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고택답사를 하면서 이 집만큼 아름답고 정리가 반듯한 집은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안성 남사당의 발상지이기도 한 청룡리는, 청룡호수를 끼고 들어간다.

 

방죽에 난 다리를 건너 고찰 청룡사를 항해 들어가면, '타라'라는 카페를 좌측에 두고 들어간다. 조금 더 가면 '풍물기행'이 보이고, 그 옆에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남서향으로 자리를 잡은 이해룡 고가가 있다.

 


 

안채의 상량문을 통해 정조 2년인 1797년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 이해룡 고가는, 지은 지가 220년이 지난 고택이다. 앞으로는 초가로 된 대문채를 - 자로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 사랑채가 있다. 중문을 낀 사랑채를 들어서면, 안채가 ㄱ 자 형으로 사랑채와 연결이 되어 있어 ㄷ 자 형이다. 전체적으로는 한 쪽이 삐쳐 나온, 튼 ㅁ 자 형이다.

 

안담으로 구분한 대문채와 행랑채

 


대문과 방, 그리고 부엌으로 꾸며진 대문채. 행랑채와 - 자로 되어 있으며, 안담으로 구분을 한다.


최근에 개축이 된 행랑채. 안채의 대청과 마주하고 있으며, 모두 다섯 칸으로 꾸며졌다.

 

초가로 꾸민 대문채는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 - 자로 구성되었다. 대문채는 한 칸의 방과 부엌 그리고 대문으로 꾸몄는데,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 있다. 행랑채는 최근에 새로 꾸몄다고 하는데, 대문을 들어서면 안담을 경계로 해서, 대문채와 구별이 되었다. 행랑채는 모두 5칸으로 안채의 대청과 마주하고 있다.

 

행랑채는 네 칸의 방과 한 칸의 부엌으로 구성되었다. 담장을 낀 세 칸의 방 앞에는 좁은 툇마루를 놓았다. 새로 개축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해룡 고가는 대문채부터 남다르다. 처음 이 집을 찾았을 때 생각이 난 것은, 꼭 한 번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다. 그럴 정도로 이해룡 고가는 지금까지 보아오던 고택들과는 차이가 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은, 이해룡 고가는 집 전체를 놓고 볼 때 군더더기가 없이 말끔하다는 것이다.  

 

중문을 붙들고 있는 사랑채

 


청룡호수와 충북 진천으로 너어가는 산을 바라보고 있는 행랑채. 중문을 끝에 달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사랑채. 그저 화려하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았다. 앞쪽의 청룡호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높이 자리 잡은 이해룡 고가의 사랑채는, 호수와 산을 모두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해룡 고가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이 되어 있으면서도, 남녀의 공간을 구분하여 놓았다는 점이다.     

 

이 집은 사랑채에 중문이 달려있다는 점이 남다르다. 안채를 들어가는 중문이 사랑채의 끝에 자리를 한다. 사랑채는 모두 네 칸 반으로 꾸며졌으며, 남쪽으로는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이 있다. 중문 안으로 들어가면, 이 온돌방에 불을 떼는 아궁이가 대문 안에 있다. 툇마루는 사랑채 앞쪽에 전체적으로 넓게 깔았으며, 북쪽의 마루방은 안채의 건넌방과 연결이 되어 있다.       

 

깔끔한 안채의 구성

 


안채의 건넌방은 사랑채와 이어져 있다. 툇마루를 높임마루로 하고 그 밑에 아궁이를 두었다.


이해룡 고가의 대청은 꾸밈이 없이 시원하게 두 칸으로 마련하였다.


안방과 부엌. 두 칸으로 낸 부엌은 넓은 까치구멍을 내어 시원하게 보인다.

 

지은 지가 220년이 지난 이해룡 고가. 물론 그동안 많은 보수를 하였겠지만, 이 집만큼 깔끔하게 느껴진 고가는 처음이다. 안채는 ㄱ 자형으로 꾸며졌다. 사랑채와 연결이 된 건넌방은 앞에 높은 툇마루를 놓고, 그 밑에 아궁이를 두고 있다. 두 칸의 대청은 시원하게 트였는데, 겨울철의 바람은 - 자로 놓여있는 행랑채가 막아줄 것 같다. 조금 높게 자리를 한 안채는 건넌방, 두 칸 대청, 그리고 안방에서 꺾어 두 칸의 부엌으로 꾸며졌다. 

 

부엌은 문 쪽을 판자벽으로 막았으며, 앞뒤로 낸 까치구멍은 창살을 넓게 띠어놓아 시원해 보인다. 안방의 뒤에는 작은 툇마루를 놓았을 뿐, 여느 집에서 보이는 많은 툇마루는 보이지를 않는다. 이렇게 뒤로 복잡하게 낸 툇마루가 보이지를 않아, 집 전체가 말끔하게 보이는가 보다.

 

안방과 대청, 건넌방의 뒤로는 기와로 꾸민 키 작은 굴뚝이 서 있다. 이렇게 뒤뜰에 나란히 서 있는 굴뚝이, 자연스럽게 이 집을 꾸며내고 있다. 집의 구성이나 배치가 참으로 단아하다. 집은 집 주인의 심성을 닮는다고 했다던가, 주인의 심성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막돌로 쌓아올린 우물과 담, 최고의 멋

 


안채 부엌 뒤에 자리한 우물. 돌을 막 쌓기를 하였다. 너와 지붕이 인상적이다.


 막 쌓기를 한 우물 안에 두레박이 걸려있다

 

안채 부엌의 뒤로 돌아가면 너와로 지붕을 얹은 우물이 있다. 우물에는 아직도 두레박이 달려있는 것이 운치를 더한다. 그런데 이 우물을 쌓은 것이 색다르다. 일반적으로 우물은 돌을 정리를 하고 백회 등으로 바르는데, 이해룡 고가의 우물은 그냥 돌을 막 쌓기를 했다. 우물 안도 역시 마찬가지다. 흡사 멀리서보면 돌무지처럼 보인다.

 

하나의 우물이 이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집 주위를 두른 담장도 마찬가지다. 마치 축성(築城)을 한 듯, 돌로 담장을 쌓았다. 전체적으로 이해룡 고가는 정형화를 시키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의 석 재료를 이용한 집의 건축방식.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 집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아마 내가 한옥 집을 짓는다고 하면, 이해룡 고가와 같은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다.

 


안채의 뒤편에 나란히 서 있는 키 작은 굴뚝. 굴뚝이 이해룡 고가를 더욱 편안하게 해준다.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안성 청룡리의 이해룡 고가. 언제인가 아주 오래전에 남사당에 대한 책을 안성시(당시는 안성군)에서 의뢰를 받아, 이 곳 청룡리를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 그때 만나 뵌 어르신이 바로 이 집에서 사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남사당패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그러고 보니 이 집과는 꽤 오래 된 인연이 있었던 것만 같다.

 

사랑방 대청에 앉아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내다본다. 이 집의 사랑채가 왜 이리 앉았는지 알 것만 같다. 청룡호수의 물안개와 진천으로 넘어 가는 산봉우리에 구름이 걸리는 날, 다시 한 번 찾고 싶다.

사람이 사는 안식처, 바로 집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집은 사실 우리들의 집은 아니다. 이웃과 소통이 막혀버린 꽁꽁 싸맨 그런 집들은 정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찾아 나선 것이 바로 우리 선조 때부터 살아온 ‘고택’이다. 그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200여 채가 넘는 고택을 둘러보았다.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날 문화재를 답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은 카메라에 신경이 자꾸 쓰인다. 연신 뿌리는 빗방울을 닦아내도 금방 뿌옇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볼 것은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문화재 답사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83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23호인 '수원광주이씨월곡댁'으로 향했다.

 

 

몇 년 전에는 이 집은 '파장동 이병원가옥'이었다. 이렇게 명칭이 바뀌면 가끔 애를 먹기도 한다. 옛 이름을 갖고 찾아다니다가 엉뚱한 곳으로 길 안내를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월곡댁은 지어진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데서 더 의미를 두는 집이다. 안채의 대청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조 고종 25년인 1888년(광서(光緖) 14년 견자(犬子) 3월 18일 유시(酉時))에 건축이 되었다.

 

도심 한가운데 남은 초가 한 채

 

이 집은 수원에 있을 때 몇 번인가 들려보았던 집이다. 초가를 올린 집이라 지붕을 보수하고 있을 때도 다녀간 적이 있다. 그런데 주변이 너무 많이 변해있다. 집은 안채를 둘러싼 담 밖으로 ― 자형의 헛간채가 있고,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바깥채가 ㅁ 자 형으로 꾸며져 있다.

 

 

 

파장동 월곡댁에 도착해 보니 도심 어디나 그러하듯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다. 이리저리 몇 바퀴를 돌아다니다가 할 수 없이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선다. 비는 계속 쏟아지는데 손바닥만 한 우산 하나 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이럴 때는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무엇을 망설이야. 사람은 비를 맞아도 카메라만 맞지 않으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비를 맞고 월곡댁으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안채와 바깥마당을 조금 떨어진 헛간채의 사이에도 몇 대의 차가 서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앞에도 차를 대어 놓아 사진을 찍기가 불편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차를 비켜서면서 사진을 찍어댄다.

 

사방이 트여있는 ― 자형의 헛간채

 

안채와 바깥마당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있는 헛간채는, 20세기 중엽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월곡댁은 살림채는 담장으로 막았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트여 있다. 헛간채 남쪽으로 비켜서 마당 안으로 출입하는 입구를 내었다. 헛간채는 넓은 5칸 정도로 꾸며졌다. 그 맨 끝에는 방으로 놓아 안채와 별도로 이곳에서 헛간채를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헛간채 앞에 몇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어,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그래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답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헛간채는 방과 광 등으로 꾸며졌는데, 광문의 크기와 모양이 다 다르다. 아마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그 크기를 달리한 듯하다. 초가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운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담 안에 꾸며진 안채와 바깥채

 

원래 이 월곡댁의 집 뒤로는 낮은 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흘렀다고 한다. 주변에는 오랜 한옥이 많고 감나무가 있어 예스러운 멋을 풍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변에 집들이 답답할 정도로 들어차 있다.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초가 한 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바깥채에 달아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누군가 문을 열고 나온다. 사진을 좀 찍겠다고 이야기를 한 후 안채를 둘러본다. 안채는 평범한 ㄱ 자형으로 부엌과 대청, 안방과 건넌방으로 꾸며져 있다. 이 집의 초가지붕은 두께가 대단히 두껍다. 안채의 구성은 동편의 끝이 부엌이고 이어 안방이 있다.

 

 

 

대청을 두고 있는 건넌방은 문밖으로 툇마루를 둘러놓았다. 집은 그저 평범한 듯하면서도 재미가 있다. 안채의 부엌은 안마당으로 쪽으로 반 칸을 더 내밀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툇마루를 놓아 안방과의 연결을 용이하도록 하였다. 건넌방도 위아래 칸으로 나누어졌으며, 앞쪽이 약간 돌출되어 있다. 아마 이렇게 부엌과 건넌방을 돌출시켜, 서해안에서 안채로 불어오는 바람을 최대한 막아낸 듯하다.

 

사랑채로 사용한 바깥채

 

월곡댁은 지정 당시 명칭이 '파장동이병원가옥'이었던 것이 바뀐 이유는, 소유자 이병원의 모친인 성주 도씨가 과거 안산군 월곡면에서 이곳으로 시집와 지은 가옥으로, '월곡댁'으로 불린 것을 반영하였다고 한다. 2007년 1월 29일자로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으로 지정명칭을 변경하였다.

 

 

안채와 마주하고 있는 바깥채는 사랑채의 용도로 쓰였다. ㄴ 자형의 바깥채는 꺾인 부분에 중문을 두고,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방이 있고, 우측으로는 광과 방이 있다. 이 바깥채는 조금은 옛 모습에서 달라진 듯하다. 사랑채는 위아래 방을 안채와 직각이 되게 배치를 하고, 중문이 부엌을 향하게 하였으며, 마당 앞에는 헛간과 외양간이 있었다고 한다.

 

집을 지은 년대가 남아 있는 수원광주이씨월곡댁.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월곡댁은, 도심 한가운데 자리를 하고 있다. 정작 집안에 사는 사람들이야 불편하겠지만, 이렇게 비가와도 찾아다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고맙기 한이 없는 소중한 집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24호인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109번지에 소재한 정용채 가옥은, 고택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집안의 짜임새가 돋보이는 집이다. 조선조 말기에 지어진 살림집인 정용채 가옥은 뒤편에 나지막한 동산이 자리하고 있어, 마치 삼태기처럼 집을 감싸고 있다.

 

대문채와 행랑채, 사랑채, 안채 등 50여 칸으로 꾸며진 이 집은 대문칸의 상량문을 통해 1887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는데, 안채의 경우에는 그보다 앞 선 19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은 15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오는 동안, 원형에 가깝게 관리를 해온 집으로도 가치가 매우 높은 집이다.

 

 

 

ㅁ자형의 구조, 공간 배치가 뛰어나

 

솟을대문으로 구성된 대문채는 좌측으로는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 있고, 들어서면서 우측으로는 부엌과 방을 드렸다. 좌측으로는 방을 드려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있다. 행랑채는 14칸 정도의 규모로 일자형으로 길게 늘어진 줄행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ㄷ 자형의 안채와 쪽문으로 연결을 하였다. 부농의 집답게 행랑채는 각종 광이며 곳간 등을 두었다.

 

대문채와 떨어져 지은 사랑채는 4칸으로 구성이 되었으며, 바라보면서 우측에 대청을 두었다. 이 사랑채의 특징은 남쪽 두 칸 방 뒤편에 안채 대청과 연결이 되는 복도를 두었다는 점이다. 번잡하게 식솔들의 눈을 피해 사랑에서 바로 안채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외견상으로는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을 명확하게 짓고 있으면서도 생활의 편리함을 생각한 집의 구조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안채의 날개채 부분과 행랑채가 맞닿아 있고, 중문을 달아 구분을 하였다.

 

폐쇄적인 안채의 구성에도 채광을 생각해

 

안채는 ㄷ 자형의 구성으로 되어있다. 양편 날개채는 모두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 중문을 두어 폐쇄적이다. 가운데 세 칸 대청을 마련하고 양편에 방을 두었으며, 날개채는 부엌으로 꾸민 것이 특징이다. 바깥마당으로 나가면 안채에 달린 남향받이의 방이 있다. 이는 폐쇄적인 안채의 공간 구성상 채광에 유리하도록 꾸민 것이다.

 

 

 

바깥마당에는 우물과 장독대 등을 두었는데, 이 집의 특성상 폐쇄적인 안채를 벗어나 모든 실생활의 살림을 바깥마당에서 했음을 알 수 있다. 바깥마당에 접한 방 앞에는 마루를 두어 생활하기에 편리함을 꾀했다는 점도 정용채 가옥의 특징이다. 한 마디로 폐쇄적이면서도 한 편에 여유를 부린 그러한 구성이다.

 

반듯한 가옥, 집안 전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한 마디로 정용채 가옥의 특징은 반듯하다는 점이다.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 듯, 집안의 곳곳은 윤기가 흐른다. 마당은 잘 정리가 되어있고, 집안의 마루 등에도 먼지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뒤편 바깥마당 우물에는 덮개가 덮여 있어, 이 물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 보면 가장 위편에 자리하고 있어 행랑채 담 밖으로 나오면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바로 아래편에는 초가로 지어진 중요민속문화재인 정용래 가옥이 보인다. 폐쇄적이면서도 실생활에 편리하게 구성이 된 정용채 가옥은, 주변의 지형을 고려한 배치수법이 뛰어나다. 구성에 있어서도 각 채별로 뚜렷하게 공간구성을 하고 있으며, 실질적인 쓰임새에 따라 면밀한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마당과 안마당, 바깥마당의 공간이 나름대로 용도에 맞게 구성이 되어있고, 폐쇄성이 짙은 안채에 날개를 달아 채광에 도움을 주고 있는 정용채 가옥. 고택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꾸밈이 잘 되어있는 집이다.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24-4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5호인 ‘군포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현재 남아있는 가옥의 안채는 조선 정조 7년인 178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사랑채는 그보다 늦은 고종 14년인 1877년에 지은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을 처음으로 지은 시기는 조선조 중기의 문신인 정광보가 마을에 들어온 시기인 1400년대 후반으로 본다.

 

8월 8일 돌아본 동래정씨 종택. 현재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작은 사랑채, 문간채, 행랑채가 남아 있다. 사랑채는 앞면 5칸으로 왼쪽부터 방 1칸과 사랑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행사청 순으로 되어 있어 평면 분할이 독특하다. 사랑채와 작은 협문을 사이에 두고 있는 작은 사랑채는 앞면 3칸으로 공부방으로 사용하였다.

 

 

 

온기가 느껴지는 집

 

고택답사를 하다가 보면 집이 생기가 도는 집들이 있다. 그런 집은 대개 사람이 실고 있는 집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집이 좋아도 무엇인가 부족한 듯하다. 군포 동래정씨 종택은 집안을 여기저기 손을 보았지만 외형적으로는 옛 모습을 그대로 지켜내고 있다.

 

예전에는 사랑마당을 감싸고 있었을 바깥담장은 장 정리가 되어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연못에 연꽃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그 실한 연꽃만 보아도 이 종택은 간수가 잘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대문채였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은 용도를 변경해, 중앙을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사무실로 사용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앞면 3칸으로 대문과 창고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후에 5칸을 더 지어 안채의 폐쇄성을 높여 주었다고 한다. 현재는 대문은 보아지 않고 바로 사랑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과 작은사랑을 둔 종택

 

안채 앞으로 지은 사랑은 큰사랑과 작은 사랑으로 구분을 하였다. 팔작지붕 5칸으로 지어진 큰 사랑은 왼쪽부터 방 1칸과 사랑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행사청의 순으로 집을 구성했다. 서쪽 맨 끝에는 방의 벽면을 막고 그 앞으로 누정을 한 칸 앞으로 돌출시켜 올렸다. 누정은 삼면이 터지게 누마루를 깔았으며, 장초석 위에 네모난 기둥을 올리고 난간을 둘렀다.

 

 

 

큰 사랑채의 기단을 장대석으로 마감을 한 것에 비해, 작은 사랑은 잘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 2층으로 기단을 쌓았다. 작은 사랑은 모두 세 칸으로 지어졌으며, 공부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큰 사랑과 작은 사랑 사이에는 협문을 내어, 안채에서 바로 사랑으로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를 찍고 열려있는 문으로 안채를 찍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안을 들여다보니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새끼를 데리고 있다. 아마도 낯선 사람이 새끼라도 해할까봐 걱정스러웠나 보다. 집을 돌아 중문으로 돌아가니 문이 닫혀있다. 귀농본부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한잔 찍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ㄱ 자형의 안채에서 느끼는 종택의 위엄

 

안채는 ㄴ 자 형의 중문을 마주하고 ㄱ자로 꺾어지은 팔작지붕이다. 안채를 바라다보면서 좌측으로는 두 칸의 부엌을 조성한 듯한데, 현재는 그곳을 방으로 꾸민 듯하다. 댓돌 앞에 신이 놓여있다. 꺾인 부분에 대청을 놓고 이어 안방을 드렸다. 안방의 끝에는 작은 툇마루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곳도 유리벽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인이 없이 커다란 개가 지키고 있어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볼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안채를 보면서 종택의 위엄이 서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집을 지은 정광보는 파시조인 동래부원군 정난종의 큰아들로, 맞은편 산 중턱에 조성된 정난종의 묘를 조성하고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은 독특한 사랑채의 구성과 작은사랑채의 위치 설정 등이 독자적인 집으로, 조선조 후기 사대부가의 살림집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집이다. 고택을 돌아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렇게 모든 고택에 사람들이 온기를 전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래등 같은 집에 온기가 없이 여기저기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때마다, 같이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99칸의 대갓집. 그러나 후손들이 관리를 하기가 어렵다고 신흥재벌에게 사랑채와 행랑채를 팔았다고 한다. 원래는 99칸의 커다란 대갓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남은 집으로만 보아도 그 규모를 어림잡아 짐작할 수가 있다. 도대체 이 집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 222-14에 소재한 경기도 기념물 제12호 '김좌근 고택'을 찾아갔다.


이 김좌근 고택은 벌써 올들어 두번이나 찾아가보았다. 갈 때마다 복원 공사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7월 23일 그 무더운 더위를 피해 찾아간 백사면 내촌리. 아직 주변은 정리가 끝나지 않았지만, 반듯하게 복원이 끝나가는 집은 그 규모가 엄청났음을 알 수가 있다.

 



김병기가 부친의 묘지관리를 위해 지은집


김좌근 고택은 이천 백사면 내촌리 소일마을 상단인 마을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얕은 산자락을 배산으로 남향으로 지어진 이 집은, 전통 한옥으로 지은 99칸의 집이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집의 치목이나 석재를 사용한 것을 보아도, 이 집의 과거 위세를 알 수가 있을 정도이다. 지금은 담장과 행랑채는 사라지고 안채와 별채인 사랑채만 남아있다.


이 집은 영의정 김좌근의 아들이며 고종 때 어영대장과 이조판서를 지낸 김병기가  부친의 묘지관리를 위한 별장으로 지었다고 한다. 십 수년 전까지만 해도 솟을대문과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남아있었다는 김좌근 고택은 사랑채와 행랑채가 두 겹으로 안채를 싸안고 있는 규모있는 대갓집의 모습을 지켜왔다고 한다. 그런 집이 지금은 사랑채와 안채만이 남아있다.

 






관리가 힘들어 팔아버린 집


집이 워낙  크고 관리가 힘들어지자, 후손들이 신흥재벌하게 이 집을 팔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랑채 등을 옮겨가는 도중에 그 회사가 부도가 나서, 그나마 이건을 중단하는 바람에 지금의 모습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전한다. 우리의 많은 고택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원래 김좌근 고택은 대문과 중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구조가 되었다. 안채는 ㄷ자 형으로 중문과 연결된 사랑채가 있었으며, 바깥문은 대문과 연결된 행랑채가 ㄱ 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안채와 별채인 사랑채가 안채로 통하는 중문과 안채의 담으로 가로막혀 두 동의 건물이 서로 독립된 형태로 서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두 개의 건물 사이에도 가로막힌 건물이 있었으며, 뒤편으로는 널마루로 짠 회랑을 달아내어 서로 왕래를 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은 회라잉 없어졌으나, 과거에는 이 회랑을 이용해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도 이동을 할 수 있는 동선이 있었다는 것이다.


'닥터 진'의 김병기가 지은 집, 옛 풍취는 그대로 남아


복원 공사를 마친 집을 돌아본다. 사랑채의 한편을 잘 다듬은 장초석으로 주초를 삼고, 그 위에 누마루를 올려 누정을 삼았다. 집은 날아갈 듯한 팔작지붕으로 마련하고, 치목과 치석이 모두 제대로 된 장인의 솜씨를 마련한 듯하다.

 





꽃담을 아름답게 조성한 안채는 지금 난 중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가 있다. 아직은 주변 정리가 끝나지 않아 잡초가 수북히 쌓여있기는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중문에 붙여 방을 드렸다. T 자 형으로 조성한 안채는 툇마루를 길게 놓았다. 이 안채가 특이한 것은 중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곳이 앞쪽이지만, 그 뒤편의 형태도 똑 같이 조성을 했다는 것이다.


안채는 서쪽으로 부터 다락과 3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팔작지붕이다. 부엌은 세칸 규모로 문을 들어서면 토를 달아 내었다. 그 오른쪽에도 다락을 드렸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만 보아도 당시 이 집의 위세를 알만하다. 일부가 사라져버려 제대로 가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제대로 모습을 갖추었다면 그 어느 집보다 뒤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좌근 고택을 돌아보면서 새삼스럽게 세상을 배운다. 요즈음 드라마 '닥터 진'에서 보이는 김씨들의 세도가 세월이 지나면서 달라졌음을. 하기에 영원한 세도는 없는 것인가 보다. 하긴 닥터진에서 대원군과 권력다툼을 하는 좌의정 김병기의 구성은 역사와는 많이 다르게 표현이 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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