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채의 대청과 건넌방 사이에 광이 있는 특별한 집이 있다. 충북 제천시 금성면 구룡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37호인 박도수 가옥은, 안채의 대청과 건넌방 사이에 광을 두고 있다. 날이 추워서이지 겨울철 난방을 하느라 비닐로 안채의 전면을 모두 막아 놓았으나, 전면에 보이는 살창이나 대청과 붙은 쪽의 판장문 등이 광임을 알 수 있다.

왜 이곳에 광을 들여놓았을까? 박도수 가옥은 현재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실례를 범할 수가 없었다. 비닐로 막은 안쪽을 자세하게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집이다.


판자벽으로 막은 문간채의 조형미

대문채의 앞에는 넓은 마당을 두고 있다. 좌측으로부터 대문, 두 칸의 방과 광으로 구성된 대문채는 초가로 지어졌다. 20세기 초에 지어졌다는 대문채는, 한편을 판자벽으로 막아 헛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단순한 판자벽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각종 농기구 등을 쌓아두는 헛간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부정형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았다. 두 칸의 방 앞에는 툇마루가 없이 바로 툇돌로 내려가게 돌을 놓았다. 대문채의 바깥쪽 문틀을 꾸민 목재의 문양으로 보아, 이 대문채를 사랑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듯 하면서도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는 박도수 가옥의 대문채다.



특히 대문채의 안으로 들어가면 판자로 만든 굴뚝이 더욱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마치 푸근한 고향집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그러한 정겨운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살기에는 불편할 줄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집이다.

모채의 쓰임새는?


박도수 가옥은 - 자형의 대문채와 ㄱ 자형의 안채가 있고, 건넌채인 모채가 트여진 쪽을 막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형으로 꾸며졌다. 20세기 초에 대문채와 함께 지어진 모채는 대문채 옆에 난 일각문을 통해 드나들 수가 있도록 하였다. 양편에 부엌을 두고, 가운데 두 칸의 방을 드린 모채는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아마도 대문채를 사랑으로 사용했을 경우 이 모채는 행랑채의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 것 같다. 기존의 문간채나 안채보다 단순하게 지어진 것도 그렇지만, 가운데 방을 두고 양편에 부엌을 둔 것이 이 모채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모채를 드나드는 별도의 문인 일각문을 두었다는 점도 그러하다. 대농이었다는 박도수 가옥의 구성에서 보면, 이 모채 외에는 행랑채로 사용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안채에 낸 광은 종자를 보관하는 곳?

비닐 밖에서 확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쉬움이 남는 박도수 가옥. 전체적으로는 서쪽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차례로 두고, 꺾어진 부분에서 두 칸 대청과 광, 건넌방을 두고 있다. 특이한 것은 바로 이 광이다, 광을 이곳에 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농이었다는 박도수 가옥에서 마땅히 광을 둘만한 공간 확보가 어렵다고 해서 안채에 광을 둘 이유는 없다. 아마도 이 광의 용도는 농작물의 종자를 보관하는 곳이었던 곳 같다.



대청에 다락을 만들어 사당을 드린 것도 이 가옥의 남다른 면이다. 광을 지나면 건넌방의 마루를 높이고 투박한 난간을 둘러놓았다. 아마 이 건넌방을 안사랑방으로 사용을 했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반 가옥보다는 특이하게 꾸며진 박도수 가옥. 집안의 구성이라든가, 꾸밈이 전례가 없다는 집이다. 동치(同治) 3년인 1864년에 지어졌다는 상량문이 있는 박도수 가옥. 그 특이함이 눈길을 끈다.




안채의 서쪽 끝에 있는 부엌은 대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판자 바람벽을 설치했다. 그리고 위편에 까치구멍을 내고, 아래편에도 까치구멍을 내었다. 대농의 집이라기엔 조금은 좁다는 느낌이 들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좁은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을 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안채 뒤편의 툇마루가 그러하다, 일반 가옥의 툇마루보다는 넓게 꾸며졌다. 집안에서 사용하는 기물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점도 이 가옥의 특징이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고개 너머를 ‘잿말’이라고 한다. ‘잿말’이란 <고개마을>이라는 뜻이다. 잿말은 충주군 감미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음성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이수일, 병조참판을 지낸 정우명 등이 이 잿말 출신이다. 특히 효자를 배출한 마을이란 점에 마을 주민들의 자긍심이 상당한 곳이기도 하다. 효자 김대환은 부친이 심부전증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자, 20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장기를 이식해 부친을 회생시키기도 했다.


이완대장의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곳

이러한 잿말에 중요민속문화재 제141호인 김주태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김주태 가옥이 유명한 것은 이곳에서 이완대장이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꿈을 키웠다는 것이다. 이완(1602∼1674)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인조 2년인 1624년 무과에 급제한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경기도 수군절도사 등의 자리를 역임하였다.

이완대장은 48세인 1649년 효종이 북벌 정책을 계획할 때, 어영대장, 훈련대장을 시작으로 병조판서를 지냈다. 이완대장은 당시 제주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신무기를 만들기도 했다.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자, 북벌 계획이 전면 중단되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현종 때에는 수어사로 임명되었으며, 포도대장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사대부가의 위엄이 서린 사랑채

이완대장이 어린 시절 살았다는 김주태 가옥은 사대부가의 위엄을 그대로 지닌 고택이다. 김주태 가옥은 300여 년 전에 건립하였다고 하지만, 이완대장이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400년 가까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의 집이 현재의 김주태 가옥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안채는 19세기 중엽에, 사랑채는 상량문에 고종 광무 5년인 1901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김주태 가옥의 사랑채는 솟을대문을 지나 석축으로 2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 자로 사랑채를 앉혔다. 남향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지체 높은 사대부가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준다.

솟을대문에서 사랑채를 오르려면 계단을 올라 앞마당이 있고, 그 위에 축대를 올려 사랑채를 지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랑채는 솟을대문의 지붕과 같은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 사랑채를 마주하면 좌측으로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다. 아궁이는 앞에서는 벽으로 막혀 볼 수가 없다. 우측 끝에는 누마루를 한단 높여 누정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전면 모두 창호로 문을 냈으며, 뒤편에는 양편으로 작은 문을 만들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하인들이 묵을 수 있는 행랑방들이 줄을 지어있다. 굳이 사랑의 어르신을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이 지어진 집이라는 느낌이다.



 

대문채엔 난 쪽문의 비밀

김주태 가옥의 대문채에는 방이 없다. 대문의 양 편으로는 곳간을 드렸다. 그런데 이 대문을 자세히 보면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대문을 마주하고 우측을 보면 작은 문이 하나 있다. 쪽문이라고 하는 이 문을 열면, 천정이 낮은 곳으로 허리를 굽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즉 대문을 열지 않고도, 이 문으로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게 만들었다.

이 문은 언제 사용하였을까? 혹 사랑채에서 바라보면 대문으로 드나들기가 버거운 하인들이 이문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굳이 번거롭게 대문을 열지 않고, 이문을 통해 출입을 하였을까? 그렇다고 하면 위에 처정을 두어 굳이 머리를 숙이지 않도록 했을 터인데. 고택을 답사하면서 나름대로 생긴 질문과 답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재미를 느껴보기도 한다.



철저히 통제가 된 안채

사랑채의 뒤편에 자리한 안채는 안 담장을 둘렀다. 그러나 사랑채를 지나 안채를 들어가려면 좌측으로 난 문과, 우측에 사랑채와 안채와 연결이 된 담장의 일각문을 통하지 않고는 안채를 들어갈 수가 없다. 안채의 담장에는 또 다시 중문이 자리하고 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곳을 통하지 않고 안채를 출입하기는 어렵다. 결국 철저하게 통제가 되어있는 형태이다.

김주태 가옥의 안채는 T 자 형태로 지어졌다. 이런 형태는 경기지방의 사대부 가옥에서나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안 담장에 낸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ㄱ 자형으로 자리하고 좌측에는 광채가 있다. 안채는 앞마루를 높인 건넌방과 두 칸 대청, 그리고 사랑방이 있다. 꺾인 부분에도 방과 부엌이 달려있다. 장대석으로 놓은 기단 위에 안채를 지었는데,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안채 모습을 그대로 지켜냈다.



담장과 굴뚝의 멋스러움

김주태 가옥의 또 하나의 멋은 담장이다. 황토와 기와를 이용해 쌓은 담장의 문양, 수키와를 엎어놓고, 그 사이에 황토를 넣어 문양을 만들었다. 밑에는 돌을 다듬지도 않고, 그냥 황토와 섞어 쌓았다. 김주태 가옥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담장이다. 예전부터 이런 담장을 했는지, 아니면 최근 보수룰 하면서 이런 담장을 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담장 하나가 주는 재미는 상당하다.

또 하나의 멋을 찾으라 한다면 굴뚝이다. 기와와 백회를 이용해 조성한 굴뚝은 낮고 작다. 전체적인 집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거의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굴뚝은 중간에 네모난 작은 창을 내고, 위는 사각형의 낮은 피라미드처럼 만들었다. 이런 작은 것 하나까지도 주의 깊게 꾸민 집이다. 이러한 담장과 굴뚝이 있어, 집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멋스럽게 만들었다. 김주태 가옥만이 갖고 있는 공간 구성은 그래서 뛰어나다.

소를 타고 다녔다는 정승 고불 맹사성. 맹정승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많이 전하는 편이다. 정승 고불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9년인 1360년에 태어나, 조선조 세종 20년인 1438년에 세상을 떠났다. 려말과 선초에 걸쳐 세상을 살다 간 맹사성은 본관은 신창이며 자는 자명, 호는 고불이다.

많은 벼슬을 거쳐 1427년에는 우의정이 되었으며, 1432년 좌의정을 지내고 난 후 1435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정승 황희와 함께 조선 초 우리 문화를 금자탑을 이룩한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고불 맹사성.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맹사성은 검소한 관리로 명성을 높였으며, 효자로 유명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지기도 했다.


청빈한 삶을 살다간 맹사성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소재한 고불 맹사성의 옛집. 사적 제109호인 '맹씨 고택'은 맹사성이 살던 고려 때 지어진 고택과 더불어 맹사성이 심었나는 수령 600년이 지난 은행나무, 그리고 맹우와 맹희도, 맹사성의 위폐를 모신 세덕사가 있다.

평소 청빈한 삶을 살아 온 맹정승은 아랫사람이라고 하여 절대로 무시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면 대문 밖까지 나가 맞아들이고, 언제나 상석에 앉혔으며 손이 떠날 때도 반드시 대분 밖까지 배웅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하는 ‘쌍행수’

고불의 고택이 있는 곳을 ‘맹씨 행단’이라고 한다. 행단은 은행나무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돌담으로 양편을 쌓은 쪽문 안에는 <청백리 고불 맹사성 기념관>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밖으로 돌아 계단을 오르면 맹사성의 유적을 관리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 듯, 솟을대문 안으로는 ㄱ 자 형의 집이 있다. 그 집을 바라보고 우측 계단으로 오르면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고물 맹사성이 1380년경에 이곳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이다. 두 그루 은행나무 중 우측의 은행나무는 외과 수술을 한 듯, 나무 가운데에 남성의 성기 같은 시멘트로 바른 죽은 가지가 보인다. 수령 630년이 지난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쌍행수'라고 부르는데, 높이는 35m 둘레는 9m 정도에 이른다. 잎이 떨어져 가지만 남아 있어도 이렇게 위용을 보이고 있으니, 여름 무성한 잎을 달고 있다면 대단할 것 같다.

최영장군도 살다 간 680년 역사의 맹씨 고택

은행나무 앞으로 자리하고 있는 고택 한 채. 바로 고불 맹사성이 살았던 고택이다. 이 집은 고려 충숙왕 17년인 1330년에, 최영 장군의 부친인 최원직이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무민공 최영이 살았던 집이다. 최영장군과 고불 맹사성이 살았다는 고택 한 채. 이 집의 내력이 대단하다.

고불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자사위이다. 최초로 지어진 지 680년이나 된 이 고려 때의 고택은, 최영과 맹사성이라는 역사의 일면을 장식한 두 사람이 거처로 정했던 곳이기도 하다. 맹씨 고택은 성종 13년인 1482년, 인조 20년인 1642년, 그리고 순조 때인 1814년과 1929년에 각각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집은 '공(工)' 자 형으로 꾸며져 있으며, 27.5평에 불과하지만, 고려 때의 고부재와 창호 등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집이다.




집안 곳곳에 배어 있는 고불의 청렴

두 사람의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 살다 간 고택. 최영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다. 고불 맹사성은 청백리로 소를 타고 다니며 직접 아궁이에 불을 땔 정도로 청렴한 정승이었다. 이렇게 세상의 탐욕과는 거리가 먼 두 분의 마음이 맹씨 고택에는 그대로 배어 있다. 기단은 커다란 자연석을 이용하였고, 주추도 다듬지 않은 덤벙주추를 놓았다. 중앙에는 두 칸의 마루를 놓고, 양편에는 길에 방을 드렸다. 그 방의 끝이 앞뒤로 삐죽이 나와 工 자 형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방은 별다른 꾸밈없이 양편에 길게 들였는데, 뒤편을 막아 각각 윗방을 들였다. 이 집의 아궁이는 별다르게 부엌을 만들지 않고, 앞면 담 밖에 아궁이를 놓았다. 이런 아궁이의 형태는 밑에 사람을 쓰지 않고, 직접 불을 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불 맹정승의 청빈한 삶을 그려 볼 수 있는 것이다.



700년 가까운 세월. 그렇게 청빈한 주인들이 살다 스러져간 고택 한 채. 그 집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요즈음 돈푼께나 있고, 권력께나 가졌다는 자들은 앞을 다투어 고래등같은 집을 짓고 자기자랑을 하고자 할 때, 그저 작은 집 하나로 비바람을 피했다. 그 청빈하고 세상에 찌들지 않은 마음 하나를, 비워놓은 내 마음에 담아간다.

우리나라에 99칸 고래등 같은 집들이 있다. 전북 정읍에 있는 김동수 가옥이 99칸이었으며, 경주 최부자집도 99칸이라고 했다. 그런데 충남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갈산중학교 인근에 자리한 충남 민속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전용일 가옥은, 그보다 반 칸을 더 합한 99칸 반이라는 것이다.

현재 전용일 가옥에서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문은, 예전에는 사랑채를 지나 안채를 들어갈 수 있는 중문이었다고 한다. 99칸 반의 대저택. 전용일 가옥의 주인은 왜 이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지은 것일까?


99칸 반의 저택, 지방 토호의 상징인가?

99칸 반의 집이라니, 그 규모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아마 이 지역의 부농의 집이었을 목조기와집은 지금은 안채 28칸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800년대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용일 가옥의 안채는 바람벽을 둔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청과 온돌방을 두고, 좌우의 날개채를 달아 남향을 향한 집이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보면 ㄷ 자형을 띤 집의 구조지만, 사랑채가 떨어져 있어 튼 ㅁ 자형이다, 중문을 달린 중문채와 안채의 날개채 사이에는 쪽문을 낸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가옥구조로 축조가 되어있다.




예전에는 100칸이라는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 칸을 뺀 99칸의 집을 짓는 것이 지방의 토호들이나 세도가들이 집을 짓는 방법이었다. 일설에는 100칸의 집은 궁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대부가나 토호들이 100칸을 지으면 바로 모반이 된다고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 99칸에서 전용일 가옥은 그보다 반 칸을 더 달아낸 99칸 반의 집이었다고 한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 후원을 보아도 이 집의 세를 알만하다. 현재는 안채를 중심으로 네모난 대지위에 높은 담장을 쌓고, 그 안에 안채만이 남아있지만 모든 것 하나하나가 전용일 가옥의 가세를 알기에 충분하다.



부재 등이 돋보이는 전용일 가옥

전용일 가옥의 사랑채 앞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 주변 건물에는 팔각 돌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석조 부재 등이 아직도 인근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당시에 돌을 깎아 기둥을 세운 건축물을 지었다고 하니, 아마도 지방의 사대부가들도 이런 집을 짓기가 어려웠을 것만 같다.

집안 곳곳을 살펴보면 이 집이 부재 사용법 하나서부터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쪽문의 문턱 하나에도 세심한 배려를 한 전용일 가옥. 조선 후기 건축 기술과 세련된 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전용일 가옥은 19세기 중반에 세워진 대표적인 양반집이다.



홍성의 대부호 양반집으로 알려진 전용일 가옥. 영원한 세도는 없다는 옛 말이 실감이 난다. 한 때는 99칸 반의 대부호답게, 그리고 지방의 세력가답게 인근 근동에서 이 집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고 했다는 한다. 현재 남아있는 안채의 규모나 그 사용한 부재들을 보면, 이 집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99칸 반의 영화로움은 사라졌어도, 그 자취는 집안 곳곳에 남아있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번지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90호인 명재고택. 이 집은 한 마디로 우리나라 한옥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고택이다. 조선조 숙종 때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명재고택은 조선시대 상류 양반가의 표본이 되는 집으이다. 안채는 비튼 ㄷ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안채의 앞으로는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튼 ㅁ자 형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잘 정리된 앞마당에서 풍기는 멋

명재고택을 찾아가면 우선 집이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이 든다. 바르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집 앞에는 네모나게 조성한 연못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샘이 있다. 주변 정리가 잘 된 앞마당은 너른 공지가 마련되어 있어, 주차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사랑채 옆으로는 장독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색다른 운치를 더해준다. 아마도 곁에 있는 집에서 전통 장이라도 생산을 하는가 보다.



사랑채의 우측 계단 위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사당 역시 장독들과 잘 어울린다. 사당은 사랑채 우측으로도 오를 수가 있지만, 안채에서도 일각문을 통해 오를 수 있도록 동선을 조성하였다. 아마 사당에 제라도 올릴 경우, 부녀자들이 손쉽게 사당을 오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 같다

열린 공간으로 조성한 명재고택의 사랑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열려 있다고 한다. 앞으로 펼쳐지는 마을을 향해 언제나 개방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는 윤증 선생의 일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명재고택의 주인인 윤증 선생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자인, 호는 명재 혹은 유봉이다. 김집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송시열, 윤휴, 이유태 등 당대의 명현들과 함께 교분을 쌓았다.



윤증 선생은 등과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유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에 임명되면서, 공조좌랑, 세자시강원진강,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의 임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윤증 선생은 이러한 벼슬을 모두 사양하고 한 번도 실직에 나아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객을 해보아도 선생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쉽지가 않은 것이 이런 일화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윤증 선생은 마을사람들과 늘 함께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두 단의 높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조성을 하였다. 정면 네 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는 가운데 두 칸은 온돌을 놓고, 양편 두 칸은 마루방으로 조성하였다. 바라보면서 좌측은 높이 올린 누마루 방으로 조성하였는데, 사랑채 온돌방 앞에 놓인 툇마루를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돌출을 시켰다. 우측의 마루는 시원하게 개방을 해놓았다.

옆을 판자문으로 마감을 한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놀랍다.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면 계단식으로 꾸민 건물에 툇마루를 통해 안채를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까지 이어진다. 사랑채를 보면서 좌측으로는 문간채로 이어지며,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갈 수가 있다. 이러한 사랑채의 누마루 방은 문을 들어 올려 완전 개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 한옥의 미학을 대표한다는 명재고택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다.  




대청 양편에 고방을 둔 안채의 겸손함

고방이란 고택에서 잡다한 살림살이나 곡식 등, 다양한 물건들을 넣어두는 작은 방이다. 규모가 큰 집에서는 고방 대신 광이라 불리는 창고를 여러 곳에 배치하였으나, 규모가 작은 집에서는 안방과 부엌 가까이에 고방을 설치하고 채광과 환기가 잘 되도록 하였다. 명재고택의 색다른 점은 바로 이러한 고방을 대청 양편에 두었다는 것이다.

규모가 꽤 큰 집인데도 불구하고 명재고택에는 광채가 따로 없다. 이것은 윤증 선생이 허세를 부리기보다는, 주변에 민초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절대로 민초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채는 북쪽중앙에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대청을 두고 있다. 그리고 양편에 날개채를 달아냈다. 대청 양편 뒤쪽에는 양편에 고방을 두고, 대청의 서쪽에는 두 칸의 안방과 한 칸의 윗방을 두고 있다. 남쪽으로는 두 칸 넓은 부엌과 부엌 위에는 다락이 있다. 그리고 대청 동쪽으로는 건넌방과 윗방 남쪽으로 부엌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안채의 ㄷ자와 문간채, 사랑채가 연결되어 ㅁ자형을 이루며, 대청, 누마루, 고방 등의 배치가 품위 있게 나열이 되었다.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 앞면에는 나무를 위로 질러 시렁을 낸 것도 명재고택의 특징이다. 그리 넓지는 않으나 그래도 조심스러운 집안 여인네들의 동선을 생각해, 이동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꾸민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휴일이 되면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명재고택. 아마도 이 고택에서 느낄 수 있는 선생의 겸손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닌지. 선생의 마음 씀씀이가 그대로 배어있는 명재고택을 쉽게 뒤로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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