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일 화성행궁 상설한마당의 개막식에 펼쳐진 어가행렬. 정조대왕이 행궁 앞에 이르러 장용외영의 군사들과 화성유수의 영접을 받고 입궁을 하려고 하자, 난데없이 징을 두드리면서 사람들이 정조대왕의 앞으로 뛰어들어 엎드린다. 이른바 격쟁(擊錚)’을 시작하는 것이다.

 

격쟁이란 조선시대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궁궐 담장위에 올라가거나, 대궐로 뛰어 들어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행위를 말한다. 또는 왕이 행행하는 길거리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 왕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격쟁은 조선조 성종 때부터 시작해, 실록에 보면 총 300회 정도가 기록되어 있다. 정조와 숙종 때 가장 많은 격쟁이 이루어졌다.

 

 

격쟁 이전에는 태종조에 백성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대궐 밖 문루 위에 달았던 북을 쳐 억울함을 호소하는 신문고가 있었다. 신문고는 조선시대 민원제기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신문고는 원래 취지인 백성들의 원통함을 풀기 위해 치는 예는 거의 없었다. 일부러 한양까지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은 사용빈도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고의 제도가 효용도 없게 되자 연산군대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왕에게 하소연을 하는 제도인 격쟁

 

조선조에는 각종 민원을 제기하는 방법인 정소(呈訴)’가 있다. 정소란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각종 민원을 문서로써 관에 요구하고 청원하는 행위를 말한다. 정소는 신분 성별에 제한 없이 모든 백성이 가능했으며, 부녀자와 노비도 할 수 있었다. 정소 절차는 경국대전에 보면, ‘억울하고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는 서울은 주장관, 지방은 관찰사에게 올린다. 그렇게 한 뒤에도 억울함이 있으면 사헌부에 고하고, 그래도 억울함이 있으면 신문고를 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문고 제도가 사라지면서 대신 격쟁이라는 제도가 생겨났다. 격쟁이란 억울한 일이 잇는 백성들이 임금에게 하소연을 하기 위해, 왕이 거둥하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하문을 기다리던 것이다. 신문고를 폐지한 후 정서를 올려 불복한 자로 하여금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게 하였던 제도이다.

 

하지만 격쟁으로 인한 폐단도 생겨났다. 심지어는 지방의 수령을 유임시키고자 하는 일이 발생하는가 하면, 사소한 일까지 들고 나와 임금의 앞을 막는 일이 허다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히여, 속대전에서 법제화되었으며 대전회통에서 증보되었다. 격쟁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자손이 조상을 위하여, 처가 남편을 위하여, 동생이 형을 위하여, 종이 주인을 위하여 하는 4가지였다. 이밖에 민폐에 관계되는 것도 가능하였다.

 

 

사리에 맞지 않으면 장을 치거나 유배를 보내기도

 

하지만 심하게 임금의 행행을 막고 읍소하는 자가 많아지자, 그 폐단을 없애기 위해 격쟁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잘못된 경우는 형벌로 논하게 했다. 사리에 맞지 않는 일로 격쟁을 논하는 자는 장 1003,000리 유배의 벌을 내렸으며, 읍민이 수령을 유임시키고자 격쟁하는 것은 장 100에 처하였다.

 

이렇게 무례한 격쟁에 대한 것을 막기 위해 엄하게 다스리기도 했다. 무고하게 수령을 고소하는 것은 부민고소율(部民告訴律)’, 사소한 일을 해당 도의 관찰사나 수령에게 고하지 않고 격쟁으로 직접 왕에게 아뢰는 자는 월소율(越訴律)’, 사실과 다른 허위로 상소한 자는 상서사부실률(上書事不實律)’로 처벌했다.

 

명종 15년인 1560년에는 궁정에 함부로 들어와서 격쟁하는 자가 많아, 이들을 엄벌에 처하였으며, 정조 1년인 1777년에는 위외격쟁추문(衛外擊錚推問)의 법을 정하였다. 그 이후 철종 9년인 1858년에는 왕이 도성 밖으로 거동할 때에만 격쟁할 수 있다는 법을 정하였다.

 

 

격쟁을 가장 많이 처리한 정조대왕

 

정조대왕의 행행 중에는 총 3,355건의 상언이나 격쟁을 처리하였다. 이는 한 번의 행차 중에 평균 51건의 민원을 처리했다는 것이다. 상언이나 격쟁은 조선 후기 왕들이 모두 허용한 일이지만, 정조대왕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 만큼 정조대왕이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준 임금이었다.

 

정조대왕의 행행 중의 격쟁 중에는 정조 15년인 1791년 평민인 박필관이 격쟁을 통해 사회의 폐단을 금지시켜줄 것을 호소한 사건이 있다. 사실 격쟁은 조선시대 백성이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사회모순의 심화로 일반백성들의 생활이 극심하게 어려워지자, 자신들의 괴로움을 호소하고자 격쟁을 많이 이용했다.

 

 

정조 15년인 1791122일 평민인 박필관이 격쟁을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아전과 백성이 결탁하는 일, 2.상민이 족보를 위조하는 일, 3.소를 함부로 잡는 일, 4.산 소나무를 함부로 자르는 일, 5.지방 토호들이 토지겸병을 마음대로 하는 일, 6.노비를 30명 이상 가지는 일, 7.장토(庄土)30결 이상 소유하는 일 등을 금해줄 것과 그밖에 군역에 대한 수포를 20척으로 줄여줄 것을 청했다.

 

이 격쟁을 들은 형조에서는 일반평민이 감히 노비나 토지, 군포 문제를 거론했다고 죄를 줄 것을 왕에게 청했다. 그러나 정조는 격쟁내용을 검토한 뒤 노비문제와 토지, 군포에 관한 것은 시행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그 외의 사항은 각 도에 명령하여 엄금하도록 했다.

 

우리는 여기서 정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규제대로 한다면 박필관은 부민고소율과 월소율에 해당 해 장 100을 맞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격쟁을 고한 박필관의 원을 들어주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지도자 상이 아니겠는가?(자료 인용 / 구글 검색) 사진 /수원시 정책홍보담당관실 김기수

조선조 제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은 재위 24년간 총 66회의 행행을 하였다. 이는 1년 평균 약 3회 정도를 행행을 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의 행행은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묘소 참배가 그 절반을 차지하였다. 1789년에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칭하고,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원을 참배하였다.

 

<원행정례>에 의하면 정조대왕이 현릉원으로 원행을 할 때는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수원 현릉원의 원소재실까지의 지명과 행궁, 교량 등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밑에 2행으로 지역 경계나 지역간의 거리를 기록해 놓았다. 이 원행정례에 의하면 시흥로의 경우 전 노정의 길이는 83, 교량 24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위로부터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에 도착함을 알리는 파발.왕의 행행시에 나열되는 깃발, 말을 타고 맨 앞에서는 경기감사

 

능행차반차도의 재현

 

324() 수원 화성 행궁일대는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바로 능행차반차도에 기록된 8일간의 화산릉 행차가 재현이 된 것이다. 수원 화성 행궁 앞에서 1년 동안 펼쳐지는 화성행궁 상설한마당이 시작되는 날에 이루어지는 어가행렬로 인해, 주변은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룬다.

 

능행차반차도는 정조대왕이 어머니인 경의왕후(=혜경궁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가 묻힌 화성 현릉원을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능행차반차도는 정조대왕화성행행반차도또는 화성행차도라고도 한다. 반차도란 궁중의 각종 의례장면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위로부터 훈련대장, 백마를 탄 정조대왕, 행행에는 상궁과 나인들도 함께 한다 

 

1795년 음력 윤 2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이루어진 정조대왕의 화성 행차에는 어머니인 경의왕후를 비롯하여 두 누이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동행하였다. 그 외에 우의정인 채제공을 비롯하여 문무백관과 나인, 호위군사 등 6천명이 동원되었다. 정조대왕의 능행차반차도에는 이들 가운데 1,779명의 사람과 말 779필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파발 뒤에 이루어진 어가행렬

 

24일 이루어진 어가행렬은 연무대에서 화성 행궁까지의 길지 않은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행렬 또한 약식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장엄은 그 적은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당시의 모습을 기억해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먼저 말 4필이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에 행차함을 알리는 파발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위로부터 혜경궁홍씨의 가마, 행궁으로 향하는 전조대왕 행차, 행궁 앞에 이른 정조대왕을 맞이하는 장용외영의 무사들

 

많은 인원이 생략되기는 하였지만, 반차도의 순서대로 행행이 이루어졌다. 길가에 늘어선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카메라와 휴대폰을 꺼내 어가행렬을 찍기에 바쁘다.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 앞에 도착하자 장용외영의 무사들이 먼저 정조대왕을 맞이하고, 뒤이어 유수가 정조대왕을 안내해 행궁으로 거동을 한다.

 

격쟁으로 백성을 사랑한 정조대왕

 

격쟁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임금의 행행 중에 징을 치고 나아가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는 행위이다. 정조대왕의 행행 중에는 총 3,355건의 상언이나 격쟁을 처리하였다. 이는 한 번의 행차 중에 평균 51건의 민원을 처리했다는 것이다. 상언이나 격쟁은 조선 후기 왕들이 모두 허용한 일이지만, 정조대왕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 만큼 정조대왕이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준 임금이었다.

 

 위로부터 억울한 사연을 임금에게 고하는 격쟁, 신풍루를 통과하는 고취대, 신풍루를 들어서는 정조대왕  


격쟁을 마친 정조대왕이 행궁 앞에 고취대를 앞세우고 도착을 하자, 화성 행궁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신풍루의 솟을삼문 중 중앙문을 통해 정조대왕이 입궁을 했다. 비록 적은 인원에 짧은 거리였지만, 정조의 어가행렬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수원만이 갖고 있는 자랑거리인 정조대왕의 능행차. 수원사람들이 자랑할 만한 이 시대의 문화콘텐츠가 아닐는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 요즈음 화성에는 주말과 휴일이 되면 몸살을 앓고 있다. 바로 KBS-2TV의 리얼 버라이어티 ‘12-등잔 밑이 어둡다편이 방송이 되고 난 후에 일이다.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수원으로 몰려든다. 그리고 그들은 화성을 돌아보며, 12일의 추억에 젖는다.

 

이들이 화성을 돌아보면서 가장 즐겨 찾는 곳은, 바로 12일의 멤버들이 찾았던 곳이다. 그러나 정작 수원 화성을 제대로 즐기기에는 무리한 코스이다. 10년이라는 세월동안 틈만 나면 찾았던 화성. 안과 밖으로 돌아본 화성은, 방법에 따라 계절에 따라 제대로 즐기는 법이 따로 있다. 그동안의 경험에 의해 수원 화성을 백배로 즐기는 법을 소개한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화성을 즐길 수가 있을까?

 

사실 수원 화성을 한 번에 다 돌아본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더구나 자녀들과 함께 찾아왔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수원 화성을 100배로 즐기는 방법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까? 우선 화성을 대번에 바람 지나 듯 획 지나간다면, 그것은 화성에 대해서 무지라고 생각한다.

 

화성은 그냥 일반적인 성이 아니다.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것을 보면, 기록과 정조대왕의 애민(愛民), 과학적인 방법, 자연친화적인 조형물 등, 우리나라의 축성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거대한 자연친화적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화성을 곳곳을 곱씹으면서 100배로 즐기며 돌아본다는 것은, 어쩌면 내 가족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100배로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100배로 즐기면서 화성을 둘러보자

 

(1코스)

연무대에서 국궁체험 후 출발(화성열차 탑승) - 성신사 하차 - 오솔길로 서장대 오름 - 성안 길로 장안문까지 이동(화서문에서 장안문까지는 화성열차를 이용시 성밖의 경치 관람함) - 장안문에서 성 밖의 길로 방화수류정 옆 북암문까지 이동 - 북암문을 이용 성 안으로 들어와 수원천을 따라 걸음 - 화성박물관을 돌아본 후 재래시장 탐방 - 지동벽화길 구경(소요시간 3시간 30. 천천히 아이들과 함께 거닐면 4시간 소요)

 

() 1코스는 현재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고 있는 코스로, 국궁체험과 화성열차는 주말과 휴일에 관람객이 한꺼번에 몰릴 시 체험이 어려울 수도 있음.

 

 

 

(2코스)

장안문 출발 - 성안으로 화서문까지 이동 - 보물인 화서문을 둘러본 후 화령전 앞을 지나 행궁으로 이동 - 행궁 정문인 신풍루 앞에서 무예24기 관람(무예 24기 시범은 오전 11시와 오후 3시 두 차례 이루어지기 때문에 1시간 전에 장안문에서 출발해야 함) - 행궁 구경과 체험하기 - 공방길 구경 - 팔달문을 거쳐 재래시장 구경 - 남수문에서 성안으로 들어가 창룡문까지 이동 - 연무대 국궁체험(소요시간 3시간)

 

() 2코스는 화서문에서 행궁으로 이동할 때 만나게 되는 행궁동 일원에서 9월 한 달 동안 세계 최초로 생태교통 수원2013’이 열린다. 이때 자녀들과 함께하기를 권한다. 생태가 살아있는 마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생태마을을 돌아본다면 관람시간은 1시간 정도가 추가로 필요하다.

 

 

 

(3코스)

팔달산 남쪽 중앙도서관 출발 - 오솔길을 걸어 산으로 오르면서 지석묘군과 부석소 관람 - 용도 끝의 외곽인 화양루 상 밖에서 서편으로 난 길을 이용해 서삼치까지 이동(이 길은 소나무 숲이 정말 좋다) - 관광안내소에서 성안으로 이동 - 우측으로 걸어 서남암문으로 들어가 용도 걷기 - 서남암문으로 뒤돌아 나와 팔달문 쪽으로 이동하기 - 팔달문 관광안내소에서 공방길을 따라 행궁으로 이동 - 무예24기 관람과 행궁 둘러보기 - 화성박물관 관람 - 수원천 - 재래시장 구경(소요시간 3시간)

 

() 3코스 역시 무예 24기를 관람하는 시간이 있어 시범시간인 오전 11와 오후 3시 공연 1시간 30분 전에 중앙도서관을 출발해야 함. 재래시장에서 먹거리를 즐긴 후 지동 벽화길 관람을 하면 더 바람직하다.

 

 

사실 화성을 돌아본다는 것은 일괄적이지 않다. 그것은 화성이라는 친자연적인 거대한 조형물이 계절에 따라 그 멋스러움을 달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와 같은 코스로 즐긴다면 남들과는 다른 화성을 만날 수가 있다. 화성과 행궁, 박믈관과 재래시장, 벽화길과 노을빛 전망대.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딴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재미를 주는 곳이 수원 화성이기 때문이다.

화성은 아름답다. 그저 자연과 순응을 하면서 자연인양 쌓았기 때문이다. 그런 화성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언제냐고 누가 질문을 한다. 난 당당하게 요즈음이 가장 아름답다고 이야기를 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그냥 느슨한 마음으로 뒷짐 지고 걷기에 딱 좋기 때문이다. 물론 꽃이 흐드러지게 피거나, 단풍이 물들었을 때도 좋다.

 

그러나 정작 아름다움은 화성이 돋보일 때가 아닐까? 3월 중순 경부터 4월 중순 까지 화성을 걷다가 보면, 눈에 보이는 것마다 다 흡사 성 돌을 위해 있는 듯하다. 그저 차가운 돌을 쌓은 것이 아니라, 온기 가득한 따듯함이 배어있다. 푸른 소나무 가지들이 성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 그러하고, 성 돌에 비친 햇살도 그러하다.

 

 

화성의 압권은 역시 용도

 

물론, 화성 어디를 걷고 있던지 그 바람이 그 바람이다. 그리고 햇살 역시 동서남북 다르지가 않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은 역시 용도일원이다. 용도 끝에 서 있는 화양루 밖에서 길을 잡아 서삼치를 향해 걷는다. 숲에서 이상하리만치 은은한 향내가 난다. 그리고 서삼치를 돌아 흙길을 그저 터벅거리면서 안으로 걷다가 보면 서남암문이 반긴다.

 

아마도 예전에는 이곳에서 밖의 정황을 살피고, 이렇게 나른해지는 계절이 돌아오면 포사장 몰래 슬며시 고개를 떨구고 무거워지는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리고 용도 저편에서 자박거리고 걷는 발자국 소리에 놀라, 입가에 흘린 침 얼른 닦아내고 겨우겨우 눈을 치켜뜨지는 않았을까?

 

 

용도를 걷다가 보면 또 한 번 이 계절에 자지러지게 된다. 훌쩍 커버린 소나무들이 성 안을 기웃거리며, 봄날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을 힐끔거리기 때문이다. 약간은 냉한 기운을 가진 바람도 덩달아 이른 상춘객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그래서 이 길은 늘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자랑을 하나보다.

 

화양루에 오르면 봄이 보인다.

 

용도 끄트머리, 팔달산 등성이 남쪽에 높지 않게 처마를 내민 화양루가 있다. 서남각루라고 하는 이 정자는, 그곳에 그리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울 뿐이다. 마루 위에 올라서면 저 밑 수원천에서 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곳 또한 마음을 한 자락 펼쳐놓을 수 있는 곳이다.

 

 

잠시 여장으로 다가가 고개를 삐죽 내밀면 소나무들이 반긴다. 화양루 성 밖에 서있는 소나무들은 늘 그렇게 사람을 반기고는 한다. 굳이 외롭지도 않은데도,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는가 보다. 아마도 옛날 그곳에서 쐐기 박고 돌을 떼어내던 인부들이 그리워서일 것이다. 그래서 이 길은 늘 먼저 봄을 탄다.

 

이 길 언제 걸어보려고 그리 아껴?

 

이 용도를 제대로 걸어보려면 우선 서장대를 먼저 오르는 것이 좋다. 아니면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에서, 팔달산으로 치받듯 오르는 성의 여장을 따라 걷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렇게 어디로 오르거나 땀을 흘리면 더욱 좋은 곳이다. 그런 다음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뒷짐 턱지고 걸으면 그야말로 부러울 것이 없다.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다. 이 계절이 오면 용도를 따라 걸으면서 장용외영의 무사들도 봄에 홀리고는 했을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길을 왜 그리 아껴두는 것인지. 그저 평일이면 어떻고 주말이면 어때. 화성으로 달려와 천천히 서남암문을 지나 용도를 걸어보고, 화양루에 올라 봄을 느끼면 되는 것을.

 

늘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언제 걸어보려고? 왜 아직도 아끼기만 하는데? 용도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그 안에 봄은 늘 있지 않다. 꼭 이 철이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화성 용도의 봄기운. 그 봄기운이 사라지고 있지 않으려나. 내일은 다시 올라야겠다.

지난 2월 24일 오후 6시 10분에 KBS-2TV를 통해 방송이 된, 리얼 버라이어티 ‘1박 2일’의 효과는 얼마나 될 것인가? 그동안 1박 2일이 방송된 곳들을 몇 곳 다녀보았지만, 눈으로 보기에도 그 변화를 실감하고는 했다. 실제로 1박 2일이 지나간 곳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번 수원편인 ‘등잔 밑이 어둡다’가 방송이 나가고 난 후, 1주일이 지난 3월 2일(토) 아침 일찍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과연 1박 2일이 공중파를 통해 방송이 나가고 난 뒤, 그 효과는 얼마나 눈에 띠게 달라진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화성 동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성을 돌아보는 관람객 급증


화성 동문인 창룡문을 들어서 동북공심돈 위를 보니 사람들이 가득하다. 공심돈 출입구 쪽으로도 사람들이 모여 있다. 평소 주말과는 확연히 다르게 사람들이 많이 화성을 걷고 있다. 남수문 쪽으로 발길을 옮겨 보았다. 주말에도 이곳은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줄을 이어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낮 시간 e수원뉴스 김우영 주간과 함께 다시 한 번 회성을 돌아보기로 했다. 남문인 팔달문에서 시작해 지동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 주말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못골 시장을 지나 미나리광시장, 지동시장을 거쳤다. 한 가지 색다른 것은 야채를 파는 장사치들마다 무를 수북이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1박 2일 수원편 전편에서 재래시장에 들어간 성시경과 차태현, 주원이 무를 싸게 사서 가장 무거운 물건을 사온 사람에게 수원왕갈비로 저녁을 먹었는데, 그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쌓여있던 무들이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난 뒤에는, 거의 다 팔려 바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으로 직접 실감한 1박 2일 효과

            

남수문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오르면서 보니, 확연히 많아진 관람객들을 볼 수가 있다. 적게는 두 사람, 많게는 1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성안을 걷고 있다. 성을 걸으면 성 밑을 바라보니, 그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 밖 길을 걷고 있다. 날씨가 쌀쌀한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관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문인 창룡문 쪽으로 다가가자, 연신 동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동북공심돈 위에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공심돈 밑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 같으면, 주말과 휴일에는 안전요원이라도 배치를 해야 할 것만 같다. 공심돈은 위로 오르기 때문에 안전사고에도 유념을 해야만 할 듯하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1박 2일 방송이 나가고 난 뒤, 그들이 올랐던 곳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몰려있다는 것이다. 눈으로 직접 확인이 되는 ‘1박 2일’의 효과가 이 정도 일 줄이야.


“날씨 따듯해지면 또 오자. 내일 저녁에 1박 2일 또 보고”


아이들과 함께 화성을 찾아 온 어머니가 하는 말이다. 지나가는 사람들 입에서 ‘1박 2일’이란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가 있다. 그들 모두는 1박 2일을 보고 난 뒤 화성을 찾아 온 것이다. 조금 더 걸어 방화수류정 방향으로 다가섰다. 연신 밀려드는 사람들로 방화수류정에도 사람들이 북적인다.


평소에는 한 두 사람 있을 듯 말 듯한 적대위에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1박 2일에서 멤버들이 이곳에 들어와 홍이포를 보고 놀라는 장면이 방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루 종일 화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하고 있었다.


 

끝으로 장안문을 거쳐 행궁으로 다가갔다. 마침 오후 3시가 되어 행궁 신풍루 앞에서는 무예 24기 시연이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가을철 관광 성수기에나 모일 듯한 인파들이 모여 있다. 화성 관람을 하고 난 후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요즈음은 어디 관광을 가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주변 관광지를 검색하기 때문이다. SNS의 효과를 함께 실감하게 된다.   

 

 

3월 3일(일) 오후 다시 1박 2일 수원편의 후편이 방송이 된다. 과연 그 다음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1박 2일의 효과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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