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를 하는 길에 문화재 안내판을 만나면 괜히 즐겁다. 그것도 전혀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문화재를 만나게 된다면 정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찌 보면 횡재를 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기쁨은 하루 종일 죽어라하고 답사를 해본 사람들만이 느끼는 생각이다.

곡성을 지나 화순 일부를 거쳐 보성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가는 길에 보니, 저수지를 건너 다리 옆에 안내판이 보인다. '봉갑사지‘ 처음 들어보는 명칭이다. 문화재 안내판은 흙색으로 표지판이 되어있다. 그 안내판과 동일한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봉갑사지‘라는 것이다. 망설일 필요도 없다. 봉갑사지를 찾아 좁은 길로 들어섰다.


아름다운 길 끝에서 봉갑사지를 만나다.

정말로 아름다운 길이다. 그 길 끝에 봉갑사지란 표지판이 보인다. 산을 깎아 평평하게 만들고 전각들을 짓느라 한창 분주하다. 우선 차에서 내려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옛날 주추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남 보성군 문덕면 천봉산 봉갑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에 인도스님인 ‘아도화상’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봉갑사는 호남의 삼갑이라 하요, 영광의 불갑사, 보성의 봉갑사, 그 하나는 영암의 도갑사라는 것이다. 이 세 절은 순서대로 지어져 ‘호남삼갑(湖南三甲)’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1,600년 된 절터는 어디로 갔을꼬?

봉갑사에는 도선국사가 삼갑을 완성하고, 각진국사가 중창하였으며, 나옹선사와 무학대사 등도 이곳에서 주석을 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산비탈에 조성중인 불사로 인해, 여기저기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러나 어떻게 석재 하나도 보이지를 않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다.

마침 절의 관계자인 분인 듯한 분에게 물어보았다. ‘봉갑사지가 어디냐?“고. 그랬더니 현재 절을 짓고 잇는 곳이 봉갑사가 있던 곳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옛 봉갑사의 자리는 어디인가?“ 라고 물었다. 기록에 이 골짜기에 봉갑사가 있었다고 했는데, 꼭 어디인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정말로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렵게 찾아 온 봉갑사지이다. 하다못해 석재 하나라도 만났다고 한다면, 이렇게 힘이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오랜 고찰 터에 석재 한 장이 없다고 하니, 이개 웬일일까?

아직은 불사가 초기단계인지 휑한 느낌이다. 삼갑의 한 곳이라고 하는 봉갑사지. 그런데 어떻게 석재 한 장도 없는 것일까? 혹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 봉갑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비탈진 등성이 위에 금강저를 높이 쳐들고 서 있는 금강역사에게 길을 묻는다. 이곳이 봉갑사지가 정녕 맞는 곳인가를.

상연대, 해발 1279m의 백운산 정상 밑에 자리한 곳이다. 오죽하면 윗 상자(=上)를 써서 상연대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8월 7일, 몸이 말이 아니다. 모처럼 맞는 휴일인데 비는 어지간히 쏟아진다. 아마도 이런 빗속에서 답사를 나갔다고 하면,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이해가 가질 않을 것이다.

아우 부부가 그래도 함께 동행을 하겠다고 넌지시 이야기를 꺼낸다. 못 이기는 척 나가고도 싶지만, 도저히 답사를 할 기운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한 곳이라도 글을 쓸 곳을 찾아 나섰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비는 점점 세차게 쏟아지는데, 가까운 곳을 찾아가겠다고 길을 나섰다.

비가 쏟아지는 날 찾아간 상연대에서 바라다 본 정경 

빗길에 찾아간 상연대, 자칫 뒤돌아 설 뻔

지리산을 넘을 대쯤엔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오늘 답사는 무리인 듯하다. 그래도 다만 한 곳이라도 찾아가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는다. 함양으로 접어들어 상연대를 찾아 길을 접어든다. 도로변의 숲길이 아름답다. 하지만 그 숲길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는, 상연대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

상연대는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에 소재한다. 백전면 소재지를 지나면 백운리 대방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길이 양편으로 갈린다. 왼쪽 길로 가면 묵계암과 상연대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백운암이 자리한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조금 올라가니 여기저기 길이 갈라진다. 어디로 가야할까?

가파른 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 상연대

우선은 이름이 상연대라고 했으니, 산 위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한참이나 오르니 묵계암이 나타난다. 묵계암을 지나쳐 상연대를 오르는 숲길이 아름답다. 내려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려는데, 아우가 말린다. 한 번 서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차는 힘이 들어 헉헉대며 쉬지 않고 산길을 오른다. 길에 가득한 낙엽이 미끄러워 운전을 하면서도 힘이 드는가 보다.

한참이나 산으로 올랐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자료에는, 묵계암에서 걸어서 10분 정도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차를 몰고 올라가도 10여분이 걸리는 가파른 길이다. 걸어서 10분이라는 말을 그대로 믿고 올랐다면 큰 낭패를 당할 뻔 했다.

깎아지른 비탈 위에 담장이 보인다. 그 밑에 주차장이 있다. 차 서너 대는 댈만한 공간이다. 차에서 내리니 바람까지 세차게 분다. 돌계단을 오르니 바람에 날아갈 듯하다. 그 위에 상연대가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짐을 상연대로 나르기 위한 지게와 리프트

겨우 오른 상연대, 그러나 단청공사 중

주차장 한 편에 지게가 하나 덩그러니 서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짐을 지게에 지고 오르는가 보다. 축대 위에는 해우소 곁에 터진 담장사이로 오르는 리프트도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풀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사용한지가 오래인 듯하다. 계단을 오르는데 비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백운산 정상 밑에 자리한 곳이라, 계곡을 치고 올라오는 바람의 세기가 장난이 아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전날 음식을 잘못 먹어, 밤새 한 토사에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겨우 우산에 이끌리다시피 상연대에 오른다. 그러나 이건 무슨 일인가? 온통 공사장이다. 단청공사 중이란다. 힘이 빠진 몸으로 이곳까지 겨우 올랐건만, 이런 낭패가 있나. 비바람이 세차서 사진조차 제대로 찍을 수가 없다.


상연대로 오르는 계단. 비바람이 거세 우산도 쓸 수가 없었다

구름도 비켜가는 상연대

상연대는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말기인 경애왕 1년 924년에 세운 암자이다. 고운 최치원선생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건립하여 관음기도를 하던 중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상연(上蓮)’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신라 말의 구산선문 중 한 곳인 실상선문이 이곳으로 옮겨와 마지막 선문의 보루라고 전한다.

천여 년 동안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했다는 상연대.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53년경에 재건을 했다고 한다. 비는 더욱 거세진다. 바람소리까지 윙윙거릴 정도이니 더 이상은 서 있을 수가 없다. 법당 안은 구경도 못하고 돌아서는데, 빗속에 멀리 산들이 줄지어 선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단청 공사중인 상연대와, 상연대에서 내려다 본 주차장

날이 좋았더라면, 정말로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을 것만 같다. 구름도 비켜간다는 상연대.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는 백운산 정상 밑에 서 있는 상연대는, 그렇게 비바람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사불산(四佛山) 대승사. 경상북도 문경시 신북면 전두리에 소재한 고찰이다. 대승사는 신라 진평왕 9년인 587년, 비단보자기에 쌓여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공덕봉 꼭대기에 내려앉자, 임금이 바위 곁에 절을 세운 것이 창건 기원이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병풍처럼 둘러친 사불산의 자락 안에 자리한다.

『삼국유사』 권3 <사불산조>에 기록에 의하면 임금이 이 사면바위에 와서 절을 하고, ‘대승사’라 사액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대승사라는 사명으로 전래한 것이, 벌써 1430년 정도나 된 고찰이다. 진평왕은 망명비구에게 사면석불에 공양을 올리게 하였는데, 망명비구가 입적을 한 후 무덤에서 한 쌍의 연꽃이 피어났다고 전한다.

자장으로 점심공양을 마치고 선방으로 돌아가시는 스님들

묵언수행’을 하는 대승사

7월 22일 금요일. 아침 일찍 대승사로 향했다. 3시간 30분을 달려 도착한 대승사. 몇 번이고 주변까지 찾아가 보았지만, 정작 대승사 일주문을 들어선 것은 처음이다. 작은 일주문 앞에는 ‘사불산 대승사’라고 적혀있고, 안쪽에는 ‘불이문(不貳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불이문을 지나니 넓은 주차장이 나타난다. 대승사의 살림을 맡아하는 원주스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공양간 한편에서는 아궁이에 커다란 솥을 걸고 불을 끓이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아궁이다. 장작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른다. 이 복중에 아궁이에 불을 때 공양을 지어야 한다니. 그래도 옛 정취가 있어 좋다는 생각이다.



대승사 일주문인 불이문과 주차장 위에 놓인 장독대

대승사에는 보물 제991호인 금동보살좌상과 보물 제575호인 목각탱부관계문서, 경북 유형문화재 제239호인 마애여래좌상과 유형문화재 제300호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이 있다. 이 중 금동보살좌상은 공개를 하지 않고 있으며, 대웅전에 모셔진 후불탱화인 목각탱화는 전국에 있는 목각탱화 중 가장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목각후불탱화는 나무를 깎아 돋을새김을 하고, 중앙에는 광배와 연꽃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별도의 나무로 깎은 아미타불이 안치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라다만 보아도 대단한 작품이라는 느낌이다.




대승사 대웅전과 보물 목각탱화, 그리고 대웅전의 꽃창상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향나무

이 목각탱화는 길이 3.6m, 폭 2.7m이다. 원래는 영주 부석사에 있던 것을 옮겨왓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중앙에 배치한 이 목각탱화는 좌우로 5단에 걸쳐 협시상을 배치하고 있는데, 좌우에 3구씩 4열에 맞추어 좌우대칭으로 배열하였다. 시간이 없어 사면바위와 마애불을 오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다음번에 대승사를 방문했을 때는 그곳부터 들려보아야겠다.




대승사 꽃밭에서 만나 나비와 응진전, 그리고 응진전에 모셔진 나한상과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공간

짜장 한 그릇에 만족하는 스님들

공양간 앞에 놓인 동판을 친다. 나무망치로 치는 동판은 둔탁한 소리를 낸다. 여기저기서 스님들이 공양간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발우에 면과 짜장을 받아 섞는다. 한 그릇을 다 드시고 조금 부족하신 듯하다. 면을 더 넣어 드신 후 선원으로 돌아가는 스님들. 그 뒷모습이 참으로 한가해 보인다.



한 여름에 아궁이에 불을 때서 면을 삶아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수행이란 생각입니다

“잘 먹었습니다. 역시 스님이 만드신 것이라 그런가, 맛이 더 있는 것 같네요”

선원에 계신 스님들은 묵언 수행중이라 ‘맛있다’라는 말씀도 못하신다. 일을 보시는 스님이 오셔서 대신 말씀을 전하신다. 아마도 묵언 중이 아니시라면 꽤 많은 칭찬을 받았을 것을. 그렇게 공양을 하기 위해 찾아간 문경 대승사. 언젠가는 스님들의 생활을 소개할 수 있는 날이 올 수가 있을까? 점점 멀어져 가는 스님들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공양을 준비하는데 곁에서 떠나지를 않는 대승사 견보살 백구. 스님들의 공양시간을 알릴 때 치는 동판. 그리고 스님들의 신발 

문경 봉암사. 일 년에 단 하루 ‘부처님오신 날’을 제외하고는 산문이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 곳.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유일한 절이기도 하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도헌 국사가 창건하였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지증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의 지세를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이 날개를 쳐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흐르니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며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이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라고 절을 지었다.


절의 창건을 마친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번 소실과 중건을 반복 한 봉암사는 1982년 6월 조계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고, 희양산 봉암사 지역을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절집 안 땅을 밟기도 송구스럽다

아침 일찍 출발을 하여 문경으로 향했다. 문경 봉암사 입구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 30분경. 들어가는 입구부터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안거 중인 스님들께 ‘스님짜장’보시를 하러 왔으니 어찌하랴. 닫힌 산문이 열렸다. 버스로 구불거리는 길을 들어간다.

경내로 들어가니 절 입구에는 통행금지 푯말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100여명이 넘는 스님들이 안거 중인데도 소리하나 없이 조용하다. 마당을 둘러본다. 조그만 풀 한 포기 없이 말끔하다. 세속에 묻힌 때를 갖고 이곳 땅을 밟기조차 송구스럽다.



버스에서 짐을 내려 공양간으로 옮겨 놓고 절 경내를 돌아본다.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놓여진 널찍한 돌들. 그저 앉으면 자리가 된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맑다 못해 푸르다. 한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기 위한 물소리가 암반 위를 흐르면서 경쾌한 소리를 낸다. 길가에 놓인 이끼가 가득한 돌. 그대로 자연이다.

돌아다니기조차 죄스럽다. 정말 조심스럽게 절 경내를 돌아본다.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없다. 깨끗하기가 이를 데 없다. 아마도 선원에 계신 스님들의 수행으로 인해서 인가보다. 봉암사 안에는 몇 점의 문화재가 있다.




봉암사 삼층석탑,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극락전이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사진 한 장을 찍으면서도 죄스럽다. 오늘따라 셔텨 소리가 유난히 크게만 들린다. 금색전 쪽으로 지나다가 보니 입구 한편에 기와조각, 돌들이 모여져 있다. 돌 하나도 허투루 놓아두지 않는 곳이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나오다가 피식 웃고 만다. 이 빈틈없는 봉암사 경내에서 돌절구 하나가 마당에 쓰러져 있다. 그 모습이 정감이 간다. 아마도 마음에 한 점 여유를 느끼고 싶으셨을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비가 오면 물이 고여 썩으니, 일부러 쓰러트려 놓았다는 것이다. 수행자와 속인의 느낌의 차이인지. 봉사도 정해진 시간 안에 산문을 나가야 된다는 봉암사. 3시간의 짧은 머무름 속에서 그래도 볼 것은 다 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깊숙한 곳은 발도 들여 보지 못했는데.



이끼가 가득 낀 바위가 길가에 놓여있다. 바위 하나도 자연이 되기싶은 곳이다. 전각 입구에 놓여있는 돌들. 돌맹이 하나도 돌아다니지 않는 경내이다. 돌절구 하나가 쓰러져 있다. 봉암사에서 본 마음의 한자락 여유이다.  




봉암사의 전각들. 많은 전각들이 있지만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맨 아래 극락전은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 봉암사 삼층석탑과 보물 지증대사 적조탑과 탑비를 모셔놓은 전각(문화재에 대한 글을 다시 쓰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하나)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392-1에 소재한 선원사. 만행산 자락에 지어진 절로. 헌강왕 1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선원사는 한창 사세가 번성할 때는 전각이 80동이나 있을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 30년인 1597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불타 전소가 되어버렸다.

영조 30년인 1754년에 김세평이 약사전과 명월당을 재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의 철불을 약사전에 안치하였다. 선원사 약사전에 봉안된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철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흔히 이 철불을 설명하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설명에는 창건 당시 조성한 철불이라고 한다. 선원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헌강왕 때인데, 창건당시 조성한 철불이 어떻게 고려 철불이 될 수가 있는지 의아스럽다.


선원사 정경과 보물인 철조여래좌상이 있는 약사전

약사전 앞에 배를 묶는 석주는 무엇인고?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인 남원선원사는 전형적인 비보사찰이다. 풍수비보사찰인 선원사는 남원을 구하는 절이다. 도선국사는 남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요천을 보면서, 남원의 지세가 물 위에 떠 있는 배와 같다고 생각을 하였다. 도선국사는 선원사를 창건하면서 약사전 앞에 두 개의 석주를 세워놓았다.

이 석주는 바로 남원이라는 배가 떠내려 갈 것을 걱정해, 배를 묶어놓기 위한 것이다. 이 입석이 없다면 남원은 그대로 물에 정처 없이 떠도는 배에 지나지 않아,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아직도 선원사 약사전 앞에는 배를 묶어두는 입석이 서 있다. 이 작은 입석 하나가 남원이라는 커다란 배를 묶어놓고 있는 것이다.


 

약사전 앞에 놓여있는 배를 묶는 석주

칠성각에 수궁가는 무엇인고?

선원사는 현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다. 그런 선원사가 예전에는 꽤나 운치가 있었나보다. 아마도 남원팔경 중에 끼어있는 ‘선원모종’도 선원사가 남원의 상징이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해가 떨어질 때쯤 요천 냇가를 거닐면, 은은히 들려오는 선원사의 범종소리. 아마도 그 무엇보다 푸근하지 않았을까?

<아니리>

그때여 어사또 농부들이 모심는 구경을 허시고 게서 떠나 남원 구중을 들어갈제

<진양조>

박석티를 올라서서 좌우산천 둘러보니 산도 옛 보던 산이요 물도 보던 물이다 마는 물이야 흐르난 것이니 그물이야 있겄느냐 광한루야 잘 있드냐 오작교도 무사헌가 동림 숲을 바라보니 춘향과 나와 둘이 서로 꼭 붙들고 가느니 못 가느니 이별허든 곳이로 구나

선원사 저녁 종성 옛 듣던 소리로 구나 북문 안을 들어서니 서리역졸 문안커날 명일사 거행을 분부허시고 춘향집을 찾어갈 제 일락서산 황혼이 되야 집집마다 밥짓노라 저녁 연기 자욱하야 분별헐 길 전히 없다 차즘 차즘 찾어 갈 제 춘향 문전 당도 허여 동정을 살펴보니 그때여 춘향어미난 후언의 단을 뭇고 두손 합장 무릎 꿇어 하나님 전의 축수를 허는디

비나니다 비나니다 천지지신 일월성신 오방신장 후토신령 화위동심 하옵시오 임자생 성춘향은 낭군 위하여 수절을 허다가 석문삼청 옥중으서 명재경각이 되었으니 삼청동 이몽룡씨 어서 수이 급제허여 전라 감사나 전라 어사로나 양단간의 수이 허여 오늘이라도 남원을 내려와겨 내 딸 춘향 살려주오


수궁가에 등장하는 토끼와 거북이 선원사 삼성각에 있다

선원사의 저녁 종소리는 남원 사람들한테는 꽤나 마음 속 깊이 각인이 되어있었나 보다. 판소리 춘향가에도 선원사의 저녁 범종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대목은 이도령이 과거에 급제를 한 후 박석티고개를 넘어서 춘향의 집으로 향하는 대목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선원사 삼성각에 보면 자라가 토끼 한 마리를 등에 태운 형상이 문설주 위에 조각이 되어있다. 도대체 왜 삼성각 문 위에 자라가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이 궁금했는데, 이제야 조금 빛이 보이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약사전 앞에 서있는 배를 묶는 석주 때문이다.


선원사는 물에서 남원을 지키는 사찰.

즉 선원사 앞에 도선국사가 절을 처음으로 이룩하면서, 배의 형태인 남원을 지켜내기 위해 세웠다는 배를 묶는 석주가 있다. 그곳에 남원이라는 배를 묶어, 남원이 좌초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약사전 뒤에 자리한 칠성각 문 위에, 별주부인 자라와 토끼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물에 빠진 토끼 같은 약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상징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래저래 남원 선원사는 물과 연관이 지어진다. 즉 물이 차면 좌초될 수밖에 없는 남원을 꽁꽁 붙들어 매어놓고, 그래도 물난리가 난다면 자라가 토끼를 구하 듯, 모두 구해내라는 뜻일 것이다. 아마도 남원이 물로 인해 큰 피해를 당하지 않은 것도, 도선국사의 석주와 삼성각의 별주부 때문은 아닐까?

남원 선원사의 알 수 없던 두 가지 물건. 늘 지나칠 때마다 ‘무엇에 쓴 물건일꼬?’를 생각했는데, 그 의문이 풀린 듯하다. 그래서 선원사는 늘 남원 사람들에게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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