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402호인 수원 화성의 팔달문이 3년 가까운 중건 공사를 마치고, 201353() 오후 2시에 중건 준공식을 가졌다. 팔달문은 화성 축성 당시인 17942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3개월 만에 옹성이 완공되면서 공사를 마쳤다. 팔달문은 장안문보다 약 3개월 정도 공사기간이 더 길었으며, 공사에 들어간 비용 역시 더 많았다.

 

이러한 팔달문은 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공사를 한 기록이 보인다. 처음으로 팔달문을 보수를 한 것은 도광 26년인 1846년이었다. 이 해 69일부터 내린 비로 수원천의 물이 크게 불어나, 북수문 아래 전돌이 떠내려갔고 문루도 무너졌으며, 남수문과 매향교까지 파괴가 되었다고 수원부 판관 겸 중군인 채학영이 보고를 한 것이다. 이때 폭우로 무너진 팔달문을 중수하고 옹성을 수보하였다.(수원부계록) 이 이후에도 팔달문은 28차례나 보수를 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팔달문의 해체보수

 

팔달문의 국보 1호인 숭례문과 같은 형태로 축조가 되었다. 하지만 그 크기 면에서는 숭례문보다 크다고 하였다. 20082월 숭례문이 화재로 인하여 소진되었을 때, 수많은 국민들이 불타고 있는 숭례문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화성의 팔달문은 일제의 치하와 6, 25 한국동란 때에도 화서문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내었다.

 

이러한 팔달문을 해체 보수를 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2007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안전진단 결과, 팔달문 상층 문루 일부의 서까래가 빠지고 보가 처지는 등 목부재의 변형이 발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더 이상 방치를 하면 원형의 훼손이 온다고 판단하여, 2010625일 팔달문을 해체, 보수를 시작했다.

 

 

팔달문을 해체 공사 이전에도 주요부재의 균열 및 대량의 기울어짐, 평고대 파손과 공포의 이완, 평바의 이완, 상층 종도리 및 서까래 탈락, 상층 외기도리 뻘목 파손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주요 부재의 균열 및 부식, 부재 결구부 이완 및 이격현상에 대한 보수가 2010625일 시작을 하여, 2013331일까지 29개월 정도 이루어진 것이다.

 

팔달문 다시 돌아오다.

 

팔달문은 옹성의 문이 성문과 일직선으로 놓여있다. 그것은 이 팔달문의 홍예를 지나 옹성을 거쳐 곧게 사통팔달하라는 뜻이다. 삼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팔달문을 들어서야 한다. 팔달문의 상량문에는 돈과 곡식과 군사가 모이고, 선비와 농사꾼과 장사치가 반드시 여기 있네.’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팔달문은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문이다.

 

 

 

정조의 명에 의해 화성이 축성될 당시 축조 된 팔달문은 220년 만에 첫 해체 보수공사를 마친 것이다. 그리고 53일 마침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팔달문은 조선 초기 건물의 수려함과 건물의 멋스러움을 갖추고 있으며, 군사적 기능의 방어기능까지 겸비하고 있다. 하기에 팔달문은 성문건축의 백미로 손꼽힌다.

 

행사는 2시가 지나서 시작이 되었으며, 고유제로 먼저 팔달문의 복원을 마쳤음을 고하였다. 식전공연 시조시인 정수자의 축시와 화성사업소장의 경과보고 등으로 이어졌고, 염태영 수원시장의 기념사와, 노영관 수원시의회 회장과 국회의원 남경필 의원의 축사가 이어졌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이렇게 팔달문이 우리에게 돌아온 것을 축하한다. 팔달문의 해체보수 중건을 하는데 모두 47억이라는 예산이 들었으며, 국비가 70%, 도비가 15%, 시예산 15%로 공사를 마무리했다. 국보 1호인 숭례문과 같은 모습으로 지어진 팔달문이 지금까지 우리들의 곁에 남아있어 우리는 행복하다고 기념사에서 말을 했다.

 

축사가 끝난 후 성문 안에 놓여있던 대북을 여덟 번을 울려 개문을 하고, 팔달문의 누각에 올라 돌아보는 것으로 준공식을 마쳤다. 팔달문을 해체보수하면서 교체된 부재들은 팔달문, 가까이 늘 우리 곁에라는 제목으로 수원화성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가 된다. 53일부터 721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회에 가면, 220년 전의 팔달문의 목재와 부토, 잡상 등 부재를 만날 수가 있다.

 

2년 여 간에 걸친 보수공사를 마친 팔달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후기인 1794년에 세운 화성의 남쪽 문인 팔달문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팔달산에서 따왔다. 화성의 네 곳의 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팔달문은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우진각 지붕으로 꾸민 팔달문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옹성은 우리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414일 오후에 팔달문을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인가 촬영을 하려고 했지만, 공사가 마무리가 되지 않아 미루고는 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일요일 오후였지만, 그 바람으로 인해 기가 나부끼는 모습이 오히려 보기가 좋다. 차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촬영을 하느라 조금은 힘이 들었지만, 이렇게 웅장한 팔달문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공사 실명제 석판이 가장 뚜렷해

 

196493일에 보물 제402호로 지정이 된 팔달문은,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 서문인 화서문(보물 제403), 방화수류정, 서북공심돈 등과 함께 보물로 지정이 된 시설물이다. 그동안 갑갑하게 공사 때문에 가려져 있던 팔달문이, 모든 공사를 다 마치고 말끔하게 새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문을 지나 옹성 쪽으로 나가다가 문의 겉 벽면에 있을 공사실명제 판을 찾아보았다. 이 실명제 판은 4개문에 다 있지만, 장안문은 6.25 때 폭격을 맞는 바람에 깨어졌다고 한다. 대신 그 내용을 적어 옹성 안에 비로 제작을 해두었다. 팔달문을 바라보고 오른쪽 문 벽에 있는 실명제 판에는 감동 전 목사 김낙순, 전 부사 이방운 등 85의 기술자가 팔달문의 조성에 참여를 했다고 적고 있다.

 

 

꿀이 흘렀다는 팔달문

 

문 안에는 커다란 나무 하나가 바닥에 놓여있다. 바로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를 때 사용하는 비녀이다. 그 크기만 해도 팔달문의 장엄함을 알 수가 있다. 안으로 들어가 옹성의 벽을 바라다본다. 참 단단하게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은 양편의 성곽이 끊어져 아픔을 더하고 있지만, 그 문 하나만으로도 대단하다.

 

바람이 갑자기 세차게 불어 옹성의 문이 삐그닥거린다. 만일 그 소리를 과거에 적들이 들었다고 하면, 그 소리만으로도 두려움에 떨었을 것만 같다. 함께 팔달문의 구경에 나섰던 김우영 e수원뉴스 주간이 이야기를 한다.

 

 

여기 어디쯤인가 성문 벽에서 무엇이 흘러 내렸데요. 그것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니 달았다는 거예요. 성돌을 들어내고 안을 들여다보니, 그곳에 벌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고 해요

 

팔달문은 생명을 살리는 문이라는 것이다. 정조대왕이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선비들을 모아 장사를 시작했던 곳. 팔달문 앞의 장시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런 장시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흥청거림이 있어, 꿀벌조차도 그 안에 집을 지은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공사를 마치고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 팔달문. 주변을 돌아보다가 보니, 성문 벽 밑에 풀 한포기가 자라고 있다. 그렇게 공사를 하고 있는 동안도 생명이 그것에서 움튼 것이다. 비록 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지만, 주변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감흥을 불러온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팔달문, 팔달문을 자랑하기에 주저함이 없는 것은, 새롭게 치장을 한 팔달문을 만났다는 감흥 때문이다.

화성은 거대한 축조물이다. 하지만 화성은 자연과 닮았다. 사람들이 화성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화성이 자연과 동화되었다는 점이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느 한 곳도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거대하면서도 자연과 닮아있는 화성은, 4월이 되면 제대로 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것은 화성 주변으로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꽃과 함께 어우러진 화성을 돌다가 보면, 어찌 이리도 자연과 어울리게 축성을 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411() 화성 창룡문(동문)을 들어서 남수문까지, 안과 밖으로 화성을 돌아보았다. 아직은 만개가 되지 않은 꽃들이지만, 그래도 화성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든다. 꽃과 함께 어우러진 화성의 일부분을 돌아본다. 이 봄에 남은 구간을 4번으로 나누어 돌아 볼 생각이다.

 

중국 산동성 르지오(일조)시 무술문화교류단이 411() 오전 10시 수원문화재단을 방문한 후, 1030분부터 화성행궁 신풍루 앞 무대에서 무예24기 시범단과 함께 80분 간 양 국의 전통무예시범을 보였다.

 

르지오시의 태극권무술협회, 오사극권연구회 등 9개 무술관련단체로 구성된 무술문화교류단은, 한국과의 무예교류행사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이번에 국내 여행사 모두투어를 통해 수원문화재단이 운영 중인, 무예24기 시범단과 상호교류를 요청하여 이번 행사를 추진하게 되었다.

 

 

무술문화교류단의 대표인 르지오시 태극권 무술협회 비서장인 후장강은 "양국의 무예 교류행사를 위해 중국의 무술단체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더욱 다양한 문화교류행사를 통해 수원의 관광 활성화에도 기여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중국 르지오시 무술문화교류단은 이번 교류를 시작으로, 앞으로 10여 회에 걸쳐 수원을 방문하여 중국 전통무예를 선보일 계획이다.

 

다양한 무술동작 선보여

 

공연의 순서는 태극권 개인 5(중국)에 이어, 무예24기 시범단의 무예 24기 시범으로 이어졌다. 이어서 중국 오사극권 연구회의 오사극권 37사의 시범이 있었으며, 일조양사극권연구회의 42사 태극권 시범으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일조란산태극권연구회의 24시 태극권이 시범을 보였다.

 

 

이날 시연에 함께 참가했던 무예24기 시범단의 최형국 박사는 르지오시에서 이번에 참가한 시범단은 전문 무술인이 아닌, 자신의 양생(몸을 건강하게 단련시키는 행위)을 위해 수련을 하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태극권은 청나라 황실에서 황족과 호위무사들이 수련했던 무술로, 누구나 손쉽게 행할 수 있는 양생술이자 스포츠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한다.

 

태극권을 행함에는 넓은 공간도 많은 시간도 필요치가 않다. 또한 특별한 기구나 특정한 장소를 마련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즐겨 수련한다. 검을 들고 나오기도 하지만, 그 검은 우리 무예24기에서 사용하는 검과는 차원이 다른 듯하다. 한 마디로 그 모든 것이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양생시키기 위한 수련이라는 것이다.

 

 

태극권은 부드럽고 고요하다. 역동적인 동작이 아니라 느릿한 몸짓의 운동이, 기혈의 순환 및 신진대사를 촉진시킨다. 뿐만 아니라 온몸에 생기를 불어넣고, 신체의 각 기관을 활성화시켜 더욱 건강한 몸으로 양생시키는 것이다. 내면의 정신수련을 통하여 사고력과 집중력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수많은 중국인들은 어디서나 즐겨하는 수련방법이다.

 

무예 24기도 교류공연 등 기획해야

 

무예 24기는 수원을 상징하는 무술이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실전용 무술이다. 두 나라의 무예를 보면서 대비 되는 것은 강과 약이었다. 그리고 동()과 정()이다. 검을 들고 할 때는 그 차이가 극명하다. 우리 무예24기의 검술이 힘이 있고 절도가 있다면, 태극권에서 보이는 검술은 부드럽다.

 

 

이번에 화성 행궁 앞에서 선을 보인 중국문화교류단의 태극권이 우리나라에 와서 시연을 했다. 여행사를 통해 수원에 온 이들은 앞으로 10여 차례나 더 찾아온다고 한다. 우리도 이제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 우리들의 무예를 알려주어야 한다. 수원의 상징이자 정조대왕이 강한 국권의 상징인 무예24기가, 전 세계를 누비면서 세계인들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줄 때라는 생각이다.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무예 24. 그런 많은 기획공연 등을 통해, 화성과 무에24기가 있는 수원을 알려야 한다. 외국 어느 나라에나 있는 문화교류가 아니라, 수원만이 갖고 있는 무예24기를 활용할 때라는 생각이다. 그런 좋은 문화콘텐츠를 활용할 때, 비로소 문화강국으로서의 또 다른 위치에 서게 될 것이란 생각이다.

 

화성은 정조대왕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곳이다. 정조대왕은 화성을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축성을 하였을 뿐 아니라,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화성은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9월에 완공되었다. 28개월 만에 이렇게 거대한 성을 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동원된 모든 인부들에게 적정한 노임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화성을 돌아보는 많은 사람들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복원된 화성

 

화성의 축성시에는 많은 기물이 동우너되었다. 거중기와 녹로 등 신 기재를 특수하게 고안해 사용하였고, 이런 장비를 이용해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은 축성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 손실되었다. 그 뒤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성의 성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축성하였다. 성의 시설물로는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5,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이 중 아직까지 복원이 되지 못한 시설물은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 등이다.

 

공사실명제로 축성을 한 화성은 공사를 맡은 사람들의 이름까지 세세하게 적어놓았다

 

화성을 그냥 돌아보았다니

 

요즈음 들어 날씨가 풀리면서 화성에는 주말과 휴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성을 따라 걷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외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함께 화성을 찾아와 성 길을 따라 걷는다. 그런 관광객에게 물어보았다, ‘화성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냥 돌아보았노라고.

 

그래서 화성을 좀 더 재미있게 돌아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화성에서 이것들은 꼭 찾아보라고. 1. 공사실명제판 2. 성벽 위에 거대한 연못 3. 장안문의 성혈 4. 성벽에 남긴 야질흔적 5. 성을 지탱하는 적심돌 등이다.

 

화성은 철저하게 실명제에 의해서 축성이 되었다. 공사구간마다 책임자들이 그들의 주도아래 성을 쌓은 것이다. 그리고 성벽에 그곳을 축성한 자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 놓았다. 이 축성실명제의 표시는 화서문과 창룡문 등의 성문의 바깥쪽 벽에 새겨져 있다.

 

장안문의 옹성 위에 마련한 소방시설인 다섯개의 구멍인 오성지 

 

'화성성역의궤'‘<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오성지는 모양이 구유 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만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 때 물을 내려 보낸다. 오성지를 설치하였는데, 전체 길이는 14, 너비는 5,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라고 적고 있다. 장안문의 북옹성에 설치한 오성지를 설명한 글인데, 팔달문의 남옹성에도 오성지를 설치하였고 그 크기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성지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였는데, 옹성문이 없는 창룡문과 화서문에는 오성지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작은 규모지만 중요한 암문 중에서 동암문과 북암문에는 오성지를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성지 뒤편 위에 커다란 저수통을 만들고, 그곳에 구멍을 다섯 개 뚫어 옹성문 위에 설치한 것이 오성지이다. 적의 화공으로부터 성문을 지키는 한 방법이다.

 

장안문의 기단석에는 많은 성혈이 파여져 있다. 장안문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다. 이 장안문은 사실 신앙의 대상물이었다. 장안문이라는 상징성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정조대왕이 한양에서 화성행궁으로 오갈 때 이 장안문을 지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장안문의 안쪽 왼편 기단석에 보면 성혈(性穴) 이 보인다. 대개 성혈이란 아주 오래 전 선사시대부터 전해진 신앙이라고 하지만, 화성은 200년 전에 축성되고 난 후 이 성혈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마도 한양에 과거라도 보러 가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 이렇게 정성을 다 해 성혈을 조성한 것은 아니었을까?

 

성돌을 쪼개내기 위해 파 놓은 야질의 흔적들

 

화성을 밖으로 돌다가 보면 성을 쌓은 돌에 야질의 흔적이 보인다. 야질이란 성을 쌓을 돌을 쪼개낼 때, 커다란 바위의 계획선 위에 띄엄띄엄 원뿔형의 구멍을 정으로 파낸다. 그 다음 바짝 마른 밤나무나 소나무 따위를 그 구멍에 맞게 깎아서 박아 넣은 후에 물을 뿌린다. 물에 불어난 나무가 바위를 쪼개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우리말로 야질이라고 하는데 고대로부터 써 오던 기술이다. 이 야질의 흔적이 성벽 곳곳에 남아있다.

 

가운데 큰 돌이 성을 단단하게 붙들고 있는 돌인 적심돌이다

 

화성은 위로 올라갈수록 약간 기울어져 있다. 2~3% 정도 안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매우 단단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만 갖고 그 성이 단단하지는 않다. 그렇기에 성벽의 중간중간에 적심돌을 하나씩 끼워놓는다. 적심돌은 크고 깊게 박혀있는 돌로 그 길이가 5m 정도로 안으로 들어가 있다. 한 마디로 성벽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돌이다. 이 적심돌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있다.

 

화성을 돌아보면서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쏠쏠하다. 하지만 이런 것을 모르고 그냥 걷기만 한다면 의미가 없다. 앞으로 화성을 걷는 일이 있다면, 이러한 것들을 보고 느끼면서 진정한 화성을 멋스러움에 취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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