 것이다

 

가진자들은 늘 소통하고 보여주는 민초들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은 감추고 가리는 것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늘 자신들은 서민을 위해서 산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집의 담을 낮추고, 마음의 담을 낮추지 않고는, 절대로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사는 민초들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다. 담장의 철학은 사람들을 일깨우지만 그들은 그 속내조차 모르고 산다.

 

우리의 담장이 주는 철학. 내가 쌓은 담은 안편에서는 우리 담이 되지만 밖으로는 상대의 담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담장의 마음이다. 하나의 담장이 서로를 소통하게 만드는 것이다. 높은 담을 가진 자들. 이제 스스로 그 높은 담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그들과는 절대로 담을 공유할 수가 없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 537-4번지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92호인 민칠식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옥은 한옥체험을 하고 있는 집으로, 나지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널찍한 터에 남향으로 자리 잡은 조선 후기의 주택이다. 민칠식 가옥은 사랑채 기와에서 숭정 871705년이라는 명문 기와가 발견이 되었고, 안채의 상량문을 보면 1829년에 크게 보수를 한 기록이 있다.

 

민칠식 가옥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면,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솟을대문은 자 모양으로 구성이 되었으며, 그 안으로 정침이 자리하고 있다. 정침의 앞쪽으로는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고, 사랑채에 붙은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중문을 두고 연이어져 있어 자형태의 집이다. 그러나 뒷면이 좌우로 길게 삐져나와 있어, 이런 형태를 날개집이라고 부른다.

 

 

 

 

 

10칸의 자형인 대문채

 

민칠식 가옥은 대문부터가 색다르다. 자형으로 길게 뻗은 대문채는, 좌측에서 5번째 칸에 솟을대문으로 구성을 했다. 밖에서 보면 우측으로 네 칸이 광채와 대문채를 들여놓고, 좌측으로 다섯 칸을 역시 방과 광들을 마련하였다. 대문채는 자 맞걸이 집으로 솟을대문을 만들고 양끝을 박공으로 처리했다.

 

대문채는 동에서 서로 길게 나열을 하였으며, 밖의 담장은 밑에는 돌로 쌓고, 위에는 기와로 문양을 넣었다. 자칫 단조로운 담장을 돌과 기와를 이용하여 멋을 내었다. 담장의 대문 쪽에는 숨어 있는 듯한 낮은 굴뚝이 있다. 현재는 한옥체험을 하느라 그랬는지, 광으로 사용하던 일부의 칸을 화장실로 꾸며 놓았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에 사무실을 두었는데, 안으로는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작지만 쓰임새 있는 사랑채

 

민칠식 가옥의 전체적인 구성은 그리 작은집은 아니다. 그러나 대문을 들어서면서 정면으로 보면, 좌측으로 사랑채를 두고 그 옆에 담장을 이어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꺾어 안으로 들어가도록 구성을 하였다. 중문의 동편에는 사랑채의 아궁이가 있으며, 안채를 들어가는 곳에 다시 중문 안문을 두었다.

 

이 문이 예전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런 것 하나서 부터가 특별한 집이다. 사랑채는 앞으로는 세 칸으로 구성을 하였다. 사랑채 내림마루 끝에는 숭정(崇禎) 87년인 1705년이라는 기명의 망와가 있어, 이 집을 처음 지은 년대가 아닌지 추측을 한다. 사랑채 앞에는 큼직한 판석으로 댓돌을 만들어서 위엄을 표현하였으며, 사랑마당에서 중문간까지도 장대석으로 쌓은 여러 단의 계단을 오르도록 하였다.

 

사랑채는 마름모형의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새웠다.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리고, 동편 맨 끝 방은 누정과 같이 누마루방으로 구성을 하였다. 사랑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고, 사랑채 서남쪽 모퇴에는 볏광을 드렸다. 사랑의 측면은 두 칸으로 되어 있으며,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이 안채와 연결된 담장에 나 있다. 이 사랑채의 특징은 담으로 안채와 연결이 되었다는 것이며, 그 연결 선상이 단지 담장이 아니라, 방과 한데부엌 등으로 꾸며졌다는 점이다.

 

 

 

돌출된 안마루가 특이한 안채

 

중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꺾어서 안채를 들어가게 하였다. 안채는 왼쪽부터 부엌, 큰방, 대청, 작은방, 안마루 순으로 구성된 8칸 집으로, 오른쪽에 돌출하여 덧붙여진 안마루가 특이하다. 사랑채는 광과 중문간, 부엌, 사랑방, 마루로 배치하였는데, 안채와 비슷한 구조기법을 보이고 있지만 안채보다 높게 지어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안채의 구성은 사랑채를 제하고 나면 자 형태이다. 동편으로는 사랑채와 맞물리는 일각문이 있고, 일직선상에 놓인 안방의 뒤편으로는 담장을 쌓아 보호를 한 날개채가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을 날개집이라고 부르는 연유이다. 서쪽 끝에 놓인 부엌은 앞이 개방되어 있으며, 중문채와 구별을 하기 위해 담장에 일각문을 내었다.

 

 

 

 

그 앞으로는 방을 드렸는데, 이곳은 중문채를 사용하는 여인들의 거처로 보인다. 안채와 중문채가 접해지는 부분에는 다시 일각문을 두어 서쪽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는 자형태의 구조를 갖고 사랑채와 중문채, 안채가 하나로 구성이 되어있으며, 그 구분을 일각문으로 했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런 형태의 집은 대개 영남지방의 양반가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이다. 그러나 충청지방의 집에서는 매우 드문 집의 구조이기 때문에, 민칠식 가옥이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고 하겠다. 고택답사를 하다가 이렇게 보존이 잘되고, 특이한 집을 만나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제는 집을 보는 안목이 조금은 생긴 듯하다.

원주 봉산동에 있는 시림박물관 뒤편에는,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을 지낸 최규하 전 대통령의 집터에 지은 집이 있다. 이 집은 원래는 초가였으나, 후에 손을 보아 보존상의 문제로 기와로 고쳐지었다. 1994년 최규하 전 대통령이 이 집을 원주시에 기증했다. 현재의 집은 1997년 원주시립박물관을 건립 할 때 옛 집과 비슷한 평면구조로 고쳐지은 것이라고 한다.

 

대문이 두 개인 가옥

 

현재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지에 있는 가옥은 일각문을 들어서 사랑채 안마당으로 들어설 수가 있다. 이 집의 특징은 사랑채와 광채, 행랑채가 ㄴ자형으로 붙어 있다는 점이다. 이 집의 일각문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대문이 하나 있고, 사랑채를 돌아서면 광채와 연결되는 곳에 또 하나의 대문이 있다.

 

사랑채는 행랑채와 대문을 두고 연결이 되어 있다.
사랑채의 모서리 부분에는 마루방을 들여 정자 형태로 꾸몄다.


사랑채와 행랑채를 연결하는 가운데 난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한 칸의 행랑방이 있고, 좌측으로는 사랑채의 뒤 방문이 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좌우에 아궁이를 두어 이 방이 행랑채임을 알 수 있다. 사랑채의 모서리에는 마루방을 두었으며, 마루방은 앞으로 돌출시키고, 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마루방은 정자 기능을 갖고 있다.

 

사랑채의 모서리를 돌아가면 반 칸의 헛간을 만들고 그 옆에 대문을 두었다. 그리고 한 칸의 외양간과 한 칸 반의 광채가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행랑방, 대문 세 칸의 사랑채와 꺾인 부분에 헛간, 대문, 외양간, 광의 순서로 배열이 되어 있다. 외양간의 앞면은 구유를 두고 남은 부분은 판자벽으로 막았다. 그리고 우마가 대문을 들어서 마당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외양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쪽문이 담벼락에 붙어 있다.

 

사랑채와 붙은 대문과 연결된 행랑방
사랑채 뒤편 꺾인 부분으로는 헛간과 대문, 외양간 광이 있다.
 
광채에 나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 외양간의 우마가 출입하는 쪽문이 담벼락에 나 있다.

 

단소 강습소로 이용되는 안채

 

안채는 ㄱ자 형으로 꾸며져 집안의 전체적은 구성은 튼 ㅁ자 형이다. 이는 강원 영서지방의 전형적인 가옥의 꾸밈새다. 안채를 바라보고 좌측에 툇마루를 높인 건넌방을 두고, 두 칸의 대청과 꺾인 부분에 윗방과 안방, 그리고 두 칸의 부엌을 드렸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대나무로 만든 국악기의 한 종류인 단소를 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이곳에서 단소 강습을 하는가 보다.

 

대청 앞 댓돌 근처에는 신발이 여러 켤레 보인다. 단소를 배우는 사람들이 꽤 되는 듯하다. 이렇게 전통가옥을 이용한 문화강좌 등이 참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대로 방치하면 아무래도 폐허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2년 전인가 이곳을 방문 했을 때는 온 집안의 벽마다 낙서가 되어 있어,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당시 이곳을 관리하던 어르신은, 눈을 잠시만 돌려도 낙서를 해놓고 간다는 말을 했다.

 

안채는 ㄱ 자형으로 꾸며졌다. 현재는 단소 강습소로 이용을 한다
단소 강습을 하는 사람들의 신발.

 

이렇게 다시 찾은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 터 가옥. 말끔하게 새 단장을 한 가옥에서 은은히 들리는 단소소리가 정겹다. 그리고 낙서하나 없는 벼름박이 보기가 좋다.

 

시원한 까치구멍을 낸 부엌

 

이 가옥의 특징은 대문 안에 있는 마구간에 우마가 출입하는 쪽문도 그렇지만, 안채의 부엌에 낸 까치구멍이다. 벽을 삼등분하여 그 맨 위를 전체를 넓게 까치구멍을 둘렀다. 부엌의 위로 시원하게 뚫린 까치구멍이 이 집의 또 하나의 볼거리다. 부엌 문 바로 옆에는 작은 까치구멍을 아래 내어 환기를 최대한으로 도왔다.

 

부엌에는 위 부분에 시원하게 낸 까치구멍이 양벽에 들러져 있다.
안방의 뒤로는 폭 넓은 툇마루를 놓았다. 주변이 들판이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안채 안방 뒤에는 넓은 툇마루를 놓고 윗방과 부엌이 일직선이 되게 한 것도, 이 집의 주변에 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당시에는 넓은 들판 한 가운에 집이 자리하고 있었나보다. 단소 강습을 하고 있는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 터 가옥. 다시 찾은 집안을 둘러보면서 '좋다'라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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