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엊그제만 해도 덥다고 난리를 쳤는데 벌써 찬바람이 인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로 인해 날씨가 더 쌀쌀해질 것으로 보인다. 15일 오후,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가 않아 그동안 찾아보고 싶었던 평택 만기사를 찾았다. 이곳은 보물 제567호로 지정이 된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이 있기 때문이다.

 

만기사(萬奇寺)는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 548번지에 소재한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만기사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벌써 만기사를 다녀온지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만기사는 많은 불사를 이뤄 가람 안에 전각이 늘어났다. 전형적인 산지가람 형태인 만기사. 주차장에서 걸어올라 천왕문을 지난다.

 

 

고려 태조 때 창건한 사찰

 

만기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낮은 산비탈을 깎아 3단으로 전각을 배치한 만기사는, 고려 태조 25년인 942년에 남대사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서 1km 정도 떨어진 동천리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만기사가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시대를 입증할 만한 것은 보물로 지정이 된 철불인 철조여래좌상 뿐이다.

 

만기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조 헌종 9년인 1843년에 기록한 <진위현읍지> 불우조에 기록이 보인다. 이 책에는 만기사에 대해서

만기사는 무봉산 아래에 있다. 절 북쪽에는 돌구멍에서 맑은 물이 샘솟는데, 맛이 달고 차다. 옛날 세조가 이 절 앞에 수레를 멈추고 우물에 가 물을 마시고 하교하기를 이 우물은 감천이나 감로천이라 하여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우물을 임금이 마셨다고 해서 어정이라고 한다 고 기록하고 있어, 만기사가 조선조에도 법맥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만기사에 기록은 기내사원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등에도 나타나고 있다. 기내사원지는 진위현읍지의 기록을 예를 들어 만기사를 세조 때 중건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밖에 보국사 창건문 등에도 만기사를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만기사는 큰 사찰은 아니었으나, 조선조까지도 사세가 계속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1972년부터 사격을 갖추기 시작해

 

현재 만기사의 당우로는 보물 철조여래좌상을 모신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무봉서원, 명부전, 종각, 감로당, 심우당, 원통전, 요사 등이 있다. 1972년부터 불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만기사는, 주지인 김혜송 스님이 대웅전과 요사, 삼성각을 지어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서요사를 신축하였으나, 1979년 동요가사 화재로 소실되는 아픔도 있었다. 1980년에는 동요사를 확장하여 중건하였고, 1981년에는 연못을 조성하였다. 1994년에는 기존의 대웅전을 대신하여 대웅전을 신축하였다. 만기사의 문화재로는 고려시대의 철불인 철조여래좌상이 유일하다.

 

길상좌를 하고 있는 단아한 철조여래좌상

 

높이가 1.43m인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불상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철불인 철조여래좌상은 현재는 금으로 도금하였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는 없고 불신만 남아 있는 상태이며, 오른팔과 양 손은 새로 만들어 끼운 것이다. 원래의 것은 절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직하게 있다. 갸름한 얼굴의 세부표현은 분명하고 목에는 3줄의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옷은 우견편단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어깨에만 걸치고 있으며, 어깨는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은 편이다.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자세라는 길상좌를 하고 앉았는데, 어깨 부분에서는 크게 접어 계단식의 주름을 만들었다. 팔과 다리 부분에도 주름을 표현하였는데 매우 형식적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이 자세는 깨달음을 얻을 때 자세인 항마촉지인이다.

 

상체가 약간 긴 편이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은 편이어서 안정감이 있다. 당당한 형태이지만 도식적인 옷주름의 표현과 단정해진 얼굴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물인 철조여래좌상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평택 만기사. 잠시 멈추었던 비가 또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날이 쌀쌀해질 텐데, 답사의 속도를 높여야만 할 것 같다.

 

양평 사나사를 찾아가다

 

천년의 숨결이 배어있는 사나사(舍那寺)’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민국 전통사찰 제48호이다. 사나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7년인 923년에 고승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한 후,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사나사는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깨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인 1608년에 단월 한방손이 재건하였다. 영조 51년인 1773년에는 양평군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를 조직하고 향답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순종 원년인 1907년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 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절에 함씨각이라는 전각이 특이해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또 한 번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1956년에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이 협력하여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다. 이렇게 많은 수난을 당한 사나사에 함씨각을 건립했다는 것은, 사나사와 함규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나사 경내에는 경기도도유형문화재 제72호인 원증국사석종탑과 도유형문화재 제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가 있고, 대적광전, 극락전, 삼성각, 조사전, 함씨각, 요사채등의 전각이 자리 잡고 있다. 절 한편으로 용문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밑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어,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하로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함공혈에 얽힌 전설

 

옥천면 용천 2리 사나사 입구 계곡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여기서 함씨 시조인 성주 함왕이 탄생했다고 전한다. 이 함공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아주 오랜 옛날 함공혈 부근에 함씨족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함씨들은 나름 하나의 부족을 형성하여 살아가길 열망 하였으나, 그 무리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씨족사회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우두머리가 없으면,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함씨들은 의견을 모아 하늘에 제사를 드렸는데, 어느 날 함공혈에서 한 남자 어린이가 나왔다. 함씨들은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점지한 아이라고 여겨, 그 아이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아 함왕으로 추대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후 함씨들은 번창을 하였으나,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다른 부족들의 침입을 받아 함씨들의 왕은 죽고 점차 쇠퇴해 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함씨마을을 지나던 나그네가 말하기를 '어머니는 버려두고 자기들만 번창하길 바라면 될 것인가? 그러니 나라가 이 꼴이 되었지'라면서 혀를 차고 갔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은 함씨들은 왕이 태어난 바위를 성 밖에 두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뒤에 함씨 중에서 왕의 덕목을 갖춘 지도자가 나타나지를 않아, 결국 새로운 성을 축조하지 못하였고,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은 단지 전설로 끝이 나지만, 함규를 어찌하여 함왕이라고 칭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사나사에 전하는 함왕에 대한 또 다른 설이 있어, 그 설을 정리해 본다.

 

 

함규(왕규)를 함왕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바위굴에서 나왔다는 분도 함규가 아니다. 함왕이라 함은 구봉 함혁 즉, 함왕주악을 일컫는 말이다. 함혁(함왕주악)은 함씨 시조로 알평과 동시대 인물이다. 함씨 세보에 의하면 당나라 때 대사마대장군(지금으로 말하면 국방부 장관)으로 병사 2천명을 거느리고 입동국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한 세력으로 한강을 유역으로 한 양근지역에 마한의 부족국가를 세운 후 세대를 이어오다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라에 복속된다. 그가 마한의 부족국가를 세웠을 때 함왕주악은 왕()이었다. 하기에 함왕성, 함왕골, 함왕혈, 함왕계곡등의 이름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신라에 복속된 후 문성왕으로부터 문간공의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함씨들은 한강유역의 강력한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신라에서부터 고려까지 승승장구한 호족가문이다. 한강을 유역으로 한 양근지역에 함왕성을 쌓고 강력한 지역기반을 바탕으로 세대를 이어오다가, 그의 21대 후손인 함규가 고려 왕건을 도와 개국 공신이 되었다.

 

왕건은 한강유역의 강력한 호족세력 함규를 얻음으로써 후삼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한다. 왕건은 함규의 두 딸과 혼인을 함으로써 함규의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으며, 그런 연유로 왕건이 함규에게 성을 하사한다. 그는 왕규로 고려사에 기록되어지는데, 함왕은 함규(왕규)의 시조인 함왕주악을 일컫는 말이다.

 

알평이 구봉 함혁과 경주 표암봉 밑에서 같이 지냈다는 기록이, 경주 이씨 세보에 전해진다. 알평이 신라를 개국하기 전에 촌장이었듯, 함혁 즉, 함왕주악도 마한의 부족국가 왕이었다. 사나사 함씨각은 구봉 함혁 즉, 함왕주악의 영정을 모신 각이며 함혁을 함씨 시조로 보아야 한다. 함왕은 함규(왕규)와는 다름 선대의 함혁을 칭한다

 

대개 절을 다니면서 보면 제일 먼저 일주문을 두고, 이어서 금강문 또는 사천왕문, 마지막이 불이문 등으로 나열을 한다. 불이문을 들어서면 금당(대웅전, 극락전, 미륵전 등)을 짓고, 금당 앞에 탑, 금당 뒤에 요사채, 강당 등이 있다. 이렇게 절의 배치를 하는 것을 가람배치라고 하는데, 가람이란 범어의 승가람마(Sangharama)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약하여 가람이라 한다.

 

승가란 중을, 람마란 원의 뜻하는 것으로, 가람은 본래 많은 승려들이 한 장소에서 불도를 수행하는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다. 하기에 이를 합해 중원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사찰의 대표적인 구성요소로는 문과 루, 종각, 법당, 회랑, 탑 등 다양한 축조물들이 있다.

 

가람의 배치는 어떻게 하나?

 

가람의 배치란 절의 건물 배치를 말한다. 이는 탑, 금당, 강당 등 사찰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건물의 배치를 뜻하는 말로, 그 배치는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다르다. 통일신라 때는 수많은 절이 있었다. 이 절들의 배치는 주로 일탑일금당식이나, 혹은 쌍탑일금당식의 가람 배치법을 하였다.

 

쌍탑일금당식은 일탑일금당식과 마찬가지로, 금당 앞에 동서로 불탑을 2기 세우는 배치법이다. 통일신라 8세기까지의 가람은 쌍탑일금당식으로 절이 산에 건립되었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절이 산 속으로 자리를 옮겨가면서 산지가람이 발달하여, 가람 배치가 자연의 지세에 따라 건물이 건립되었다. 그런 연유로 금당 앞에 쌍탑이 두거나, 일탑일금당식, 혹은 경우에 따라 탑이 없는 무탑 절도 생겨났다.

 

많은 탑을 조성한 성주사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에 소재한 사적 제307호인 성주사지.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당시의 절들은 산골에 자리 잡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충남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석등, 보물 제19호인 5층석탑, 금당건물과 그 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26호인 동삼층석탑, 보물 제20호인 중앙 3층석탑, 보물 제47호인 서삼층석탑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성주사지는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4탑 형식의 독특한 가람배치

 

현재 남아있는 문화재와 주춧돌 등으로 본 성주사지는 웅장하였다. 중문지를 지나면 석등과 그 뒤에 웅장한 오층석탑이 서 있다. 그리고 금당지가 있고, 좌우로 동남회랑지와 서남회랑지가 있다. 동남회랑지의 뒤편으로는 삼천불전지가 자리하고 있어, 성주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는가를 가늠할 수가 있다.

 

 

금당의 뒤편으로는 삼층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다. 3기의 석탑 뒤에는 강당지가 있고, 그 한편에는 석불입상이 서 있으며, 한편에서 조금 비켜선 북서쪽에 국보 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서 있다. 이러한 가람의 배치는 금당 앞에 오층석탑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일탑일금당식과 같은 가람의 배치이다. 금당 뒤편에 3기의 탑은 후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주사 사적기에 따르면 이 금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3기의 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탑으로, 정광, 가섭, 약사여래사리탑 중 하나이며, 발굴조사 결과 딴 곳에서 가져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성주사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선종 중심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9산 선문 중 하나인 성주산문은 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으며, 많은 승려를 배출한 최대의 산문이었다. 수많은 문화재만을 남겨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성주사. 잔뜩 흐리고 바람이 부는 날씨였지만,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음은 옛 성주사를 다시 한 번 가늠해보고자 함이다.

개심사(開心寺). 말 그대로 ‘마음을 여는 절’이란 뜻이다. 이 절에 가면 절로 마음이 열릴까? 그렇다면 그 마음이 열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 앞에 머리를 조아려 108배를 하면 마음이 열릴까? 아니면 도력 높은 스님의 법문으로 인해, 꽁꽁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릴까? 참 알 수 없는 절 이름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이 절에 들어서면서 만나는 전각들에게서, 그만 마음이 열리고 말았다. 괜히 넋 나간 인간처럼 비실거리고 웃다가 보니, 절로 마음이 열렸다. 충청남도에 있는 절집 중 4대 사찰의 하나로 백제시대에 혜감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개심사는, 처음에는 개원사였다고 한다.

 

백제 때의 기단이 남아 있어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1-5에 소재한 개심사는, 아직도 백제 때의 기단이 남아있는 절이다. 현대의 대웅전은 성종 6년인 1475년에 산불로 소실이 된 것을, 성종 15년인 1484년에 중건하였다. 1484년에 중건한 대웅전이 아직 보존이 되어있으니, 대웅전은 530년이라는 세월을 지키고 있는 전각이다.

 

대웅전의 기단은 백제 대 것이라고 

 

보물 제143호로 지정이 된 대웅전은 다포식과 주심포식을 절충한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개심사 경내에는 보물인 대웅전 외에도 보물 제1264호로 지정된 영산회 괘불탱, 충남 문화재자료 제194호인 명부전, 충남 문화재자료 제358호인 심검당 및 아미타본존불, 관경변상도, 칠성탱화, 오층석탑, 경전 목판 등의 자료가 있다.

 

여름에 처음으로 만난 개심사

 

개심사는 벌써 4~5 차례나 찾았던 절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았을 때는 모두 가을이었다. 굳이 가을을 고집했던 것은, 가을이 참 아름다우 절이기 때문이다. 7월 28일(일), 이번에 처음으로 한 여름에 개원사를 찾은 셈이다. 개원사는 아름다운 절이다. 전에는 계단과 흙길로 오르막이었으나, 이번에 찾아가니 계단을 말끔히 정리하여 사람들의 보행에 편하게 해 놓았다.

 

해탈문서 부터 기둥이 틀어졌다(위). 종각 역시 마찬가지

 

절집을 찾아갈 때 바쁠 이유가 없다. 삼사순례로 찾아간 개원사였지만, 일행의 뒤에 쳐져 혼자 길을 걷는다. 장맛비가 오락가락 하고는 있지만, 빗방울 몇 방울 더 맞으면 어떠하랴. 계단을 오르다가 보니, 저만큼 개심사가 보인다. 계단 끝에는 아름드리 고목과 연못이 있고, 연못가에 자란 배롱나무는 꽃이 지고 있다.

 

개심사 경내로 접어든다. 대웅전과 안양루가 남북으로 배치가 되어있고, 심검당과 무량수각이 동서로 나뉘어져 자리하고 있다. 무량수각 뒤로 돌면 명부전이 있고, 그곳을 지나 산길로 오르면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나 이 절을 찾아가면 그리 마음이 느긋해진다. 왜 그렇게 마음이 편해질까?

 

심검당이라고 무엇이 다를까? 자연은 개심사 곳곳에 있다 

 

스님, 치목이 안 되었나 봅니다.

 

상왕산 개심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안양루 옆으로 작은 해탈문이 있다. 그 해탈문을 들어서다가 그만 웃고 만다. 괜한 생각이 들어서이다. 제 멋대로 구부러진 나무를 이용해 조성을 한 일각문. 스님이 치목을 하기 싫으셨을까? 아니면 그냥 제멋대로 갖다 맞추신 것일까? 일각문의 묘한 생김새가 사람을 즐겁게 한다.

 

안으로 들어가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 종각의 기둥들도 제멋대로다. 얼마나 자연스런 스님이 머물다 가셨기에, 자연 그대로를 이렇게 기둥으로 사용을 하셨을까? 심검당의 배흘림 기둥도 눈길을 끈다. 심검당 한 편으로 돌아가니 이 곳 기둥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면 그렇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생각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틀어짐의 압권인 전각(위) 과 명부전도 틀어지기는 마찬가지

 

무량수각 앞에서 대웅전을 향해 합장을 하고 난 뒤, 무량수각을 지나 명부전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예스런 전각 하나가 서있고 앞에는 사람들이 담소를 하고 있다. 이 전각의 기둥 역시 제멋대로이다. 개원사의 스님들은 나무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왜 치목을 하지 않으셨을까?

 

산신각에 무슨 까치살창이 있어?

 

명부전 앞을 지나치려는데, 삼사순례를 도는 일행들이 명부전에서 나온다. 잠시 안을 향해 합장을 한다. 명부전 기둥 역시 뒤틀려 있다. 산신각으로 오르는 길을 걷는다. 몇 해 전인가?, 가을에 이곳을 찾았을 때 단풍이 떨어져 만든 아름다운 관경이 눈에 선하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는데. 산신각 앞에도 무리가 지어 있다.

 

 

일행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돌아가려면, 어디를 들어가 제대로 108배 한 번 할 수가 없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모든 것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답사를 다닐 때마다, 혼자 호젓하게 길을 떠나는 이유도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그저 108배를 하던지, 아니면 피곤한 다리를 쉬던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아서이다.

 

비바람에 산신각의 기왓장이라도 날아갈까 봐 그랬는가? 끈으로 묶어 놓았다. 산신각 앞에 서서 합장을 하고 뒤돌아서려는데, 전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 보인다. ‘산신각에 무슨 까치살창이 있지’. 이런 것은 부엌이나 광에나 사용을 하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개심사라는 이절, 하나도 정해진 틀이라는 것이 없다.

 


 2007년 11월 11일 단풍이들고 낙엽이 가득한 깊은 가을의 개심사 모습입니다


 

“스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하나같이 제멋대로입니까? 그래서 닫혔던 마음이 비틀어진 기둥사이에 난 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빗장을 열어주었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이 절에서 스님 덕분에 마음을 열고 갑니다.”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고, 달을 보고 깨우쳤다고 하여서 ‘간월암’이라는 붙였다는 서산 간월도의 간월암. 무학스님은 20세 때 이곳이 들어와 토굴을 짓고 열심히 수도를 하다가 달을 보고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나옹스님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하여 법호를 무학(無學)이라고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 간월암이 처음부터 간월도나 간월암으로 불린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피안도 ‘피안사(被岸寺)’로 불리다가, 밀물 때가 되면 마치 섬이 연꽃과 비슷하다고 하여 ‘연화대’ 또는 낙가산 ‘원통대’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이렇게 부르던 것이 결국 고려 말에 이곳에서 수도를 하다가 깨우침을 얻은 무학대사로 인해 ‘간월암’이 되었다.

 

 

한 때 폐사가 되었던 간월암

 

세상은 참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다. 조선이 개국할 때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끔을 해몽하면서 이미 이성계가 태조가 될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500일 기조를 시키고, 한양의 도읍터를 잡아주기도 했다. 더구나 한양터를 바을 때 그 문을 창여문이라 부르고 28칸을 지었으니, 조선이 28대로 마친다는 것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난 뒤, 간월암과 황도(태안) 등을 사폐지(절에 소유된 토지로 실질적인 절의 땅이다)로 주었다. 하지만 조선조 때 배불정책을 펴,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했는가는 알고 있는 바이다. 조선의 개국을 도운 무학대사. 그리고 이성계에게서 두 곳의 섬을 사폐지로 받은 무학대사. 하지만 조선은 500년 동안 수없이 배불정책이 이어졌다.

 

 

결국 무학대사가 토글을 짓고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어 조선이라는 나라까지 개국이 되는 것을 도왔지만, 그 억불정책으로 인해, 간월암이 폐사가 되었다. 아마 조선의 왕이 28대를 전해 질 것을 알았다는 무학대사인데, 간월암이 훗날 당한 고초를 알지는 못했던 것일까? 그 후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공선사는 이곳에서 광복을 의해 천일기도를 드리고 해방이 되었다고 하니, 이 절에 기운이 남다른 모양이다.

 

삼사순례로 찾아간 간월암

 

삼사순례, 하루에 세 곳의 절을 돌아오는 불교의식이다. 7월 28일(일)아침 일찍 버스로 수원을 출발했다. 수원시 지동에 소재한 고려암의 신도들이 삼사순례를 떠난 것이다.  출발하기 전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막상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더 세차게 퍼붓는다. 오늘 들릴 세 곳의 절에 나름 문화재가 많이 있어 기대를 하고 떠난 길이다. 홍성 나들목으로 나서 천수만 방조제를 지나 간월암이 보이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비가 오는데도 바닷바람이 조금은 세찬 듯하다. 모자가 바람에 날려 몇 번이고 날아간다. 그래도 간월암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려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간월암은 조수의 차에 의해 섬도 되었다가, 육지와 연결이 되기도 하는 절집이기 때문이다. 물을 빠진 길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바위에 붙은 것들을 열심히 줍고 있다.

 

간월암으로 들어가니 마침 사시예불 중이다. 작은 섬 위에 옹기종기 앉은 전각들이 정겨운 곳. 벌써 몇 번째 이곳을 찾았지만, 올 때마다 늘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주변에 부는 바람과, 일렁이는 물살 때문인 듯하다. 잠시 예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닷가 쪽으로 지어진 작은 전각 앞에서 열심히 잘을 하고 있다.

 

무학대사의 신통력이 절을 지키는 것일까?

 

아마도 이 작은 전각이 바다 쪽으로 조성을 한 것을 보니, 용왕각인 모양이다. 열심히 절을 한 사람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마치 썰물처럼 간월암을 빠져나간다. 나오는 길에 절 입구에 사람들이 쌓아올린 돌탑을 보면서 잠시 고개를 숙인다. 이 돌탑을 정성으로 쌓은 사람들도 마음에 다 서원이 있었을 것. 나도 잠시 고개를 숙여 행로의 무사함을 빌어본다.

 

고려 말의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깨들음 을 얻었고, 그 이전에도 이미 피안사라는 절이 잇었다고 하면, 간월암의 역사는 500년이 훌쩍 지난 고찰이다. 하지만 옛 흔적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간월암이란 이름으로 또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절집이 있으니, 그도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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