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5일, 여수시 돌산읍 율림리 산 7번지에 위치한 향일암으로 오르는 길. 주차장에 차를 댈 때부터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 빗속에서 사람들은 꾸역꾸역 향일암으로 오르는 길을 걷는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이 비를 맞으며 향일암에 오르도록 하는 것일까? 카메라가 신경이 쓰이지만, 그 인파 속에 나를 묻어 버린다.


‘향일(向日)’이란 말 그대로 해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일출의 명소로 알려진 향일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 19교구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금오산 향일암은 남해 제일의 관음기도 도량으로, 관세음보살이 중생들이 그 이름을 부르면 음성을 듣고(=觀音)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곳으로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좁은 바위틈을 빠져나가다


향일암을 오르는 길은 한 사람이 겨우 빠져 나갈 수 있는 바위틈을 지나야 한다. 향일암의 전각들은 하나같이 바위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 바위가 전각을 맞이한 것인지, 전각이 바위를 찾아간 것인지. 그렇게 언제까지라도 하나가 되어 있을 전각과 바위들이 비에 젖은 나그네를 맞이한다.


카메라는 이미 비에 젖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렌즈를 닦아보지만 뿌옇게 김이 서린다. 그래도 어쩔 것이냐? 이 먼 길을 달려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다. 바닷가로 향해보지만, 한치 앞도 보이지가 않는다. 동행을 한 사람들은 연신 사진을 찍어달라고 졸라대지만, 그럴 수가 없음이 참 답답하다.

 

 


사진만 찍으려고 하면 세차게 부는 바람과 쏟아지는 비가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다. 금방 렌즈에 가득한 빗물이다. 그래도 몇 번을 천으로 렌즈를 닦아가면서 겨우겨우 여기저기 찍어보지만, 이런 날은 참 불가항력이다.


주변의 돌까지 거북등의 무늬가 있다는 향일암


원통보전 앞에 섰다. 우측으로는 산신각이 있고, 좌측으로는 종각과 그 아래 하관음전이라는 용왕전이 있다. 원통보전 안으로 들어가 삼배라도 하고 싶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다. 신발을 벗으려고 하니 바짓가랑이에서 물이 줄줄 흐른다. 오르는 길에 갑자기 넘쳐흐르는 물이 발을 치고 지나갔게 때문이다.

 

 


안에서는 스님의 예불이 한참이다. 할 수 없이 수미단 위에 좌정하신 세분 부처님께 마음의 염원을 고해본다. ‘나로 인해 상처받은 중생들, 그리고 나와 인연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그러고 나서 하관음전을 향한다. 하관음전을 내려가는 길 바위 위에는 거북이인지 석물들이 줄지어 바다를 향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십 수년 전 이곳에 들렸을 때, 한 노장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여기 향일암은 우리나라 최고의 관음성지인데, 관음보살이 이곳에 오실 때는 거북이를 타고 오시지. 그래서 이곳에는 바위와 심지어는 축대를 쌓은 돌에도 모두 육각형의 거북 등과 같은 문양이 보인다.”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 많은 거북이들이 있는가 보다. 관음보살님을 모셔오기 위해서.

 

 


바위틈으로 다니는 길, 모든 곳이 바로 기도처라고


산신각을 둘러보고 난 후 상관음전으로 향한다. 원통보전 뒤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좁은 바위틈으로 계단이 있다. 그곳을 빠져나가 상관음전이 있다. 오르고 내려오는 사람들로 인해, 길을 비켜서 기다려야만 한다. 그렇게 찾아간 상관음전. 그러나 여기도 역시 어간문 앞에서 손을 모을 뿐이다.

 

 


장맛비 속에서 찾아간 금오산 향일암. 이곳은 온통 어디에 앉아도 기도처라고 한다. 그만큼 따로 기도처가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곳에서 난 수많은 관음보살을 만난다. 이 빗속에서 여기 오른 사람들. 그들 모두가 관음보살은 아니었을까? 향일암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에 다시 거세진 빗줄기가 그리 싫지가 않다. 나도 이미 관음의 마음을 얻었는지.

한 때는 수많은 승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름대로의 구도자의 글을 모색하며, 사시사철 변하는 구룡령의 모습을 눈 안에 담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속초에서 옛 속초비행장 앞을 지나 구룡령을 향해서 가다가보면 구룡령 초입 못 미쳐 좌측으로 선림원지 이정표가 보인다.

 

사람들에게는 ‘미천골’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이곳은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속한다. 미천골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가족들이 휴양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여름과 가을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하루를 즐기고는 한다. 미천골에는 선림원이 있던 사지가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 흥성한 선림원

 

선림원지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의 발굴에서 나타난 많은 유물유적들 발견이 된 곳이다. 발굴조사 결과 선림원은 804년경에 순응법사 등이 창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대에는 선림원에서 한 끼 밥을 먹기 위해 씻은 쌀뜨물이 계곡을 따라 하류까지 흘러 미천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선림원이 10세기를 전후해 산사태와 대홍수로 매몰되었다고 추정한다. 요즈음 강원도에 내린 집중호우로 근동이 홍수와 산사태가 나서 많은 인명피해가 난 것으로 보아도 선림원의 산사태의 매몰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선림원지에는 현재 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4점이 남아있어, 9세기 후반에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돋을새김한 팔부중상은 곧 걸어 나올 듯

 

선림원지에서는 1948년에 명문이 적힌 신라 범종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선림원이 얼마나 큰 절이었나는 가늠할 수가 없다. 다만 지금 남아있는 문화재를 보고 유추할 뿐이다. 축대를 쌓은 계단을 오르면 보물 제444호로 지정이 된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법당터 남쪽의 원래 위치에 복원되었다. 2층으로 되어있는 기단은, 아래층 기단을 올려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다. 2층 기단 역시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는데, 한 면을 두기씩 8부중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장으로 되어 있으며, 1층 몸돌은 높은 편이며 2층 몸돌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넓은 편이며 지붕의 경사가 급하게 내려오다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약간 들려 있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은 5단이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는 이 삼층석탑은, 기단부의 짜임이나 각 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9세기경 신라 후기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된다.

 

화려한 장식을 한 석등, 특별한 미를 지녀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는, 보물 제445호 석등은 선림원지 안의 서쪽 언덕 위에 놓여있다. 화사석은 8각으로 빛이 새어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무늬를 새긴 매우 드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 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받침돌의 귀꽃조각은 앙증맞게 돌출되어 아름답고, 그 위로 가운데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은 모양이며 그 장식이 화려하다.

 

즉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러 모두 3개의 마디를 이루게 하였다.

 

 

 

파편이 된 비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보물 제446호인 홍각선사 탑비 귀부 및 이수는 통일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워진 것이다. 탑비는 일반적으로 비의 받침인 거북머리의 귀부와 몸돌, 이수로 구성되는데 이 비는 비받침 위에 비머리가 올려져있다. 비문이 새겨지는 몸돌은 파편만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파편을 본을 삼아 재현된 몸돌이라도 현장에 있었다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귀부의 거북은 목을 곧추세운 용의 머리모양으로 바뀌어있고, 등에는 6각형의 무늬가 있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면서 보이는 기법이다.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몸돌을 세우는 자리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이수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중앙에 비의 주인공이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글씨가 있다.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만 같은 용

 

보물 제447호인 선림원 부도는 일제시대에 완전히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분을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기단부만이 남아있다. 기단의 구조로 보아 8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신라의 전형적인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정사각형으로 조성된 받침돌 위로 기단의 하단, 중단, 상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인데, 아래단이 바닥돌과 한 돌로 짜여진 점이 특이하다.

 

 

 

윗단에는 두 겹으로 8장의 연꽃잎을 큼직하게 새기고, 그 위에 괴임을 2단으로 두툼하게 두었다. 중간받침돌은 거의 둥그스름한데 여기에 높게 돋을새김해 놓은 용과 구름무늬의 조각수법이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윗받침돌에 2겹으로 새긴 8장의 연꽃잎은 밑돌에서의 수법과 거의 같다.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부도는 위아래를 마무리하는 수법에서 뛰어난 안정감을 보이고 있다. 기단 아래받침돌 밑을 크게 강조한 것은 8각형의 일반적인 부도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쌀뜨물이 계곡을 메웠다는 선림원. 그런 이야기로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대웅전의 초석으로는 상상이 가질 않는 이야기다. 이곳을 벗어난 인근 어디에 또 수많은 유물이 묻혀 있는 것은 아닐까? 맑은 물이 흐르는 미천골 계곡. 도대체 얼마나 쌀을 씻어야 저 계곡을 다 뿌옇게 물들일 수 있을까? 지난 역사 속의 선림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역사는 그렇게 스러져가도, 그 역사의 흔적은 이리 남아있는 것을.

마음 한 자락을 덜어놓고 가도, 한 점 미련이 남지 않을 듯한 암자. 넓지 않은 경내에는 그저 어디서 털버턱 주저 앉아도 마음이 편한 것만 같다. 이천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된 영월암. 1300여 년이라는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아름다운 암자다.

 

영월암은 원래는 ‘북악사’란 이름으로 문헌상에 나타나고 있는 고찰이다. 영월암 중건기에 따르면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 문헌이나 금석문 등은 전하지 않는다.

 

 

더운 날 오르면, 오장까지 시원한 곳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오른 영월암. 입구에는 수령 640년이 되었다는 은행나무가 한그루 서 있다. 이 은행나무는 나옹대사가 식수하였다고 전한다. 수고는 37m에 둘레는 5m가 되는 보호수이다.

 

은행나무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영월암, 설봉산 주봉 아래에 고즈넉히 자리를 잡은 이 암자는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겸손함이 배어 있다. 그저 얼핏 구름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세월 설봉산을 넘어 흐르는 구름을 따라, 그렇게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그런 암자이다.

 

대웅전을 지나 왼편 암벽 위에 서 있는 삼성각으로 오른다. 영월암 삼성각에는 중앙에 유리로 앞을 가리고 뒤편 암벽에 판 후 독성을 모셔놓았다. 그 독성이 혹 나옹선사가 아니었을까? 그저 혼자만의 생각이 멋 적어 허공에 빈 웃음을 날려본다.

 

삼성각 곁에는 와편을 쌓아 올린 굴뚝이 서 있어 멋스러움을 더한다. 전국의 수많은 고찰을 찾아다니면서 보면 그 하나하나가 다 아름답지만, 그 중에도 눈에 띠는 이러한 조형물 하나는 꼭 있기 마련이다.

 

구름에 떠가는 듯한 느낌이

 

삼성각 앞에서 내려다 본 영월암. 그저 조용하게 숨을 죽이듯 엎드려 있다. 그 많은 날들을 그렇게 조용히 앉아, 참선에 든 수도승처럼, 영월암은 그렇게 지내왔는가 보다. 가지런히 줄지어 있는 기와들이 참 정연하단 생각을 한다. 작은 것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그러한 마음을 알려주려는 것인지, 누군가 도토리 몇 알을 게단 한편에 모아놓았다.

 

삼성각에서 내려오는 계단 밑을 보니 석조 안에 꽃들이 가득하다. 저런 것 하나도 저리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마음이 있어, 영월암은 구름을 닮았나보다. 우물 뚜껑 위에는 영월암 스님이 닦아서 말리려는 듯 다구들이 늘어져 있다. 깨끗하게 닦여진 다구들. 세상에 찌든 마음을 저렇게 닦아낼 수만 있다면. 오늘 영월암에 올라 나도 구름을 닮은 마음을 가져본다.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 그 앞에서 마음을 멈춘다.

 

보물 제822호 마애불을 바라보며 오르다가 보면 좌측에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를 볼 수가 있다. 영월암 창건 당시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은 주불이 없어 안타깝다. 문화재 답사를 하기 위해 전국을 다니다가 보면, 이렇게 일부가 훼파되거나 사라진 문화재가 있어 마음이 아프다.

 

 

 

높이 9.6m의 거대한 이 마애불은 ‘마애여래불’로 명칭을 붙였지만, 민머리 등으로 보아 ‘마애조사상’으로 보인다. 둥근 얼굴에 눈, 코와 입을 큼지막하게 새겼다. 두툼한 입술에 넙적한 코, 지그시 감은 눈과 커다랗게 양편에 걸린 귀. 그저 투박하기만 한 이 마애불에서 친근한 이웃집 어른을 만난 듯하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모두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왼손을 안으로 향했다.

 

고려 전기에 조성이 되었다고 하면 천년 세월을 이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전국을 돌면서 우리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만나는 문화재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

 

 

문화는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보며 그 소중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낙서에 훼파를 한다면 소중한 문화유산을 어떻게 지켜갈 수가 있을까? 영월암 대웅전 뒤편 암벽에 조성된 마애불은 그런 속된 세상이 보기 싫어 아예 눈을 감아 버렸나보다.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을 닮은 마음을 갖고 있는 영월암. 설봉산 위로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 찌든 마음 하나를 훌훌 털어버린다.

충남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에는 고려 때의 절이었던 안국사지가 있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를 않아 언제 이 절이 창건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발굴조사 시 발견된 유물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절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후 조선시대에 폐사가 되었던 것을 1929년 승려 임용준이 중창을 하였으나, 다시 폐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절들이 이렇게 중건과 소실, 혹은 폐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긴 시간을 전해진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석불과 석탑 등이 남아 그 역사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역사의 흔적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때야 추정이 가능하지만, 지금처럼 이리저리 그 소중한 문화재들을 옮겨다니면 그도 힘들어질까 걱정이 된다.


불안정한 모습, 그러나 고려의 석불

안국사지에는 석불입상이 있다. 좌우에 협시보살이 서 있고 중앙에 본존불이 서 있는 삼존불의 형태다. 2003년 발굴 조사 때 출토된 연호를 보아 고려 현종 12 ~ 21년 때인 1021~1030년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서 있는 본존불은 원통형의 관 위에 보개를 씌었는데, 그 형태가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만들어 보기에도 불안정하다.

양편에 선 협시보살도 하나의 돌에 조각을 한 수법을 택했다. 조각을 한 수법이 소박한 것으로, 이러한 조각수법은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흔히 보이는 조각기술이다. 본존불의 두 손은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몸에 비해 길고 빈약해 보인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지가 않는다.



이러한 본존불의 형상은 이 지방에서 고려시대의 석불에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형식화 되고, 제작기술이 쇠퇴한 지방적인 특색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현재 이 석불입상은 보물 제100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몸돌은 어딜 가고

석불입상 앞에는 보물 제101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석탑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석탑은 현재 1층에 1매의 몸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4매의 지붕틀이 얹혀 있는 모습이다. 아마 몸돌이 사라져버린 듯하다. 많은 문화재들의 훼손이 안타까운 것은 이런 점이다.

원형의 형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1층 몸돌의 형태는 매우 간단히 처리를 하였다. 3면에는 여래좌상을 돋을새김을 하였고, 한 면에는 문고리를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보기 드문 모습이다. 대개 4면 전체에 좌불을 새기거나 양편에는 문고리, 남은 방위에는 창살 등을 조각하는 데 비해, 기본형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고려탑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는 석탑은 추녀가 심하게 올라간 편이며,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4단씩 조각되어 있다. 석불입상의 뒤에는 배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있다. 흔히 배바위라고 부르는 이 바위에는 암각문이 두 군데 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글씨를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판독을 한 결과, 바위를 바라보고 왼편에는 목공전설이 오른편에는 매향비문이 새겨져 있다. 현재 충남 기념물 제163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안녕을 구하기 위한 자연석인 매향비

배처럼 생긴 바위에 적은 암각문을 판독을 한 결과 이 매향비문은 경오년 2월이라고 적혀있어, 1330년이나 1390년에 음각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매향비문은 돌을 다듬어 적기도 하지만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안국사지의 매향비문은 배처럼 생긴 바위에 음각을 하였다.



 

한 곳의 사지를 둘러보는 데는 길게는 한 나절에서 짧게는 두세 시간이 소요된다. 이렇게 찬찬히 들러보고 나와도, 후에 또 다른 것이 나타나면 늘 후회를 하는 것이 현지답사다.

언제나 하나하나 다시 둘러보는 것도 그러한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다. 당진 안국사지. 그 형태가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남아 있는 유적에서 그 모습을 찾아본다. 머리속에 그려지는 절의 모습이 확연치가 않은 것은, 주변을 너무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역사는 많은 것들을 변하게 만들지만, 그 모습이나마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텐데 말이다.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자리하고 있는 옛 절터인 회암사지. 사적 제128호인 회암사지는 요즈음 한창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 원래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전에는 회암사지에 수많은 문화재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회암사지에서 보이는 것은 전각들이 서 있던 곳의 축대와 주춧돌, 그리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부도탑 등이다.

2월 25일, 회암사지를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가려고 했던 곳이다. 멀리서 보아도 발굴을 하고 있는 회암사지의 모습은 장관이다. 회암사지에는 보물 제387호 회암사지선각왕사비, 보물 제388호 회암사지부도, 보물 제389호 회암사지쌍사자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무학대사비, 그리고 회암사지부도탑 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승려 지공이 창건했다고 하나 그 이전에 이미 절이 있었다고도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에 승려 지공이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그러나 일설에는 보우선사의 원증국사탑비에 의해, 충숙왕 즉위년인 1313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다고도 추정한다. 회암사는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회암사지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있고 그 남쪽 끝에 석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옹은 고려 우왕 2년인 1376년에 삼산양수지기의 비기(秘記)에서 이곳이 인도 나란타사와 지형이 같으므로, 이곳에 절을 일으키면 불법이 크게 흥한다고 하여 절을 중창했다는 것이다.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

회암사지는 현재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회암사는, 발굴된 터만 보아도 대가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세종 6년인 1424년에 행해진 ‘선교양종(禪敎兩宗)’ 폐합 때의 기록으로도, 그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회암사는 성종 3년인 1472년에는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가 중창을 하였으며,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의 비호로 다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유생들의 탄핵으로 보우는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다. 기옥을 보면 선조 때까지는 간간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만, 1818년 재건한 무학대사비에는 폐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날 꼭 비워야 하나

발굴을 한다는 안내판에는 2012년까지로 기록이 되어있다. 문화재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고 하여,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찾으니 대답이 없다. 아마도 일요일이라고 쉬는 모양이다. 그런데 소중한 문화재를 발굴을 한다고 해서, 이전을 한다는 것이 영 미덥지가 않다. 혹 이전을 하면서 훼손이라도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안내판을 보니 절터 위에 전망대가 있고, 그 곳에 가면 문화관광 해설사가 있다고 하여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해설사가 있다는 컨테이너는 굳게 닫혀 있다. 요즈음 주말과 일요일이 되면, 가족들이 나들이를 하면서 문화재를 둘러보고는 한다. 자녀들과 함께 온 가족인 듯한데, ‘꼭 일요일에 쉬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한다.

물론 일요일은 모두가 쉬는 날이기 때문에, 그들보고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딴 지역을 돌아보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주말과 일요일은 근무를 하고 평일에 쉬는 곳이 많다. 관광객들이 찾아들기 때문에, 쉬는 날을 변경해 사람들에게 문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기대를 하고 찾아간 회암사지. 결국은 발굴중인 사지에 즐비하게 늘어선 석물만 보고 온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 갖고도 회암사지가 과거 얼마나 대가람이었는가는 충분히 가늠할 수가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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