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고택 중에는 한데 부엌이라고 부르는 구조물이 있다. 한데 부엌이라고 하면 건물 안에 속한 부엌이 아닌 밖으로 노출이 된 부엌을 말한다. 이런 부엌은 비가 많이 내리거나 습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옥의 구조이다. 충북 제천 청풍 후산리 고가에는 이 한데 부엌이 있다. 한데 부엌은 기존의 가옥 건물 한편을 안으로 집어넣어 그곳에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후산리 고가는 툇간을 달아낸 한데 부엌이다.

 

대청에 재실을 배열한 후산리 고가

 

 

현재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소재한 후산리 고가는 원래 제천시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던 조선 말기의 가옥이다.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문화재단지 안으로 1985년에 이건했으며, 현재 충북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ㄱ 자 팔작집으로 지어진 후산리 고가는 좌측으로 부엌과 2칸 크기의 윗방이 있고, 꺾어진 곳에 두 칸 대청이 두었다. 이 대청의 윗방과 접한 부분을 안쪽으로 돌출을 시켜 재실을 배열했다. 이러한 경우는 드문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집 뒤쪽으로 돌출을 시켜 재실 등을 배열하고 대청을 넓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는 넓지 않은 후산리 고가의 조금은 답답한 듯한 구성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부엌에 특별함이 있다

 

후산리 고가의 부엌은 남다르다. 그저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칠 만한 것들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엌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엌이라는 것이 부녀자들의 공간이다 보니 나름대로 세사한 부분까지 정성을 쏟은 듯하다. 우선 부엌에 난 까치구멍이 색다르다. 일반적으로 살창으로 구성하는 까치구멍이지만, 윗방의 다락 아랫부분에도 까치구멍이 나 있다. 그럼에도 부엌문 위에는 창처럼 끝을 만든 살창을 내고 있다.

 

부엌의 뒤편으로 나 있는 퇴칸 위로도 칸이 넓은 살창을 내어 놓았다. 또한 뒤편의 벽을 밖으로 돌출을 시켜 문을 달아 부엌의 기물들을 넣어 놓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그런가하면 후산리 고가의 부엌 천정은 나무를 가로, 세로로 가로질러 '정(井)'자 모양의 문양이 드러나게 했다. 작은 것 하나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 부엌이다.

 

 

한데 부엌과 툇마루의 용도, 감탄을 하다

 

한데 부엌이란 말 그대로 밖으로 노출이 되어있는 부엌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건물의 한편 위를 돌출시키고, 그 아래쪽에 아궁이를 들이는 것이 한데 부엌의 모습이다. 그러나 후산리 고가의 한데 부엌은 툇간을 달아냈다. 후산리 고가는 대청에서 오른쪽으로 건넌방과 사랑방을 두고 있다. 건넌방과 사랑방의 툇마루를 높이하고, 그 밑에 함실아궁이를 드렸다.

 

한데 부엌은 한 칸 정도의 규모로 달아냈는데, 사랑방의 앞쪽으로만 툇간을 달아냈다. 이는 사랑방에 손님들이 찾아들 것을 대비해, 불을 자주 땔 수 있도록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즉 건넌방은 윗방이 있어 겨울철에는 불을 자주 땔 필요가 없지만, 사랑방의 경우는 다르다. 겨울철에도 사랑방에 손님이 찾아들면, 방을 뜨듯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데 부엌을 툇간으로 달아낸 것이 후산리 고가의 특징이기도 하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이용

 

사랑채를 별도로 구성하지 못한 후산리 고가는 나름대로 사랑채의 용도를 꾸며냈다. 그것은 바로 사랑채의 옆으로 두 곳의 문을 내고, 그 앞에 넓은 툇마루를 놓았다는 점이 색다르다. 툇마루는 처마를 길게 빼어 마루 끝과 처마 끝이 일직선상에 놓이게 하였다. 툇마루는 사랑방의 옆면 전체를 모두 낮게 깔아, 이곳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넓은 툇마루에 앉아 술 한 잔에 시 한수를 읊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멋이리라.

 

 

 

이 사랑방의 툇마루만이 아니고 후산리 고가의 툇마루들은 일반 가옥마다 넓은 것이 특징이다. 그런 이유는 비교적 넓지 않은 후산리 고가이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활용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인 듯하다.

 

집은 그리 크지 않지만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추구했고, 사용하기에 편안하게 구성한 후산리 고가. 조선조 말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민가 가옥의 구성을 보이고 있는 후산리 고가는 낯익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좁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그 공간의 구성을 적절히 하여, 집안사람들이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볼수록 정감이 가는 가옥이

 

김좌진 장군의 본관은 안동이다.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백야라는 호를 많이 사용한다. 부유한 명문 출신인 김좌진 장군은 15세 때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호명학교를 세웠다.

 

1911년 군자금 모금혐의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던 김좌진 장군은, 1916년 노백린·신현대 등과 함께 박상진·채기중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광복단에 가담하여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전념한다.

 

 

나라사랑으로 일관한 삶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 39인에 가담한 장군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어 낸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해내고 총사령관에 취임한 후, 1928년 혁신의회 조직한다. 1930년 1월 24일 영안현 산시역의 자택 앞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 당한 장군은,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된다. 간략한 약력만 보아도 장군의 나라사랑이 어느 정도였는가 짐작이 간다.

 

나라를 위해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오직 조국의 안녕을 위해 몸 바쳐 온 김좌진 장군.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에 소재한 생가는 현재는 1992년부터 성역화 작업으로 인해 깨끗하게 정비가 되었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광으로 구분이 되어있고, 밖에는 마구간이 있다.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와가로 꾸몄다. 그저 평범한 시골집답게 꾸며진 이 생가는 남다른 것들이 있어,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세상 사람들에게 고함

 

집의 대문에는 <김좌진>이라는 문패가 걸려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우물과 장독대가 보인다. 어느 집이나 있는 것이지만 무엇인가 색다른 느낌이다. 평생을 올곧은 정신으로 살다가 가신 김좌진 장군. 아마 그런 분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기 때문에, 그 모든 하나하나가 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집안을 둘러보다가 대청마루에 걸려있는 글귀 하나를 본다.

 

'청백전가팔백년(淸白傳家八百年)', 청백리의 집안으로 팔백년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이 글을 보는 순간 머리가 띵하다. 요즈음의 사람들 얼굴과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병역비리에 세금포탈, 거짓증언에 말바꾸기, 여기저기서 돈받아 놓고 오리발 내밀기. 서민생각은 추호도 하지않고 입으로만 서민 사랑하기 등의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과 각기 다른 주장들이 세상을 온통 벌집 쑤신 듯 시끄럽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당연하다는 것이요, 또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의 말살이라고 고함을 쳐댄다.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은 좀 배워라

 

오직 한평생 나라만을 생각하고, 팔백년이라는 긴 시간을 청백리의 집안이란 글을 남긴 김좌진 장군. 지금의 세상에 계셨으면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아마 모르기는 해도 세상이 보기 싫어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시지나 않았을까? 아니면 민초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불철주야 고민하고 스스로 행동을 하셨을까?

 

 

 

15세 때에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농토를 배분한 장군이다. 지금의 사회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일침을 놓으셨을까? 집 장독대 곁에 쭈그리고 앉아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배불리 먹고 가득 쌓아놓고도 그것이 모자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그 모습들을 보았다면, 아마 피눈물을 흘렸을 것만 같다.

 

소리 없는 고요. 평생을 격랑의 회오리 속에서 살아오신 장군을 그린다. 한 낮의 해가, 그리고 바람이 통한의 상처를 어루만지 듯 지나간다. 장군의 정이 가득담긴 손길처럼

아침부터 안개가 심하게 끼었다. 안개가 걷히면 답사를 가리라고 마음을 먹고 오전 내내 기다려 보았지만, 안개가 걷힐 것 같지가 않다. 오후 두시가 지나 충북 음성으로 향했다. 네 시가 다 되어서 도착한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공산정 마을. 마을 입구에서 게이트볼을 즐기고 계시는 어르신들께 고택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친절히 가르쳐 주신다.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니 초가지붕이 보인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43호인 음성 서정우 가옥이다.

 

대문채를 붙여지은 사랑채의 단아함

 

우선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참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집이다.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사랑채를 지었다. 사랑채는 뒤편에 대문채를 달았는데, 이러한 형태가 우리나라 가옥 구조상의 한 형태란다. 앞에 사랑채를 두고 뒤편으로 대문채를 붙여 내었다. 사랑채와 대문채가 ㄴ 자 형태로 자리를 잡고 안채가 뒤편에 ㄱ 자 형태로 자리해, 전체적으로 보면 ㅁ 자형의 가옥구조를 하고 있다.

 

 

사랑채는 잘 다듬지 않은 돌을 이용해 이단으로 축대를 쌓은 후 그 위에 마름모꼴의 주추를 놓았다. 앞에는 마루를 놓고 뒤편으로 방을 드렸다. 사랑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에는 창고 방을 한 칸 드리고 방 두 칸에 이어서 큰 문을 단 사랑방을 만든 소박한 사랑채의 모습이다. 사랑채 뒤편으로는 대문채를 이어지었다. 대문채는 방 한 칸을 사랑채에 달아내고, 대문과 두 칸의 곳간을 이어 단출한 모습이다. 전체적은 집안 구조가 중부지방 민초들의 삶이 배인 듯한 형태이다

 

돌과 기와를 이용한 아름다운 담벼락

 

서정우 가옥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사랑채와 안채 등의 담벼락이다. 일반적으로 집의 담벼락에 문양을 넣을 때는, 꽃이나 나무, 새, 동물 등을 새겨 넣는다. 그러나 서정우 가옥의 담은 돌과 기와를 이용해 문양을 만들었다. 돌은 네모난 것들을 구해 마름모로 놓고, 그 위에 기와를 이용해 줄을 맞추었다. 얼핏 보아도 아름답다.

 

 

 

그저 무료한 담벼락을 만드는데 비해, 서정우 가옥의 담벼락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멋을 내었다. 마침 함께 답사 길에 나선 친구가 한옥을 지을 때 관계하는지라, 이 담벼락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전통 가옥을 보수하느라 전국을 다녀보았지만, 이런 담벼락의 형태는 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무료한 담벼락을 돌과 기와로 못을 낸 서정우 가옥.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가보다.

 

평범한 안채의 부엌에도 무엇인가 있다

 

사랑채의 뒤편에는 ㄱ 자로 꺾어 지은 안채가 있다. 안채는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부엌과 안방, 윗방을 차례로 배열하고, 꺾인 부분에 대청을 드리고 건넌방을 꾸몄다. 대청은 두 칸으로 달았으며, 뒤편에 커다란 창호를 두 곳을 내어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이 든다. 대개는 판자문을 하는데 비해, 서정우 가옥은 대청의 뒷문을 창호로 내어 멋을 냈다. 아마 이집을 지을 때부터 집주인이 꽤나 멋을 아는 분이었을 것 같다.

 

 

 

서정우 가옥은 안채의 건축연대가 19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한다. 상량문에는 1924년에 다시 고쳐지은 것으로 적고 있다. 사랑채도 안채를 보수할 때 지은 것으로 본다. 그저 평범한 안채에는 부엌이 조금 특이하게 만들어졌다. 커다란 부엌문을 달고 그 옆에 작은 문을 하나 만들었다. 그리고 부엌 바깥 담벼락의 위에는 나무를 넓게 띄어 창을 낸 까치구멍을 냈다. 연기가 잘 빠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금은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람을 피하느라 비닐로 까치구멍을 막고 환풍기를 달아, 조금은 멋이 감해졌다는 느낌이다. 부엌의 담벼락 역시 사랑채의 담벼락과 같이 돌과 기와를 이용했다. 평범한 듯 하면서도 무엇인가 색다른 멋을 낸 서정우 가옥. 그래서 더 정감이 간다.

 

 

 

뒤울안 텃밭과 판자굴뚝이 백미

 

서정우 가옥의 또 하나 아름다움은 뒤울 안에 있는 텃밭이다. 안채의 뒤편이 비탈이 진 것을 축대를 쌓아 평평하게 만들고 그 곳에 작은 텃밭을 만들었다. 텃밭 옆에는 역시 축대를 쌓은 후 장독대를 꾸몄다. 담장이 둘러쳐진 안에 아기자기한 민초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안채의 뒤편에 선 굴뚝이 눈에 들어온다. 널판자로 네모나게 만든 굴뚝이다. 굴뚝의 끝에도 사이를 띄워 덮개를 만들었다. 작은 것 하나하나가 참으로 아름답다는 느낌이다.

 

 

 

중부지방 전형의 민가 가옥이라는 음성 서정우 가옥은 오밀조밀한 멋이 있다. 튀어나지 않고, 안으로 스며드는 멋. 우리 고택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작은 멋 하나가, 사람을 참으로 기분 좋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 고택 답사는 늘 즐겁다. 사람이 살고 있어 여기저기 촬영을 하는데 힘이 들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살아있다는 훈훈함이 있어서 더 좋다는 생각이다. 서정우 가옥을 뒤로하며, 앞으로 만날 많은 고택들을 미리 그려본다. 그래서 안개 자욱한 날이지만, 답사 길이 즐거운가 보다.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52에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이 된 윤황 선생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이 처음에 지어진 해는 정확하게 전해지지가 않으나, 윤황(1572∼1639) 선생의 6대손인 윤정진이, 조선조 영조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 종가로 내려오고 있는 집이다.

 

이 집은 一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구조는 튼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 뒤편으로는 담을 쌓아 안채와 구분을 하고 있으며, 좌측으로는 ㄱ자형의 안채가 자리하고, 우측으로는 l 자형의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우측에는 높게 앉은 사당채가 자리하고 있다. 윤황 선생의 고택은 화려하지 않으며, 간결하게 지은 옛 전통 가옥으로 중부지방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선생의 심성을 닮은 사랑채

 

윤황 선생은 조선조 선조 5년인 1572년에 태어나서, 인조 17년인 1639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다. 자는 덕휘, 호는 팔송으로, 선조 30년인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인조 때에는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내기도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하였다. 1637년 김상헌, 정온 등이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했다는 죄로 청에 붙잡혀 갈 때, 윤황 선생은 자신이 대신 잡혀 가겠다고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선생의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겠다고 자처를 할 수 있는 윤황 선생의 고택 앞으로는 - 자형의 사랑채가 6칸으로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 다섯 칸이 있고, 좌우측에는 반 칸의 높임마루를 한 방이 있는데, 사랑채를 바라보며 좌측은 앞으로 돌출이 된 작은 공간이고, 우측은 측면으로 툇마루를 달아낸 누정 방으로 꾸몄다. 중앙 좌측의 두 칸은 온돌방으로 했으며, 이어 두 칸의 대청을 두었다. 대청은 두 칸 다 네 짝 문을 달아냈다.

 

 

 

이 집은 딴 곳에서 옮겨왔다고 하는데, 대청의 기둥을 보면 목재를 재활용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대청 앞으로 나란히 선 네모난 기둥들의 위편을 보면, 나무를 끼웠던 흔적들이 있다. 당시 파평 윤씨들의 가문에서 이렇게 나무를 다시 활용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도를 부리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를 버릴 줄 아는 윤황 선생의 자손답게, 집을 옮겨 지으면서도 절약을 했다는 것이다.

 

낮은 굴뚝에 얽힌 의미

 

뒤편으로 돌아가면 배수로를 내었는데, 연도가 그 배수로를 지나 낮은 굴뚝과 연결이 된다. 굴뚝을 이처럼 낮게 만드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낮은 굴뚝을 바라보면서 늘 그 굴뚝처럼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위하라는 뜻이다. 종가집들의 굴뚝이 하나 같이 낮은 이유가 바로 그렇다. 집안에 모든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도 겸손하라는 것을 일러주는 교훈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방역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대개 한옥에서 소나무나 참나무 등을 이용해 불을 지핀다. 나무를 넣기 전에는 낙엽 등을 이용해서 불씨를 만드는데, 그때는 연기가 많이 나게 된다. 그 연기들이 낮은 굴뚝에서 뿜어져 나와, 집안 곳곳에 병충해를 잡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한옥에는 그 작은 것 하나하나도 다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안채의 단아함

 

윤황 고택의 안채는 화려하지 않다. 그저 분칠을 하지 않은 맨 얼굴처럼 정숙하다. ㄱ자 형으로 꺾인 안채는 좌측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두고, 꺾인 부분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있다. 사랑채와 같이 안채의 대청에도 창호를 달았다. 그리고 우측 맨 끝 방은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한데 아궁이를 내었다.

 

 

 

이렇게 높임마루를 놓았을 경우 그 측면에는 낮은 툇마루를 놓기도 하는데, 윤황 선생의 고택은 그 흔한 툇마루마저 없다. 그저 치장을 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억제를 한 집이다. 뒤편으로 돌아가며 보수를 하면서 새로 쌓은 듯한 축대가 있다. 그 축재 한편에는 장독대가 놓여있는데, 일반적인 종가의 장독대와는 다르다. 그저 평범한 민초의 장독대와 다를 바가 없다. 무엇하나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치장을 하지 않은 집. 그래서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한 것일까? 윤황 선생의 고택이 바로 그러하다.

 

 

 

자연이 녹아있는 사당채와 연못

 

윤황 선생 고택의 사당채는 양편에서 오를 수가 있다. 사랑채 뒤에서 일각문을 통해 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제의를 지낼 때 종친들이 사랑채에서 바로 오를 수 있도록 낸 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은 안채 뒤편 계단을 통해서 사당채로 오르는 길이다. 역시 담장에 일각문을 내었다. 이 문은 안채에 있는 부녀자들이 음식을 나를 때 동선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에 앉아 좌측 높임마루에서 보면 그 앞쪽으로 작은 연못이 있다. 지금은 주변이 정리가 안 돼 연못을 식별하기조차 쉽지가 않지만, 아마 이 연못에는 꽃이 피고 물고기들이 유영을 했을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닮은 집. 그리고 자연을 위한 집. 논산 윤황 선생의 고택은 집 안에 그렇게 자연이 녹아 있었다.

충주시 엄정면 미내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35호 윤민걸 가옥은, 윤민걸의 고조부인 윤양계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양반가 한옥으로 지어진 이 집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담이 있고, 중문을 들어서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아래채가 있다. 안마당에 있었을 행랑채는 유실이 되었다고 하며,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초가로 지은 광채와 뒷담을 벽으로 삼아 꾸민 사당이 있다.

충주시청 홈페이지에 보면 윤양계는 <병마절제도 위 연길현감 도청부도사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고종 2년인 1865년에 이 집에 살았다고 안내문에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집을 지은 지는 언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윤양계가 이 집에 살았다는 고종 2년에 연길현의 현감이었다고 적었는데, 이는 연일현의 오자로 보인다. 승정원 일기의 한 대목을 보자.



'고종 3(1866)년 5월 16일. 경상 감사 이삼현(李參鉉)의 장계에서 진휼하여 구호한 각읍 가운데 베풀어 도와준 것이 뛰어난 수령들의 별단을 등문(登聞)한 것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하양 현감(河陽縣監) 류치윤(柳致潤)은 오고(五考)를 기다리지 말고 군수에 승천(陞遷)시키되 별천(別薦)의 예로 시행하고, (중략) 연일 현감(延日縣監) 윤양계(尹養桂)와 고성 현령(固城縣令) 윤석오(尹錫五)는 모두 가자하고 영장(營將)의 이력을 허용하고, 우병사(右兵使) 이주응(李周應)은 가자하고, 대구 영장(大邱營將) 서형순(徐珩淳)은 방어사의 이력을 허용하라.‘하였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이 윤민걸 가옥의 조성연대가 언제인지는 좀 더 정확한 고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고종 2년에는 윤양계는 연일현감으로 재임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연일에 있었다고 해서 충주에 집을 짓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사랑채의 뛰어난 미적 감각

안담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별채라고 부르는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ㅡ자형 평면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중앙의 전면1칸은 튼 마루로, 그리고 좌측의 한 칸을 툇마루로 조성을 하였다. 뒤편으로는 온돌방을 놓았으며, 우측의 1칸은 마루를 높여 우물마루를 깔았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사랑채 같은 형태인 듯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재미난 곳이 많다. 우선 우측의 마루방을 높였다는 것도 그렇지만 창호가 색다르다. 이 방은 일반적인 사분함 여닫이문이 아닌 중방 위에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다. 중앙에 툇마루는 앞을 터놓았는데, 좌측의 툇마루는 방처럼 꾸몄다는 것도 이 사랑채의 특징이다. 사랑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벽에 새인 듯한 그림을 그려놓았다. 지난해에 보수를 하면서 그린 것인지, 아니며 오래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재미있다.



안채와 아래채의 단아함

안채는 ㄱ자형으로 꺾여있다. 좌측으로부터 부엌과 두 칸의 방, 대청이 있고 안방의 꺾어진 부분에는 큰 방을 드렸다. 큰 방의 끝에는 판자로 벽을 막은 한데아궁이를 두고 그 위에 다락을 조성했다. 그런데 이 안방의 뒤편에 마루로 놓은 돌출된 부분이 있다. 안채의 우측 벽면에 돌출을 시킨 이 부분은 소중한 것들을 보관하던 '안 창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뒤편의 툇마루 끝에 출입문을 달아 놓은 마루방과 안방에서 들어갈 수 있는 마루방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안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부엌에서 볼 수 있다. 이 정도의 큰 집이라면 까치구멍이 양편으로 나 있는 것이 보편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윤민걸 가옥은 환기를 시키는 까치구멍이 뒤편의 문 옆으로만 있다. 연기 등이 안마당으로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다.



왜 바깥담을 아름답게 했을까?

사랑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3칸의 마루방을 드린 사당이 있고, 그 옆에 초가로 지은 광채가 있다. 그런데 뒷담에 나 있는 사주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바로 바깥 담장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광채와 사당채의 뒷벽이 그대로 바깥담이 되어있는 윤민걸 가옥의 특징이다. 사당과 광채가 떨어진 ㄱ자형으로 되어있는데, 이 바깥담인 벽을 모두 심벽으로 처리를 했다. 왜 이렇게 바깥담을 아름답게 치장을 한 것일까? 이런 바깥담에 대한 꾸밈은 집의 전체가 그렇다. 솟을대문부터 바깥담을 모두 심벽처리를 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었을까? 두고두고 고민을 해야 할 문제인 듯하다.



고택은 아름답다. 그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숨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은 집 주인의 심성을 닮는다. 집을 지을 때는 자신들이 가장 사용하기 적합하게 꾸민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개성을 강조한 것이 우리 고택의 멋이다. 천편일률적으로 변해가는 서구식의 가옥들. 그런데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을 꿋꿋하게 버티어 낸 나름대로의 고집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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