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인가 휴대폰에 문자가 하나 들어온다. ‘고객님 택배 601372 ○○045를 오늘 배달예정입니다. 동수원우체국이라는. 누가 무엇을 보냈기에 택배가 오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선뜻 생각나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택배를 기다리고 무조건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취재 약속을 해 놓은 곳이 있으니.

 

나가서 일을 보고 오후에 집에 들어오니, 문 앞에 커다란 상자가 하나 보인다. 상자에는 남원 고구마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그때서야 아 스님이 보내셨구나.’하고 깨닫는다. 바쁘게 살다가 보면 잊어버리는 것이 많다. 남원에 계신 스님은 짜장스님으로 유명세를 타고 계신, 선원사 주지이신 운천스님이시다.

 

 

고구마 한 상자 보내드릴게요.’

 

그 전날 통화를 했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설마 이렇게 빨리 고구마가 온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전화를 하고나서 바로 택배로 보내셨는가 보다. 하루 만에 도착을 한 고구마 한 상자. 열어보니 한 상자 가득한 고구마 중에는 아이 머리통만한 것들도 들어있다. 한 해 동안 스님이 땀 흘려 농사를 지으신 것이다.

 

6개월 정도인가 선원사에서 스님과 함께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짜장면을 들고 전국 각처를 다니면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스님짜장을 만들어 봉사를 하는 운천스님. 그 짜장에 들어가는 재료를 이렇게 직접 농사를 지으신다. 양파, 고구마, 감자 등, 짜장면에 들어갈 재료를 직접 농사를 지어 충당하는 것이다.

 

고구마를 캤는데 고구마 한 상자 보내드릴게요.”

스님 짜장 재료도 부족하실 텐데요

올 해는 농사가 잘 되었어요. 받을 주소 보내주세요

, 스님 고맙습니다.”

 

 

몸이 부서져도 봉사를 하시는 운천스님

 

운천스님이 선원사 주지로 임직을 받고나서, 선원사는 많은 발전을 했다. 우선은 낡은 담장을 허물어버리고, 사람들의 눈높이로 담을 낮추었다. 남원시 도통동에 소재한 선원사는 천년고찰이다.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선원사에는 보물인 철불이 있으며, 선원팔경 중에도 거론될 만큼 유서가 깊은 고찰이다.

 

스님들이 할 일이 꼭 예불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무엇인가 대중 속에 아픔을 볼 수 있어야죠. 태안기름 유출 사고 시에 그곳에 가서 짜장면 1000그릇을 봉사하는 것을 보고난 후, ‘나도 저렇게 짜장면을 들고 봉사를 해야겠다.’라고 생각을 했죠.”

 

그 뒤로 벌써 몇 년이다. 일 년이면 3만 그릇이 넘는 짜장면을 만들어 봉사를 하신다. 남들이 들어가기 꺼려하는 곳도 마다하지 않는다. 구미 불산유출 사고마을은 기자들도 들어가기를 꺼려했던 곳이지만, 제일 먼저 그곳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수원이 고향인 운천스님은 수원에서 짜장봉사를 하다가 손가락 세 개가 부스러지는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을 해 있으면서도 가장 먼저 걱정을 한 것은 짜장봉사를 가야하는데, 어르신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빨리 퇴원을 해야지라고 한다. 흡사 봉사를 위해 태어난 듯하다. 그렇게 봉사를 할 때 필요한 고구마 등을 직접 농사를 지은 것이다. 일 년 동안 땀 흘려 농사를 지은 고구마 한 상자가 앞에 놓여있다. 가슴이 뭉클하다 난 스님을 이해 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스님,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스님의 마음을 담아 이웃에 어르신들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혼자 이 한 상자를 다 먹는다면 정말 죄스러울 듯 하네요.”

 

살다가 보면 가끔 황당한 일을 당하고는 한다. 그렇다고 나쁜 일은 아니다. 어제 저녁 잠을 설치는 바람에 아침에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모르는 번호지만 전화를 받았다.

 

나다. 나 지금 공항인데 바로 수원으로 간다.”

언제 나왔냐?”

지금 도착했다니까

. 그럼 형네로 가든지 누나네 집으로 가라

수원 가는 공항버스 벌써 탔다

 

 

참 매년 이맘때가 되면 한국으로 나오는 친구 녀석이다. 걸음을 걷기 전부터 이웃에서 살던 친구와 나는, 네 집 내 집이 없었다. 그저 아무 집이나 가서 쓰러져 자면, 그 집이 바로 자기네 집이었으니까. 거기다가 부모님들도 친구고 심지어는 누나들까지도 서로 친구였으니, 남이라고 할 수도 없이 형제처럼 함께 자랐다. 심지어는 동네 분들이 쌍둥이라고 했으니.

 

그래도 친구밖에 없어

 

이 친구가 찾아오는 것은 한 가지 이유이다. 어릴 때부터 형제와 같이 자랐으니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먼 길을 달려오는 것이다. 하지만 꼭 , 밥해 놔라라고 말을 그친다. 친구가 해 준 밥이 맛있다고 하지만, 정말 맛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저 친구와 함께 한 상에 앉아 밥이라도 먹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서둘러 집을 치우면서 혼자 투덜댄다. ‘이 녀석은 맨 날 내가 무슨 제 마누라인줄 아나 서방인 줄 아나라면서. 하지만 그 투덜거림이 기분이 나빠서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생각하면 눈물이 나도록 고맙기 때문이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도 혼자 나와서 고생을 하고 있을 때도, 무던히도 한국만 나오면 날 찾아와 귀찮게 한 녀석이다.

 

그 속마음을 알기 때문에 고맙기만 하다. 속초에 있을 때도 쉽지 않은 길을 달려와 밥 한 그릇 먹고는 바로 사라져버리고는 했다. 몇 시간을 달려와 고작 밥 한 그릇 먹겠다고 찾아 온 것은 아니다. 어릴 적 형제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으니, 그리고 서로가 눈만 보아도 마음을 읽어낼 수 있으니 찾아오는 것이다.

 

 

친구를 위해 마련한 밥상

 

혼자 생활을 하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늘 찬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에 있는 아우들이 항상 챙겨주기 때문에, 오히려 남들보다 찬이 더 많다. 이렇게 갑자기 누가 들이닥쳐도 비로 상을 차릴 수 있으니, 먹을 복은 타고났는가 보다. 이 친구 녀석 어릴 때부터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고는 했으니, 자연적으로 식성이 같아졌는지. 녀석은 음식도 같은 것을 좋아한다.

 

야 역시 한국에 나와 밥은 너한테 와서 먹어야 제 맛이 나더라.”

이젠 제발 그만 좀 와라, 아니면 나가서 사 먹든지

미쳤냐. 맛있는 밥을 두고 왜 나가서 먹어

 

이렇게 만나서 함께 얼굴을 보는 시간이 불과 한 시간 남짓이다. 그 시간을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겠다고, 그 먼 길을 달려온 친구다. 아마 이 친구가 없었다고 하면 내 생활이 엉망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멀리서도 무슨 일만 있으면 전화로라도 걱정을 해주고는 했다.

 

 

요즈음 좋은 사람 안 생겼냐?”

주변에 다 좋은 사람들이지

그런 좋은 사람 말고. 형님이 사람 하나 소개시켜줄까?”

됐네, 이 사람아

오늘 밤에 제사 모시고 내일 새벽 비행기로 출국한다. 형님 없다고 슬퍼하지 말고 내년에 보자

 

60 중반에 든 남자끼리의 우정이란, 아마도 다시 아이가 되어가는 것만 같다. “내년에는 오지 말고 누나네 집으로 바로 가라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 친구가 내년 이맘 때 연락이 없으면, 아마 불안해서 못 살 것 같다. 그렇게 얼굴 보여주고 밥 한 그릇 먹고 훌쩍 떠나버린 친구 녀석.

 

그래 매년 괴롭혀도 좋으니, 그저 건강하게 오래도록 보자 친구야

 

내 블로그가 왜 갑자기 차단이 됐는지

티스토리 블로그에 댓글을 달려고 하면 차단이 된 블로그라고 나오는데

내 홈페이지가 왜 차단이 됐는지

누가 무슨 이유로 차단을 했는지

정확하게 이유를 말하시오

 

사람마다 소중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사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30년 가까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답사를 한 문화재들을 저장해 놓은 3,000장 가까운 CD이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요즈음 소중한 것이 하나 더 생겼다.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책이다. 양장본으로 인쇄를 한 책이 아니라서, 볼품이야 없지만 나에겐 그 어떤 책보다도 소중하다.

 

<하주성 기자의 생태교통 30일간의 기록>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 책은, 9월 한 달 동안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생태교통 수원2013’의 현장인 행궁동 일대를 누비면서 이런저런 것을 기록한 책이다. 얼마 전 수원시청을 들렸더니 정책홍보담당관실의 SNS팀이 만들었다면서 건네준다. 한준수 팀장이하 여러분들이 고생을 했단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해

 

벌써 생태교통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다. 참 세월은 덧없다고 했던가? 그렇게 빠르게 지나 가버린 만큼이나, 생태교통의 그 현장이 차츰 잊혀가고 있을 때이다. 그런 즈음에 꼼꼼하게 편집을 하고, 직접 프린터로 뽑아 제본까지 마친 책이다. 세상에 단 한 권 밖에는 없는 책이기 때문에 더 소중하다.

 

생태교통 수원2013’9월 한 달. 참 무던히도 날이 더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오듯 한다. 그런 무더위 속에서 하루 종일 행궁동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다가 보면, 겨드랑이고 어디고 땀띠가 나 짓무를 정도였다. 그렇게 한 달을 생태교통과 함께 생활을 한 이야기들이다. 책을 받아들고 한 장 한 장을 정성스럽게 읽어간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블로거에게 온 편지 한 장

 

그리고 엊그제인가 문 앞에 편지 한 통이 떨어져 있다. 발신인을 보니 수원시이다. 무엇인가 헤서 열어보니 염태영 수원시장님의 편지가 한 통 들어있다. 화성문화제 기간 중에 팔도 파워쇼셜러들이 수원을 찾아 화성문화제 이것저것을 포스팅 한 것을, 역시 SNS팀에서 책자로 만들어 시장님께 드렸다고 한다.

 

지난해와 올해 수원시는 미디어 다음의 주관으로, 팔도 파워쇼셜러들 10명이 찾아와 수원의 곳곳을 누볐다. 그리고 자신의 블로그에 수원에 대한 기사를 송고를 하는 방법으로 수원을 알렸다. 수원에서 가쳐간 곳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블로그를 보고 찾아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니, ‘일인 미디어의 꽃이라고 하는 블로그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된다.

 

 

수원은 SNS의 선두주자이다. 그만큼 대세에 발 빠른 대처를 한 셈이다.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해 소식을 알리는 SNS는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게 된다. 그 중에서 블로그는 오래도록 읽을 수가 있기 때문에, 요즈음을 미디어세상이라고 하는가보다. 사람들에게 전달체계를 잘 이용하는 파워블로거들이 함께 했기 때문에 효과는 그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태교통과 제50주년 수원화성문화제. 그 기간 동안 참 많이도 힘들었지만, 그만큼 행복했다. 그리고 이제 그 숱한 사연들을 담아 낸 책자 한권이 책꽂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다. 가장 작은 것이지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것은, 아마도 열심히 한 흔적이 아닐는지. 이런 행복이 잦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벌써 20년 세월이 흘렀다. 이 글을 쓴 세월이. 그리고 오늘 20년 만에 우연히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는 글 두편을 찾았다.

 

살풀이

 

덩실덩실 풀어간다

이승에서 맺힌 고를

한 겹 한 겹 풀어간다

 

누구라 맺힌 마음

저리도 슬피 울어

찢어진 가슴 한 귀퉁이

바람에 휘날릴까

 

그저

목 놓아 울어본들

가시는 길이 북망이고

잠든 곳이 산천이라

 

풀어헤친 봉두남발

다소곳 갈기 모아

흰 천 손에 들고

플어내니 겁살(劫煞)이라

 

 

()랄 것도 없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끼적였을 뿐이다. 내가 시인도 아닌데 무슨 시를 쓸 것인가? 우리 춤인 살풀이 사진을 찍어대다가, 옆에 놓인 종이에 적은 글이다. 그리고 당시 플래닛이라는 나만의 공간을 올려놓았었다. 아침에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살풀이라는 글을 찾았다. 1994년인가 적은 글이니 꼭 20년 세월이 지났다. 그런데도 인터넷에 이 글이 남아있다.

 

물론 내 블로그는 아니다. 아마도 누군가 이글을 퍼다 자신의 블로그에 남겨 두었는데, 그 글이 내 눈에 띠였을 뿐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내친 김에 또 무엇이 있을까 하여 찾아보았다. 또 하나의 살풀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보인다. 참 글 같지도 않은 글을 만났으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살풀이 2

 

먼 산 한번 쳐다보고

물동이에 올랐다.

무거운 다리는 천근이고

하늘은 그다지도 높았는지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그 끝이 없다.

천겁 세월 찌들어 온 인생

그 안에 먼 살()이 그리도 많았는지

날마다 살을 풀어낸다 야단이다.

어미 아비 세상을 뜨던 날

살 풀어 저승원문 편히 가라고

그렇게 물동이 타고 훨훨 날았다.

 

 

26일 지동 시인의 벽을 취재하고 난 후, 기사를 쓰기 위해 검색을 하다가 발견을 한 두 편의 글. 참 글 같지도 않은 글을 찾아놓고 괜히 부끄러워진다. ? 이런 글을 적었을까? 살풀이는 우리 춤 살풀이를 보고 썼고, 살풀이2는 굿판에서 무당이 물동이에 올라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적었던 기억이 난다.

 

생전 시라는 것은 써보지도 않았고, 시를 쓰는 법을 배운 적도 없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적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두 편의 글이 아직도 인터넷에서 검색되고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참 아무 것도 모르는 인사가 끼적인 글도, 글이라고 나돌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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