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에는 윤씨 일가가 집단으로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살던 마을이다. 이곳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를 비롯하여 윤일선 가옥, 윤승구 가옥, 윤제형 가옥 등이 남아 있다.

 

이중 윤일선, 윤승구, 윤제형 가옥은 하나의 커다란 솟을대문을 통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공동으로 이용하는 솟을대문을 통해, 마을로 출입을 하게 꾸며진 곳은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살아야 집도 살아'

 


이 중에서 공동 솟을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제일 끝에 있는 집이 윤제형 가옥이며, 네 채의 윤씨 고택 중 유일하게 사람이 생활을 하고 있는 집이다. 윤제형 고택은 1900년경 윤제선이 건립한 한옥으로, 현재 충남 민속문화재 제13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집은  ㄱ자 형의안채와 ㄴ자 형의 사랑채가 어우러져, 튼 ㅁ자 형의 평면구조로 중부지방 주택의 특징을잘 보여준다.

 

집을 촬영하고 있는데 마을 분인 듯 어르신 한 분이, 무엇을 그리 열심히 찍느냐고 물어 보신다. 신문에 소개를 하려고 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집은 사람이 살아야 집도 사는 법이여. 이렇게 좋은 집들이 많은데 그 집만 사람이 살아. 여기저기 물건을 늘어놓아도, 사람이 살면 집도 숨을 쉬지. 저렇게 좋은 집들도 비워 놓으면 온기를 잃어서 결국엔 폐허가 되는 법인데..."

 

혀를 차시고 가시는 어르신의 말씀대로 사람이 살고 있는 윤제형 가옥은 온기가 느껴지지만, 굳게 문이 닫힌 딴 가옥들은 무엇인가 찬바람이 이는 듯하다.

 


잡석 기단 위에 올린 사랑채. 사랑채의 창호가 재미있다.

잡석 기단위에 세운 사랑채, 소재도 빈약해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대문을 사이로 문간채와 구분하고 있다. 사랑채는 막돌로 기단을 쌓고, 전면 왼쪽 세 칸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툇마루가 끝나는 담장과 이어지는 곳에는 일각문을 두어 안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에는 또 하나의 안담을 치고 그곳에도 일각문을 두어, 안채의 출입을 제한했다.

 

사랑채는 네모난 기둥을 썼는데, 소재가 모두 가늘고 사이가 넓어, 전체적으로 사랑채의 구성이 빈약해 보인다. 사랑채의 앞으로는 지금도 밭이 있어 전면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구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에서 재미있는 것은 대문과 잇닿은 방서부터 방문을 낸 것이 칸마다 두 배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창호를 하나를 내고, 가운데는 두 개, 그리고 세 칸 째는 네 개의 창호를 사용했다.     

 


사랑채와 대문을 사이에 두고 꾸민 행랑채. 사랑채의 뒷벽이 돌출이 되아 ㄱ 자형으로 구성하였다.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헛간과 광, 그리고 방을 들인 행랑채가 있다. 행랑방은 한 칸으로 되어 있으며 헛간과 광보다 측면이 반 칸이 좁다. 안으로 들어가면 사랑채가 정면 세 칸에 측면이 두 칸이나 되는 ㅁ자로 꾸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랑채와 행랑채를 합해 ㄴ자 형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안채의 끝을 활용한 가옥

 

윤제형가옥의 안채는 ㄱ자 집이다. 사랑채와 튼 ㅁ자로 마주하고 있는 안채는 ㄱ자로 꺾어지는 넓은 툇마루를 두어 방을 연결하고 있다. 안채를 바라보면서 맨 우측 끝에 있는 방을 높임 툇마루를 놓고 그 아래 한데 아궁이를 두었다. 툇마루의 끝에는 난간을 둘렀다. 이 방은 난간을 두른 것으로 보아 별당이나 누정의 용도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안채의 끝에 높임마루를 놓고 , 측면 앞으로는 넓은 툇마루를 놓았다. 높임마루 앞에는 난간을 둘러 누정으로 삼았다.

측면으로 돌아가면 방문 앞에 넓은 툇마루를 놓았는데, 양 벽을 바람벽과 벽장으로 막아 아늑하게 만들었다. 측면 방문의 위에는 '송죽헌(松竹軒)'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안채의 뒤로 돌아가니 재미있는 것이 있다. 안방 뒤편에 있는 굴뚝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고, 그대로 벽을 타고 올라, 기와를 올린 추녀 안으로 솟았다는 점이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도 쉽게 보지 못한 굴뚝의 처리다.

 


안채 끝방의 측먄 방문 위에 걸린 송죽헌이라고 쓴 현판



안채 뒤편의 굴뚝은 지붕 끝 밖으로 나가지 않고 벽을 타고 올라 처마 안으로 솟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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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간채와 별채

 

헛간채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을 지나 서 있다. 나무 판자문을 달은 헛간채는 네 칸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헛간채는 사랑채와 안채와 이루는 ㅁ자형 구획 바깥에 서 있다. 안채와 행랑채의 사이로 보이는 또 하나의 건물은 별채로 보인다. 가운데 두 칸으로 된 방을 드리고,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이 별채는 바깥 담장 모서리에 붙여지었다.

 

사람이 살고 있어 조심스럽게 집안을 다니면서 촬영을 해야만 했던 아산 윤제형 가옥. 마을 어르신의 말씀처럼 사람이 살고 있어야 집이 함께 산다는 이야기가 공감이 간다. 많은 고택을 보고 다니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집들이 난해하기는 해도, 그 안에 따스함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안채와 행랑채 뒤로는 담방 모서리에 붙인 건물이 있다. 별채인 듯 하다.


외곽 담장 모서리에 놓인 집. 윤제형 가옥의 별채인 듯하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청안면사무소 옆에 자리한 충북 유형문화재 제93호 청안동헌. 처음으로 청안동헌이 세워진 것은 조선조 태종 5년인 1405년이라고 한다. 청안현의 관아로 세워진 청안동한은 일반적인 동헌의 형태와는 다르다. 세월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손을 보고 변형이 된 청안동헌은 여러 가지 구조기법으로 등으로 미루어 볼 때, 19세기 후반의 건물로 추측된다.

 

한편에 방을 드린 구조

 


청안동헌은 현재 청안면사무소 곁에 있어 찾기기 쉽다. 높은 네모꼴 주초를 사용하고 그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다. 목재는 소로로 수장한 굴도리를 썼으나, 부연을 달지 않고 보머리에 초가지 장식이 없는 검소한 형태로 꾸며졌다. 이런 모습은 관아건물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지만, 현존하는 유적이 드물어 조선시대 관아건축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앞에서 청안동헌을 바라보면 좌측에 세 칸의 마루를 놓고, 우측에는 두 칸의 방과 반 칸의 다락이 있는 아궁이를 두었다. '안민헌(安民軒)'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청안동헌은  1913년부터 3년간 중수하여 일경(日警)의 청안주재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청안지서장 사택으로 사용하면서, 건물구조가 많이 변형되었던 것을 1981년 복원 수리하였다.

 

현재 청안동헌은 동헌 한 동만 남아있어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원래 관아에는 고을 원이 공무를 보는 동헌, 정당과 익실을 갖춘 객사, 수령이 기거하는 내아와 동헌의 입구인 아문 등이 있어야 하지만, 동헌을 제외한 다른 건물은 모두 남아있지 않다.

 

세칸으로 마루를 깐 대청은 뒤편에는 판자문을 내었다
 

대청의 외벽은 창호로 꾸몄다.

 

방을 네 개로 쪼갠 청안동헌

 

청안동헌의 특징은 우측으로 보이는 방이다. 대청마루에서 방문을 보면 교살불발기 창호로 꾸몄다. 우측의 문을 열면 다시 그 안으로 창호가 있고, 앞으로는 길게 마루를 놓았다. 밖의 창호에서 방을 가로질러 마루를 놓은 것이다. 방문은 밖과 안 모두 세살문으로 꾸몄다. 방은 밖에서 보면 큰 방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방을 네 등분하여 모두 4개의 작은 방이 있다.

 

대청의 뒤편에는 판자문으로 막았고, 측면은 세살문으로 처리해 들어 올릴 수가 있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전혀 꾸밈이 없이 검소하다. 아마 당시 이 건물을 지을 때 민가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측 외벽은 별다른 구조물이 없이 아래 위, 좌우 모두 삼등분을 하여 나무를 가로질렀다.

 

대청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교살불발기 창호로 꾸며 운치가 있다.
 

방앞에는 툇마루를 놓고, 그 앞에 외문 창호를 달았다.
 

큰 방을 네개로 나누어 작은 방을 만들었다. 여러 용도로 사용하면서 나뉜 것으로 보인다.

 

방을 드린 우측 끝으로는 위로는 다락을 낸 반 칸 정도의 아궁이가 있다. 양편으로 아궁이를 내어 놓은 이 방은 네 개의 방을 덥히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마루 밑은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해 놓았으나, 현재는 전체를 돌로 막아놓았다.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

 

일반적으로 어디를 가나 동헌은 그냥 덩그러니 건물만 남아있다. 청안동헌도 예외는 아니다. 토요일에 답사를 간 청안동헌은 청안면의 직원 한분이 여러 가지 설명을 곁들이는 바람에 편하게 답사를 할 수가 있었다. 담을 사이로 있는 청안치안센터 건물 옆에는 커다란 고목이 한 그루 서 있어, 청안동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방 옆에는 반칸 정도의 한데 아궁이를 놓고, 외벽으로 처리를 하였다.

불이 타 위를 잘랐다는 나무. 청안동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고목은 밑동만 남아있고 잘려진 가지에 새 가지가 돋아나 있다. 안내를 하신 분의 이야기로는 이 나무가 불에 타 위를 잘랐다는 것이다. 그 옆에 있는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도 오래 묵은 역사의 나무란다. 주말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청안동헌. 문을 바른 창호지는 찢고간다는 사람들. 도대체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곁에 면사무소인데도 훼손을 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막아내기란 버겁다는 것이다. 언제나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려는지.

사람이 사는 안식처, 바로 집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집은 사실 우리들의 집은 아니다. 이웃과 소통이 막혀버린 꽁꽁 싸맨 그런 집들은 정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찾아 나선 것이 바로 우리 선조 때부터 살아온 ‘고택’이다. 그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200여 채가 넘는 고택을 둘러보았다.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날 문화재를 답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은 카메라에 신경이 자꾸 쓰인다. 연신 뿌리는 빗방울을 닦아내도 금방 뿌옇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볼 것은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문화재 답사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83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23호인 '수원광주이씨월곡댁'으로 향했다.

 

 

몇 년 전에는 이 집은 '파장동 이병원가옥'이었다. 이렇게 명칭이 바뀌면 가끔 애를 먹기도 한다. 옛 이름을 갖고 찾아다니다가 엉뚱한 곳으로 길 안내를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월곡댁은 지어진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데서 더 의미를 두는 집이다. 안채의 대청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조 고종 25년인 1888년(광서(光緖) 14년 견자(犬子) 3월 18일 유시(酉時))에 건축이 되었다.

 

도심 한가운데 남은 초가 한 채

 

이 집은 수원에 있을 때 몇 번인가 들려보았던 집이다. 초가를 올린 집이라 지붕을 보수하고 있을 때도 다녀간 적이 있다. 그런데 주변이 너무 많이 변해있다. 집은 안채를 둘러싼 담 밖으로 ― 자형의 헛간채가 있고,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바깥채가 ㅁ 자 형으로 꾸며져 있다.

 

 

 

파장동 월곡댁에 도착해 보니 도심 어디나 그러하듯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다. 이리저리 몇 바퀴를 돌아다니다가 할 수 없이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선다. 비는 계속 쏟아지는데 손바닥만 한 우산 하나 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이럴 때는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무엇을 망설이야. 사람은 비를 맞아도 카메라만 맞지 않으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비를 맞고 월곡댁으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안채와 바깥마당을 조금 떨어진 헛간채의 사이에도 몇 대의 차가 서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앞에도 차를 대어 놓아 사진을 찍기가 불편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차를 비켜서면서 사진을 찍어댄다.

 

사방이 트여있는 ― 자형의 헛간채

 

안채와 바깥마당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있는 헛간채는, 20세기 중엽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월곡댁은 살림채는 담장으로 막았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트여 있다. 헛간채 남쪽으로 비켜서 마당 안으로 출입하는 입구를 내었다. 헛간채는 넓은 5칸 정도로 꾸며졌다. 그 맨 끝에는 방으로 놓아 안채와 별도로 이곳에서 헛간채를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헛간채 앞에 몇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어,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그래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답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헛간채는 방과 광 등으로 꾸며졌는데, 광문의 크기와 모양이 다 다르다. 아마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그 크기를 달리한 듯하다. 초가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운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담 안에 꾸며진 안채와 바깥채

 

원래 이 월곡댁의 집 뒤로는 낮은 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흘렀다고 한다. 주변에는 오랜 한옥이 많고 감나무가 있어 예스러운 멋을 풍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변에 집들이 답답할 정도로 들어차 있다.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초가 한 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바깥채에 달아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누군가 문을 열고 나온다. 사진을 좀 찍겠다고 이야기를 한 후 안채를 둘러본다. 안채는 평범한 ㄱ 자형으로 부엌과 대청, 안방과 건넌방으로 꾸며져 있다. 이 집의 초가지붕은 두께가 대단히 두껍다. 안채의 구성은 동편의 끝이 부엌이고 이어 안방이 있다.

 

 

 

대청을 두고 있는 건넌방은 문밖으로 툇마루를 둘러놓았다. 집은 그저 평범한 듯하면서도 재미가 있다. 안채의 부엌은 안마당으로 쪽으로 반 칸을 더 내밀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툇마루를 놓아 안방과의 연결을 용이하도록 하였다. 건넌방도 위아래 칸으로 나누어졌으며, 앞쪽이 약간 돌출되어 있다. 아마 이렇게 부엌과 건넌방을 돌출시켜, 서해안에서 안채로 불어오는 바람을 최대한 막아낸 듯하다.

 

사랑채로 사용한 바깥채

 

월곡댁은 지정 당시 명칭이 '파장동이병원가옥'이었던 것이 바뀐 이유는, 소유자 이병원의 모친인 성주 도씨가 과거 안산군 월곡면에서 이곳으로 시집와 지은 가옥으로, '월곡댁'으로 불린 것을 반영하였다고 한다. 2007년 1월 29일자로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으로 지정명칭을 변경하였다.

 

 

안채와 마주하고 있는 바깥채는 사랑채의 용도로 쓰였다. ㄴ 자형의 바깥채는 꺾인 부분에 중문을 두고,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방이 있고, 우측으로는 광과 방이 있다. 이 바깥채는 조금은 옛 모습에서 달라진 듯하다. 사랑채는 위아래 방을 안채와 직각이 되게 배치를 하고, 중문이 부엌을 향하게 하였으며, 마당 앞에는 헛간과 외양간이 있었다고 한다.

 

집을 지은 년대가 남아 있는 수원광주이씨월곡댁.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월곡댁은, 도심 한가운데 자리를 하고 있다. 정작 집안에 사는 사람들이야 불편하겠지만, 이렇게 비가와도 찾아다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고맙기 한이 없는 소중한 집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31호로 지정이 된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29에 소재한 ‘엄찬 고택’은,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의 외손인 엄찬의 고택으로 알려진 집이다. 원래 이 집은 문간채가 있었지만 현재는 문간채는 사라지고, 사랑채와 중문을 들어서면 광채와 ㄷ자형의 안채가 광채와 연결되어 ㅁ자형의 집을 구성하고 있다.

 

 

 

사랑채와 사랑마루

 

넓은 마루가 시원한 사랑채

 

밖에서 본 엄찬 고택은 한 마디로 멋진 집이다. 녹음이 우거진 짙은 나뭇잎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담장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듯하다. 현재 엄찬 고택은 사랑채와 행랑채가 연결된 중문을 사이로 출입이 가능하다. 사랑채는 3칸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두 칸은 넓은 툇마루를 놓아 시원한 느낌이 든다.

 

사랑마루에서 벗들과 앉아 술이라도 한 잔 햇다면, 세상 모든 정취가 시 한수로 대신했을 것만 같다. 이 집을 지었다는 성삼문의 외손 엄찬도, 예전에는 이 사랑마루에서 앞의 경치를 바라보며 글을 읽고는 했을 것이다. 중간에 한 칸은 좁은 툇마루를 놓았는데, 이어진 부분은 안채에서 드나들 수 있는 부엌이다.

 

밖에서 본 행랑채

 

마구간도 있었을 줄행랑

 

중문 밖으로는 한 칸의 행랑방과 광이 마련되어 있다. 이 광은 집의 구조로 보아 마구간으로 사용된 듯하다.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으로는 -자형의 광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광채는 행랑방을 합하여 모두 여덟 칸으로 마련이 되었는데, 그 중 좌측 세 칸은 문을 달아 놓았다.

 

ㄷ 자형의 안채는 겹 마루를 놓아

 

전체적으로 대지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그대로 사용한 엄찬 고택은, 남쪽으로 중문을 두고 동쪽으로 본채를 두었는데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의 우진각으로 꾸몄다. 이 엄찬 고택의 특징은 안채의 대청마루다. 모두 세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대청은 겹 마루를 놓았다. 중간에 기둥을 두고, 그 밖으로 또 마루를 덧낸 형태이다.

 

 

안채의 마루는 기둥밖으로 또 마루를 덧낸 겹마루이다.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드렸는데,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부엌과 다락, 그리고 연이어 방을 세 개를 놓았다. 안방과 윗방으로 구분이 되는 이 방은 그리 크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이 안채에서 특이한 것은 바로 사랑채와 이어지는 부엌이다. 이 부엌은 중문과 연결이 되어 있는데, 아궁이가 이단으로 되어 있다. 즉 경사가 진 대지를 그대로 이용하다가 보니, 아궁이가 깊어서 아래쪽은 가마솥에 불을 때는 아궁이로 하고, 그 위에 방을 데우는 아궁이를 따로 두었다.

 

이중으로 난 아궁이. 비탈이 진 비형을 그대로 이용하기 위해 부엌의 아궁이를 층이지게 조성하였다. 위는 방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다.

 

그림 같은 고택의 아름다움, 보존에 신경 써야

 

성삼문의 외손집이라고 해서 그 집이 잘 보존이 되어야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이 엄찬 고택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이 될 만큼 그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집이다. 엄찬 고택을 찾았을 때 집이 퇴락해지고 있다는 점이 마음이 아프다. 마당에는 잡풀이 그득하고 주변은 어지럽게 널려 있다.

 

마을 밑에서 바라보는 엄찬 고택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두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행랑채 앞에 자리를 하고 있어, 운치가 있어 보인다. 모두 여덟 칸으로 되어있는 광채는 한 눈에 보아도 이 집이 예사롭지 않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안으로 들어가 살펴본 집은 여기저기 손을 보아야 할 곳이 보인다.

 

 

 

1670년대에 지어졌다는 엄찬 고택. 그저 성삼문의 외손이 살고 있던 집이라고 장황하게 안내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소중한 문화재로 지정을 했으면, 잘 보존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사랑채 넓은 마루에 앉아 불볕 햇볕을 피해본다. 예전에는 꽤나 행세를 했을법한 집안인데, 손길 사라진 집에서 느끼는 한기가 불볕더위마저 서늘하게 만든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24호인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109번지에 소재한 정용채 가옥은, 고택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집안의 짜임새가 돋보이는 집이다. 조선조 말기에 지어진 살림집인 정용채 가옥은 뒤편에 나지막한 동산이 자리하고 있어, 마치 삼태기처럼 집을 감싸고 있다.

 

대문채와 행랑채, 사랑채, 안채 등 50여 칸으로 꾸며진 이 집은 대문칸의 상량문을 통해 1887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는데, 안채의 경우에는 그보다 앞 선 19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은 15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오는 동안, 원형에 가깝게 관리를 해온 집으로도 가치가 매우 높은 집이다.

 

 

 

ㅁ자형의 구조, 공간 배치가 뛰어나

 

솟을대문으로 구성된 대문채는 좌측으로는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 있고, 들어서면서 우측으로는 부엌과 방을 드렸다. 좌측으로는 방을 드려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있다. 행랑채는 14칸 정도의 규모로 일자형으로 길게 늘어진 줄행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ㄷ 자형의 안채와 쪽문으로 연결을 하였다. 부농의 집답게 행랑채는 각종 광이며 곳간 등을 두었다.

 

대문채와 떨어져 지은 사랑채는 4칸으로 구성이 되었으며, 바라보면서 우측에 대청을 두었다. 이 사랑채의 특징은 남쪽 두 칸 방 뒤편에 안채 대청과 연결이 되는 복도를 두었다는 점이다. 번잡하게 식솔들의 눈을 피해 사랑에서 바로 안채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외견상으로는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을 명확하게 짓고 있으면서도 생활의 편리함을 생각한 집의 구조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안채의 날개채 부분과 행랑채가 맞닿아 있고, 중문을 달아 구분을 하였다.

 

폐쇄적인 안채의 구성에도 채광을 생각해

 

안채는 ㄷ 자형의 구성으로 되어있다. 양편 날개채는 모두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 중문을 두어 폐쇄적이다. 가운데 세 칸 대청을 마련하고 양편에 방을 두었으며, 날개채는 부엌으로 꾸민 것이 특징이다. 바깥마당으로 나가면 안채에 달린 남향받이의 방이 있다. 이는 폐쇄적인 안채의 공간 구성상 채광에 유리하도록 꾸민 것이다.

 

 

 

바깥마당에는 우물과 장독대 등을 두었는데, 이 집의 특성상 폐쇄적인 안채를 벗어나 모든 실생활의 살림을 바깥마당에서 했음을 알 수 있다. 바깥마당에 접한 방 앞에는 마루를 두어 생활하기에 편리함을 꾀했다는 점도 정용채 가옥의 특징이다. 한 마디로 폐쇄적이면서도 한 편에 여유를 부린 그러한 구성이다.

 

반듯한 가옥, 집안 전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한 마디로 정용채 가옥의 특징은 반듯하다는 점이다.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 듯, 집안의 곳곳은 윤기가 흐른다. 마당은 잘 정리가 되어있고, 집안의 마루 등에도 먼지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뒤편 바깥마당 우물에는 덮개가 덮여 있어, 이 물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 보면 가장 위편에 자리하고 있어 행랑채 담 밖으로 나오면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바로 아래편에는 초가로 지어진 중요민속문화재인 정용래 가옥이 보인다. 폐쇄적이면서도 실생활에 편리하게 구성이 된 정용채 가옥은, 주변의 지형을 고려한 배치수법이 뛰어나다. 구성에 있어서도 각 채별로 뚜렷하게 공간구성을 하고 있으며, 실질적인 쓰임새에 따라 면밀한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마당과 안마당, 바깥마당의 공간이 나름대로 용도에 맞게 구성이 되어있고, 폐쇄성이 짙은 안채에 날개를 달아 채광에 도움을 주고 있는 정용채 가옥. 고택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꾸밈이 잘 되어있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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