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방, 동대, 알 수 없는 명칭 무엇일까?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7호인 윤영채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5월 22일 찾아간 집은, 일반적인 고택에서 보이는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집의 구조가 일반 양반집이나 민초들의 형태가 아닌 특이한 형태로 꾸며져 있다. 집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많은 옛 고택을 나름대로 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생소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 집은 원래 사람이 생활을 하는 고택은 아니었다. 현재 안채와 중문채, 문간채를 겸한 사랑채 등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 형태로 꾸며져 있다. 이 집은 원래 남원을 ‘방(坊)’이라는 작은 행정구역으로 나누면서 48개의 방을 조성했는데, 그 중 ‘이언방(伊彦坊)’에 속하였던 곳이다. 이언방이란 아마도 선비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48방 중 최고의 명당에 자리해
이 이언방이 선비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바로 옆에 서원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집은 중종 6년인 1511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돼, 500년이 지난 유서 깊은 집이다. 이 이언방은 48방 중 가장 명당에 속한다고 한다. 이 건물은 이언방이라는 마을에 있던 집으로 ‘동대(東臺)’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아, 관청의 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설에는 이 건물이 남원 수령의 별장이었다고도 한다. 건물은 중앙에 안채인 듯한 세 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편에 부속건물을 붙여지었다. 현재는 개인 소유로 되어있는 이 집은, 그 형태가 남다르다. 우선은 집의 전체적인 구성은 일반적인 고택과 그리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중간에 살림집으로 개조를 하면서 약간의 형태가 달라진 듯하다.
전체적인 구성으로 볼 때 현재의 문간채에 붙은 사랑채는 후에 다시 붙어 지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청의 옆에 붙은 날개채 역시 근자에 들어서 사람이 살림을 할 수 있도록 고쳐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행랑채 사이에 높임마루가
윤영채 가옥의 사랑채는 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대문을 마주하고 좌측으로는 방으로 꾸몄다. 그리고 그 끝에는 판자문을 달아낸 툇마루를 두고 있다. 이 사랑채를 나중에 꾸몄다는 것은 집의 구조로 보아 알 수 있다. 낮게 막힌 담이 사랑채에 연결이 되어있는데, 그 안에 중문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이 중문은 안채의 뒷마당으로 출입을 할 수 있는 문으로만 사용이 가능하다.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방이 한 칸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사이를 두고 한 층이 높은 방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다. 이 중문에서 대청까지는 모두 세 단으로 높아진다. 두 개의 방과 안채 건넌방 사이에는 높임마루가 있다. 일반적인 높임마루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뒤로는 벽을 막아 판문을 달고, 마루 밑으로는 아궁이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어느 집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이 집의 특성상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듯하다. 이곳이 명당이기 때문에 지형을 건들이지 않고, 그대로 지형에 맞게 축조를 한 것이란 생각이다.
활주조차 색다른 윤영채 가옥
넓은 대청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관청의 동헌을 보는 듯하다. 뒤로는 세 칸 모두 판문을 시원하게 달아냈으며, 마주보고 우측으로 부엌과 안방, 윗방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이 살림을 하기 위해 꾸민 집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그런 집을 후에 살림을 할 수 있도록 여기저기 개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부엌의 바깥 지붕은 활주를 따로 주추를 놓지 않고, 기둥에 기대어 건물 주추위에 올려놓았다. 윗방의 뒤편에는 벽을 돌출시켜 다락의 용도로 사용했다. 전체적인 집의 모습은 예전과 달라졌다고 하지만, 중문채와 안채의 사이에 특이한 형태의 높임마루와, 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꾸밈새 등이 특이하다. 옛 고택은 아무리 돌아보아도 새로운 것은, 바로 이런 색다른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마당 한 가운데 정원에 굴뚝을 낸 임종호 가옥
경남 거창군 북상면 중산마을에는 지은 지가 150년 정도 되어 보이는 고택 한 채가 있다. 주인인 임종호는 2~3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현재는 구 가옥 곁에 새로 거처를 마련하고 모친이 살고 있다고 한다. 주변 제각 앞에서 만난 마을 어르신은, 그 집에 살고 계신 분이 자신의 질부라고 하시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신다.
이 집은 치목구조나 여러 가지 형태 등으로 보아 조선조 말경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어르신은 120~130년 정도 되었다고 하신다. 솟을대문 안으로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고, 그 뒤편 우측에 광채가 있다. 그리고 사랑채와 나란히 뒤쪽으로 안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돌담으로 집 전체를 둘러놓았다. 집의 형태로 보면 이곳에서 꽤나 잘 살았던 집안이란 생각이다.
다섯 칸으로 지은 사랑채의 풍취
사랑채는 모두 다섯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자연석 주초를 그대로 쓴 집은 기둥을 모두 사각으로 치목을 하였다. 이런 치목의 방법이나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목재들을 보아도, 지방의 목수들이 다듬은 손길이 아니다. 사랑은 바라다보면서 좌측에 아궁이를 두고, 두 칸 마루방을 드렸다. 그리고 안채로 드나들 수 있는 누마루 한 칸과, 온돌방 한 칸을 계속 두고 있다.
우측 온돌방 앞으로는 누마루에 난간을 둘러 정자방으로 꾸며 놓았다. 사랑채 뒤편으로 길게 늘어선 광채는 중문채를 겸하고 있는 듯 보인다. 광채 옆으로는 담을 터 바깥으로 출입을 하게 하였는데, 그 문을 통해 제각으로 드나든 듯하다. 광채는 우측 한 칸은 방을 드리고, 가운데는 광채를 그리고 좌측으로는 뒤주를 삼았다.
광채
안채에도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채와 나란히 뒤편에 조성한 안채 역시 다섯 칸이다. 좌측으로부터 한 칸의 부엌과 안방, 윗방 그리고 대청마루 뒤편에 문을 달아 신주방으로 꾸민 듯하다. 맨 오른쪽의 건넌방은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난간을 두르고 높임마루를 달아냈다. 임종호 가옥의 특징은 대청마루 뒤편에 마련한 신주방이다.
안채
“어르신 저 집의 마당 가운데 굴뚝은 사용하는 것인가요?”
“얼마 전까지도 사용을 했지. 지금은 살림을 하지 않으니 쓰지 않지만”
“그런데 왜 마당 가운데에 굴뚝을 마련했나요?”
“낸들 아나 여기저기 연기가 나면 안 좋으니까 그랬나보지.”“그럼 안채와 사랑채에도 굴뚝이 모두 저 가운데로 빠지나요?”
“처음엔 그렇게 만들었지. 지금은 잘 모르겠구먼.”
안채 안마당에 조성한 굴뚝과 터진 담
‘오수의견’의 주인인 김개인의 생가지를 가다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에는 ‘김개인의 생가지’가 있다. 김개인은 바로 주인을 구한 개인 ‘오수의견’의 주인이기도 하다. 오수의견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시대의 문인인 최자가 1230년에 쓴 『보한집』에 전해지고 있다.
현재 지사면 영천리는 고려시대 거령현에 속해 있었다. 김개인의 집에는 주인을 잘 따르는 충직한 개 한 마리가 있어, 주인은 어딜 가나 그 개를 꼭 데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어느 날 동네잔치를 다녀오던 김개인은 술에 취해, 그만 길가에 있는 풀밭에 쉬고 있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현재의 상리 부근에 있는 풀밭에 누워서 잠이 든 김개인. 그런데 갑자기 들불이 일어나 무서운 기세를 풀밭을 태우고 있었다. 들불이 일어난 것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던 김개인. 들불은 김개인이 잠든 근처까지 번져왔다.
목숨을 버리고 주인을 구한 의견
불이 타고 있는데도 주인이 깨지를 않자. 주인을 따라갔던 개는 근처에 있는 개울로 뛰어들어 몸을 적신 다음, 주인의 곁으로 다가오는 불길을 향해 뛰어들어 뒹굴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를 했는지 모른다. 결국 주인이 불에 타는 것을 막았지만, 개는 온몸이 불에 그슬려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개인의 생가지가 있는 영천마을 석비와 김개인의 생가지에 조성한 안채
김개인의 집을 돌아보다.
지사면 영천리에 있는 김개인 생가지. 현재 그곳에는 생가지에 재현을 한 집 한 채가 있다. 금산, 장수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생가지의 집. 낮은 돌담을 둘러친 곳 옆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돌담 안으로 들어가면 헛간채 한 채와 안채 한 채이 있다. 아마도 옛날 집이야 어떻게 꾸며졌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옛 모습을 그려내느라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허물어진 벽 볼썽사나워
오수에 있는 의견공원은 몇 차례인가 찾아가 보았다. 아마도 처음으로 찾아간 날이 2006년 8월 31일이었나 보다. 임실군 오수 의견공원 안에 있는 의견비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의견공원을 찾아 가다가 보니, 전주에서 남원으로 내려가는 도로가에 김개인과 의견의 동상이 서 있다. 공원 안에는 오수의견비와 그 앞쪽으로 의견상 등이 있다.
전주에서 남원으로 내여가는 길목에 서 있는 김개인과 의견의 동상과 의견공원(아래) 2006년 8월 31일에 답사를 한 자료이다.
속초 ‘방아간댁’은 고풍이 넘치네.
속초시 도문동 1504호 김근수 가옥은,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6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4월 23일 찾아간 김근수 가옥은, 한 마디로 옛 정취가 묻어있는 집이다. 집을 돌아보다가 만난 할머니는 연세가 80이 훨씬 넘어 보이신다. 이 집을 40여 년 전에 매입을 하였다고 하신다.
함경도 형 집으로 지어진 김근수 가옥
김근수 가옥은 함경도 형태로 지어진 집이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졌으며, 사랑채와 안채가 한 몸에 붙어있다. 팔작 기와집으로 지어진 집을 돌아보면서 느낀 점은, 비좁기는 하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는 생각이다. 함경도식 온돌 겹집에 마루를 수용한 이 집은 안담과 바깥담을 두른 형태이다.
허리를 다치셨다고 말씀을 하시는 할머니는, 방문을 일일이 열어 주면서 잘 살펴보라고 하신다. 수많은 집을 돌아보았지만 이렇게 대접을 받기는 또 처음인 듯하다.
담벼락에 낸 굴뚝이 이채로워
김근수 가옥은 일반적인 고택의 형태는 아니다. 집을 바라보면서 몸채의 좌측 편에는 두 칸으로 된 사랑이 있다. 앞으로는 우물마루를 놓았으며, 방은 가운데에 문을 달아 두 개의 작은 방으로 꾸며졌다. 방문을 열어주면서 지금은 공부하는 학생이 묵고 있다는 할머니의 설명이시다.
사랑의 앞으로는 바깥담을 둘러놓았다. 그리고 담벼락에는 강원도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담벼락 굴뚝이 보인다. 마루는 툇마루 형태로 놓았다. 안채는 안방과 뒷방으로 꾸며져 있어 이중 겹집으로 구성이 되었다.
부엌에는 본채의 지붕에서 이어져 내려 온 마구간이 붙어 있으며, 부엌문을 열어야 드나들 수 있는 뒤 사랑이 있다. 뒤 사랑은 정면 두 칸, 측면 한 칸으로 구성이 되었으며, 가묘를 모시는 벽장이 있다고 한다.
뱀의 형국에 해당하는 명당
원래 김근수 가옥은 현재의 몸채 앞에 사랑채와 행랑채가 별도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8,15 광복을 전후해 집이 축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집은 풍수지리상 뱀의 형국에 해당하는 명당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저 윗집과 저 아랫집까지 모두 내 집이야.”
“할머니 부자시네요”
“이 집에서 아들 딸 다 대학을 보냈어.”
“정말로 고생하셨네요.”
“부엌에 붙은 것이 외양간이야. 그런데 지금은 그냥 광으로 써”
귀가 어두우신지 말씀을 드려도 잘 알아듣지를 못하신다.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일일이 방문을 열어 볼 수 있도록 안내를 해 주시는 할머니가 고맙기만 하다. 허리를 다치셨다고 하시는 할머니, 오래도록 건강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옥의 처마를 보면 눈물이 난다
왜일까? 한옥의 추녀마루가 들린 듯한 모습. 그리고 날아갈 듯한 곡선.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괜한 눈물이 흐른다. 아마도 그 아름다움이 마음을 동하게 해서인지도 모른다. 이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웃긴다’라고 표현을 한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로 이해를 할 수 없으니, 웃기는 일은 맞는 듯하다.
한옥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부분은 상당히 복잡하다. 내림마루에서 추녀마루로 흐르는 선은 가히 예술이다. 어찌 그 딱딱한 목재와 기와만을 갖고도 저렇게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인지. 그래서 한옥의 아름다움에 빠져 들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집에서도 볼 수 없는 곡선
한옥의 처마선. 그 아름다움의 끝은 바로 굴곡진 선이다. 그 끝이 하늘을 향해 비상하듯 올려져 있다. 마치 그 끝에 몸을 실으면 하늘 저 끝으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그 선은 세상에 어떤 집에서도 표현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한옥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다.
오늘 비가오는 날,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바라보다가 새삼 그 아름다움에 젖어버렸다. 말도 형용할 수 없는 처마의 아름다운 선. 울컥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오른다. 아마도 저 선에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내일은 또 다시 한옥의 선을 찾아 나서야겠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