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만나게 된 KBS -2 TV의 버라이어티 ‘12’. 그 복불복 야외취침 장면을 우연히 목격을 하게 되었다. 솔직히 그동안 12일이란 프로를 보면서, 한 겨울에 밖에서 취침을 하는 것에 대해 조금은 의구심을 갖고는 했다. 왜냐하면 그 추운 겨울에 텐트 하나만 치고 밖에서 자다가는 몸이 성할 것 같지가 않아서이다.

 

하기에 촬영을 어느 정도 하고나면 안으로 잠자리를 옮겼다가, 아침 기상미션에 맞추어 다시 텐트 속으로 들어가는 설정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내 의구심을 완전히 깬 현실을 본 것이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침 일찍 바라다보고 있는, 수원 화성 행궁 앞에서 만난 복불복 잠자리였기 때문이다.

 

 

수원에 온 12

 

12일은 철저하게 보안유지를 하면서 촬영을 한단다. 소문이 나다가 보면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촬영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인구 115만이 사는 수원 같은 대도시, 거기다가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금요일의 화성 일대에서 촬영을 하다가 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12일의 촬영 현장을 잠시나마 접하면서 왜 비공개를 촬영을 하는지(물론 비공개라고 해서 순수한 관광객들을 막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화성을 관람하는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12일에 출연을 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많지 않은 오지를 찾아다니면서 제작을 하는지도 이해가 간다.

 

지난 금요일인 215. 날이 많이 푹해진지라 화성을 한 바퀴 돌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화성을 따라 걸었다. 겨울철이 지나고 나면 추위에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기왓장 등이 허물어져 내리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찾아내어 기사를 쓰고 문화재를 재빠르게 보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란 생각 때문이다.

 

 

역시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에서 장안문을 향해 걷고 있는데, 북동포루 지붕을 보니 지붕을 발라놓은 것이 몇 장 기와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방송카메라를 들고, 멘 사람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많은 장비들이 동원이 되었다면 12일 정도라야 하기 때문이다.

 

12일 수원편이 기대된다.

 

사실 지난 해 11팔도 파워소셜러들을 수원으로 초청해 12일 동안 팸투어를 하면서, 참가한 블로거들에게 수원이 12일에 적합한 곳이라는 글을 올려주기를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런 12일이 수원에 와서 제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채고, 북수문인 화홍문 쪽으로 자리를 옮겨 기다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12일의 멤버들이 수많은 카메라에 쌓여 화홍문에 도착을 했다. 마침 화홍문 주변에는 인근 고등학교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모여 있어, 그들이 환호를 치기도 한다. 저마다 휴대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어댄다. 경비를 맡은 일행들이 말려보기도 하지만, 막무가내이다.

 

찍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틈만 보이면 휴대폰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12일의 인기가 실감나는 장면이다. 그들은 자리를 연무대로 옮겨 국궁체험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날 밤 화성 행궁 광장에는 비닐하우스 한 채가 지어졌다. 12일의 유명한 잠자리 복불복 때문이다. 갑자기 밤이 되면서 바람이 세차지고 기온이 떨어지는데 걱정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행궁광장을 나가보았다. 7시가 채 안되었는데 행궁광장에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들도 광장 한 가운데 놓인 비닐하우스가 궁금한지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지만, 보안 때문에 이내 제재를 당한다. 밤사이에 기온이 떨어져 날이 추웠는데도 바람막이도 없이 비닐하우스 안에 잠을 잔 잠자리 북불복.

 

이번 224()33(), 2회에 걸쳐서 방송이 될 12일 수원편이 많이 기다려진다. 그들은 정조대왕의 화성을 돌면서 어떤 이야기들을 했을까? 밤늦게까지 팔달산 서장대에 올라 무슨 게임들을 하고 왔을까? 그 모든 것이 궁금해 얼른 방송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팔달산 중턱에는 성신사(城神祠)’라는 사당이 있다. 바로 화성을 지키는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이 사당은 일제 강점기에 훼파가 되었던 것인데, 사단법인 화성연구회 회원들의 노력으로 복원이 되었다. 이곳에서 오래 전부터 고유제를 지내 온 화성연구회 회원들은, 화성 행궁 뒤편 좌측 서장대로 오르는 길에서 명문이 적힌 기와편 등을 발견하였다.

 

그런 후에 매년 정월에 날을 정해 이곳 성신사 터에서, 성신을 위한 고유제를 지내왔다. 처음에는 성신사의 복원을 위한 고유제를 지냈으나, 200910월에 성신사가 조금 자리를 옮겨 복원을 마치자 그곳에서 정월에 날을 잡아 고유제를 지내오고 있다.

 

 

정조의 지시에 의해 지은 사당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기에 맞추어 특별지시를 내렸다. 바로 성신사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신이기는 하지만, 당시로 보면 수원전역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하다. 팔달산 중턱 서장대 아래 성신사를 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성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며 화성과 화성 백성들을 사랑하는 축문을 직접 지어 하사를 하기도 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711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약 한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사당이 완성된 후에는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길일을 기려, 1796919일에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화성연구회 노력으로 복원 된 성신사

 

화성의 신을 모시는 성신사는 팔달산 기슭의 병풍바위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당은 53가인데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앞 기둥 안쪽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고, 당 아래에는 층이지게 기단을 놓았다. 정당 앞으로는 3문을 세웠으며, 좌우로는 5간 행각을 붙였다. 남쪽으로 2간은 안쪽으로 행하게 하여 전사청을 삼았고, 북으로 3간은 밖으로 향하게 하여 재실 1, 마루 1, 나머지 1간은 공랑을 삼았다.

 

정조대왕 당시의 성신사는 일제에 의해 훼파가 되었으며, 화성연구회의 무단한 노력으로 200910월에 다시 복원을 하였다. 이 때의 복원에 들어가는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216일 오후 2시에 사단법인 화성연구회 주관으로 이루어진 수원화성 성신사 고유제는 이낙천 이사장, 김이환 명예이사장(이영미술관장) 30여명의 회원들이 참석을 하였다. 제순은 성신의 위폐를 여는 것으로 시작을 해, 행강신례 행참신례, 행전신례에 이여 초헌관이 첫 잔을 성신에게 올리는 행초헌례의 순으로 이어졌다.

 

화성의 신을 모시는 성신사, 이게 아쉽다

 

30분 정도에 걸쳐 끝이 난 성신사 고유제. 고유제의 끝은 행망예레라고 하여서 축문을 태우는 일이다. 그리고는 예를 모두 마치게 된다. 그러나 이 고유제를 보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든다. 사당은 어디나 예제를 마친 후 축문을 태우는 예감을 마련한다. 그러나 성신사에는 어디에도 축문을 사를 수 있는 예감이 보이지 않았다. 정당 좌측 뒤편에라도 예감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정당 안 위패 앞에 향로 하나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나 사당 안에는 기본적으로 향로가 있기 마련이다. 성신사는 화성의 신이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 따지면 수원을 지키는 신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앞에 방명록이나 향을 사를 수 있는 변변한 향로 하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곳을 들리는 관광객들이 향을 피우고 예를 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옆에는 방명록 등을 비치해 들려간 흔적을 남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촛불은 화재의 위험 때문에 켤 수 없다고 해도, 향 정도는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화성에 대소 공사를 시작하거니 끝이 날 때는 이곳 성신사에 가서 참례라도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담당부서에서는 조금 더 깊이 생각을 하기 바란다.

조선조 22대 정조대왕이 1795년 윤2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현륭원)이 있는 화성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인 정조대왕 능행반차도(陵幸班次圖)’. 이 능행반차도는 조선조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가 중심이 되어 그린 것이다.

 

이 능행반차도를 보면 행렬이 장엄하면서도 축제분위기 같이, 반차도에 그려진 인물들의 행색과 거동이 경쾌하게 표현이 되어있다. 반차도에는 모두 1779명의 인물과 779마리의 마필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시흥환어행렬도를 보면 그보다 더 많은 인원이 능행길에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능행반차도 중 정조대왕의 가마 앞 쪽에 두 무리의 고취대가 있다

 

어가의 뒤를 따르는 기마고취대 장엄하다

 

능행반차도는 경기감사가 앞을 서고 그 뒤에 총리대신의 행마가 그려져 있다. 그 뒤편에는 말에 올라탄 고취대가 18명이 따르고, 뒤편으로는 훈련대장이 말을 타고 있다. 훈련대장의 뒤로는 중군(中軍)이 따르며 그 뒤편으로 다시 북과 장고, 해금, 피리, 징 등을 불고 치며 8명의 고취대가 따른다.

 

조금 뒤편으로는 금군별장이 말을 타고 있으며, 조금 뒤편으로는 얼굴을 가린 내인들이 말을 타고 따른다. 그 뒤편으로는 또 다른 정리사 행렬이 따른다. 그 뒤편으로 양편을 기를 든 군사들이 따르고, 정조대왕의 가마가 보인다. 가마 뒤로는 왕을 상징하는 용기가 따르고 있고, 그 용기 뒤편에는 고취악대의 본진이 뒤따른다.

 

 가마 뒤를 따르는 51명의 고취대의 모습. 장엄하다.

 

정조대왕의 가마 뒤편으로는 51명의 고취악대는 맨 앞에 4명의 나각수, 8명의 나팔수, 4명의 고수와 2명의 운라, 4명의 자바라와 두 줄로 늘어선 8명의 태평소, 그리고 3명의 해금과 3명의 저(대금)이 열을 지어 행렬을 한다. 그 뒤로는 6명의 피리와 3명의 장고, 3명의 북, 맨 뒤에는 징수를 포함한 3명이 뒤따른다.

 

그 뒤편에도 두 곳에 기마고취대가 행렬 안에 끼어 있어, 전체적으로 능행반차도에는 다섯 무리의 고취악대가 편성되어 있다. 능행반차도에 나타나는 고취악대는 모두 91명이나 편성이 되어있으며, 이들은 모두 말에 올라타고 있다.

 

 조리를 하는 재료를 실은 우마차 앞에도 6명의 고취대가 자리한다 

 

현대의 고적대 편제와 동일해

 

조선조의 군악편제는 내취라고 명칭을 붙였는데, 영조 때에 편찬된 속대전에 의하면 겸내취와 원내취가 국왕의 거동 때 또는 정전에 출좌할 때 시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겸내취와 원내취의 기록이 병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내취는 장악원 소속의 악공이라기보다 병조에 속했던 군악대원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의 군악대의 제도는 성종 때 확립된 제도로 국조오례의』 『악학궤범등에 기록되어 있다. 행악인 전부(全部)고취와 후부(後部)고취는 왕의 어가를 중심으로 하여 앞뒤로 배열하는데, 전부고취와 후부고취는 악사가 각 1명이고, 악공은 50명이다.

 

정조대왕 능행반차도에 나타나는 이 기마고취악대의 형태는, 요즈음 군악대의 고적대나 각급 학교 등에서 나타나는 고적대의 악기편성과 동일하다. 인원의 편성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고적대에서 사용하는 악기를 보면 나각(소라), 나팔, 태평소, 대금, 피리, 해금, , 자바라, 장고, 운라 등 동일한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명절 다음날인 211. 행궁을 찾아 벽에 그려진 능행반차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동안 몇 차례나 보았지만, 그저 무심히 바라보기만 했기 때문이다. 능행반차도를 보다가 중간 중간 말을 타고 있는 기마고취대의 모습에 눈이 번쩍 뜨인다. 정조대왕의 어가 뒤편을 따르는 고취대의 인원이 악학궤범 등에 나오는 인원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편제는 다르다고 해도 51명의 고취대가 어가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능행반차도는 사실적으로 묘사된 그림이기 때문에, 당시의 고취대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능행반차도에 나타난 편제에 관해 더 많은 공부를 해야겠지만, 고취대 하나만 갖고도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화성을 돌아보기를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다. 길이 미끄럽기도 하거니와, 찬바람이 많이 불어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렇게 화성을 돌 때 딴 곳보다 더 춥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수원천과 방화수류정의 용연과 같은 물이 있기에 조금의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하만 그보다 더한 이유는 바로 바람을 막아 줄 건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옛날보다 겨울이 많이 춥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화성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보면, 봄부터 가을까지에 비해 현저히 줄어든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과거 장용영의 군사들이 화성을 지키기 위해 순례를 돌고, 초소 등에 머물고 있었을 당시는 지금보다 몇 갑절은 더 추웠을 것이다.

 

 

몸에 밴 정조대왕의 백성 사랑

 

이번 19일에 대선이 있다. 가끔 휴대폰에 낯모르는 번호가 뜬다. 그리고는 이번 대선에서 누굴 찍겠느냐고 물어온다. 또한 주변의 지인들과 자리를 함께하면, 으레 묻는 것이 이번에 누굴 찍을 것이냐고 묻는다. 내 대답은 언제나 한결 같다. ‘정조스타일’이 답이다. 정조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두말 않고 찍겠다고 한다.

 

사실 어려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보아야했던 정조로서는,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가장 포악한 폭군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근본이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한 임금이었다. 화성을 축성 할 때만 보더라도 임금을 꼬박꼬박 지불을 한 것은 물론,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축성을 하는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주었으며, 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는 척서단과 제중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내가 항상 ‘정조스타일’을 찍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정조는 막대한 국고를 소비하는 화성을 축성하면서도, 인건비가 미쳐 지급이 되지 않으면 공사를 중단하기도 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다. 수원이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려고 보니, 많은 민가들이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축성의 책임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을 때, 정조는 그런 연유를 듣고 과감히 결정을 내린다. 바로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모두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기존의 성을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면 그만큼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하지만 정조는 국고가 더 들어가는 것보다 백성들의 불편함을 더 생각한 것이다.

 

동북공심돈(위)과 문을 들어서 우측에 마련한 온돌방

 

겨울철 화성에서 만나는 정조의 마음

 

12월 5일 수원에는 3시간 여 만에 10cm가 넘는 눈이 쌓였다. 27년 만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렸다고 한다. 믈론 12월 초에 이렇게 왔다는 뜻이다. 다음 날 일부러 화성을 걸었다. 눈이 온 다음날은 칼바람이 불었다. 옷깃으로 파고드는 바람으로 인해,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이렇게 추운 겨울, 눈이 내리고 난 뒤 일부러 화성을 돌아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바로 이 겨울에 화성에서 정조의 마음을 읽고 싶어서이다. 겨울이라고 해서 화성에 무슨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반문을 한다. 하지만 화성의 일부라도 돌아본다면, 그곳에서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알아낼 수가 있다.

 

화성에는 많은 구조물들이 있다. 그 구조물 안에 바로 정조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을 만날 수가 있다. 소라각이라고 하는 동북공심돈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온돌방이 보인다. 밑에는 아궁이까지 있는 온돌방이다. 아무리 추워도 이곳을 들어가면 추위를 거뜬히 이겨낼 수가 있다.

 

봉돈(위)과 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마련한 온돌방

 

그곳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창룡문을 지나 구조물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걷는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온다. 하지만 정조의 따듯한 마음을 읽어서인가, 처음보다 한결 걸음도 가벼워지고 추위도 덜 느끼게 된다. 봉돈 안으로 들어서 본다. 좌측에는 무기고가 있고, 우측에는 역시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다.

 

47,000명 정도의 장용영 군사들이 화성에 주둔을 했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들 모두가 성을 지킨 것은 아니다. 아마도 각 시설물마다 적은 인원들이 주야 교대로 성을 지켰을 것이다. 그들이 눈과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곳곳에 그런 시설물들이 있다. 남수문 쪽으로 가다가 만나게 되는 동남각루, 그 아래에도 온돌방이 있다. 크지 않아 많은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겨울철 몇 명 정도의 군사들이 들어가 몸을 녹일 수 있는 공간이다.

 

동남각루와 그 밑에 마련한 온돌방. 화성에는 구조물 곳곳에 온돌방이 있어 군사들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온돌방이 화성의 구조물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여름철이면 시원한 포루 등의 마루를 이용해 더위를 피할 수 있고, 겨울이면 온돌방을 이용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마련한 화성. 그 하나만으로도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 바로 이런 점이 우리가 ‘정조스타일’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눈 온 뒤에 걷는 화성은 아름답다

 

어제 수원에는 첫눈인데도 불구하고, 10cm가 넘는 눈이 쌓였다. 거기다가 밤에 갑자기 기온이 하락하여 뒷골목 등의 도로는 그야말로 빙판을 방불케 한다. 12월 6일 아침, 아직 몸이 채 추슬러지지도 않았지만 화성을 향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다. 그저 눈 온 뒤의 아름다움 광경을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화성은 어느 계절이나 다 아름답다. 자연과 자연을 닮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자연처럼 화성을 그렇게 은색의 세계로 변해있었다. 지동 골목길을 벗어나 화성 겉으로 천천히 갇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동문(창룡문)을 들어서 동북공심돈과 연무대를 들러 본 후, 다시 남수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2시간 만에 돌아 본 화성 설경

 

제일교회 종탑에 올라가 주변 설경을 먼저 본 후, 돌아본 화성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르고 지냈던, 또 하나의 가슴 뜨듯한 사연을 만났다. 그래서 늘 주장하는 것이, 화성은 보면 볼수록 좋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부터 화성의 전체 구간 중 25%에 해당하는 화성의 설경을 함께 돌아보자.

 

 

화성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명소가 한 곳 생겨났다. 바로 제동 제일교회 종탑이다. 이곳에 올라가면 눈 앞으로 펼쳐지는 화성의 설경을 한 눈에 볼 수가 있다.  

 

 

지동 골목길을 벗어나 화성의 성곽 밖으로 봉돈으로 향했다. 하얗게 변한 화성과 가끔 보이는 발자국들이 조화를 이룬다, 오래 묵은 빛갈과 어우러지는 하얀 색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전설 하나쯤 들려줄 것만 같다. 그리고 포루지붕에 쌓인 하얀 눈이 우리에게 지난 역사의 이야기 한 토막을 알려주려는 듯하다.

 


적송과 눈, 그리고 화성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래서 화성은 눈이 와 미끄럽고 바람까지 불어 조금은 추운 듯도 하지만, 발밑에서 감촉있게 밟히는 눈이 좋기도하다. 동문 앞에는 이 추운 날씨에도 관람을 하러 오는가 보다.      

 

 

 

여장 위에도 눈이 수북히 쌓였다. 어제 내린 눈이 10cm가 넘는다고 한다. 성 벽에는 연신 카메라로 설경을  찍느라 분주하다. 공심돈도 예외는 아니다.

 

 

치성 안을 누군가 한바퀴 돌아서 갔다, 아마도 그 누가보다도 먼저 눈이 쌓인 화성의 벽화길을 걷고 싶어쓴가 보다.그렇게 돌아보는 시간에 화성과 정조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려을 한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