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무안군 심향면 유교리 698에 소재한 나상열 가옥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67호이다. 마을에서는 이 집을 ‘천석지기의 집’ 이라고 부른다. 천석지기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 나로서는 그것이 어느 정도의 부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대농의 집이라고 부르는 이 집을 돌아보고 나서야, 그 부의 척도를 알았다.

나상열 가옥을 찾아가 보았다. 약 90여 년 전에 지은 안채와 일제 때 지은 창고, 그리고 문간채와 중문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나상열 가옥은 전체적으로 3단의 구조로 축조되었다. 맨 위에는 안채가 있고, 계단을 내려 맞은편에 창고와 중문채가 자리하고 있다. 마지막 맨 아래편 3단에는 대문과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부호답게 많은 일꾼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집의 전체적인 구조로 보아 예전의 건물에서 사라진 부분이 있는 듯하다.


대문도 창고로 사용한 부호의 집

나상열가옥의 대문은 일반적인 집과는 다르다. 커다란 대문을 갖고 있을 경우, 그 양편은 문간채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높고 큰 나상열 가옥의 대문은 다르다. 문 앞과 안 편이 모두 판자문을 만들어 놓았다. 담벼락 위에 낸 들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바닥 등이 이것도 곡식창고로 이용했음을 항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집에는 여기저기 곳곳에 곡식창고를 만들어 놓았다는 소리다. 그만큼 천석지기의 집에는 다양한 창고가 필요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대문에 붙은 창고는 원 곡식창고에서 곡물을 밖으로 운반하기 전에 사용한. 중간 창고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행랑채는 대문 안을 들어서면서 좌측으로 나 있다. 이곳도 너른 광을 만들고 그 한편 구석에 방을 들여 놓았다. 너른 공간을 최대한으로 확보를 한 형태다. 나상열 가옥이 오밀조밀한 멋을 벗어나 시원하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엌과 연결된 마루의 용도는?


나상열 가옥에서 눈에 띠는 또 한 가지는 바로 안채에 딸린 부엌이다. 이 부엌은 안쪽과 문쪽에 작은 방을 두었다. 아마 안채에서 일을 하는 집안의 부녀자들이 이용한 듯하다. 그런데 그 방 사이에 마루가 있다. 앞을 문을 단 것으로 보아 대청은 아니다. 마루방의 한편에는 벽에 붙여 계단식으로 짠 것이 보인다.

가만히 보니 그곳을 부엌에서 사용하는 용기를 보관하는 곳인가 보다. 집에서 일을 하는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었을 테니, 그만큼 집안에서 사용하는 용기도 많았을 것이다. 많은 용기를 보관하기 위해, 부엌과 방 사이에 별도로 장식장처럼 꾸며놓았다. 그런 것들을 보관하기 위한 마루방을 만들 정도로 세심한 배려를 하고 지은 셈이다

안채 뒤편에 있는 석빙고

나상열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집안에 석빙고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축대 안에 만들어 놓는 석빙고는 많은 인원이 기거하는 절집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만큼 음식을 만들 때도 많은 양의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 그 많은 양의 음식재료를 날마다 사들이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러한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해 안채의 뒤편에 굴을 파고 석빙고를 만들었다. 이 석빙고는 음식을 보관하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음식의 적당한 숙성까지도 도왔을 것이다. 결국 이 집안의 음식은 항상 신선한 것을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우물 안에서 자라나는 나무의 정체는?

우물에는 도르래를 달아서 사용을 한 흔적이 보인다. 사람들이 많으면 그만큼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하고, 많은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물의 사용양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음식을 조리하는 집안 아낙네들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런데 사용하는 힘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우물의 양편에 기둥을 세워 도르래를 달았다.


우물을 보기 위해 가까이 갔다. 안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우물 안에 등나무와 같은 나무가 자라고 있다. 왜 이 안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을까? 저 나무는 어떻게 저곳에서 자라게 된 것이고, 언제부터 저렇게 자라고 있는 것일까? 무성한 잎이 싱싱해 보인다. 그 밑에는 물이 있다는 소리다. 나상열 가옥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수수께끼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반전의 미학, 아름다운 돌담장

집안의 전체를 돌담장으로 쌓은 나상열 가옥. 그래서 전체적으로 무거운 집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또한 그 무거움을 덜어내는 하나는 담장의 한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안채를 보고 좌측의 담장 앞으로는 계단이 아닌 비탈로 조성을 하였다. 곡식을 나르기 위한 수레가 다니던 길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너른 대지위에 시원하게 조성된 나상열 가옥에서, 정감이 가는 유일한 축조물이 바로 돌담장이다. 이 담장은 담장에 붙은 대문과 행랑채까지도 이어진다. 그리고 그 끝에는 수레를 끌 수 있는 비탈로 여유를 부렸다. 천석지기 집이라는 나상열 가옥에서 보이는 전체적인 여유. 그것은 생활의 여유이기도 하다.

처음에 굴뚝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제일 먼저 궁궐의 화려한 굴뚝에 대한 글을 썼다. 그리고 사대부가의 기와집의 굴뚝에 대한 글을 적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대부가도 있지만, 주로 민초들이 살던 초가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궁궐의 굴뚝과 사대부가인 기와집의 굴뚝도 특징이 있지만, 초가의 굴뚝은 또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

초가는 지붕을 얹은 짚이 불에 잘 붙는다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비교적 굴뚝을 높게 올리거나, 멀리 떨어져 세운다. 대개의 경우는 높이 올리는 편인데, 이는 낮은 굴뚝을 통해 불똥이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48호 정원태 가옥의 사랑채 굴둑. 전형적인 초가의 굴뚝이다. 제천시 금성면 소재. 이 집은 사람이 살고 있다. 


초가의 굴뚝은 높거나 멀거나

문화재 답사를 다니면서 한 가지 답답한 일을 겪는다. 그것은 바로 복원이라는 허울아래 망가지고 있는 우리의 문화재들이다. 전문적인 보수 기술자들이 복원을 한다고 믿고 있는데, 정작 돌아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괜히 겉멋을 부리려고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마음이 아프다.

초가의 굴뚝인 그 구조상 굴뚝이 지붕보다 높아야 한다. 아니면 연도를 길게 빼어 집과 멀리 떨어트려 놓는다. 이러한 이유는 불을 붙기 쉬운 지붕 때문이다. 사대부가에서는 장작을 주로 때지만, 민초들은 삭정이나 검불 등을 주로 땐다. 그러다가 보니 불똥이 굴뚝을 통해 날아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짚으로 이은 초가는 불똥만 튀어도 불이 붙을 수가 있다.

(사진은 용인 한국민속촌에 있는 초가집 굴뚝이다. 하나는 지붕보다 높게 올라가고, 돌로 쌓은 굴뚝은 집에서 떨어져 있다)

그런 화재를 염려해서 굴뚝을 높게 올리는 것이다. 굴뚝이 높으면 그만큼 불똥이 튈 확률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높게 할 수가 없을 때는 굴뚝을 연도를 길게 빼서 멀리 놓는다. 이 또한 불똥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어이없는 요즘 초가의 굴뚝, 아예 굴뚝이 없기도

초가의 굴뚝이 더 높은 이유는 민초들의 아픔이기도 하다. 잘 마른 장작하나 제대로 땔 수가 없는 지난 시절, 그나마 나무 삭정이나 검불이라도 많이 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땔감들은 굴뚝을 통해 곧잘 시뻘겋게 불똥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서 화재가 발생하기 때문에, 굴뚝을 높이거나 멀리 설치를 해야만 한다.


위는 사적 제230호인 천안의 유관순 생가지의 굴뚝이다. 전형적인 민초들의 굴뚝 모습이다. 아래는 충북 문화재자료 제38호인 청원 낭성 관정리민가의 굴뚝이다. 연도에서 솟은 연소통이 짧다. 이 집이 있던 곳은 바람이 많지 않았다고 하지만, 초가의 연소통치고는 너무 짧은 감이 있다.


이런 초가 굴뚝의 특성은 복원이라는 허울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질이 되어버렸다. 굴뚝의 연도를 뺀 후 길게 연소통을 올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굴뚝 연도 끝에 작은 통 하나를 박아놓는 것으로 그쳤다. 만일 그런 곳에 검불이나 삭정이들을 아궁이에 집어넣고 불을 지핀다고 하면, 그야말로 불조심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그런데 여기저기 옛 집들을 돌다가보니, 더 가관인 집도 있다. 아궁이는 있는데 아예 굴뚝이 없다. 세상에 굴뚝이 없는 집도 있을까? 그렇다면 연소는 어떻게 할까? 그저 대충 집만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엔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굴뚝은 집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구조물이다. 그런 굴뚝이 없이 집을 지어놓고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일까?



위는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의 초가집 굴뚝이다. 바람이 강한 곳이기 때문에 담장에 연도를 집어 넣었다. 가운데는 중요민속문화재 제39호인 고창 신재효 생가의 굴뚝이다. 낮지만 연도를 길게 빼어 집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그리고 아래는 삼척시 도계의 신리 너와집 굴뚝이다.


사는 집과 살지 않는 집의 차이

이런 오류는 사람이 살고있는 집과, 사람이 살고있지 않은 집이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사람이 살고 있으면 제대로 된 굴뚝이 보인다. 문제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집들이다. 거의 제 몫을 못하는 보여주기 위한 굴뚝을 만들어 놓고 있다.

초가집에도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에 가면 굴뚝이 담장에 올라앉아 있다. 그것도 항아리로 마련하였다. 바람이 센 지역에서는 이런 굴뚝이 보이기도 한다. 담장 안에 연도를 집어넣고, 그 위에 항아리를 올려놓은 것이다. 바람에 무너지거나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위는 수원 파장동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3호인 광주이씨 월곡댁의 굴뚝을 세우는 연도이다. 연도만 마련하고 연소통은 마련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궁이는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가운에와 아래는 남원 운봉에 있는 가왕 송흥록의 생가지에 세워진 집이다. 측면을 보고, 뒷면을 보아도 굴뚝이 아예 보이지를 않는다.


굴뚝 하나에도 철학이 있는 우리네의 집들. 그 굴뚝을 돌아보면, 나름대로의 멋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의 미학이다.

충북 영동군 양강면 괴목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42호인 김선조 가옥. 아마도 이 집을 돌아보면 옛 선인들의 집을 짓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전형적인 양반가의 구조를 갖춘 이 가옥은, 안채는 17세기에 안사랑채는 그보다 조금 늦은 17세기 말쯤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곳간채와 대문채는 20세기에 들어서 지었다고 한다.

김선조 가옥은 전국을 다니면서 만날 수 있는 고택 중 하나이다. 그저 평범한 집 같지만, 찬찬히 돌아보면 뛰어난 건축기법이 보인다. 물론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이 될 때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 이겠지만, 그냥 돌아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자연을 배경을 한 안채

김선조 가옥은 ‘배산(背山)’의 특징을 갖는다. 집 뒤에 있는 낮은 구릉은 여름철이면 녹음으로 뒤덮히고, 겨울이 되면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자연을 이용해 집을 지은 건축의 교과서 같은 집이다. 집 뒤편으로는 고목들이 서 있는 구릉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흡사 산속에 지은 집을 연상케 한다.

예전에는 안채 앞에 사랑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랑채가 없어지고 기단만 남아있다. 대문채에서 안채까지 휑하게 빈 공간은, 사랑채가 없어 외부공간이 전체적인 균형을 잃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허전함을 안채 뒤에 있는 녹음이 진 구릉이 막아주고 있다.



김선조 가옥의 안채는 ㄷ자형의 구성으로 건조되었다. 부엌, 안방, 대청, 윗방 등이 일렬로 배열이 되어있다. 안채의 앞쪽에만 마루를 놓은 것이 아니고, 뒤편에도 툇마루를 길게 늘였다. 이 뒷마루는 사람이 편히 앉아 구릉의 녹음을 바라다보기도 좋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된다. 멀리 돌지 않고 가까이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안사랑채가 되돌아 앉은 사연

김선조 가옥을 돌아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건물이 한 동 있다. 바로 안사랑채이다. 안사랑채는 부엌, 안방, 윗방, 대청을 일렬로 배열한 전형적인 별당 형식이다. 안채 앞에 있던 사랑채는 없어졌다는데, 이 안사랑채는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있다. 그런데 안사랑채의 전면이 아니고 돌아 앉아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안사랑채는 여자들의 공간이다. 사대부가의 집들은 사랑채에서 바깥주인이 기거를 하면서 외부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로 이용을 한다. 그리고 안채는 대개 사랑채에서 담을 쌓고 그 안에 일각문을 두어 바깥주인이 출입을 한다. 그리고 그 안채 후원에 별당채가 두어, 집안의 과년한 딸들이 기거를 한다.


그런데 김선조 가옥에는 별당채가 없는 대신, 안사랑채를 대문 안에 마련을 했다. 그러다보면 외부인들이 집안을 들어섰을 때, 안사랑채를 사용하는 여자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집을 돌려놓은 것이다. 사람들은 여자들이 기거를 하는 방이면 괜히 눈길을 주게 된다. 그러한 외부인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방법인 듯하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 집의 구조다.

문은 있는데 벽은 왜 없지?

이 안사랑채를 돌아보면 참으로 재미있다. 대문을 들어서 보이는 안사랑채의 끝에는 불을 떼는 아궁이가 있다. 그런데 이 아궁이는 부엌의 용도는 아니고, 불을 지피고 물을 데우게 되어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 아궁이가 있는 불을 떼는 곳에 안채의 방향으로는 담도 없는데, 마당 쪽으로는 문을 내달았다.



불을 때는 곳인데 구태여 문을 해 달아야할 필요가 있었을까? 벽도 없이 노출이 되어있는 곳인데 문을 단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집 주인의 세심한 배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바로 안사랑채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부녀자라는 점이다. 집의 안식구뿐만 아니라, 집에서 일을 하는 여자들까지도 가려주는 마음. 이 아궁이가 그런 것을 알려준다. 집안을 드나드는 외부의 남정네들이, 부녀자들을 함부로 볼 수 없도록 마음을 쓴 것이다. 김선조 가옥에는 숨어있는 비밀이 많아, 둘러보는 재미에 푹 빠진다.

측간도 곳간채 한편에 숨어있어

안사랑채의 뒤편 건너편에는 곳간채가 있다. 곳간채는 ㅡ 자형으로 지어졌는데 모두 5칸으로 나뉘어졌다. 좌측 두 칸은 곡물을 쌓아두는 창고로 사용하고, 중간은 뒤주로 사용을 했다. 그런데 맨 우측의 한 칸은 문이 없다. 문이 어디로 갔을까? 창고를 돌아 뒤로 가보니. 세상에 여기 측간이 숨어 있다.



'처갓집과 측간은 멀수록 좋다'고 했던가. 그런데 멀리 둘 수가 없는 집안의 구조 때문에 측간을 광의 뒤편에 두었다. 집안에서는 보이지 않으니, 용변을 보는 사람들도 편했을 것이다. 측간은 안쪽으로 들어가게 내었다. 세세한 부분까지도 신경을 써서 구성을 하였다. 고택에서 찾아보는 숨은 멋. 김선조 가옥은 그런 재미가 쏠쏠한 집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늘 쓰고 싶었던 글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굴뚝’에 대한 글이다. 남들이 들으면 ‘문화재 답사가 맞아? 무슨 굴뚝을’이라고 핀잔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굴뚝은 단순히 연기를 내는 곳이 아니다. 물론 그 용도야 연기를 내보내 불이 잘 들게 하기 위한 용도지만 말이다.

굴뚝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 그 종류가 어지간히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궁이나 반가의 집, 또한 민초들의 집을 다닐 때마다 난 굴뚝을 눈여겨보는 버릇이 생겼다. 굴뚝 하나에도 조형의 미가 있는 우리의 집들.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그 첫 번째로 경복궁의 굴뚝을 둘러본다.


왜 하필이면 굴뚝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그런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하나뿐이다. ‘굴뚝이 없는 집은 존재할 수 없다. 필요 없는 것 같지만, 굴뚝은 그 어느 것보다도 필요한 구조물이다. 그러면서도 굴뚝은 나름의 철학을 지니고 있다’

두 개의 보물을 지닌 경복궁의 굴뚝

사적 제117호인 경복궁은 현재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정궁(正宮)에 해당하는 것으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궐’로도 불린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경복궁을 건립하는 일이었다. 태조 3년인 1394년 12월 4일 시작된 이 공사는, 이듬해 9월 중요한 전각이 대부분 완공되었다.

경복궁에는 두 개의 유명한 굴뚝이 있다. 바로 자경전 뒷담에 붙어있는 <보물 제810호인 십장생 굴뚝>과 <보물 제811호인 교태전 뒤 인공동산인 아미산의 굴뚝>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굴뚝만 갖고도, 경복궁의 굴뚝이 얼마나 딴 곳에 비해 아름답게 꾸며졌는지를 알 수가 있다.


십장생 굴뚝의 안담과 바깥담(아래)

목조건물을 본 단 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경전은 현재 그 전각 자체만으로도 보물 제80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교태전 뒤쪽 자미당 터에 조대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자경전 뒷담에 조형한 십장생 굴뚝은 궁궐의 굴뚝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것으로 꼽힌다.

십장생 굴뚝은 담의 한 면을 앞으로 한 단 돌출을 시켜 전벽돌로 굴뚝을 만들었다. 굴뚝의 전면 중앙에는 십장생 무늬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였으며,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벽면을 구성하였다. 벽면의 십장생 도판에는 해, 산, 물, 구름, 소나무, 사슴, 거북, 바위, 학, 불로초, 포도, 새, 국화, 대나무, 연꽃 등이다.


이 가운데 해와 거북 등은 장수를 뜻하고, 알이 많이 달린 포도는 자손의 번성을, 박쥐는 부귀를, 나티 불가사리는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기운을 뜻한다. 담장의 윗부분에 마련한 굴뚝의 덮개는 목조 건물의 지붕을 모방하였으며, 꼭대기는 집 모양을 본떠 만든 ‘연가(煙家)’를 10개 올려놓았다.

경복궁 아미산 동산의 굴뚝

보물 제811호인 아미산 동산의 굴뚝은, 굴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독립적인 조형물이다. 아미산은 교태전 뒤에 조성한 인공동산이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실이 있는 중궁전이다. 이 인공동산에 서 있는 굴뚝은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도를 연결이 되어있다. 이 굴뚝은 처음 경복궁을 지을 때 조성한 것이 아니라, 고종 2년인 1865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조성한 것이다.

교태전 후원 인공동산인 아미산의 굴뚝 

현재 4개가 남아있는 아미산의 굴뚝은 육각형으로 굴뚝의 기둥을 마련하였다.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소나무, 매화, 봉황, 국화, 불로초, 바위, 사슴 등을 벽돌로 구워 만든 도판으로 장식을 하였으며,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하나의 후원을 아름답게 꾸미는 조형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는 아미산 동산 굴뚝은 십장생과 사군자, 장수와 길상을 상징하는 무늬 및 악귀를 쫓는다는 상서로운 짐승들을 함께 표현하였다.

아미산 동산의 굴뚝은 우리나라 궁에서 만나는 굴뚝 중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창경궁이나 창덕궁의 굴뚝들이 흙과 백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면, 경복궁의 굴뚝은 채색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그 외에 경복궁에서 만나는 굴뚝들

경복궁의 연희장소인 경회루 옆에는 수정전이 있다. 현재 수정전이 있는 자리는 세종 때 한글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이 있던 장소이다. 이 수정궁 벽에는 연가를 세 개씩 올린 담에 붙은 굴뚝이 있다. 이러한 담에 붙은 굴뚝은 경복궁 어디서나 만날 수가 있다. 이러한 굴뚝의 특징은 모두 전벽돌을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교태전에서 조금 비켜난 곳에 난 일각문인 선장문 앞에도 아미산 동산의 굴뚝과 외형이 비슷한 사각형의 굴뚝들이 서 있다. 이곳에는 각종 십장생의 문양은 보이지 않고, 평범하게 조성을 하였으나 우직한 것이 장부를 상징하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교태전 주변의 굴뚝들은 문 옆이나, 혹은 벽과 벽이 마주하는 곳에도 굴뚝이 자리한다.


왜 이렇게 아름다운 굴뚝을 조형한 것일까? 그것은 굴뚝을 단순히 연기를 배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완전한 독립된 조형물로 인정을 한 것으로 생각이 든다. 하기에 경복궁 안에는 숨은 굴뚝 찾기를 해도 좋을만한 많은 굴뚝들이 각양각색으로 숨어있다. 아이들과 함께 그것을 찾아내는 재미역시 쏠쏠할 것이란 생각이다.

단순한 굴뚝 하나에도 미학을 담아낸 선조들의 놀라운 예술세계. 지금 우리가 가장 눈여겨보며 기억을 해야 할 것들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를 지극한 효심으로 모신 효자였다. <난중일기>에는 이러한 이충무공의 내력을 적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3년 6월에서 12월 사이에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를, 여수 웅천동 송현마을 정대수 장군의 집에 모셔다 놓고 수시로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하루는 노모를 뵙기 위해 일찍 배를 타고 송현마을로 문안을 드리러 왔는데, 기운이 많이 떨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군은 어머니를 뵈러 갈 때는 흰 머리카락을 모두 뽑고는 했는데, 이는 늙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께서 마음 아파할 것을 생각해서였다고.


장군의 모친이 살던 집터를 찾아가다.

10일 아침 일찍 여수 수산시장에 볼일이 있어 내려갔다. 여수에 사는 지인을 만나 함께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장군의 어머니께서 사셨다는 집터를 찾아갔다. 길가에는 ‘이충무공 어머님 사시던 곳’이란 푯말이 붙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요즘 주변 정리를 하느라, 한창 공사 중이다. 전남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 1420-1번지. 옛 집터 인 듯한 곳에는 거북선에 비를 세운 형상물이 있는데, 이 근처 어디인가 이충무공의 모친이 5년간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거북비가 서 있는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7칸 정도에, 측면 두 칸 반 정도의 팔작 겹처마 지붕으로 된 집이 있다. 현재 이 집은 사람들이 거주를 하고 있는데, 현재 거주를 하시는 분은 정평호(남, 79세)로 임지뢔란 시 활동을 하던 정대수 장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분은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들이 대대로 이 터에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고택다운 옛집, 1930년대 지은 것으로 전해져

현재의 집주인도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상 대대로 이 집터에서 살았다는 분들. 집터는 옛집 터지만, 집은 그동안 여러 번 개축을 한 것인지 옛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재 이 집은 예전 충무공의 어머니께서 사시던 집은 아니다. 당시 발굴을 할 때 대들보 등이 발굴된 곳은, 현재 정대수 장군의 후손인 정평호옹이 살고 계시는 집의 부엌과 장독대에 걸쳐 있다고 전한다.

현재 주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 옛 선조들이 살던 집터에 나중에 보수, 개축을 했다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는 아마 사랑채나 별채에 기거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대수 장군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문 앞에 선 안내문에 보면 「1972년 옛 집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대들보, 마룻대, 세살창문과 같은 집 구조물과 맷돌, 디딜방아용 절구, 솥 같은 세간들을 찾아냈다」고 적고 있다.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집 주변으로는 수령 300년이 넘는 팽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팽나무는 수고가 25m에, 나무의 둘레는 5.2m나 되는 거목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후 문화재지정도 고려 해

집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사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주춧돌은 원형으로 다듬었으며, 그 위에 팔각기둥을 세웠다. 사방에는 처마 끝에 활주를 받쳐 놓았으며, 전체적으로 보아도 고택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배어있다.

여수시 문화재 관련 담당자는 내년에 발굴에 필요한 예산 신청을 했다고 한다. 발굴 후에 이 터가 정확하게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살던 집이라고 밝혀진다면, 이곳에 복원계획도 고려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현재의 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만일 이 터가 발굴조사 후에도 정확한 고증이 들어나지 않는다면, 관광자원으로 활용을 할 것이라고 한다. 어차피 난중일기에 밝혔듯이, 송현마을에 어머니를 모셨다고 기록이 있고, 현재의 집이 당시 정대수 장군의 집터이기 때문이다. 충신이요 효자인 이충무공의 어머니가 살았다는 집터. 그곳에는 충무공에 관한 역사를 안내판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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