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방 고택, 사잇담이라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조선 중종 5년인 1510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올해로 꼭 500년이 되었다. 물론 그동안 집의 형태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집을 지은 후, 여기저기 달라진 점도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행랑채가 없다거나 사랑방을 감싸는 외곽 담이 없는 것을 보면, 처음에 이 고택을 지은 후 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전해지면서,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 정무공 오정방 고택을 돌아보고 있노라면, '참 아름다운 집이다'라는 찬사를 할 수 밖에 없다. 가옥의 구성이 그러하다. 현재는 대문을 걸어 외곽 담장을 두르고 있다. 그 안에 대문채가 자리한다. 대문을 걸어 사랑채 쪽으로 나간 또 한편의 담장은 사랑채와 안채를 구별하는 사잇담이 되었다.
이 고택에서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오정방(1552 ~ 1625), 오상(1512 ~ 1573), 오두인(1624 ~ 1689)과 같은 해주오씨의 명현들이, 바로 이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오정방 고택은 처음에는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252번지에 세웠으나, 조선조 효종 1년인 1650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장대석 기단이 돋보이는 사랑채
오정방 고택의 사랑채는 별채로 구성되지 않고, 안채와 단일채로 구성을 하였다. 전체적으로는 ㄱ 자형의 건물에 - 자형으로 사랑과 대청, 안방을 두고, 꺾어진 부분에 부엌을 둔 형태다. 사랑채는 장대석 기단을 4단으로 높이 쌓고, 그 위에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주추를 놓았다. 두 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는 측면과 앞면에 툇마루를 두었는데, 방이 끝나는 부분부터 측면으로는 난간을 둘러 멋을 냈다.
사랑의 앞의 툇마루는 안채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안채와의 구분을 사잇담으로 나누고, 그 마루에도 문을 달아 구분을 하였다. 사랑채의 뒤로는 조금 비껴서 사당채를 꾸며 놓았다. 사당채는 1칸 규모로 지어졌으며, 별도의 담장을 둘러놓았다.
사랑채의 뒤편에 자리한 사당채. 현재는 독립채로 되어있으나, 처음에는 바깥 담장 안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
오정방 고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사랑채와 안채를 가르는 사잇담이다. 이 사잇담은 대문에서 시작해, 안채로 가로지르며 형성이 되었다. 사잇담이 끝나는 마루에 문을 달아 안채와의 경계로 삼았다. 툇마루는 안채의 대청이 시작되는 부분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사랑채와 사잇담이 만나는 곳에도 문을 달아 구분을 하였고, 툇마루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방과 대청 사이에도 문을 달았다. 사랑채에서 툇마루를 따라 안채로 들어가려면 두 개의 쪽문을 자나야만 한다.
문제는 이 사잇담 안에 있는 방이다. 도대체 이 방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툇마루는 사랑채에서 안채의 대청이 시작되는 부분까지, 같은 높이의 누마루를 깔았다. 대청의 마루는 이 툇마루보다 낮게 구성되었다. 그럼에도 이 한 칸의 방 앞에 또 다시 문을 달아, 안채와 구분을 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또한 이 방의 툇마루에는 난간을 드렸다.
밑으로는 아궁이를 두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한 사랑채와 안채의 사잇방. 이 방을 혹 정자처럼 이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집 안에 딸이 사용을 했거나, 안주인이 아닌 여인네가 사용을 한 것은 아닐까? 상상은, 또 다른 상상을 불러 온다고 했던가? 결국 이 방에 대한 용도는 알지 못한 채, 혼자의 즐거운 상상만으로 시간을 보냈다.
현재의 대문채는 중문채로 보여
전체적인 집의 구조로 보면 현재의 대문채는 중문채였을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는 - 자 형으로 지어졌으며, 대문을 두고 옆으로 두 칸의 광이 마련되었다. 이런 점으로 보면 현재의 대문채는 처음에는 중문채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만한 집에서 일각문으로 대문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랑채와 사당을 두르는 외곽의 담장이 없다는 점, 그리고 행랑채가 없다는 점 등이 이를 말해준다.
격자살 창호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된 창호를 말한다.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내는 이 창호는, 우리 고택에서 흔히 보이는 창호의 형태다. 오정방 고택의 부엌을 보면 이 격자살 창호를 이용해 멋을 내고 있다. 전체적인 집의 규모보다 부엌이 상당히 큰 형태로 꾸며진 오정방 고택이다.
안방에서 달아 낸 부엌은 3칸 정도로 구성이 되었으며, 그 위를 다락으로 꾸며 모두 격자살 창호를 달아냈다. 중앙에 부엌문을 달아내고, 부엌을 바라보면서 우측에는 또 하나의 작은 격자살 창문을 내고, 좌측으로는 까치구멍을 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락 전체를 격자살 창호로 문을 달아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집안 곳곳을 돌다가 보니, 사잇담 아래쪽에 작은 구멍이 하나 보인다. 그저 지나치기가 쉬운 것이, 그 앞에 오정방 고택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서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쳐 버릴 것 같은 이 작은 구멍. 담장 밑에 있는 이 작은 구멍은 물론 배수구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배수구 하나에도 미를 생각했던 우리네의 가옥. 그것이 바로 한국의 미를 창출해낸 마음일 것이다.
보물 제1532호 영릉 재실에서 굴뚝찾기
여주에 있는 사적 제195호 영릉은 조선 제17대 효종대왕(1619 ~ 1659)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다. 효종대왕릉은 1659년 경기도 양주군 건원릉(현 구리시)의 서쪽에 조성하고, 능호를 익릉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능 앞에는 제례를 올리는 준비를 하는 재실을 건립하였다. 이후 현종 14년인 1673년 석물에 틈이 생겨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능호를 영릉으로 고치고 재실도 함께 옮겨왔다.
재실이란 제관의 휴식을 위한 공간과 제수의 장만 및 제기 등을 보관하고,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효종대왕의 재실은 보물 제1532호로 지정이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었는데, 영릉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이 재실은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대표적인 조선시대 재실로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담벼락 속에 들어간 굴뚝, 최고의 걸작품
효종대왕릉의 재실은, 현재 효종대왕릉 정문 바로 안에 자리하고 있다. 능으로 오르는 길 우측에 자리한 재실은 주변을 모두 담장을 둘렀다. 솟을대문의 양 옆으로 자리를 한 대문채는 방과 부엌, 그리고 대청 등으로 꾸며졌다. 들어가면서 좌측의 대문채는 끝에 대청과 방을 드린 날개채를 두고 있고, 그 뒤편에 다시 건물을 덧붙여 방과 헛간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 대문채에는 방은 있는데,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굴뚝은 어디로 간 것일까? 대문채는 바깥 담장을 벽으로 쓰고 있는데, 이 담장에 보면 중간에 네모난 구멍이 있고, 사이를 띄운 기와 몇 장으로 마감을 하였다. 이 구멍은 도대체 왜 만들었을까? 얼핏 보면 바람이 통하게 하는 바람구멍과 같이 생겼다. 그 구멍이 있는 뒤편으로는 모두 방을 드렸다. 이 구멍은 무엇일까?
이 담장 중간에 네모나게 만든 구멍이 바로 굴뚝이다. 부엌에서 불을 떼면 방안에 고래를 돌아 온 연기가, 바로 담장 안에 있는 연도를 통해 이 구멍으로 빠지게 되어있다. 최고의 건물에 가장 아름다운 굴뚝의 미학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우리 선조들의 예술적 감각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담장 안에 숨은 굴뚝. 최고의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아름다움마저 숨기는 이러한 건축이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재실 외벽의 아름다움
현재 보물 제153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효종대왕릉의 재실은 제관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인 재실과 행랑채를 겸한 대문채, 그리고 제기 등을 보관하는 제기고와 능에서 제례를 지낼 때 임금이 내려준 축문과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등이 있다. 재실의 경내에는 우물과 천연기념물 제459호인 수령 300년이 넘은 회양목과 고목 등이 있다.
이 재실에서 제관들이 쉬는 공간은 솟을대문을 들어선 후, 정면의 일각문을 지나 서 있는 재실이다. 그런데 이 재실의 심벽은 처마 있는 곳까지 쌓아올렸다. 이런 형태의 모습은 어느 전각에서도 보기 힘든 형태다. 이 건물의 양편 외벽만을 이렇게 꾸며 놓아, 이곳의 특별함이 눈에 띤다. 효종대왕릉의 재실이 건축학으로 보아도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렇게 하나하나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안양청의 건축미학 돋보여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마름모꼴의 주추를 놓아 올린 안향청. 제사를 지낼 때 임금이 내려준 축문과 향을 보관하던 건물이라고 한다. 이 안양청은 앞에서 바라보면 좌우에 방문과 같은 여닫이 창호가 있고, 중간에는 대청문과 같이 꾸며졌다. 그런데 정작 방은 우측에 문 안쪽이 방이다. 그것도 전체적으로 다 방을 꾸민 것이 아니고, 반을 나누어 앞쪽에는 방이 있고, 뒤편으로는 마루를 깔았다.
그리고 남은 부분은 모두 마루를 깔았다. 결국 중앙에 둔 대청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대칭이 되어 있는 방과 같은 창호는 우측만이 방이 된다. 더욱 이 방의 마루를 향한 창호는 특이한 문양으로 꾸며졌다. 이 창호는 '교실팔각불발기'란 방법으로 중앙을 꾸미고, 나머지는 격자살로 조형미를 돋보이게 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이 효종대왕릉의 재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담장 안에 둔 굴뚝과 위까지 끌어올린 심벽, 그리고 안향청의 독특한 건축방법 등. 이 재실의 아름다움은 그 어느 고택보다도 훌륭하다.
막 쌓은 돌우물이 아름다운, 안성 이해룡고가
전국의 고택답사를 하면서 이 집만큼 아름답고 정리가 반듯한 집은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안성 남사당의 발상지이기도 한 청룡리는, 청룡호수를 끼고 들어간다.
방죽에 난 다리를 건너 고찰 청룡사를 항해 들어가면, '타라'라는 카페를 좌측에 두고 들어간다. 조금 더 가면 '풍물기행'이 보이고, 그 옆에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남서향으로 자리를 잡은 이해룡 고가가 있다.
안채의 상량문을 통해 정조 2년인 1797년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 이해룡 고가는, 지은 지가 220년이 지난 고택이다. 앞으로는 초가로 된 대문채를 - 자로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 사랑채가 있다. 중문을 낀 사랑채를 들어서면, 안채가 ㄱ 자 형으로 사랑채와 연결이 되어 있어 ㄷ 자 형이다. 전체적으로는 한 쪽이 삐쳐 나온, 튼 ㅁ 자 형이다.
안담으로 구분한 대문채와 행랑채
초가로 꾸민 대문채는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 - 자로 구성되었다. 대문채는 한 칸의 방과 부엌 그리고 대문으로 꾸몄는데,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 있다. 행랑채는 최근에 새로 꾸몄다고 하는데, 대문을 들어서면 안담을 경계로 해서, 대문채와 구별이 되었다. 행랑채는 모두 5칸으로 안채의 대청과 마주하고 있다.
행랑채는 네 칸의 방과 한 칸의 부엌으로 구성되었다. 담장을 낀 세 칸의 방 앞에는 좁은 툇마루를 놓았다. 새로 개축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해룡 고가는 대문채부터 남다르다. 처음 이 집을 찾았을 때 생각이 난 것은, 꼭 한 번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다. 그럴 정도로 이해룡 고가는 지금까지 보아오던 고택들과는 차이가 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은, 이해룡 고가는 집 전체를 놓고 볼 때 군더더기가 없이 말끔하다는 것이다.
중문을 붙들고 있는 사랑채
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사랑채. 그저 화려하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았다. 앞쪽의 청룡호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높이 자리 잡은 이해룡 고가의 사랑채는, 호수와 산을 모두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해룡 고가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이 되어 있으면서도, 남녀의 공간을 구분하여 놓았다는 점이다.
이 집은 사랑채에 중문이 달려있다는 점이 남다르다. 안채를 들어가는 중문이 사랑채의 끝에 자리를 한다. 사랑채는 모두 네 칸 반으로 꾸며졌으며, 남쪽으로는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이 있다. 중문 안으로 들어가면, 이 온돌방에 불을 떼는 아궁이가 대문 안에 있다. 툇마루는 사랑채 앞쪽에 전체적으로 넓게 깔았으며, 북쪽의 마루방은 안채의 건넌방과 연결이 되어 있다.
깔끔한 안채의 구성
지은 지가 220년이 지난 이해룡 고가. 물론 그동안 많은 보수를 하였겠지만, 이 집만큼 깔끔하게 느껴진 고가는 처음이다. 안채는 ㄱ 자형으로 꾸며졌다. 사랑채와 연결이 된 건넌방은 앞에 높은 툇마루를 놓고, 그 밑에 아궁이를 두고 있다. 두 칸의 대청은 시원하게 트였는데, 겨울철의 바람은 - 자로 놓여있는 행랑채가 막아줄 것 같다. 조금 높게 자리를 한 안채는 건넌방, 두 칸 대청, 그리고 안방에서 꺾어 두 칸의 부엌으로 꾸며졌다.
부엌은 문 쪽을 판자벽으로 막았으며, 앞뒤로 낸 까치구멍은 창살을 넓게 띠어놓아 시원해 보인다. 안방의 뒤에는 작은 툇마루를 놓았을 뿐, 여느 집에서 보이는 많은 툇마루는 보이지를 않는다. 이렇게 뒤로 복잡하게 낸 툇마루가 보이지를 않아, 집 전체가 말끔하게 보이는가 보다.
안방과 대청, 건넌방의 뒤로는 기와로 꾸민 키 작은 굴뚝이 서 있다. 이렇게 뒤뜰에 나란히 서 있는 굴뚝이, 자연스럽게 이 집을 꾸며내고 있다. 집의 구성이나 배치가 참으로 단아하다. 집은 집 주인의 심성을 닮는다고 했다던가, 주인의 심성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막돌로 쌓아올린 우물과 담, 최고의 멋
안채 부엌의 뒤로 돌아가면 너와로 지붕을 얹은 우물이 있다. 우물에는 아직도 두레박이 달려있는 것이 운치를 더한다. 그런데 이 우물을 쌓은 것이 색다르다. 일반적으로 우물은 돌을 정리를 하고 백회 등으로 바르는데, 이해룡 고가의 우물은 그냥 돌을 막 쌓기를 했다. 우물 안도 역시 마찬가지다. 흡사 멀리서보면 돌무지처럼 보인다.
하나의 우물이 이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집 주위를 두른 담장도 마찬가지다. 마치 축성(築城)을 한 듯, 돌로 담장을 쌓았다. 전체적으로 이해룡 고가는 정형화를 시키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의 석 재료를 이용한 집의 건축방식.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 집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아마 내가 한옥 집을 짓는다고 하면, 이해룡 고가와 같은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다.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안성 청룡리의 이해룡 고가. 언제인가 아주 오래전에 남사당에 대한 책을 안성시(당시는 안성군)에서 의뢰를 받아, 이 곳 청룡리를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 그때 만나 뵌 어르신이 바로 이 집에서 사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남사당패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그러고 보니 이 집과는 꽤 오래 된 인연이 있었던 것만 같다.
사랑방 대청에 앉아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내다본다. 이 집의 사랑채가 왜 이리 앉았는지 알 것만 같다. 청룡호수의 물안개와 진천으로 넘어 가는 산봉우리에 구름이 걸리는 날, 다시 한 번 찾고 싶다.
굴뚝에도 도판장식을 한 사헌부 정6품 집인 감찰댁
'감찰'이란 조선조 사헌부에 속해있던 정6품의 관리를 말한다. 감찰은 관리들의 비위를 규찰하는 일을 담당했으며, 정원은 24명으로 지방관의 비위를 규찰하기 위한 파견도 나갔으며, 각 관서에서 회계감사 등을 위해 사헌부의 검찰을 요청하는 청대에도 파견되었다. 감찰은 원래 고려시대 어사대의 감찰어사직을 계승한 직책이다.
집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그저 평범한 듯 하지만, 어느 한 곳은 딴 집과는 다른 특별함을 발견할 수 있는 집들이 있다. 감찰댁이 바로 그런 집 중 하나이다.
아산시에 있는 외암민속마을에 가면 이러한 '감찰댁'이란 택호가 붙은 집이 있다. 외암민속마을이 동씨족의 마을이기 때문에 택호를 붙일 때 평소의 직책이나, 그 집의 동족 내에서의 위치 등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감찰댁을 찾아갔을 때는 한창 보수공사를 하느라, 한편이 부산하다. 눈이 온 뒤에 질척거리는 땅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 본 감찰댁, 정리를 다 마치고 나면 나름 아름다운 고택일 것이란 생각이다.
일각문과 어우러진 돌담
감찰이란 직책은 비록 높지 않으나 나름대로 보호를 받고 있었다. 관리들의 비위를 규찰하는 직분으로 만일 이들이 비리를 저지른다고 생각을 하면, 얼마든지 많은 재물을 축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감찰을 선정할 때는 명망이 있는 자들로 선정을 했으며,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위를 보장 받기도 했다.
이러한 감찰이 살던 집이었던 감찰댁은 한 마디로 크지는 않으나,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는 문도 솟을대문이 아닌 일각문이다. 일각문 우측에는 연못을 파고, 돌담을 둘렀다. 일각문이 닫혀있어 공사를 하는 곳으로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우측으로는 작은 못이 있고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이 정자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오래된 정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일각문과 어우러진 돌담이 참으로 정겹다고 느껴지는 집이다. 외암민속마을의 대개의 집들이 이렇게 돌담으로 꾸며져서, 돌담길의 운치가 좋은 곳이기도 하다.
한편에 누정을 올린 안채
현재 외암리 민속마을 안에 자리한 감찰댁은 안채와 사당만이 남아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지어진 것인가는 확실치 않으나, 너른 앞의 정원 등으로 보아 행랑채 정도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ㄱ 자 집으로 지어졌으며, 일각문을 들어서면 작은 동산으로 조성한 정원의 뒤편에 자리한다.
안채의 중앙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방을 서쪽으로는 마루방을 들였다. 아래쪽으로는 안방이 있고 이어서 부엌과 작은방을 꾸몄다. 집은 크지 않지만 단아한 품위를 지키고 있어, 이 집 주인의 심성을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굴뚝과 우물의 여유로움
뒤편으로 돌아보니 안방의 뒤편에 우물이 보인다. 막돌로 쌓은 우물은 덮개가 다 부수어졌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정원과 정자 연못 등이 아우러져 있다. 간결하면서도 깨끗한 집이다. 집 주인은 감찰이란 직책에 알맞게 살아온 듯하다. 집은 비록 크지 않지만, 나름대로 주변에 대밭과 정원 등과 어우러지는 외암민속마을 감찰댁. 이런 여유로움에 파묻혀 지내는 시간이 정말 즐겁다.
대권 향해 뛰시는 분들, 이 집 꼭 한번 가보시라
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연병호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으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연병호 선생은, 오직 나라의 앞날만을 생각하다가 일생을 마친 분이다.
제헌과 2대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이런저런 재산을 마련할 때도, 태어난 생가 한 채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도대체 연병호 선생이 태어나고, 만년에 다시 돌아와 살았다는 생가는 어떠한 모습일까?
초라한 집을 만나는 순간 눈물이 흘러
석곡리 마을 길 한편에 자리 잡은 연병호 생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담장을 두르고 계단으로 오르면, 싸리문이 손을 맞이한다. 안에는 모두 네 칸으로 마련된 초가가 한 채 있을 뿐이다. 지금은 마당 앞에 연병호 선생의 생가임을 알리는 석비가 서 있지만, 이렇게 생가지가 정비되기 전에는 정말로 초라한 민초의 집이었을 것이다.
정남향으로 서 있는 초가는 네 칸이다. 좌측 세 칸은 방으로 드리고, 우측의 한 칸은 부엌이다. 정면 네 칸, 측면 한 칸 반으로 꾸며진 집은, 그저 어느 깊은 산골 외딴집을 보는 듯하다. 꾸미지도 않은 초가는 사람이 겨우 살아 갈만하다. 말이 집이라고는 하나, 이 집이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분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어이가 없다. 눈물이 흐른다. 지금의 내 신세를 탓하기 전에, 선생의 그 살아오신 일생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부인과 자녀들이 함께 생활을 했을까? 초라한 집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부인과 자녀들의 마음 씀씀이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본다. 아마 선생의 나라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그 가족들 역시 함께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집에서 한 가족이 함께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평생을 나라 위한 마음으로 산 연병호 선생
연병호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자는 순서이며 호는 원명이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맏형인 병환을 뒤따라 망명길에 올랐다. 1919년 상해임시 정부 수립 후 조국에 돌아 온 후에는, 임시정부의 후원과 국제외교를 위해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였다. 1921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라 북경에서 독립혁명당을 조직했으며, 이듬해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됐다.
1937년에는 일본 관헌에게 체포돼 조선총독부로 인계된 후, 8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과 공주 감옥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국이 광복이 되고 난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1948년 제헌국회의원과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제헌의원 시절에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말년에는 석곡리 집으로 돌아와, 1963년 생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남긴 재산이라고는 현재의 생가 한 채가 전부였다.
이곳을 집으로 삼아 사셨다니...
네 칸 중 세 칸의 방을 드린 초가. 한 칸마다 좁디좁은 문이 앞으로 나 있다. 겨우 어른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문이다. 그 중 부엌과 붙은 우측의 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그것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판자로 꾸며졌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우측의 두 칸은 하나로 만들어진 큰 방이다.
좌측 끝 방과 연결하는 문은 문짝이 없이, 그냥 토굴의 구멍처럼 만들어졌다.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하였다는 생가의 형태는 바라볼수록 마음이 아프다. 큰 방의 천정 아래에는 시렁대가 놓여있다. 집이라고 너무 좁아, 어디 한 군데도 마음 편하게 사용을 할 수가 없다.
방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가니 부엌문도 없다. 벽은 짚을 엮어 바람을 막았다. 부엌 안은 아궁이와 진흙으로 다져놓은 것이 다이다. 뒤편으로 나가도 문이 없다. 뒤편 부엌 반대편에는 벽을 일부 담을 둘러 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세상에 이런 곳에서 살면서도 나라를 위한 생각만을 하셨다니.
대선을 위해 뛰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집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요즈음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과연 선생과 같은 입장에 있다면, 그들도 이런 집에서 살 수가 있었을까? 당연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란 것이 내 대답이다. 혹 모르겠다. 그 시절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선생의 마음은 닮지 못했을 것이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수 없이 많은 집들을 보아왔다. 말대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집을 본 적이 없다. 비록 초라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안에는 선생의 아름다운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 대선을 앞두고 저마다 난리를 치시는 분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집이 바로 이 집이다. 그리고 이렇게 그들에게 묻고 싶다.
“이 집에서 살다 가신 연병호 선생님처럼, 세상 모든 것 다 버리고 오직 나라와 국민들만을 생각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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