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일(배재대 교수·한국사)은 ‘송병준’을 친일매국노 제1호로 꼽았다.


「송병준은 한말에 현감, 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통감부 권력을 등에 업고 농상공부대신, 내무대신 자리에 올랐다. 또한 합병 후에는 일본의 백작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 등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사전류에는 그의 행각과는 걸맞지 않게 단편적이고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1857년(1858년이라고도 하나 실제는 1857년이다) 8월 20일 함경남도 장진에서 태어났다(태어난 곳도 장진이 아니라 서울의 기생집에서 태어난 뒤 아버지가 장진으로 데려갔다 한다). 아버지는 장진군의 속사인 송문수이고, 생모는 기생으로 덕산 홍씨라고 한다.

 


부친 송문수와 본처(제주 고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나, 너댓명의 첩을 두었기 때문에 송병준에게는 배다른 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송병준이 어렸을 때, 아버지 송문수는 일가를 이끌고 경상도 추풍령 부근에 내려와 정착했다. 서자로 태어난 송병준은 적모 밑에서 심하게 구박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여덟 살 때 어머니로부터 도둑질 혐의를 받고 쫓겨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집에서 쫓겨난 송병준은 동학교도(송병준은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을 만났다고 술회하고 있으나 믿어지지 않는다)라 칭하는 일단의 도적떼에게 구출되어 3개월 가량 쫓아다니다 헤어진 후, 도둑질과 문전걸식으로 연명하였다. 하루는 참외를 훔치러 갔다가 참외밭 주인에게 들키게 되었는데, 도리어 주인이 불쌍하게 여겨 함께 살게 되었다.

 

 

 


얼마 후 주인이 참외를 팔러 서울로 올라갈 때 함께 가게 된 송병준은 우연히 민씨 세도가인 민태호(고종의 외숙, 민영환의 양부)의 눈에 띄어, 그의 애첩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후일 송병준은 이 홍씨를 자기의 생모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그가 자기 출신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 낸 거짓말이었다.」


강교수의 글 송병준에서 첫 단락 ‘배신과 사기의 배후’에 소개한 글이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살해하려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도리어 설득당하여 그의 동지가 되었다. 1886년 귀국하여서는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 흥해군수와 양지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정부가 체포령을 내리자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하늘과 역사는 용서하지 않는다


그 뒤의 그의 행적은 일일이 소개를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 송병준이 용인 양지에 살 던 집이, 현재는 남양주시 평내동 궁집 옆에 자리를 하고 있다. 원래 용인에 있었던 집을 후손들의 몰락으로 매각한 것이다. 이 집을 그대로 옮겨와 복원하였다 하여, 이곳에서는 이 집을 ‘용인집’이라고 부른다.


용인에 이 집이 있었을 때는 그 세도가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녹녹치가 않다. 그 세도가의 몰락은 결국 집까지 남의 손에 넘어가고, 몰락한 세도가의 상징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남양주로 이건하었다. 참으로 세상을 살면서, 왜 인간이 올곧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집이다.

 

 


좋은 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용인집은 구한말의 가옥이다. ㄴ 자로 꾸며진 사랑채와 행랑채, 그리고 ㄱ 자로 꾸민 안채가 합해 튼 ㅁ 자형으로 조성하였다. 집 앞에 놓인 석물들도 모두 용인에 있던 것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것을 보면, 당시 이 집의 세도를 알만하다. 이 집은 아마도 송병준이 용인 양지현감을 지낼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에 중문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꺾인 행랑채와 우측의 사랑채가 ㄴ 자 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랑채 우측 끝에는 한 칸을 앞으로 덧달아 누정을 만들었다. 창문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는 것을 보아, 당시 세도가들의 집 꾸밈을 알 수 있다. 구한말에 지은 집들에서 이런 유리문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안채는 안마당을 지나 ㄱ 자 집이다. 8칸 팔작지붕으로 지은 안채는 잘 조형된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올렸다. 방과 대청, 부엌 등을 고르게 배치한 것이나, 치목과 석재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서 당대의 재능이 뛰어난 장인들이 지은 집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 동안 만난 200여 채의 고택. 용인집은 집 그 자체로는 정말로 좋은 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는 절대로 살고 싶지가 않다. 이 집에서는 나라를 팔아넘기려고 한 매국의 냄새가 짙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냄새가 난다. 그래도 이 집을 돌아보는 것은, 역사는 준엄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도 제헌절인 7월17일에 돌아보았다는 것이 더욱 의미가 갚다.

예나 지금이나 잘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하다. 시쳇말로 백 없고 돈도 없고, 거기다가 줄도 없으면, 그야말로 세상살이가 힘들어진다. 가끔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씁쓸한 때가 있다. 넓은 평수에 사는 사람들이, 임대주택의 아이들과는 한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다는 소식을 접할 때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소재한 궁집.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살던 집이다. 아마도 화길옹주가 이곳으로 시집을 왔을 때, 시비들이 이곳으로 따라왔을 것이다. 또한 능성위 구민화의 집에도 아랫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궁집 옆으로 초가가 한 채 보인다. 바로 궁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묵었다는 집이다.

 

 

신분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초가

 

하지만 궁에서 따라 나온 시비들이나, 마름 등은 이 초가에 묵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궁집 안에도 행랑채가 있어, 마름들이나 궁에서 나온 시비들은 그곳에서 생활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 아마도 그보다 신분이 낮은 머슴이나 종들이 살던 집은 아니었을까?

 

궁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묵었다고 전하는 이 초가는, 궁집을 지었을 때와 같은 시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집도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이다. 이 초가는 현재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옛 고택들 중에서도 특히 초가의 경우 사람이 살지 않으면 퇴락해 버리고 만다. 이 초가 역시 많이 훼손이 되었다.

 

 

 

 

연륜을 알 수 있는 주변의 경관

 

궁집의 하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초가. 주변으로는 꽤 오래 묵은 듯한 나무들이 서 있어, 이 집의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초가는 ㄷ 자 형으로 되었다. 앞으로 사랑채를 놓고, 그 중간에 대문을 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ㄴ 자의 꺾인 부분에 대청을 두고, 양편으로 방과 부엌을 드렸다.

 

이 초가는 일반적인 초가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꾸며졌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양편에 방에 불을 때기가 편하도록 깊게 골을 파서 연결하였다. 한 사람이 양편에 불을 한꺼번에 땔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아궁이의 형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안으로 들어가면 양편으로는 방을 드렸다. 아마도 초가의 사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이 초가에 살던 사람들이 신분이 낮았으니, 아랫사람을 두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양편의 방을 일꾼들이 사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의 밖으로는 툇마루를 놓아 주변 경관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안채의 특이한 구성, 머슴들이 생활한 집인가?

 

사랑채에 비해 안채는 간결하게 꾸며졌다. 사랑채에 붙여 ㄱ 자로 지은 안채는 작은 방 하나를 놓고 부엌과 안방을 드렸다. 안방은 뒤로 물려 앞을 마루를 놓았으며, 꺾인 부분에는 넓은 대청을 놓았다. 그리고 건넌방을 드렸다. 이런 구조로 볼 때 이 초가에는 주로 일을 하는 머슴들 위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일반적인 중부지방의 초가와 다름이 없지만, 그 집의 구성으로 볼 때는 상당히 특이한 형태인 초가. 부엌 뒤편으로는 장독을 놓았으며, 사랑채를 맞물려 안채의 뒤편으로 연결이 될 수 있도록 담장을 둘렀다.

 

 

 

 

사람이 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재신이나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 집의 형태. 그런 집들을 돌아보면서 참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신분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7월 17일에 찾아간 남양주시 평내동의 궁집. 그곳에는 또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누마루에 앉아 위로 올려 건 창문 아래로 보이는 경치가 절경이다. 수령 450년의 고목이 된 은행나무 너머로 북한산의 바위가 병풍처럼 드리워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파란 잔디 위에서 한가롭게 뛰노는 개 몇 마리가 평안함을 안겨준다.

 

주인이 타 주는 향이 좋은 차 한 잔이, 오히려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의정부시 정암동 19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93호인 서계 박세당 사랑채. 비록 사랑채 한 채만 남아있지만, 그 한 채 만으로도 옛 정취를 가늠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 사랑채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계(西溪) 박세당(1629 ~ 1703)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을 하였던 곳이다.

 

서계 선생이 집필을 하던 곳

 

서계 선생은 인조 7년인 1629년에 이조 참판을 역임한 박정과 양주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1세인 현종 1년인 1660년에 증광문과에 장원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정언,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 겸 경연 시독관, 함경북도 병마평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668년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40세라는 한창 조정에 나아가 일을 할 나이에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당시 양주 석천동)에 칩거하면서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저술, 그리고 제자 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농사에 관하여 쓴 「색경(穡經)」이 있는데, 이 책은 선생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글로서 남긴 책으로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또한 고전연구에 관한 저술로서 「사변록(思辯錄)」등이 있다.

 

 

 

현재의 서계선생 사랑채는 당시 선생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원래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사랑채 앞에 서있는 고목인 은행나무와 그 옆의 계류를 따라 세워진 정자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 사랑채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멋을 겸비한 사랑채, 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의 정기를 느낄 수 있어

 

서계선생의 사랑채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바로 이곳을 지나 금강산으로 여정을 잡았던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들려 차 한 잔에 피곤한 다리를 쉬어갔기 때문이다. 이곳은 금강산으로 가는 곳의 길목으로, 누마루에 걸터앉으면 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의 절경이 장관이다.

 

 

 

사랑채는 모두 네 칸 반 정도의 팔작집이다. 집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반 칸은 광을 달아내고 두 칸 반을 방을 드렸다. 방 앞으로는 마루를 넓게 놓아 생활공간을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 좌측의 한 칸은 층이 지게 누정을 조성하였다. 장초석으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올린 누정은 삼면으로 들창을 내어 멋스러움을 더했다.

 

아마도 서계선생은 그 누정에 올라 책을 쓰고, 사람들과 차 한 잔을 나누며 담소를 했을 것이다. 들창을 모두 열어젖히고 서계 선생의 후손인 집 주인이 타주는 차 한 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아마 예전 선생이 이곳에 기거를 했을 때도 이렇게 나그네들과 차 한 잔으로 세월을 낚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뒤편에는 하석 박정의 영정이 있어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니 좁은 협시문에 ‘서계박선생진영각’이라 쓰여 있다. 담으로 돌아 주인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가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7호인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하석 박정의 초상화 두 점이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는 잘 보여주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영정은 외부인에게는 보여주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볼 기회가 거의 없다.

 

하지만 7월 17일 찾아간 이 고택에는 동행자 중 한 분이 문화재위원이면서 집 주인과 친분이 있어 영정 두 점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박정은 광해군 1년인 1619년에 문과시험에 합격을 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남원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영진각에 모셔져 있는 두 점의 초상화 중 한 점은 낮은 사모를 쓰고 푸른색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영정을 바라다보면서 좌측에 걸린 이 그림은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 왼쪽 얼굴을 그렸다. 다른 하나의 영정인 우측의 영정은 서계의 초상화이다. 숙종 연간이 1690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창주 조세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세걸은 숙종의 어진 제작에도 참여를 한 인물로, 서계에게 팔선도를 증정하기도 했다. 서계와는 교류가 깊어 석천동을 자주 방문하기도 했다. 이 초상화를 주선한 사람은 서계의 아들인 박태보로 알려져 있다. 

 

 

지난 해 불이 나 많은 자료가 전소되어

 

사랑채와 두 점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진각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기둥과 벽 등에 불탄 흔적이 보인다. 지난 해 12월에 누전으로 인한 불이 났다는 것이다. 소화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작동이 되지 않아 사랑채 옆에 있던 서가와 진영각 뒤편의 창고가 전소가 되어버렸단다. 아직도 그 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볼썽사납다.

 

그 무엇보다도 서가에 보관하고 있던 300여권의 고서가 불에 전소가 되었다고 한다. 주인은 그 책들이 다 타버린 것으로 인해 많은 아픔을 당했다는 것이다. 금강산으로 향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친 몸을 쉬어가던 곳. 서계 박세당의 사랑채. 오늘 그 곳에 앉아 옛 선인들의 마음을 함께 느껴본다. 아마도 북한산의 기운이 이 집으로 응집이 되어, 이곳에서 새로운 기운을 얻은 것은 아니었을까?

가끔 서울에 올라갈 때마다 찾아가는 곳이 바로 궁이다. 이곳저곳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그 안에서 벌어졌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억해보곤 하는 일이 좋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구경하다가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멋들어지게 지은 전각들이 지붕을 맞대고 늘어선 궁에, 왕이 묵는 강녕전과 왕비가 기거하는 교태전의 지붕에는 용마름이 없다는 사실이다.

 

경복궁의 강녕전은 경복궁 안에 있던 왕의 침전이다. 태조 4년인 1395년 사정전의 북쪽에 세웠다. 그 뒤 세종 15년인 1433년(에 중수했으나 명종 8년인 1553년에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다. 이후에도 몇 번 소실이 되고 다시 짓기를 반복했다.

 

 

수차례 수난을 당한 왕과 왕비의 처소

 

경복궁 안에 있던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는 없었다. 세종 25년인 1443년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명종 8년인 1553년에 강녕전과 함께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타버렸다. 교태전도 강녕전과 함께 수차례 소실되고 중건하기를 반복했다. 1920년에는 창덕궁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로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서 헐려 건축부재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강녕전과 교태전의 지붕을 보면 용마름이 없다. 날렵하게 치켜 올라간 지붕위에 용마름이 없는 지붕은 무엇인가 좀 허전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허전함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하게 만든 것이 바로 강녕전과 교태전의 멋이다.

 

왕의 침전인 강녕전에는 용마루가 없으나, 강녕전 옆의 건물에는 용마루가 있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이곳 역시 용마루가 없다. 이는 왕과 왕비가 바로 용이기 때문이다. 즉 한 지붕밑에 용이 둘일 수 없다는 사고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왕과 왕비의 침전 지붕에는 용마름을 올리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바로 왕이 용이기 때문이다. 왕과 왕비는 부부니 일심동체고, 당연히 왕비의 침전에도 용마름을 얻지 않은 것이다. 딴 건물과는 달리 용마름이 올려지지 않은 강녕전과 교태전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

 

‘어처구니’는 무엇일까?

 

가끔 TV 오락프로에 보면 궁에 가서 ‘어처구니’라는 것을 갖고 내용을 펼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궁궐에는 어처구니라는 것이 있다. 흔히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궁궐의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있는 것이다. 서역을 갔다 온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언제 우리의 궁궐로 온 것일까? 이 궁궐 처마에 올라타고 있는 잡상을 어처구니라고 한다.

 

국어사전에서 어처구니를 찾아보면 '상상 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때도 '어처구니가 없다'라고 한다. 이때의 어처구니는 요철도 구멍도 없이 꽉 막혀 도통 통하지가 않는다는 말의 뜻을 갖고 있다.

 

추녀마루에 올라앉은 잡상

 

'어처구니'는 한자어의 요철공(凹凸孔)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들어가고 나옴의 요철과 구멍의 합성어로 된 말인데 이것이 변하여 요철이 '어처'가 되고 공이 '구녕'이 되었다가 다시 '구니'로 되었다는 것이다. 말의 변화야 어찌되었건 앞뒤가 꽉 막힌 사람들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재앙과 화마를 막기 위한 장식

 

이 어처구니가 궁궐의 지붕 위에 있는 잡상이다. 지붕위에 어처구니를 올리는 이유는 이러하다. 궁궐을 지을 때 기와를 올리는데 기왓장의 측면에 계단식의 홈이 한 줄 파여 있다. 이것은 빗물이 새지 않도록 정밀하게 맞물려지도록 하는데 이것을 '어처'라고 하는 것이다. 이 어처가 없다면 기와의 줄을 맞추기가 쉽지가 않다.

 

잡상은 적게는 3개에서 많게는 11개 까지 올린다

 

즉 어처구니는 이 ‘어처공’이라는 말이 된다. 이 어처를 막기 위한 것이 바로 흙으로 구워 만든 동물이다. 흔히 잡상이라고 하는 어처구니는 올리는데 순서가 있다. 새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태는 취두라 하고, 새 꼬리 모양은 치미, 망새라고 부른다. 용두는 취두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내림마루 끝에 있으며, 그 밑 추녀마루에 잡상을 올린다.

 

잡상이 서 있는 순서를 보면 대당사부라는 삼장법사가 맨 앞에 무릎에 손을 짚고 서 있다. 그 뒤로는 손행자(孫行者)라 불리는 손오공, 저팔계(猪八戒), 사화상(沙和尙=사오정), 마화상(麻和尙), 삼살보살(三煞菩薩), 이구룡(二口龍), 천산갑(穿山甲), 이귀박(二鬼朴), 나토두(羅土頭)의 순이다. 이 장식들은 잡귀들이 건물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잡상은 궁궐의 처마마루에 올려 잡귀들의 범접과 화마를 막았다

 

이 중에서 마화상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잡상이다. 삼살보살은 세살, 겁살, 재살 등 살이 끼어서 불길한 재앙이다. 이것을 막고 있는 잡상이다. 천산갑은 인도, 중국 등지에 분포된 포유동물의 일종이다. 머리 뒤통수에 뿔이 돋아있다고 하는데 이 동물이 잡귀들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잡상들은 언제부터 처마에 올라가 있을까? 기와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고조선 말기라고 한다. 그러나 고분벽화 등에 그림에도 잡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삼국시대나 고려의 와편에도 잡상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이후가 될 것 같다. 잡상은 아무집이나 올리는 것이 아니다. 궁이나 그와 관련된 건조물에만 올린다. 적게는 3개에서부터 많게는 11개까지 올린다. 알고 돌아보는 궁궐상식, 아이들에게 자랑삼아 설명을 해주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

이천보 고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만든다. 추운 날씨 탓인가 문은 모두 비닐로 막았고, 마당은 왠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조선조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진암 이천보가 살았던 집이니, 그 이전부터 집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천보는 숙종 24년인 1698년에 태어나, 영조 37년인 176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 점으로 보아 이천보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면, 이곳은 300년 이상 된 고가일 것이다. 그 오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 온 이천보 고가. 가평군 상면 연하리 226번지에 소재하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5호이다.

 

 

안채는 사라지고 사랑채가 안채로 쓰여

 

이천보 고가에는 안채가 없다. 6·25 동란을 거치면서 안채가 불타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마 안채가 있었다고 하면 더 멋진 집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축물은 사랑채와 행랑채다. 행랑채 맞은편 건물은 최근에 지은 듯하다. 현재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일각문이 원래 대문의 자리였는지는 모르겠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ㄱ(기억)자형으로 사이를 벌려 자리한다. 사랑채의 정면 담에 일각문을 내어, 현재는 그 일각문이 대문을 대신하고 있다.

 

안채로 사용하는 사랑채는 고종 4년인 186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ㅡ(일)자형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지어졌다. 동향인 사랑채는 잘 쌓은 장대석 기단 위에 높이 45cm 정도의 사다리꼴 주추를 사용했다. 사랑채를 마주하고 좌측에 보이는 목조건물인 누마루 방은 고종 때 사랑채를 중건할 때 붙여지은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좌로부터 마루의 끝과 맞춘 누마루 한 칸과 방, 마루방인 대청과 두 개의 방이 연이어 있다. 누정과 같은 형태로 붙인 누마루는 3면을 창호로 둘렀으며, 여름이면 문을 모두 열어 바람을 맞게 만들었다.

 

일반적인 누정과 같은 누마루는 밖으로 돌출이 되는데 비해, 이천보 고가의 누마루 방은 건물 밖으로 돌출이 되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집 주인의 나아가지 않는 겸손함이 배어있다. 사랑채에는 상고당(常古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항상 옛것을 기억하라는 뜻인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수령 300년의 향나무가 고가의 연륜을 알려주고

 

이천보 고가 누마루방 뒤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된 향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향나무 한 그루로 인해 이천보 고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고가가 6·25 동란 시에 화를 입었음에도 이 향나무는 온전하게 살아남았다. 그래서인가 이 향나무의 모습이 더욱 신비롭기만 하다

 

수령이 300년이 넘었다는 이 향나무는 가슴높이의 둘레가 84cm에 높이가 15m나 된다. 이 향나무는 이천보의 선조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이 나무의 수령이 이천보 고가의 연륜을 알려주고 있다. 이천보는 1698에 태어나 1761년까지 생존했다.

 

이 나무를 이천보의 조상이 심은 것이라고 하면, 결국 이천보 고가는 300년이 훨씬 지났으며, 이 향나무의 수령도 300년 이상이어야 한다. 각종 공해에 잘 견디어낸다는 이천보 고가의 향나무. 아마 이 집안의 끈질김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돌담 벽으로 멋을 낸 행랑채

 

행랑채는 안마당에서 바라보면 우측에 방이 두 칸이 있고 부엌이 있다. 부엌 좌측에는 헛간과 곳간이 있다. 이 행랑채 곳간 쪽의 벽은 돌로 만들었다. 집 주위를 두른 담장은, 사랑채에서 볼 때 집안의 전체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또한 무료하게 맨 벽을 바라보기 보다는, 돌담 벽으로 꾸며 나름대로의 멋을 부렸다.

 

 

6·25 동란 때 불이 나서 안채 등이 소실이 된 이천보 고가. 전체적으로는 집 구조가 어떻게 꾸며졌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사랑채와 행랑채의 위치로 보아, 안채의 경우 행랑채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가 소실이 되는 바람에 고택으로서의 가치가 높지 않다고 하여 지방 문화재자료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한 때 이 고가의 모습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을 것 같다.

 

 

 

아픔의 세월이 느껴져

 

300년이 더 지난 이 이천보 고가의 사랑채 뒤에 있는 향나무나 행랑채의 담 벽, 이층으로 쌓은 장대석의 기단 등을 보아도 이 집이 얼마나 운치가 있었던 집이었나를 가늠케 한다. 그러나 일각문 앞에 문화재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저 어느 시골의 토호쯤이 살았을 그런 집으로 알았을 것이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실록에는 이천보가 병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실은 장헌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에 책임을 느껴 음독자살했다고도 전한다. 강직한 이천보의 성격상 그런 책임을 쉽게 넘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 이 집이 퇴락해 버린 것도, 그런 주인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있었음은 아닌지. 긴 세월 사랑채 뒤에서 온갖 역사의 소용돌이를 다 지켜 본 향나무는 알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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