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군 학산면 봉림리 미촌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44호인 성위제 가옥. 안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초가로 되어있는 성위제 가옥은 안채, 사랑채, 문간채, 일각대문, 광채, 사당 등으로 배치되어 있다.

성위제 가옥은 대부분 20세기 초 이후에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다만 광채만이 18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택을 답사하면서 만난 광채 중 가장 특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성위제 가옥. 정면 네 칸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이 광은, 좌측 세 칸은 판자벽을 막고 문을 달았다. 바닥은 나무로 깔아 이곳이 곡간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나머지 우측의 한 칸은 개방을 하여 헛간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광의 특별함이라는 것이 바로 판자벽이다.


재활용한 판자로 지은 광채

널따란 판자를 세로로 끼워 놓은 이러한 판자벽은 오래된 기법이다. 판자벽을 둘러보다 보니 조금은 이상한 것이 있다. 벽을 막은 판자에 구멍들이 뚫린 것도 있고, 가지런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무를 보니 어딘가에 사용했던 나무들로 벽을 둘렀다. 나무를 재활용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해답을 찾기가 어렵다. 이렇게 작지 않은 곳간을 갖고 있는 집에서 꼭 사용했던 목재를 이용해야만 했을까? 벽을 찬찬히 살펴보니,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주인의 알뜰한 습관 때문이다. 집주인의 물건 하나 함부로 하지 않는 마음이 배어있다. 막아놓은 벽은 듬성듬성 틈이 생겨 자연스럽게 통풍을 유도한다. 집주인의 여유로움이 배어있는 아름다움이다.



막힘과 자유스러움이 공존하는 외벽

안채 앞에 놓은 사랑채는 담 안과 담 밖에 걸쳐있다. 밖에서 사랑채를 출입할 때는 우측 담장에 난 작은 대문을 거치지 않고, 사랑채의 마루로 바로 연결이 된다. 사랑채의 뒤편에는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채의 뒤편에 난 문을 열면 담으로 막혀있다. 왜 이렇게 외벽을 쌓은 것일까?

안채는 집안의 안주인이 주로 기거하는 생활공간이다 보니, 사랑채를 찾아 온 외부의 손님들이 안채를 볼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를 길게 막아버린 또 하나의 벽이다.



사랑채는 바로 안채를 볼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 있다. 넓지 않은 공간에서 사랑채와 안채의 거리는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았다.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주로 기거하는 공간이기에 집을 찾은 외부인들이 이곳에서 하루 묵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안채의 소리까지도 들릴 수 있는 거리인 사랑채가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그러한 것을 차단하기 위한 외벽을 하나 막아놓았다.

그것 하나만으로 생활에 자유스러움을 얻을 수가 있다. 막힘과 자유스러움. 이것이 사랑채 외벽의 멋이다. 또한 사람들의 동선을 최대한 줄여놓아 이동을 편리하도록 하였다. 곳곳에 주인의 따듯함이 배어있는 집이다.



행랑채에 아랫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담겨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안채가 보인다. 그리고 우측에는 광채, 그 뒤에는 측간이 있다. 광채와 안채의 모서리에는 뒤주와 우물이 오롯이 자리한다. 좌측에는 담에 붙은 작은 문과 사랑채가 담으로 연결이 된다. 그리고 안채의 뒤편에는 담장으로 두른 사당이 자리한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곳이 바로 행랑채다. 행랑채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은 집이, 바로 성위제 가옥이다. 비록 내가 부리는 사람이지만, 최선을 다해 인격을 존중했음을 행랑채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대문을 낀 행랑채를 보면 성위제 가옥의 집주인이 얼마나 아랫사람을 배려했는가를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고택의 경우 대개는 대문 양 편이나 한 편에 방을 두게 된다. 그러나 성위제 가옥의 행랑채는 대문과 방 사이에 헛간을 두고 있다. 이것은 대문에서 방을 바로 연결하지 않아, 문을 열고 닫을 때 소음을 조금은 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중간에 광을 두어 문을 여닫는 소리를 분산시키는 효과를 얻어낸 것이다.



안채와 광채의 모서리에서 만나게 되는 뒤주와 우물. 전통기법을 그대로 살려 만든 뒤주는 이 집의 모든 아름다움을 정리하고 있다. 사방 한 칸으로 지어진 뒤주는 땅에서 한 자 정도를 높였다. 습기를 막기 위해서다. 그리고 우물과 가까이 두어 살림을 하는 부녀자들의 동선을 최대한 짧게 만들었다. 쌀광에서 바로 우물로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집 여기저기를 돌아보다가 만나는 여유로움과 배려. 아랫사람도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성위제 가옥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다.

충북 영동군 양강면 괴목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42호인 김선조 가옥. 아마도 이 집을 돌아보면 옛 선인들의 집을 짓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전형적인 양반가의 구조를 갖춘 이 가옥은, 안채는 17세기에 안사랑채는 그보다 조금 늦은 17세기 말쯤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곳간채와 대문채는 20세기에 들어서 지었다고 한다.

김선조 가옥은 전국을 다니면서 만날 수 있는 고택 중 하나이다. 그저 평범한 집 같지만, 찬찬히 돌아보면 뛰어난 건축기법이 보인다. 물론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이 될 때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 이겠지만, 그냥 돌아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자연을 배경을 한 안채

김선조 가옥은 ‘배산(背山)’의 특징을 갖는다. 집 뒤에 있는 낮은 구릉은 여름철이면 녹음으로 뒤덮히고, 겨울이 되면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자연을 이용해 집을 지은 건축의 교과서 같은 집이다. 집 뒤편으로는 고목들이 서 있는 구릉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흡사 산속에 지은 집을 연상케 한다.

예전에는 안채 앞에 사랑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랑채가 없어지고 기단만 남아있다. 대문채에서 안채까지 휑하게 빈 공간은, 사랑채가 없어 외부공간이 전체적인 균형을 잃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허전함을 안채 뒤에 있는 녹음이 진 구릉이 막아주고 있다.



김선조 가옥의 안채는 ㄷ자형의 구성으로 건조되었다. 부엌, 안방, 대청, 윗방 등이 일렬로 배열이 되어있다. 안채의 앞쪽에만 마루를 놓은 것이 아니고, 뒤편에도 툇마루를 길게 늘였다. 이 뒷마루는 사람이 편히 앉아 구릉의 녹음을 바라다보기도 좋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된다. 멀리 돌지 않고 가까이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안사랑채가 되돌아 앉은 사연

김선조 가옥을 돌아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건물이 한 동 있다. 바로 안사랑채이다. 안사랑채는 부엌, 안방, 윗방, 대청을 일렬로 배열한 전형적인 별당 형식이다. 안채 앞에 있던 사랑채는 없어졌다는데, 이 안사랑채는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있다. 그런데 안사랑채의 전면이 아니고 돌아 앉아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안사랑채는 여자들의 공간이다. 사대부가의 집들은 사랑채에서 바깥주인이 기거를 하면서 외부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로 이용을 한다. 그리고 안채는 대개 사랑채에서 담을 쌓고 그 안에 일각문을 두어 바깥주인이 출입을 한다. 그리고 그 안채 후원에 별당채가 두어, 집안의 과년한 딸들이 기거를 한다.


그런데 김선조 가옥에는 별당채가 없는 대신, 안사랑채를 대문 안에 마련을 했다. 그러다보면 외부인들이 집안을 들어섰을 때, 안사랑채를 사용하는 여자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집을 돌려놓은 것이다. 사람들은 여자들이 기거를 하는 방이면 괜히 눈길을 주게 된다. 그러한 외부인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방법인 듯하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 집의 구조다.

문은 있는데 벽은 왜 없지?

이 안사랑채를 돌아보면 참으로 재미있다. 대문을 들어서 보이는 안사랑채의 끝에는 불을 떼는 아궁이가 있다. 그런데 이 아궁이는 부엌의 용도는 아니고, 불을 지피고 물을 데우게 되어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 아궁이가 있는 불을 떼는 곳에 안채의 방향으로는 담도 없는데, 마당 쪽으로는 문을 내달았다.



불을 때는 곳인데 구태여 문을 해 달아야할 필요가 있었을까? 벽도 없이 노출이 되어있는 곳인데 문을 단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집 주인의 세심한 배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바로 안사랑채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부녀자라는 점이다. 집의 안식구뿐만 아니라, 집에서 일을 하는 여자들까지도 가려주는 마음. 이 아궁이가 그런 것을 알려준다. 집안을 드나드는 외부의 남정네들이, 부녀자들을 함부로 볼 수 없도록 마음을 쓴 것이다. 김선조 가옥에는 숨어있는 비밀이 많아, 둘러보는 재미에 푹 빠진다.

측간도 곳간채 한편에 숨어있어

안사랑채의 뒤편 건너편에는 곳간채가 있다. 곳간채는 ㅡ 자형으로 지어졌는데 모두 5칸으로 나뉘어졌다. 좌측 두 칸은 곡물을 쌓아두는 창고로 사용하고, 중간은 뒤주로 사용을 했다. 그런데 맨 우측의 한 칸은 문이 없다. 문이 어디로 갔을까? 창고를 돌아 뒤로 가보니. 세상에 여기 측간이 숨어 있다.



'처갓집과 측간은 멀수록 좋다'고 했던가. 그런데 멀리 둘 수가 없는 집안의 구조 때문에 측간을 광의 뒤편에 두었다. 집안에서는 보이지 않으니, 용변을 보는 사람들도 편했을 것이다. 측간은 안쪽으로 들어가게 내었다. 세세한 부분까지도 신경을 써서 구성을 하였다. 고택에서 찾아보는 숨은 멋. 김선조 가옥은 그런 재미가 쏠쏠한 집이다.


독립운동가인 보재 이상설 선생. 자는 순오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고종 7년인 1870년에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말에서 학자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이용우의 아들로 입양된 이상설은 서울로 올라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영어, 러시아어, 법률 등을 공부하여 고종 31년인 1894년 문과에 급제를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친 이상설은 의정부 참찬에까지 올랐으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의 폐기를 상소한 후 간도 용정으로 망명을 하여 서전서숙을 세웠다. 이곳에서 교포 자제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 1907년에는 이준, 이위종과 함께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여,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17년 47세의 나이로 병사를 하였다.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에 있는 이상설 생가. 유허비와 뒤편에 동상, 그리고 생가의 모습이다

숭열사와 생가가 한 자리에

숭열사는 이상설 선생의 존영을 모신 사당이다. 1972년 진천읍 교성리에 세워진 목조와가 9평의 맞배집으로 된 사당과 숭모비 등을, 1997년 현재의 자리인 산척리 생가 곁으로 옮겨 놓았다. 숭열사에는 사당과 솟을문, 추모비와 동상,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그 한편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77호인 이상설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이상설 생가는 초가 세 칸이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초가집은 황토벽으로 발라놓았다. 이 집은 선생이 태어난 집으로 광복을 전후 해 무너진 것을, 근년에 옛 분들의 고증을 받아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집 옆으로는 1957년에 세운 유허비가 서 있으며, 그 뒤편으로는 이상설 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


세 칸 초가인 안채와 맞은 편에 있는 헛간채

초라한 세 칸 초가가 품은 인물

지금은 정비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마 선생에 태어날 당시에 생가는 더 초라했을지도 모른다. 세 칸 초가는 앞에서 바라보면 좌측에 부엌이 있고, 안방과 윗방이 있다. 앞으로는 툇마루도 놓지 않았으며, 방은 겨우 성인 한 사람이 발을 뻗고 누울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윗방 역시 마찬가지이다.

안방은 뒤편으로 난 문이 조금 크다는 것뿐, 일반 민초들이 사는 집보다도 초라하다. 윗방 앞에는 조금 돌출이 되게 내달아 곡식을 넣어두는 곳간을 만들었다. 부엌은 조금 널찍하게 만들었으며 아궁이를 두었다. 벽 한편에 돌출이 된 곳은, 예전 등잔을 올려놓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윗방 앞으로 달아낸 곳간채와 안방. 안방은 성인 한 사람이 발을 뻗고 누울만한 공간이다.

이 초라한 세 칸 초가에서 태어난 이상설 선생은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며, 세계에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한다. 물론 선생이 이 집에서 자란 것은 7세 때까지였을 것이다. 그 뒤로는 이용우의 양자로 입양되어 서울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생가에서 부끄러움에 낯을 붉히다

눈발이 날린다. 마음을 먹고 나선 답사 길이 폭설로 인해 중단이 되고 말았지만, 그런 변동이 오히려 이상설 선생의 생가를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 고마울 뿐이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요즈음 사람들은 자라나는 환경만을 그렇게 핑계를 대는 것인지.



거적으로 된 부엌문과 아궁이, 그리고 벽에 불거진 것은 등잔을 올려놓는 등잔대이다.

선생을 위시한 여러 선인들은 자라난 환경이 열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가.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자라는 환경이 인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노력과 그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초라한 세 칸 초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을 이상설 선생. 오늘 그 생가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그 동안 참으로 세상을 잘못 살아왔음을 깊이 반성하면서. 눈발이 점점 거세지는 듯하다. 그저 부끄러움에 그 눈발이 고맙다. 부끄러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릴 수가 있으니.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826에 소재한 신헌 고택. 현재 충북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신헌(1810∼1884)은 조선조 후기의 무신이면서 외교가였다. 이 집은 신헌이 살던 집으로 과거에는 사랑채와 행랑채 등이 있었으나, 그 집을 허물어 길상사를 짓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신헌의 자는 국빈, 호는 위당이며 평산인이다. 순조 28년인 182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에 임명 된 후, 고종 때에 이르기까지 중요 무반직을 두루 거쳤다. 고종 3년인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충융사로 강화의 염창을 수비하고, 난이 끝나자 좌참찬 겸 훈련대장이 되어 수뢰포를 만들기도 했다.

천사의 나팔이 집안 곳곳에 놓여있는 진천 신헌고택

병자수호조약과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한 신헌

고종 12년인 1875년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자 이듬해 전권대관이 되어 병자수호조약을, 고종 19년인 1882년에는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같은 해에 판삼군부사가 되었다. 이 집은 1850년경 신헌이 전통 한옥 형태로 지은 건물이다. 세울 당시에는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광채, 중문채 만이 남아 있다. 신헌고택을 찾아갔다.

마침 문이 걸려있지 않아 집을 둘러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현재 대문으로 사용을 하고 있는 문은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다. 문은 중앙에 문을 두고 양 옆으로는 방과 헛간이 있다. 방 밖으로는 굴뚝이 서 있어, 이 방에서 안채의 일을 돌보는 여인들이 기거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대문은 중문이었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없어지고, 중문이 대문이 되었다. 중문은 바람벽을 두어 안채를 보호하였다.

안채만 남아도 단아한 집

안채는 2층 기단 위에 세운 ㄱ자형 평면집이다. 오른쪽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왼쪽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한 집에 이렇게 지붕을 들인 것은 흔치가 않다. 안채는 꺾이는 부분에 마루를 놓고 양편으로 방과 부엌을 달아냈다.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신헌고택을 들어가니, ‘천사의 나팔’이라고 하는 꽃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집안 정원 가득 꽃이 심겨져 있어, 현재 이 집에서 거주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꽃을 좋아하는가를 알 수 있다. 천사의 나팔이라는 이 꽃은 해가 지기시작하면 짙은 향을 풍긴다. 이 정도 꽃이면 집안 전체가 꽃향기로 가득할 것만 같다.


사랑과 안채를 통하던 일각문과(위) 안채의 한편. 천사의 나팔이 꽃을 피우고 있다.

안채에서 예전 밖으로 나가는 문은 중문 말고도, 중문채 끝에 일각문이 있어 그곳으로 통행을 했다. 현재 일각문 밖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남아있는 집의 전체적인 구조로 보아, 처음 이 집을 지었을 당시의 모습이 그려진다. 길상사를 짓기 위해 사랑채와 행랑채 등을 부수었다는 주민들의 이야기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안채의 앞에 길게 마련한 광채는 부속 건물이다. 이곳은 곡식이나 여러 생활용품을 보관해 두던 곳으로, 곳간, 헛간, 광 등을 마련했다. 담 밖에서 보는 광채는 10여 칸이나 되는 -자형으로 꾸며졌다. 이러한 광채의 크기로 보아도, 이집을 지었을 때는 정말 운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채는 열칸 정도로 지어 곡식 등을 보관하였다.

밖으로 나와 안채의 뒤편을 바라다본다. 뒤편에는 낮은 굴뚝들이 연이어 나 있다. 뒤편의 길가로 난 담장이 높게 되어있고, 그 밑으로 차이를 두어 안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이 뒤편이 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저 안채만 남았어도 단아한 형태로 지어진 신헌고택. 이 집의 밤은 온통 꽃향기로 뒤덮일 것이다.

언젠가 늦은 시간 막걸리 한통 사들고 다시 이 집을 찾아, 휘영청 밝은 달밤에 천사의 나팔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에 취해보고 싶다.

안채의 뒤편으로는 낮은 굴뚝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어릴 적 유관순 열사를 보고 ‘유관순 누나’라고 호칭을 했다. 아마 당시 여자아이들이 줄넘기를 하면서 불러대던 유관순 열사의 노랫말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꽃다운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에도 만세운동을 주도해,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열사의 죽음이 모든 국민 전체가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이 마음이 아파, 고무줄놀이를 하는 소녀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놀고는 했다.


사적 제 230호 생가지를 돌아보다.

열사의 생가지는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338-1에 소재한다. 이곳은 현재 사적 제23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생가가 아닌 생가지라는 것은,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임을 의미한다. 집은 그 당시의 것으로 복원을 했지만, 당시의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지성 호우가 어지간히 퍼붓는 날 찾아간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 집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초가 담장 밖에 서 있고, 사립문 안으로는 ㄱ 자형의 안채와 맞은편에 헛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광과 부엌, 안방이 있고 꺾인 부분에 대청과 건넌방이 있다. 집이라야 모두 5칸 남짓하다. 맞은편에는 2칸의 헛간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집에서 어린 한 소녀가 나라를 위해 홀연히 떨치고 일어나, 아우내 장터에서 목청을 높여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목숨을 잃은 곳이다. 비는 아직 그치지를 않았지만 차마 우산을 쓰기도 죄스럽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점점 죄스럽기만 해, 고개를 떨어트리고 만다.


안채 광의 문짝은 떨어져 나간채로 방치가 되고 있다.

열사의 집은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 서야

천안은 독립을 상징하는 고장이다. 그리고 그 상징의 한 가운데에 유관순이라는,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해 숨져간 충혼이 있다. 1902년 12월 16일 이곳에서 태어난 열사는,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1919년 3월 1일 기미만세운동에 참여를 했다.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 온 열사는 유림들과 학교, 교회 등을 찾아다니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는 3천여 명이 참가한 호서지방 최대의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날 가족들은 일경의 총칼에 무참히 살해가 되었고, 열사는 일경에 체포가 되어 경성복심법원 최종판결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끊임없이 만세시위를 하다가 갖은 고문에 못 이겨,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열사의 동생이 살면서 사적지를 관리하던 집. 지금은 비어있다(위) 아래는 매봉교회

우리는 열사를 몇 번이나 더 죽이려는가?

생가지를 돌아보는데 괜히 마음이 씁쓸해진다. 그래도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임에도, 관리가 썩 잘되는 것 같지가 않다. 물론 기념관이야 마련이 되어 있지만, 그래도 의미가 더 깊은 생가지임에도 달랑 초가 집 하나만이다.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래 숨져간 열사에게는 참으로 박한 대접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이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안채 끄트머리에 광문은 어디로 떨어져 나갔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성의 없이 마련해 놓은 장독대가 눈에 거슬린다. 물론 그 당시 열사의 집 환경이 커다란 장독대를 가졌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저 장식용으로 몇 개 진열한 독들이 고작이다. 뒤편에는 그 어느 곳에나 잘 만드는 배수로도 없다.


뒤편에는 독 몇개를 형식적으로 놓은 장독대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배수로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아래)

열사는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3등 공로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 그러나 모 언론사의 사주는 일제의 징병, 학병을 독려하는 수편의 글을 쓰고도 2등 건국훈장을 받았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니 참담한 마음이다. 사적으로 지정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보다는, 그곳을 잘 보존해 민족의 긍지를 심어주는데 더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열사의 생가지를 돌아보면서, 그저 목이 메어오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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