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는 북서적대. 정조 19년인 1795년에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이 적대의 규모는 높이 6.7m 성곽의 성가퀴와 가지런히 쌓되 반은 성 밖으로 나가 있고 반은 안으로 들어와 있다. 아래 부분의 넓이는 7.8m이고 위는 좁아져서 6.4m인데, 거기에 현안 3개가 나있다. 적대의 상부는 자 모양으로 성가퀴를 둘러쌓고, 밖에 3면에는 높이 1.5m에 두께 85의 성첩 11개를 쌓은 다음, 총안을 뚫어 놓았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

 

장안문의 동쪽에는 또 하나의 적대인 북동적대가 있다. 이렇게 장안문의 양편에 적대를 마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적대 안에는 홍이포가 놓여 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유래된 대포이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대포의 명칭을 홍이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다.

 

영조 때 홍이포가 주조되었다는 사실은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안문 양편에 조성한 적대는 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왜 적대 두 곳을 북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 양편에 설치한 것일까? 북문의 명칭을 장안문이라 붙인 것은 이산 정조의 남다른 뜻이 있었다. 장안이란 도성을 의미한다. 정조는 화성을 거점으로 하여 북진정책을 펴기 위해 많은 고심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 북진정책을 하기 위해서는 북문의 역할이 남다르다.

 

즉 만일에 북진정책으로 인해 적과 교전이 붙을 경우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북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이 된다. 그 남북으로 들어가고 나갈 수 있는 상문을 보호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기에 장안문과 팔달문의 양편에 적대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조성한 성문 양편에 조성한 두 곳의 적대. 그곳에는 정조 이산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보인다.

 

 

강화부의 화기에 처음으로 등장한 홍이포

 

홍이포는 남만대포(男蠻大砲)’라고도 부른다.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으며, 홍이포는 길이 215cm, 중량 1.8t, 구경 12cm, 최대사정거리2 ~ 5km 유효사정거리는 700m 인 전장포이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양호 사건 때 사용되었다

 

홍이포가 처음 기록에 보이는 것은 1664년이다. 당시 강도어사 민유중이 병자호란 이후, 강화부의 미곡과 화기에 대한 보유 상황을 조사하는데, 그 목록에 남만대포라는 화기가 등장한다. 당시 강화부의 화기류는 현종개수실록현종56월 계축조에 의하면, 진천뢰 140, 대완구·대포·중포가 65, 소완구 30, 호준포 37, 각 보에는 대포 179, 진천뢰 63, 남만대포 12, 불랑기 244좌 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남만대포 12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남만대포인 홍이포는 12좌로 다른 화기보다 수가 적기는 하였지만, 남만대포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기술이 도입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전래한 서양포에 대해 일반적으로 불랑기라고 부르고 있었다.

 

화성의 홍이포는 영조 때 우리가 만들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홍이는 붉은 오랑캐라는 말로 머리털이 붉은 네덜란드인을 뜻한다. 16세기 네덜란드 선교사들에 중국 명에 전해진 서양대포를 말한다고 했고, 17세기 초 정두원이 서양 선교사로부터 받아 조선으로 전해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영조실록영조79월 신사조에 기록된 훈련도감의 보고 기록에는

본국(훈련도감)에서 새로 마련한 동포(銅砲)50이고, 홍이포가 둘인데, 그것을 싣는 수레는 52폭입니다. 동포의 탄환거리는 2천여보이며, 홍이포의 탄환거리는 10여리나 되니, 이는 실로 위급한 시기에 사용할 만한 것입니다. 홍이포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새로 만든 것으로 예람하시도록 올리니 강동한 자들의 노고를 기록해 주소서.라는 내용이 보이고 있다.

 

장안문과 팔달문 양편에 적대를 만들고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적대에 놓인 홍이포.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유입한 홍이포가 아닌 영조 때 우리기술로 만든 홍이포. 사정거리가 700m에 이르는 이 홍이포의 위력이야말로 화성을 지켜내는 화기 중 가장 강력한 무기였을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에는 모두 3개소의 공심돈이 있었다. 보물로 지정된 서북공심돈과 팔달문과 남수문 사이에 유실된 남공심돈, 현재 남아있는 또 하나의 공심돈인 동북공심돈이다. 동북공심돈은 연무대와 동문인 창룡문 사이에 세워져 있다. 둥근 원형으로 조성을 한 동북공심돈은 성곽 안으로 들어와 성벽의 여장과 사이를 두고 조성을 하였다. 작은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동북공심돈은 통로가 나선형으로 위로 오르게 되어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하게 조성이 된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은 기단석은 돌로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이용해 축조를 하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는 잠겨 있는 곳이 있다. 아마도 무기고 인듯하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공심돈 위로 오르는 나선형의 통로가 있다. 맨 위에는 역시 전각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올라 주변을 살피고는 했다.

 

지금은 출입할 수 없는 동북공심돈은 수원 화성의 또 하나의 작은 고성(古城)이다. 화성을 돌아보면서 만날 수 있는 많은 구조물 중 이렇게 독단적으로 조성된 구모물이 상당히 보인다. 화성만이 갖고 있는 공심돈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층마다 개인 화가인 불랑기를 지참한 병사들이 공심돈 안에서 쏘아대는 화포만으로도 근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견고한 구조물이 바로 공심돈이다.

 

공심돈 위로 오르면 주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화성의 공심돈을 처음으로 짓고 난 당시에도 이렇게 공심돈의 위에 올라 주변을 살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선형으로 돌아 오르는 길 벽면에는 총안이 나 있다. 주변 어디로도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천혜의 작은 요새이다.

 

아름다운 공심돈에 매료당하다.

 

서북공심돈은 1796310일에 완공을 하였으며, 동북공심돈은 정조 20년인 1796719일에 완공되었다. 화성은 그 짜임새나 둘레에 비해 빠른 공정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 아마도 많은 기물을 사용하여 축성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서북공심돈과 마찬가지로 동북공심돈도 일반인들의 출입을 재한하고 있다. 나선형의 통로를 따라 위로 오를 수 있었던 동북공심돈. 개방을 했을 당시 그 위에 올라 주변을 살펴본 적이 있다. 모든 것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공심돈 위에서서 주변을 돌아보며 당시에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공심돈 하나를 갖고도 화성은 천하무적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심돈을 축조할 수 있었던 당시의 선조들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전쟁을 하기 위한 성곽이지만 그 아름다움에 빠져 길을 떠나지 못한다. 동북공심돈이 개방될 당시 그 위에 올라 주변을 살핀 적이 있었다. 성 밖은 물론 성 안의 연무대, 창룡문 등은 몰론 멀리 주변이 모두 내려다보인다. 오직 수원화성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공심돈. 이 아름다운 구조물의 막강한 화력을 얼마나 대단했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화성 안에는 독립구역 몇 개소가 자리를 한다. 이 독립구역들은 같은 화성에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방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독립구역은 바로 봉화를 올리는 봉돈과, 공심돈이다. 이 독립지역은 화성 안에 또 다른 작은 성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봉돈은 봉화를 올리는 신호의 기능을 갖고 있는 곳이다.

 

봉돈은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 봉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 안쪽으로 난 문을 들어서야 하며, 사방은 벽돌로 쌓아 막혀있다. 하기에 이 봉돈을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앞쪽에 난 문 뿐이다.

 

 

일반적인 봉수대와 다른 봉돈

 

화성의 봉돈은 1796617일에 완성이 되었다. 화성 봉돈은 일반적인 봉수대와는 다른 형태이다. 일반적인 봉수대는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부의 높은 곳에 자리한다. 그러나 봉돈은 화성의 몸체 위 성벽에 맞물려 축조하였다. 봉돈의 재료는 벽돌을 활용하였으며, 우리나라 성곽 형식에서는 색다른 형태이다.

 

이 봉돈은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평상시에는 남쪽 횃불구멍인 첫 번째 화두(火頭)’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피워 신호를 한다. 화성 봉돈에서 신호를 보내면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로 신호를 보내는데, 다른 4개의 화두에는 위급한 일이 없으면 불을 피울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방지를 하였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방이 있다. 좌측의 방은 무기고로 사용하고, 우측의 방은 봉돈을 지키는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계단식으로 축조를 한 봉돈의 내부 벽은 모두 4층으로 구성됐다. 각 층마다 성벽으로 타고 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총안이나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봉돈이 독립된 구조물이라는 것은 성 안의 벽쪽으로도 총안이 나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성이 일부 적에게 열려도 봉돈은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의 계단마다 안으로 들어쌓기를 하고, 그 위편에 통로를 내어 군사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화성 봉돈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구성이다.

 

 

봉화의 신호체계는 어떻게 구별할까?

 

봉돈에는 모두 5개의 불을 피우는 화두가 서 있다. 일반적인 봉수대가 보이는 숫자와는 사뭇 다르다. 봉화는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이 되면 횃불을 올린다. 총 다섯 개의 화두를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만을 올린다

적이 국경 근처에 출몰하면 봉수가 2개가 오르고

적이 국경선에 도달하면 3개의 봉수가 오른다

봉수 4개가 오르면 적이 국경을 넘었다는 신호이며

적과 교전이 벌어지면 5개의 봉수에 신호가 모두 올라간다

 

예전에는 이 봉돈의 연기나 횃불이 아마도 가장 빨리 상황전달을 할 수 있는 신호였을 것이다. 멀리서보면 아름다운 하나의 축조물과 같은 봉돈. 그러나 이 봉돈이 갖는 중요성은 화성의 그 어느 구조물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눈 내린 후 돌아본 동남각루에서 정조를 만나다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에는 네 곳의 각루가 있다. 각루란 성곽의 비교적 높은 곳에 설치한다. 이는 각루가 주변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 정자와 같은 건물을 지을 때 ()’()’로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정이란 땅의 지면에 붙여지은 건물을 말하고, 누는 아래로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중층으로 된 건물을 말한다.

 

요즈음은 건강을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창룡문부터 시작해 남수문까지 걷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한다. 날이 따듯해지면 주말이나 시간을 날 때 산을 오르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하지만 겨울에는 산을 오를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짧은 구간이지만 화성을 걷는 것으로 운동량을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화성을 걷는 것은 겨우내 움츠려들 수밖에 없는 신체로 인해 자칫 봄이 되면 취재로 인해 많은 결음을 걸어야하는 운동량을 비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떨어지기 쉬운 체력을 보강하지 않는다면 행사가 시작되는 봄철부터 무더운 여름이 지날 때까지 힘들게 걷고 많은 땀을 흘리다 보면 체력이 고갈되기 때문이다. 그런 체력을 보강하기 위한 작은 노력이 바로 아침운동이다.

 

 

눈 내린 다음날 만난 동남각루

 

31일 아침 일찍 창룡문으로 향하지 않고 남수문으로 향했다. 눈이 내린 후에 차가운 날씨로 얼어붙은 길이기에 가파른 남수문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에 반대로 남수문에서 창룡문 방향으로 걷는 것이 좋을 듯했기 때문이다. 생각한대로 눈이 온 후 녹지 않은 길은 미끄럽다. 이런 날 동남각루의 경사가 심한 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위험하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수문에서 동편방향으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동남각루가 있다. 동남각루는 남수문과 팔달문을 지켜내기 위한 구조물이다. 동남각루는 남공심돈(지금은 유실되어 버린 화성의 구조물 중 하나)과 마주하고 있으면서 주변을 감시하고 화성을 지키는 장용외영의 군사들이 경계를 서면서 휴식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으며 그 중 동남각루가 서북각루와 함께 규모가 작다. 하지만 이 작은 규모의 동남각루는 그 어느 각루보다 중요한 위치에 세워졌다. 동남각루는 화성에 설치한 각루 중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비상시에는 군사지휘소로도 사용한 곳이다.

 

늘 화성을 산책할 때 이곳을 지나치거나 돌아보고는 하지만 오늘의 동남각루는 남다르다. 작은 동남각루는 목책층계를 올라 각루로 오를 수 있다. 밑으로는 작은 방이 한 칸 마련되어 있고 한 옆으로는 불을 땔 때 연기가 나오는 연도와 굴뚝을 마련했다. 이 작은 각루 밑에 마련한 작은방이 바로 온돌방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동남각루 안에 깃든 정조대왕의 마음

 

<화성성역의궤>에는 동남각루를 구천(龜川 =현 수원천)의 위 일자문성의 머리에 있다. 성이 산세 때문에 이곳에 이르러 가파르게 뚝 끊어졌으며 누는 성 위로 쑥 나와서 멀리 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그 규모 또한 54간으로 높이와 너비가 모두 서북각루와 같다. 다만 4간에 모두 판자를 깔고 동쪽 처마 아래에 층계를 설치하였다. 서남 한 간은 총판아래에 역시 온돌을 설치하였다고 했다.

 

날이 풀렸다고 하지만 이른 시간의 화성걷기는 쌀쌀하다. 특히 동남각루는 아래로 수원천이 흐르고 있고 산마루에 각루가 서 있어 딴 곳마다 더 춥다. 이런 곳을 지키고 있을 장용외영의 병사들을 생각한 정조의 마음이 동남각루 안에 그대로 보인다. 정조의 애민(愛民)정신이 이 작은 각루에 그대로 배어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추웠다. 한 겨울 칼바람에서 화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잠시나마 따듯한 온돌에서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마련한 작은방. 정조는 이 작은 각루에도 온돌방을 마련했다. 화성의 구조물 가운데 이렇게 온돌방을 마련한 곳이 상당수이다. 그 안에 정조의 따듯한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조를 개혁군주라고 하는 것도, 단순히 국가의 정책만 개혁을 한 것이 아니다. 기존의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러한 작은 온돌방 하나에서 만날 수 있는 정조의 마음 하나하나가 모두 개혁을 위한 대왕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3호인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의 문루는 정면 5,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는 다포계 양식이며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수원 화성의 옹성을 보면 동문인 창룡문이나 서문인 화서문과는 또 다른 형태이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를 할 때 고증하여 화성성역의궤의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내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어 아쉬움이 크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올해 초 팔달구민과의 대화에서 팔달문의 화성 성벽이 끊어진 곳을 빠른 기간 내에 연결을 시키겠다고 피력한 바 있다. 팔달문의 끊어진 부분이 연결되면 남공심돈과 남암문 등이 복원되기 때문에 수원화성이 제 모습을 완벽하게 갖추게 된다.

 

팔달문의 이름은 팔달산에서 따왔다. 정조는 화성을 축조하기 이전부터 수도 없이 이곳의 지형을 살핀 것으로 보인다. 이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정하기 위해 전국의 명당이라는 곳을 직접 다니면서 조사를 하기도 했다. 문의 양성산, 장단 백학산, 광릉 달마동, 용인 등 능터로 좋다는 곳을 직접 조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한 정조가 직접 거론한 곳이 바로 수원이다. 그리고 이곳에 화성을 축조한 것이다. 아마도 정조가 화성을 축조하기 전에 미리 한 일은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이 들어설 자리에 많은 사람들을 옮겨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조선후기인 1794년에 세운 화성의 남쪽 문인 팔달문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이다. 수원화성의 네 곳의 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팔달문은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냈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옹성은 우리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196493일 보물 제402호로 지정이 된 팔달문은,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 서문인 화서문(보물 제403), 방화수류정, 서북공심돈 등과 함께 보물로 지정이 된 시설물이다. 팔달문은 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공사를 한 기록이 보인다. 처음으로 팔달문을 보수한 것은 도광 26년인 1846년이었다. 이 해 69일부터 내린 비로 수원천의 물이 크게 불어나, 북수문 아래 전돌이 떠내려갔고 문루도 무너졌으며, 남수문과 매향교까지 파괴가 되었다고 수원부 판관 겸 중군인 채학영이 보고를 한 것이다. 이때 폭우로 무너진 팔달문을 중수하고 옹성을 수보하였다.(수원부계록) 이 이후에도 팔달문은 28차례나 보수를 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팔달문은 옹성의 문이 성문과 일직선으로 놓여있다. 그것은 이 팔달문의 홍예를 지나 옹성을 거쳐 곧게 사통팔달하라는 뜻이다. 삼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팔달문을 들어서야 한다. 팔달문의 상량문에는 돈과 곡식과 군사가 모이고, 선비와 농사꾼과 장사치가 반드시 여기 있네.’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팔달문은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문이다.

 

220여년 전 정조대왕은 화성을 축성하고 팔달문 앞에 성밖시장을 내탕금을 내주어 조성할 때했 정조는 이곳에 선비들을 끌어들여 선비장을 조성하면서 말총과 인삼전매권을 주어 전국 상권의 중심지로 삼았다. 팔달문 앞은 커다란 시장이 형성되어 전국의 모든 상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으며 일제 때는 모든 금융회사들이 남문 일대에 몰려들 정도로 성시를 이루었다.

 

현재도 팔달문 앞에는 9개의 시장이 모여 수원남문시장이라는 명칭으로 통합운영하고 있다. 수원상권의 중심지인 이곳 팔달문 앞 수원남문시장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으며, 수많은 외국인들과 관광객들이 수원화성을 관람한 후 이곳 시장통으로 몰려들고 있다. 정조가 강한 국권을 이룩하고 백성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조성한 팔달문과 성밖시장. 그곳에 오늘도 양반상인들의 후손들이 정조의 애민정신을 지켜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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