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 밖에 아궁이를 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집을 짓다가 보니 대문 밖에 아궁이를 두게 되었겠지만, 우리들의 집을 짓는 방법으로 따지면 조금은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그러한 것 하나가 오히려 이 집을 더욱 기억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아마 전체적인 분위기가 남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반 고택과는 무엇인가가 다른 면이 있다. 양평군 용문면 오촌리 18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5호인 김병호 고가. 용문면소재지에서 용문사가 있는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오천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리를 건너 좌측 샛말로 들어가면, 마을의 중앙 언덕 위에 자리한 김병호 고가가 있다. 조선조 말기인 고종 30년인 1893년에 지어진 집으로, 전체적인 집의 형태는 튼 ㅁ 자 형으로 구성이 되었다.

 

건넌방을 경계로 삼은 안채

 

이 집은 조선조 말 내시가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연못을 3년간이나 터를 닦아 지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99칸의 큰 집이었으나 모두 타 버리고, 현재는 안채만 원래의 집이라고 한다. 김병호 고가를 돌아보면 그 말에 수긍이 간다. 그만큼 집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김병호 고가의 안채는 남서향을 하고 있다. 마루문을 달아낸 두 칸의 대청이 있고, 바라보면서 우측으로는 안방과 날개로 꺾어 달아낸 두 칸의 부엌이 있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건넌방이 있는데, 이 고가의 특징은 바로 건넌방이다. 건넌방이 앞으로 돌출이 되어, 그 다음에 달아낸 두 칸의 방과 안방의 경계로 삼고 있다.

 

덧달아 낸 두 칸의 방은 한 칸은 마루방으로 문을 달아내고, 그 다음은 온돌방을 놓아 그 북측에 감실을 만들어 조상의 위폐를 모셔놓았다. 앞으로는 반 칸의 툇마루를 놓아 사랑방의 구성을 한 것이다.

 

결국 이 건넌방을 앞으로 돌출을 시킨 것은, 안방과 사랑방의 경계를 건넌방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일반 고가에서는 보기가 힘든 구성인데, 조선조 말에 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중인계급이 신분상승을 하면서, 나름 안채와 사랑채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택한 가옥의 구조이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건넌방이 돌출이 되어 안방과 사랑방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넌방을 지나 두 칸으로 꾸며진 사랑은 한 칸은 마루방으로 하고, 끝의 방은 북쪽에 감실을 낸 사당으로 사용한다.

부엌에 벽에 낸 쪽문은 냉수문

 

김병호 고가를 주의 깊게 보면 두 칸 부엌의 위로는, 두 칸의 다락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엌은 전면은 판자벽으로 했으나 옆으로 돌아가면 심벽으로 구성하였다. 나름대로 전체적인 집의 구성을 사대부가의 집에 걸맞게 꾸몄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엌의 까치구멍 위에 판자로 문양을 내고 쪽문을 하나 내었다. 이 집을 소개하신 어르신의 말은, 이 쪽문이 '냉수문'이라는 것이다. 즉 안방에서 부엌을 드나들 때, 번거로움을 피해 이 구멍을 통해 냉수그릇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 용도로만 꼭 사용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나름대로 멋을 더하고 생활의 편리를 생각한 쪽문이다.

 

안방에서 날개채로 달아 낸 두 칸의 부엌은 위에 다락을 두었다. 앞은 판바벽으로 막고 옆과 뒤는 심벽으로 꾸몄다.

부엌의 까치구멍 위에 낸 쪽문. 이런 것 하나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대문 밖 아궁이를 둔 대문채

 

김병호 고가의 특징은 대문채의 대문 밖에 아궁이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6·25 동란으로 불이 타버린 대문채는 다시 복원을 하였다고 하는데, 대문채와 행랑채가 붙은 ㄱ 자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은 행랑채로 구성해, 길가로 툇마루를 냈으며, 우측으로는 대문채를 두었다. 대문채는 두 칸의 방과 두 칸의 광, 그리고 한 칸의 헛간으로 구성이 되었다.

 

대문채의 밖으로 한데아궁이를 내고, 그 위로 다락을 둔 점도 특이하다. 원래 이렇게 밖으로 아궁이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이 지역의 부농으로 자리를 잡은 김병호 고가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도 이곳에서 음식을 하고 행랑채의 툇마루를 이용하여 급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문채를 사랑채라고 하기도 하지만, 아마 후에 이곳을 사랑으로 사용했기 때문인가 보다.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면 사랑채가 별도로 있었을 텐데, 안채에 건넌방을 막아 사랑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이 구조는 대문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문의 우측에는 한데 부엌을 내고 그 위에 다락을 꾸몄다. 그리고 좌측의 행랑채는 밖으로 툇마루를 내었다.

뒤태가 아름다운 김병호 고가

 

김병호 고가를 둘러보다가 보면, 이 고가의 뒤태가 참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 대문채의 밖을 판자벽으로 둘렀는데, 기단의 돌이 일반적인 화강암이 아니다. 장대석으로 놓은 기단이 무늬가 있는 돌로 사용을 했으며, 주추는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집을 소개하신 분께 이 돌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잘 모르시겠단다. 

 

기단을 모두 이렇게 무늬가 있는 돌로 꾸민 것으로 보면, 김병호 고가의 처음 모습은 범상치가 않았을 것 같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이 용문사를 지은 대목이라고 하는 것으로만 보아도 그렇다. 우물마루를 깐 대청이나 툇마루 등에 목재를 사용한 치목도 뛰어나 보인다.

 

김병호 고가 안채의 뒤로 돌아가니 기와를 교체하면서 내린 흙 기와를 담장에 붙여 쌓아 놓았다. 기와의 형태로 보아 가마에서 구운 기와다. 이러한 기와는 적어도 100년 이상 된 것들이다. 이 뒤뜰이 이 가옥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기도 하다. 바로 뒷벽과 굴뚝의 조화다. 굴뚝을 강돌로 쌓아 담벼락과 쌍으로 조화를 이루게 만들었다.

 

벽과 강돌로 조형한 굴뚝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담장에는 오래된 기와가 가득 쌓여있다.

대문채에 붙은 광과 헛간의 뒤는 모두 판자벽으로 처리해 멋을 더했다. 그리고 기단은 무늬가 있는 장대석을 사용했다.

고가를 돌면서 재미있는 부분들을 만난다. 후일 이 특별한 부분만 따로 모아 책으로 쓴다고 해도 재미있을 것이다. 우리 고택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후라서 인가 양평으로 올라가는 도로에 차들이 많다. 양평읍 창대리에 있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7호인 <창대리 고가>를 찾아보려고 길을 나섰다. 아무래도 한 번 길을 나서는 것이 쉽지 않다보니, 길을 나서면 몇 군데를 돌아오고는 한다. 그래서 길을 나설 때는 늘 걱정이 앞선다.

 

오늘은 또 어디를 갔다가 허탕을 치고 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다. 고택을 돌아보다가 보면 문이 잠겨 있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향교나 서원 등은 거의가 문을 걸어놓는다. 그래서 답사를 나갈 때마다 마음속으로 기도 아닌 기도를 한다. '오늘은 제발 문이 활짝 열려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창대리 고가 양평읍 창대리에 있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7호인 창대리 고가. 지은 지가 200년이 되었다

 

굳게 닫혀버린 문, 주위만 겉돌아

 

오늘도 역시 그 불안이 적중했다. 여주 대신면을 지나 양평군 개군면을 거쳐 양평읍으로 들어가기 전에 좌측으로 들어가는 창대리. 창대3리에 들어서면 좌측으로 고가가 보인다. 앞에는 철탑에 '정각사'라는 간판이 하나 걸려있다. 창대리 고가는 지은 지가 200년 정도가 된 집이다. 경기도의 전형적인 농촌 중류가옥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고가이다.

 

대문 앞에 도착하니 자물통이 걸려있다.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본다. 들어갈 만한 곳이 없다.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일각대문도 안으로 걸려있다. 밖에서 아무리 소리를 쳐도 인기척이 없다. 대문간 앞에 두 마리의 개가 짖는 소리만 요란한 채.

 

  
▲ 고가 대문 창대리 고가 대문. 자물통이 걸려있다. 대문롸 일각문을 통하지 않으면 안쪽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

 

ㅁ 자형의 전형적인 경기도 중류농촌가옥

 

현재 정각사라는 절로 변한 창대리 고가는 ㅁ 자형으로 된 전형적인 경기도 중류 농촌가옥이다. 대문을 중앙에 두고 좌측으로는 사랑채가 앉아있고, 우측으로는 행랑채와 광채가 ㄱ 자로 꺾여 배열이 되어있다. 안채는 사랑채와 일각문으로 연결이 되었으며 이 또한 ㄱ 자로 배열이 되어있다. 문이 잠겨 있어 안채의 정면을 볼 수 없는 것이 답답하다. 안채와 광채 사이에는 공간이 있어, 뒷마당으로 드나들 수가 있다. 창대리 고가는 최근에 보수를 한 듯 밑 마당 한편에는 낡은 목재가 쌓여있다.

 

단아한 모습으로 앉은 사랑채

 

사랑채는 안채의 남쪽에 밖을 향하고 자리를 잡았다. 앞에는 마루를 깔고 좌측에는 마루방으로 꾸몄다. 우측에는 두 칸의 방이 있으며 대문과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의 보편적인 형태로 지어졌으며, 잘 다듬은 기단 위에 사다리꼴 모양의 주춧돌을 놓았다. 대문에 붙은 행랑채보다 앞으로 돌출이 된 사랑채. 그저 평범한 듯한 이 사랑채는 앞마루에 앉으면 조금 떨어진 우측 능선 위에 있는, 수령 500년이 지난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아마 흐드러지게 은행 알이 달린 그 나무의 가을은 상상만 하여도 장관일 듯 하다.

 

  
▲ 사랑채 앞에는 마루를 깔고 좌측에는 마루방으로 꾸몄다. 우측에는 두 칸의 방이 있으며 대문과 연결이 되어있다. 사다리꼴의 주추를 놓았다

  
▲ 대문과 사랑채 사랑채는 대문보다 앞으로 돌출이 되어있다.

 

고택을 답사하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추위를 막기 위해 문에 쳐놓은 비닐이다. 어디를 가나 겨울만 되면 이런 형태로 겨울을 날 채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고택의 모습을 흉하게 만든다. 하지만 추운 겨울에 바람을 막기 위한 것이니 무엇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일각문 안으로 본 행랑채

 

꽉 막힌 창대리 고가. 나름대로 여기저기 촬영을 한다. 이렇게 잠긴 고택을 답사하면서 생긴 버릇 하나가, 조그마한 틈만 보여도 그 안으로 사진을 찍어대는 버릇이다. 때로는 바닥에 엎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주변 산위로 올라가서 촬영을 하기도 한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내친 걸음이니 어떻게 하랴. 일각문 위로 까치발을 하고 올라서 행랑채를 들여다 볼 수밖에.

 

  
▲ 행랑 일각문 안으로 본 행랑채. 마루방과 방이 있고 이어지는 광채는 부엌과 헛간, 곳간 등이 있다

     

사랑채와 대문으로 이어지는 행랑채는 대문 곁에 마루방을 들였다. 그리고 ㄱ 자로 꺾이는 부분에는 방을 들이고, 부엌과 광, 곳간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대문을 안으로 들여다보니 안을 벽을 막아 바람이 안으로 직접 들어오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 바람벽을 쳤다. 사랑채의 뒤는 그저 평범한 한옥과 같이 처리가 되었다.

 

집 뒤쪽으로 추리를 해보는 안채

 

몇 번이고 집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안채를 볼 수가 없어 답답하다. 절이라고 해서 안을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들뜬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뒤편의 모습으로 안채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가끔은 이런 재미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ㄱ 자형으로 꺾인 안채는 안방이 정남향을 보고 있다. 사랑채와 가지런히 안방과 건넌방, 부엌 2칸이 있다. 안방과 대청마루는 직각으로 꺾여있다. 안방서부터 대청, 건넌방까지는 모두 툇마루로 연결이 되어있다고 하는데 볼 수가 없다. 이런 형태는 딴 가옥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 안채 뒤 방 뒤에는 마루를 놓고 부엌은 두 칸으로 꾸몄다

  
▲ 안마당 담 밖에서 들여다 본 안마당. 좌측이 행랑채와 연결이 된 광채. 우측이 안채다. 안채의 박공부분은 기와로 줄을 넣어 멋을 더하고 있다
 

 

안채가 자리한 뒤로는 뒷마당이 있다. 안채의 방 뒤편에도 마루를 놓아 여유를 부렸다. 뒤로 본 부엌은 한 칸은 부엌으로, 한 칸은 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부엌으로 사용한 한 칸은 밑에 나무로 만든 창살을 붙여 환기가 되는 것을 도왔다. 담을 돌아보니 마당 안이 보인다. 절이기 때문에 마당 한 가운데 탑이 있다. 안채 건넌방의 박공부분은 기와로 줄을 멋을 부렸다. 농촌 중류가옥이긴 해도 나름대로의 멋과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가옥이다.

 

창대리 고가. 결국 안채의 앞모습을 보지 못한 체, 길을 떠나고 말았다. 시간이 허락이 된다면 다시 한 번 찾아가 안채의 모습을 소개하려고 한다. 조금은 아쉬운 발길이지만 다음 답사지가 있으니, 마냥 머무를 수도 없는 일. 돌려지지 않는 발길을 옮긴다.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행궁은 조선조 정조 때(1794~1796년) 축성되었다. 역대 임금이 화성시 융릉(사도세자 부부무덤)과 건릉(정조 무덤)으로 행차할 때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멸실이 되어버린 이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별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멸실이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봉안각이다.

 


 

화성 행궁을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고 길을 떠난 날. 바람이 불면서 날이 쌀쌀하다. 이런 상태라면 찾아가보아야 사진 한 장도 제대로 찍을 것 같지가 않다. 그래도 이왕 나선 길이니 어찌하랴. 마음 속으로 제발 그곳을 가면 날이 조금이라도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행국 앞에 도착을 하니 어찌 이런 일이. 그렇게 어둡던 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지고 있다. 그저 이런 날씨마저 고마울 뿐이다. 

 

재인(才人)의 기능 전수장소로 변했던 화령전

 

화령전은 화성 행궁이 복원을 하기 전에는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남아있었다.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이 멸실되고 난 뒤 이 화령전에는 재인인 무형문화재 발탈의 기능보유자였던 고 이동안옹과 그의 딸인 정경파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했다. 만일 행궁의 복원이 되지 않았다면, 정조의 어진을 모셨던 화령전은 영원히 재인들의 춤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을 뻔 했다.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이다.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의 앞쪽에는 악공들이 제사를 지낼 때 연주를 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에는 세 곳의 계단이 놓여있다. 이 중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지만, 요즈음은 그저 아무나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운한각에는 정조의 어진을 모샤놓았다. 현재의 어진은 군복인 융복을 입은 초상화로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것이다.


운한각이 화재나 홍수 등으로 인한 피해를 입을 때, 어진을 피난 시키기 위한 이안청. 복도로 운한각과 연결이 되어있다.


격자창을 내고 그 밑에 벽돌을 쌓아올린 담벼락. 돌의 크기가 위로 올라갈 수록 작아져 멋을 더한다.

 운한각을 돌다가 보면 참으로 잘 꾸며진 전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현재 운한각에 모셔진 정조의 어진은, 군복인 융복을 입은 초상화로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것이다. 운한각의 좌측에는 화재나 홍수 등에 대비해 어진을 대치시키는 이안청이, 복도로 연결이 되어있다. 운한각의 창문이나 기둥 등을 보면 당시에 이 전각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격자문이나 띠살문 등으로 꾸민 창호도 아름답지만, 벽돌 등으로 쌓은 담벼락 또한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인다. 이안청으로 가는 곳에는 아궁이를 내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한 것도, 여름철 습기가 차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도 물이 좋은 제정

 

화령전의 운한각을 마주보고 좌측으로 담 너머에 있는 전각이 있다. 작은 일각문으로들어서면 전사청이다. 전사청은 운한각에서 정조를 위한 제향을 준비할 때, 각종 제물을 마련하는 곳이기도 하다. 전사청은 한편 마루가 돌출이 된 형태로 지어졌다. 전사창에서는 운한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을 내었는데, 이곳으로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날랐을 것이다. 

 


화령전의 한편에 서 잇는 전사청은 화령전에서 제향을 할 때 사용하는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전사청 안에는 어정(御井)이라고 하는 제정(祭井)이 있다. 이 제정은 화령정에서 이루어지는 제의식에 사용할 정화수를 뜨는 곳이다. 현재의 제정은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지금도 음용수의 기준인 46개 항목을 모두 통과한다는 어정수, 손바닥으로 물을 한 모금 마셔본다. 추운 날씨였지만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짜릿함이 일품이다.

 


화령전에서 제향을 드릴 때 정화구를 뜨던 우물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재인이 춤과 소리를 하던 풍화당

 

화령전 가운데 풍화당은 재실이다. 화령전에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들이 미리 와서 머무는 건물이다. 풍화당은 화령전 가운데 운한각과 함께 원형이 보존되어 있던 건물로 사료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 풍화당에서 바로 고 이동안과 정경파가 제자들에게 춤과 소리를 가르쳤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정조의 어진을 모시는 화령전의 전각 중 한곳인 풍화당에서,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에 대해 죄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풍화당은 양편으로 툇마루를 높여 그 밑에 아궁이를 두었다. 풍화당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낮은 굴뚝이 있다. 흡사 거북이 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러한 작은 것들이 풍화당이 정감이 들게 한다.

 

 



풍화당의 양편에는 마루를 높이고, 그 밑에는 아궁이를 둔 방이 있다

 살창으로 꾸며진 외삼문의 특별함

 

화령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바로 외삼문이다. 화령전의 운한각 앞으로는 내삼문이 있고, 그 밖으로 양편에 작은 골방을 드린 외삼문이 있다. 양편에 작은 방은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라도 묵었던 곳인가 보다. 그런데 이 외삼문은 어떠한 전각에서도 보기가 힘든 모습으로 꾸며 놓았다.

 

모두 세 칸으로 되어있는 외삼문은 솟을대문이 아니다. 지붕은 모두가 - 자로 평형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문의 밑 부분은 판자문으로 막고, 그 위를 살창으로 꾸민 살문이다. 일반적인 궁이나 별궁의 문들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폐쇄적인 방법을 쓴데 비해, 화령전의 문은 왜 이렇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아마 그 뜻을 모르긴 해도 평소 백성들을 사랑했던 정조대왕이, 운한각에서 지나는 백성들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 외삼문 앞을 지나는 백성들이, 정조대왕의 어진을 알현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행궁의 한편에 지어진 화령전은 그래서 오랜 시간 발길을 붙들고 있다.

조선 중종 5년인 1510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올해로 꼭 500년이 되었다. 물론 그동안 집의 형태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집을 지은 후, 여기저기 달라진 점도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행랑채가 없다거나 사랑방을 감싸는 외곽 담이 없는 것을 보면, 처음에 이 고택을 지은 후 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전해지면서,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 정무공 오정방 고택을 돌아보고 있노라면, '참 아름다운 집이다'라는 찬사를 할 수 밖에 없다. 가옥의 구성이 그러하다. 현재는 대문을 걸어 외곽 담장을 두르고 있다. 그 안에 대문채가 자리한다. 대문을 걸어 사랑채 쪽으로 나간 또 한편의 담장은 사랑채와 안채를 구별하는 사잇담이 되었다.

 


이 고택에서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오정방(1552 ~ 1625), 오상(1512 ~ 1573), 오두인(1624 ~ 1689)과 같은 해주오씨의 명현들이, 바로 이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오정방 고택은 처음에는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252번지에 세웠으나, 조선조 효종 1년인 1650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장대석 기단이 돋보이는 사랑채

 

오정방 고택의 사랑채는 안채와 붙어있다. 장대석 기단이 이 집의 견고함을 말해준다.


오정방 고택의 사랑채는 별채로 구성되지 않고, 안채와 단일채로 구성을 하였다. 전체적으로는 ㄱ 자형의 건물에 - 자형으로 사랑과 대청, 안방을 두고, 꺾어진 부분에 부엌을 둔 형태다. 사랑채는 장대석 기단을 4단으로 높이 쌓고, 그 위에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주추를 놓았다. 두 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는 측면과 앞면에 툇마루를 두었는데, 방이 끝나는 부분부터 측면으로는 난간을 둘러 멋을 냈다.

 

사랑의 앞의 툇마루는 안채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안채와의 구분을 사잇담으로 나누고, 그 마루에도 문을 달아 구분을 하였다. 사랑채의 뒤로는 조금 비껴서 사당채를 꾸며 놓았다. 사당채는 1칸 규모로 지어졌으며, 별도의 담장을 둘러놓았다.


사랑채의 뒤편에 자리한 사당채. 현재는 독립채로 되어있으나, 처음에는 바깥 담장 안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잇담으로 가른 사랑채와 안채

 

오정방 고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사랑채와 안채를 가르는 사잇담이다. 이 사잇담은 대문에서 시작해, 안채로 가로지르며 형성이 되었다. 사잇담이 끝나는 마루에 문을 달아 안채와의 경계로 삼았다. 툇마루는 안채의 대청이 시작되는 부분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사랑채와 사잇담이 만나는 곳에도 문을 달아 구분을 하였고, 툇마루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방과 대청 사이에도 문을 달았다. 사랑채에서 툇마루를 따라 안채로 들어가려면 두 개의 쪽문을 자나야만 한다.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툇마루. 이 마루는 두개의 쪽문을 달아 안채의 출입을 통제했다.

 
사잇담 안에 있는 한 칸 방의 용도는?

 

문제는 이 사잇담 안에 있는 방이다. 도대체 이 방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툇마루는 사랑채에서 안채의 대청이 시작되는 부분까지, 같은 높이의 누마루를 깔았다. 대청의 마루는 이 툇마루보다 낮게 구성되었다. 그럼에도 이 한 칸의 방 앞에 또 다시 문을 달아, 안채와 구분을 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또한 이 방의 툇마루에는 난간을 드렸다.

 

밑으로는 아궁이를 두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한 사랑채와 안채의 사잇방. 이 방을 혹 정자처럼 이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집 안에 딸이 사용을 했거나, 안주인이 아닌 여인네가 사용을 한 것은 아닐까? 상상은, 또 다른 상상을 불러 온다고 했던가? 결국 이 방에 대한 용도는 알지 못한 채, 혼자의 즐거운 상상만으로 시간을 보냈다.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는 사잇담이 있고, 사랑채에서 안채로 오려면 작은 방이 하나 있다. 이 방의 툇마루에는 난간을 둘렀다.

 

현재의 대문채는 중문채로 보여

 

전체적인 집의 구조로 보면 현재의 대문채는 중문채였을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는 - 자 형으로 지어졌으며, 대문을 두고 옆으로 두 칸의 광이 마련되었다. 이런 점으로 보면 현재의 대문채는 처음에는 중문채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만한 집에서 일각문으로 대문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랑채와 사당을 두르는 외곽의 담장이 없다는 점, 그리고 행랑채가 없다는 점 등이 이를 말해준다.

 

현재 오정방 고택의 대문은 과거에는 중문채였을 것으로 보인다.

대문 옆에는 두 칸의 광이 있다.

 

격자살 창호가 아름다운 부엌

 

격자살 창호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된 창호를 말한다.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내는 이 창호는, 우리 고택에서 흔히 보이는 창호의 형태다. 오정방 고택의 부엌을 보면 이 격자살 창호를 이용해 멋을 내고 있다. 전체적인 집의 규모보다 부엌이 상당히 큰 형태로 꾸며진 오정방 고택이다.

 

안방에서 달아 낸 부엌은 3칸 정도로 구성이 되었으며, 그 위를 다락으로 꾸며 모두 격자살 창호를 달아냈다. 중앙에 부엌문을 달아내고, 부엌을 바라보면서 우측에는 또 하나의 작은 격자살 창문을 내고, 좌측으로는 까치구멍을 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락 전체를 격자살 창호로 문을 달아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두칸의 마루와 안방, 그리고 부엌이 있는 안채다. 부엌은 격자살 창호를 달아 시원하게 연출했다.

 
 
사잇담에 작은 구멍 하나, 눈을 끌다

 

집안 곳곳을 돌다가 보니, 사잇담 아래쪽에 작은 구멍이 하나 보인다. 그저 지나치기가 쉬운 것이, 그 앞에 오정방 고택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서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쳐 버릴 것 같은 이 작은 구멍. 담장 밑에 있는 이 작은 구멍은 물론 배수구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배수구 하나에도 미를 생각했던 우리네의 가옥. 그것이 바로 한국의 미를 창출해낸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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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 있는 사적 제195호 영릉은 조선 제17대 효종대왕(1619 ~ 1659)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다. 효종대왕릉은 1659년 경기도 양주군 건원릉(현 구리시)의 서쪽에 조성하고, 능호를 익릉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능 앞에는 제례를 올리는 준비를 하는 재실을 건립하였다. 이후 현종 14년인 1673년 석물에 틈이 생겨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능호를 영릉으로 고치고 재실도 함께 옮겨왔다.

 

재실이란 제관의 휴식을 위한 공간과 제수의 장만 및 제기 등을 보관하고,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효종대왕의 재실은 보물 제1532호로 지정이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었는데, 영릉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이 재실은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대표적인 조선시대 재실로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담벼락 속에 들어간 굴뚝, 최고의 걸작품

 

효종대왕릉의 재실은, 현재 효종대왕릉 정문 바로 안에 자리하고 있다. 능으로 오르는 길  우측에 자리한 재실은 주변을 모두 담장을 둘렀다. 솟을대문의 양 옆으로 자리를 한 대문채는 방과 부엌, 그리고 대청 등으로 꾸며졌다. 들어가면서 좌측의 대문채는 끝에 대청과 방을 드린 날개채를 두고 있고, 그 뒤편에 다시 건물을 덧붙여 방과 헛간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 대문채에는 방은 있는데,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굴뚝은 어디로 간 것일까? 대문채는 바깥 담장을 벽으로 쓰고 있는데, 이 담장에 보면 중간에 네모난 구멍이 있고, 사이를 띄운 기와 몇 장으로 마감을 하였다. 이 구멍은 도대체 왜 만들었을까? 얼핏 보면 바람이 통하게 하는 바람구멍과 같이 생겼다. 그 구멍이 있는 뒤편으로는 모두 방을 드렸다. 이 구멍은 무엇일까?

 

이 담장 중간에 네모나게 만든 구멍이 바로 굴뚝이다. 부엌에서 불을 떼면 방안에 고래를 돌아 온 연기가, 바로 담장 안에 있는 연도를 통해 이 구멍으로 빠지게 되어있다. 최고의 건물에 가장 아름다운 굴뚝의 미학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우리 선조들의 예술적 감각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담장 안에 숨은 굴뚝. 최고의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아름다움마저 숨기는 이러한 건축이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돌로 쌓은 외곽 담장이 아름다운 효종대왕릉의 재실


 

 

 

외곽 담벼락에 난 이 구멍들이 바로 연기가 빠지는 굴뚝이다. 이 담방 안에 연도가 숨어있다.

 

 

 

 

 

 

 

 

 

 

 

 

재실 외벽의 아름다움

 

현재 보물 제153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효종대왕릉의 재실은 제관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인 재실과 행랑채를 겸한 대문채, 그리고 제기 등을 보관하는 제기고와 능에서 제례를 지낼 때 임금이 내려준 축문과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등이 있다. 재실의 경내에는 우물과 천연기념물 제459호인 수령 300년이 넘은 회양목과 고목 등이 있다.

 

이 재실에서 제관들이 쉬는 공간은 솟을대문을 들어선 후, 정면의 일각문을 지나 서 있는 재실이다. 그런데 이 재실의 심벽은 처마 있는 곳까지 쌓아올렸다. 이런 형태의 모습은 어느 전각에서도 보기 힘든 형태다. 이 건물의 양편 외벽만을 이렇게 꾸며 놓아, 이곳의 특별함이 눈에 띤다. 효종대왕릉의 재실이 건축학으로 보아도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렇게 하나하나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재실 외벽의 심벽. 처마있는 곳까지 전체를 다 꾸며서 특별한 건물임을 알려준다.

 

 

 

 

안양청의 건축미학 돋보여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마름모꼴의 주추를 놓아 올린 안향청. 제사를 지낼 때 임금이 내려준 축문과 향을 보관하던 건물이라고 한다. 이 안양청은 앞에서 바라보면 좌우에 방문과 같은 여닫이 창호가 있고, 중간에는 대청문과 같이 꾸며졌다. 그런데 정작 방은 우측에 문 안쪽이 방이다. 그것도 전체적으로 다 방을 꾸민 것이 아니고, 반을 나누어 앞쪽에는 방이 있고, 뒤편으로는 마루를 깔았다.

 

그리고 남은 부분은 모두 마루를 깔았다. 결국 중앙에 둔 대청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대칭이 되어 있는 방과 같은 창호는 우측만이 방이 된다. 더욱 이 방의 마루를 향한 창호는 특이한 문양으로 꾸며졌다. 이 창호는 '교실팔각불발기'란 방법으로 중앙을 꾸미고, 나머지는 격자살로 조형미를 돋보이게 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이 효종대왕릉의 재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담장 안에 둔 굴뚝과 위까지 끌어올린 심벽, 그리고 안향청의 독특한 건축방법 등. 이 재실의 아름다움은 그 어느 고택보다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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