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라서 인가 양평으로 올라가는 도로에 차들이 많다. 양평읍 창대리에 있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7호인 <창대리 고가>를 찾아보려고 길을 나섰다. 아무래도 한 번 길을 나서는 것이 쉽지 않다보니, 길을 나서면 몇 군데를 돌아오고는 한다. 그래서 길을 나설 때는 늘 걱정이 앞선다.

 

오늘은 또 어디를 갔다가 허탕을 치고 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다. 고택을 돌아보다가 보면 문이 잠겨 있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향교나 서원 등은 거의가 문을 걸어놓는다. 그래서 답사를 나갈 때마다 마음속으로 기도 아닌 기도를 한다. '오늘은 제발 문이 활짝 열려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창대리 고가 양평읍 창대리에 있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7호인 창대리 고가. 지은 지가 200년이 되었다

 

굳게 닫혀버린 문, 주위만 겉돌아

 

오늘도 역시 그 불안이 적중했다. 여주 대신면을 지나 양평군 개군면을 거쳐 양평읍으로 들어가기 전에 좌측으로 들어가는 창대리. 창대3리에 들어서면 좌측으로 고가가 보인다. 앞에는 철탑에 '정각사'라는 간판이 하나 걸려있다. 창대리 고가는 지은 지가 200년 정도가 된 집이다. 경기도의 전형적인 농촌 중류가옥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고가이다.

 

대문 앞에 도착하니 자물통이 걸려있다.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본다. 들어갈 만한 곳이 없다.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일각대문도 안으로 걸려있다. 밖에서 아무리 소리를 쳐도 인기척이 없다. 대문간 앞에 두 마리의 개가 짖는 소리만 요란한 채.

 

  
▲ 고가 대문 창대리 고가 대문. 자물통이 걸려있다. 대문롸 일각문을 통하지 않으면 안쪽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

 

ㅁ 자형의 전형적인 경기도 중류농촌가옥

 

현재 정각사라는 절로 변한 창대리 고가는 ㅁ 자형으로 된 전형적인 경기도 중류 농촌가옥이다. 대문을 중앙에 두고 좌측으로는 사랑채가 앉아있고, 우측으로는 행랑채와 광채가 ㄱ 자로 꺾여 배열이 되어있다. 안채는 사랑채와 일각문으로 연결이 되었으며 이 또한 ㄱ 자로 배열이 되어있다. 문이 잠겨 있어 안채의 정면을 볼 수 없는 것이 답답하다. 안채와 광채 사이에는 공간이 있어, 뒷마당으로 드나들 수가 있다. 창대리 고가는 최근에 보수를 한 듯 밑 마당 한편에는 낡은 목재가 쌓여있다.

 

단아한 모습으로 앉은 사랑채

 

사랑채는 안채의 남쪽에 밖을 향하고 자리를 잡았다. 앞에는 마루를 깔고 좌측에는 마루방으로 꾸몄다. 우측에는 두 칸의 방이 있으며 대문과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의 보편적인 형태로 지어졌으며, 잘 다듬은 기단 위에 사다리꼴 모양의 주춧돌을 놓았다. 대문에 붙은 행랑채보다 앞으로 돌출이 된 사랑채. 그저 평범한 듯한 이 사랑채는 앞마루에 앉으면 조금 떨어진 우측 능선 위에 있는, 수령 500년이 지난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아마 흐드러지게 은행 알이 달린 그 나무의 가을은 상상만 하여도 장관일 듯 하다.

 

  
▲ 사랑채 앞에는 마루를 깔고 좌측에는 마루방으로 꾸몄다. 우측에는 두 칸의 방이 있으며 대문과 연결이 되어있다. 사다리꼴의 주추를 놓았다

  
▲ 대문과 사랑채 사랑채는 대문보다 앞으로 돌출이 되어있다.

 

고택을 답사하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추위를 막기 위해 문에 쳐놓은 비닐이다. 어디를 가나 겨울만 되면 이런 형태로 겨울을 날 채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고택의 모습을 흉하게 만든다. 하지만 추운 겨울에 바람을 막기 위한 것이니 무엇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일각문 안으로 본 행랑채

 

꽉 막힌 창대리 고가. 나름대로 여기저기 촬영을 한다. 이렇게 잠긴 고택을 답사하면서 생긴 버릇 하나가, 조그마한 틈만 보여도 그 안으로 사진을 찍어대는 버릇이다. 때로는 바닥에 엎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주변 산위로 올라가서 촬영을 하기도 한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내친 걸음이니 어떻게 하랴. 일각문 위로 까치발을 하고 올라서 행랑채를 들여다 볼 수밖에.

 

  
▲ 행랑 일각문 안으로 본 행랑채. 마루방과 방이 있고 이어지는 광채는 부엌과 헛간, 곳간 등이 있다

     

사랑채와 대문으로 이어지는 행랑채는 대문 곁에 마루방을 들였다. 그리고 ㄱ 자로 꺾이는 부분에는 방을 들이고, 부엌과 광, 곳간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대문을 안으로 들여다보니 안을 벽을 막아 바람이 안으로 직접 들어오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 바람벽을 쳤다. 사랑채의 뒤는 그저 평범한 한옥과 같이 처리가 되었다.

 

집 뒤쪽으로 추리를 해보는 안채

 

몇 번이고 집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안채를 볼 수가 없어 답답하다. 절이라고 해서 안을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들뜬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뒤편의 모습으로 안채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가끔은 이런 재미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ㄱ 자형으로 꺾인 안채는 안방이 정남향을 보고 있다. 사랑채와 가지런히 안방과 건넌방, 부엌 2칸이 있다. 안방과 대청마루는 직각으로 꺾여있다. 안방서부터 대청, 건넌방까지는 모두 툇마루로 연결이 되어있다고 하는데 볼 수가 없다. 이런 형태는 딴 가옥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 안채 뒤 방 뒤에는 마루를 놓고 부엌은 두 칸으로 꾸몄다

  
▲ 안마당 담 밖에서 들여다 본 안마당. 좌측이 행랑채와 연결이 된 광채. 우측이 안채다. 안채의 박공부분은 기와로 줄을 넣어 멋을 더하고 있다
 

 

안채가 자리한 뒤로는 뒷마당이 있다. 안채의 방 뒤편에도 마루를 놓아 여유를 부렸다. 뒤로 본 부엌은 한 칸은 부엌으로, 한 칸은 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부엌으로 사용한 한 칸은 밑에 나무로 만든 창살을 붙여 환기가 되는 것을 도왔다. 담을 돌아보니 마당 안이 보인다. 절이기 때문에 마당 한 가운데 탑이 있다. 안채 건넌방의 박공부분은 기와로 줄을 멋을 부렸다. 농촌 중류가옥이긴 해도 나름대로의 멋과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가옥이다.

 

창대리 고가. 결국 안채의 앞모습을 보지 못한 체, 길을 떠나고 말았다. 시간이 허락이 된다면 다시 한 번 찾아가 안채의 모습을 소개하려고 한다. 조금은 아쉬운 발길이지만 다음 답사지가 있으니, 마냥 머무를 수도 없는 일. 돌려지지 않는 발길을 옮긴다.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있는 도화리 고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고가는 조선 말기의 목조 기와집이다. 전체적으로 ㄷ자형의 이 도화리 고가는 청풍면 도화리에 있는 집을 1985년 수몰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도화리 현장에 있을 때에는 부엌 뒤뜰과 건물의 서쪽 부분에 각각 장독대가 있었고, 뒤뜰과 옆 마당에 밭이 있었던 집이었지만, 현재는 집만 옮겨온 상태이다. 이 집은 냇돌로 기단을 쌓은 집으로 왼쪽으로는 방, 부엌, 방이 배치가 되고, 중앙에는 세 칸의 대청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방 두 칸과 부엌이 배치되었다.

 


 

왼쪽의 방은 사랑방으로의 기능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왼쪽으로 보이는 방은 이 집의 사랑방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옥의 사랑채 앞에는 툇마루를 놓기 마련인데, 도화리 고가의 왼편 방은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다. 툇마루는 앞쪽과 집 뒤편까지 이어져 있다.

 

  
▲ 사랑방 툇마루가 달린 이 방은 사랑방으로 싸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 사랑방 툇마루가 놓인 곳에도 문을 내고 앞 뒤에도 각각 문을 내었다. 툇마루는 집 뒤편까지 이어진다.


문 앞 사랑방을 지나면 부엌이 있는 것도 이 방을 사랑방으로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즉 안방과 구별을 두기 위해 중간에 부엌을 두었다는 점이다. 사랑방은 툇마루에 문을 두고, 양편으로도 문을 내었다. 문을 모두 개방하면 삼면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이 되었다. 충실한 사랑방의 기능을 그대로 갖고 있는 셈이다.

 

판자벽으로 된 부엌

 

사랑방과 마주하고 있는 곳에는 대청 건너의 두 칸의 방과 연결된 부엌이 있다. 그런데 이 부엌은 앞뒤 벽을 판자로 막았다. 이 지역에서 보이는 많은 고가 중에서, 이렇게 판자벽을 사용한 집은 오직 도화리 고가뿐이다. 이 부엌은 앞뒤로 나 있는 문을 중심으로 대청 쪽은 일반 담벼락을 사용했지만, 문에서 바깥 부분은 모두 판자벽으로 조성했다.

 

  
▲ 부엌 판자벽으로 꾸민 부엌. 앞 뒤가 다 판자벽이다.

  
▲ 부엌의 뒤편 부엌의 뒤편 판자벽에는 구멍이 나 있다. 까치구멍도 충실히 만들어 놓았다.


앞쪽의 부엌 문 위는 개방을 하였고, 뒤편의 판자벽은 이단으로 나누어 문 위로는 짧은 판자를 사용했고. 그 밑으로는 긴 판자를 사용했다. 이 부엌의 담도 문 쪽의 바람이 마주치는 담에는 심벽(心壁)으로 꾸몄다. 바람이 들어올 정도로 틈새가 벌어진 부엌에 심벽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런 모습이 오히려 이집의 멋으로 보인다. 이 판자벽을 막은 판자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있다.

 

도화리 고가에는 두 곳의 부엌이 있는데, 모두 양편으로 문을 내고 까치구멍도 충실하게 아래편으로 두었다. 사랑방 쪽의 까치구멍은 바깥쪽으로는 이층으로 내어 환기가 빠르게 만들었다. 이 부엌에는 아궁이 반대편에 판자로 만든 마루를 중간에 놓아 그릇 등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 부엌마루 부엌에는 중간에 마루를 놓아 그릇이나 상 등을 올려놓고 아래는 장작을 쌓아둔다.

  
▲ 까치구멍 도화리 고가의 안방에 붙은 부엌에는 이층으로 된 까치구멍이 있다.


대청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선조들

 

고가를 돌다가 보면 대청 위에 두 개의 나무를 가로지른 것을 볼 수 있다. 그 두 개의 가로지른 나무는 때로는 끈으로 묶어 놓은 것도 있고, 아주 고정을 시켜 놓은 것도 있다. 세 칸이나 되는 도화리 고가에도 양편에 이렇게 가로지른 나무가 있다. 그 가로대 위에는 멍석이나 상 등을 올려놓았다. 넓지 않은 집에서 대청의 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이런 지혜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 대청 대청을 적절히 이용한 도화리 고가

  
▲ 대청 가로지른 나무 위에 갖가지 물건을 올려놓았다. 좁은 집을 적절히 사용한 지혜다.


아름다움과 보온, 일석이조인 심벽

 

고가들을 돌면서 보면 아름다운 심벽들이 있다. 이 심벽은 돌과 백회 등을 이용해 조성을 한다. 도화리 고가의 심벽이 남다른 것은 바로 냇돌로 심벽을 쌓았다는 것이다. 일반 돌이 아닌 냇돌로 심벽을 쌓기는 더욱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를 한다. 그만큼 정성을 드린 아름다운 집이라는 이야기다. 이 심벽은 벽의 두께가 두꺼워져 보온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 보온과 아름다운 집을 꾸밀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었다.

 

  
▲ 심벽 도화리 고가의 심벽은 냇돌을 이용해 조성하였다. 그 심벽이 아름답기도 하고, 보온의 효과도 높인다. 또한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는 것을 막기도 했단다


도화리 고가를 돌아보면 평범한 가운데 재미가 있다. 그저 지나치기 쉬운 것 하나에도 선조들의 지혜가 보이기 때문이다. 도화리 고가의 특이함은 바로 냇돌로 기단과 심벽을 치장한 집이라는 점이다. 

바깥 담벼락부터 안 담벼락까지, 담벼락을 꾸민 방법이 다 다르다. 굴뚝도 일반 가정집과는 전혀 다른 벽돌굴뚝을 조성하였다. 중요민속자료 제136호인 충북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의 김기응 가옥. 안채는 19세기 초에, 그리고 나머지는 1900년대를 전후해서 지어졌다는 김기응 가옥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안으로 들어가 보아도, 전통적인 상류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바깥담벼락의 꾸밈이 돋보이는 집

 

김기응 가옥은 외벽부터가 남다르다. 솟을 대문을 가운데 두고 양편으로는 행랑채를 마련했는데, 행랑채는 ㄱ 자 형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문을 들어서면 우측 끝에 한 칸을 달아내어, 전체적으로는 한편이 잘라나간 ㄷ 자 형이다.

 

대문 밖의 외벽은 고택 답사를 하면서 처음 본 꾸밈이다. 돋아 나온 벽은 위로는 붉은 벽돌을 놓고, 그 밑에 수키와를 두 장을 마주 해 원을 만들었다. 그 밑으로는 돌을 쌓아 전체적으로는 3단으로 구분을 하여 문양을 만들었다. 이런 담벼락을 본 적이 없어, 이 집을 지을 때 담장 하나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바깥담벼락 대문 좌우에 마련한 행랑채의 담벼락이 외벽이다. 벽돌과 기와, 돌을 이용해 쌓은 문양이 특이하다.

▲ 행랑채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안마당을 낀 행랑채가 있다. 행랑채의 구성으로 보아 이 집의 살림살이 규모를 알만하다.

 

솟을대문의 우측으로는 쪽문이 나 있다. 충청도 고택의 양반 집을 보면, 대부분이 이렇게 대문이나 중문의 우측으로 쪽문을 내어 출입을 하는데, 당시 양반가의 대문 조성을 할 때 유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안마당이 있다. 행랑채는 대문을 들어서면서 우측부터 한 칸의 돌출된 광이 있고, 꺾어져서 광과 헛간, 방, 부엌이 드리고, 대문을 지나면 방과 헛간이 있다. 그리고 담장으로는 연결이 되었지만, 안으로는 떨어진 꺾어진 부분에 한 칸의 헛간을 두고, 세 칸의 광과 방을 드렸다. 김기응 가옥의 특징은 공간 구성을 적절히 이용하여, 집의 분위기를 아름답게 꾸몄다는 점이다. 

 

안담을 쌓은 안에 자리한 사랑채

 

▲ 사랑채 일각문 사랑채는 안마당을 지나 우측으로 자리했다. 흑담으로 담장을 두르고 일각문을 내었다

▲ 쪽문 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쪽문. 위로는 까치구멍을 내어 마치 행랑채에 붙은 부엌쯤으로 알게 했다.

 

넓은 안마당을 지나면 황토로 쌓은 안담이 있다. 안담은 안채를 들어가는 중문에 붙여 ㄱ 자로 꺾어 일각문을 두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채를 조성하였다. 사랑채는 큰 사랑, 대청, 작은 사랑으로 구성이 되어있지만, 겨울 추위를 막기 위해 앞을 모두 문을 달아냈다. 이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지붕을 달아내 안채로 연결한 통로가 있는 것이 보이는데, 바깥을 담장으로 둘러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사랑채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작은 쪽문이 보인다. 이 쪽문을 통해 안채로 드나들 수가 있다. 이 지역의 고택에서 보이는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을 하는 일반적인 동선이 흐름이다. 그런데 이 쪽문 위로는 까치구멍을 내어, 이것이 문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중문채에 붙은 부엌문으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마 외부인에게 이 문을 알려지는 것을 막자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 굴뚝 사랑채 뒤편의 굴뚝. 검은 벽돌과 붉은 벽돌을 사용해 무게를 내고 있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쪽문의 사이는 담으로 막아 놓았는데, 그 안에 높은 벽돌 굴뚝을 놓았다. 이 벽돌 굴뚝은 검은 벽돌과 붉은 벽돌을 이용해, 흡사 어느 궁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형태로 꾸며놓았다.

 

또 다른 형태의 안채 담벼락

 

안채를 들어가기 위해 중문을 향하는데, 중문 옆으로 쌓은 담벼락이 바깥 담벼락과는 또 다르다. 중문의 담벼락은 돌출을 시켜 위로는 붉은 벽돌을 6줄을 놓고, 그 밑으로는 돌로 쌓았다. 김기응 가옥의 담벼락은 모두 다르게 조성을 해, 용도를 구분한 듯하다. 

 

중문을 들어서면서 우측으로 네 칸의 광이 있다. 그리고 그 끝을 떨어트려 안채가 시작이 된다.이 광의 문을 보면 일반적인 가옥의 광과는 다른 문을 달아냤다. 광의 문 까지도 세세하게 신경을 써서 아름답게 꾸민 흔적이 보인다.

 

▲ 중문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중문의 담벼락은 또 다른 문양을 조성했다. 집안의 곳곳에 다른 담벼락을 꾸민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 중문채 중문에 달린 중문채는 광채로 구성하였다. 광의 문의 꾸밈이 색다르다.

 

안채는 ㄷ 자 형태로 꾸몄는데, 부엌, 안방, 두 칸 대청, 뒷방을 차례로 놓고, 꺾어져서 마루와 건넌방, 부엌을 두었다. 중문을 들어서 안채를 보면 좌측 중문채와 접한 부분에 한 칸의 광을 내었다. 방과 광 사이에는 다락을 위로 두고, 밑으로는 뒤쪽으로 나갈 수 있는 작은 쪽문을 낸 것도 이 안채의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오밀조밀하게 공간 구성을 한 김기응 가옥. 건물마다 특징이 있는 문양을 사용한 담벼락. 그리고 벽돌로 쌓아올려 중후한 감을 주는 굴뚝. 김기응 가옥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 안채 중문을 들어서면 ㄷ 자로 꾸민 안채가 있다.

고택 답사를 하기 위해서 3일에 한번 씩은 답사를 나간다. 예전 같으면 그저 집의 구조를 찍고, 전체적인 정경을 촬영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답사를 하는 방법이 전혀 달라졌다.

 

하나하나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고, 조금만 특이한 것이 있으면 몇 장이고 담아온다. 그것을 정리하면서 나름대로 분석을 하고 글을 쓰기 때문에, 답사의 형태가 달라지고 나름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참 좋은 집이었을 것 같은 고가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중전리. 이 고가를 찾기 위해서 애를 먹었다. 번지가 나오지 않고 중전리라고만 소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큰 길에서 찾아 들어간 중전리.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곳을 찾았다. 마을 분들에게 이곳에 고택이 있느냐고 물어도, 그 누구도 모른다는 한결같은 대답이다.

 

몇 바퀴를 돌아보았지만, 고택 같은 집이 보이지를 않는다. 할 수 없이 돌아 나오다보니 좌측으로 중정리라는 이정표가 또 보인다. 그 길로 따라 들어갔지만, 길은 구불거리고 마을에 집이라고는 몇 채 되지 않는다. 차를 돌리려는데, 저 안쪽 산 밑에 초가가 보인다. 중전리가 지역적으로 넓어, 처음 찾아간 중전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러니 큰 마을에서는 모를 수밖에.

 

 

중전리 고가는 한 마디로 참 좋은 집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마침 어르신 한 분이 마당에서 작업을 하고 계신다. 집을 좀 찍겠다고 부탁을 드리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대문채의 우측을 사랑채로 사용하고, 대문의 좌측은 판자벽으로 막은 두 칸의 외양간과 헛간이다.

 

사랑채는 대문에서 두 칸의 방을 마련하고, 그 끝에 터진 대청을 두었다. 사랑채의 두 칸 방은 앞뒤로 툇마루를 두었다. 주위에 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터진 대청에서 주위의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의 대문채에 지붕은 이어지고 벽이 없이 꺾어진 방들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ㄴ 자형으로 지어진 집이다.

 

 

대문채에 살림방을 둔 중전리 고가

 

중전리 고가의 사랑채가 있는 대문채는 ㄴ 자로 꺾여있다. 그런데 대문 옆에 있는 헛간과 이어지는 부분은 지붕만 있고, 한 칸 정도가 빈 공간이다. 이 공간에는 한데 아궁이가 있으며, 두 칸의 방이 있다. 그리고 까치구멍을 낸 광이 있고, 그 앞에 마루를 놓았다. 이 마루는 안채의 건넌방과 마주하고 있는데, 현재 이 집에 거주하고 계시는 분의 이야기로는 이 사랑채에 연결된 방이 살림방이라는 것이다.

 

집의 구조로 보면 행랑채에 해당하는 형태로 되어있지만, 이 방이 살림방이라는 말에, 안채에서는 살림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안채는 사람이 살았지만, 안주인이 이 사랑채의 꺾인 방에서 살림을 했다는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 안채로 가려면 판자로 막은 바람벽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대문을 열어도 직접적으로 안채를 볼 수는 없다. 안채는 ㄱ 자형으로 되어있어, 중전리 고가의 전체적은 구성은 튼 ㅁ 자형을 하고 있다.

 

 

안채의 건넌방에서 살림방으로 연결이 되다

 

중전리 고가의 집의 구조는 남다르다. 일반적으로 건넌방에는  마당 안쪽으로 방문이 나 있는데 비해, 이 안채의 건넌방은 안마당 쪽으로는 문이 나 있지 않다. 그리고 사랑채의 꺾인 날개채의 끝에 달린 마루와 이어지는 곳에 방문이 나 있다. 즉 안채의 안방에서 대청을 지나, 건넌방에서 이 살림채로 동선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안채는 건넌방과 두 칸의 대청 그리고 꺾이는 부분에 안방과 있고, 다락을 둔 부엌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6칸의 집이지만, 방은 건넌방과 두 칸인 큰 안방으로 구성이 되었다. 대청 끝 안방의 앞부터 부엌의 까치구멍까지 이어서 툇마루를 놓은 것도 특이한 구성 형태다. 부엌에서 뒷문을 통해 안채의 뒤편에 있는 장독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중전리 고가의 색다른 형태이다. 대청의 안방 앞에는 대나무로 시렁을 놓아 병풍을 올려두었다. 우리의 고택 중에는 대나무 시렁을 둔 집이 상당수 있다.

 

 

방앗간이 있는 중전리 고가

 

중전리 고가는 외딴집이다. 금성면 중전리의 큰 마을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그래서인가 이 고가의 안채와 꺾은 날개채의 터진 부문 뒤편으로 들어가면, 그곳에 초가로 지은 방앗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방앗간채는 디딜방아를 놓은 곳과, 곡식을 쌓아두는 세 칸으로 구성이 되었다. 산자락 밑에 자리하고 있는 중전리 고가는 안채의 뒤편에 돌로 축대를 쌓고 있어, 나름 운치가 있다.

 

중전리 고가의 사랑채는 원래 초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기와집으로 꾸며졌다. 또 하나 이 중전리 고가에는 외곽담장을 두르고, 그 안으로 대문을 낸 것도 색다르다. 아마 이 곳에 사랑채를 두었기 때문에, 외곽담장을 둔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의 외곽담장은 안채의 부엌 끝과 맞물려 있어, 사랑채에서는 안채의 뒤편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현재 중전리 고가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집의 구조는 특이하지만, 원형이 바뀐 것이 중요민속자료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행궁은 조선조 정조 때(1794~1796년) 축성되었다. 역대 임금이 화성시 융릉(사도세자 부부무덤)과 건릉(정조 무덤)으로 행차할 때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멸실이 되어버린 이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별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멸실이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봉안각이다.

 


 

화성 행궁을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고 길을 떠난 날. 바람이 불면서 날이 쌀쌀하다. 이런 상태라면 찾아가보아야 사진 한 장도 제대로 찍을 것 같지가 않다. 그래도 이왕 나선 길이니 어찌하랴. 마음 속으로 제발 그곳을 가면 날이 조금이라도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행국 앞에 도착을 하니 어찌 이런 일이. 그렇게 어둡던 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지고 있다. 그저 이런 날씨마저 고마울 뿐이다. 

 

재인(才人)의 기능 전수장소로 변했던 화령전

 

화령전은 화성 행궁이 복원을 하기 전에는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남아있었다.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이 멸실되고 난 뒤 이 화령전에는 재인인 무형문화재 발탈의 기능보유자였던 고 이동안옹과 그의 딸인 정경파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했다. 만일 행궁의 복원이 되지 않았다면, 정조의 어진을 모셨던 화령전은 영원히 재인들의 춤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을 뻔 했다.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이다.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의 앞쪽에는 악공들이 제사를 지낼 때 연주를 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에는 세 곳의 계단이 놓여있다. 이 중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지만, 요즈음은 그저 아무나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운한각에는 정조의 어진을 모샤놓았다. 현재의 어진은 군복인 융복을 입은 초상화로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것이다.


운한각이 화재나 홍수 등으로 인한 피해를 입을 때, 어진을 피난 시키기 위한 이안청. 복도로 운한각과 연결이 되어있다.


격자창을 내고 그 밑에 벽돌을 쌓아올린 담벼락. 돌의 크기가 위로 올라갈 수록 작아져 멋을 더한다.

 운한각을 돌다가 보면 참으로 잘 꾸며진 전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현재 운한각에 모셔진 정조의 어진은, 군복인 융복을 입은 초상화로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것이다. 운한각의 좌측에는 화재나 홍수 등에 대비해 어진을 대치시키는 이안청이, 복도로 연결이 되어있다. 운한각의 창문이나 기둥 등을 보면 당시에 이 전각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격자문이나 띠살문 등으로 꾸민 창호도 아름답지만, 벽돌 등으로 쌓은 담벼락 또한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인다. 이안청으로 가는 곳에는 아궁이를 내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한 것도, 여름철 습기가 차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도 물이 좋은 제정

 

화령전의 운한각을 마주보고 좌측으로 담 너머에 있는 전각이 있다. 작은 일각문으로들어서면 전사청이다. 전사청은 운한각에서 정조를 위한 제향을 준비할 때, 각종 제물을 마련하는 곳이기도 하다. 전사청은 한편 마루가 돌출이 된 형태로 지어졌다. 전사창에서는 운한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을 내었는데, 이곳으로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날랐을 것이다. 

 


화령전의 한편에 서 잇는 전사청은 화령전에서 제향을 할 때 사용하는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전사청 안에는 어정(御井)이라고 하는 제정(祭井)이 있다. 이 제정은 화령정에서 이루어지는 제의식에 사용할 정화수를 뜨는 곳이다. 현재의 제정은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지금도 음용수의 기준인 46개 항목을 모두 통과한다는 어정수, 손바닥으로 물을 한 모금 마셔본다. 추운 날씨였지만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짜릿함이 일품이다.

 


화령전에서 제향을 드릴 때 정화구를 뜨던 우물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재인이 춤과 소리를 하던 풍화당

 

화령전 가운데 풍화당은 재실이다. 화령전에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들이 미리 와서 머무는 건물이다. 풍화당은 화령전 가운데 운한각과 함께 원형이 보존되어 있던 건물로 사료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 풍화당에서 바로 고 이동안과 정경파가 제자들에게 춤과 소리를 가르쳤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정조의 어진을 모시는 화령전의 전각 중 한곳인 풍화당에서,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에 대해 죄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풍화당은 양편으로 툇마루를 높여 그 밑에 아궁이를 두었다. 풍화당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낮은 굴뚝이 있다. 흡사 거북이 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러한 작은 것들이 풍화당이 정감이 들게 한다.

 

 



풍화당의 양편에는 마루를 높이고, 그 밑에는 아궁이를 둔 방이 있다

 살창으로 꾸며진 외삼문의 특별함

 

화령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바로 외삼문이다. 화령전의 운한각 앞으로는 내삼문이 있고, 그 밖으로 양편에 작은 골방을 드린 외삼문이 있다. 양편에 작은 방은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라도 묵었던 곳인가 보다. 그런데 이 외삼문은 어떠한 전각에서도 보기가 힘든 모습으로 꾸며 놓았다.

 

모두 세 칸으로 되어있는 외삼문은 솟을대문이 아니다. 지붕은 모두가 - 자로 평형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문의 밑 부분은 판자문으로 막고, 그 위를 살창으로 꾸민 살문이다. 일반적인 궁이나 별궁의 문들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폐쇄적인 방법을 쓴데 비해, 화령전의 문은 왜 이렇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아마 그 뜻을 모르긴 해도 평소 백성들을 사랑했던 정조대왕이, 운한각에서 지나는 백성들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 외삼문 앞을 지나는 백성들이, 정조대왕의 어진을 알현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행궁의 한편에 지어진 화령전은 그래서 오랜 시간 발길을 붙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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