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객사는 그동안 해체와 복원, 이전 등으로 인해 많은 수난을 겪은 건물이다. 객사(客舍)란 지방 관아의 중심건물이기도 하다. 객사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폐를 놓고, 절을 하는 의식인 망궐례를 행하는 곳이다. 또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이곳에서 묵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 이전에 조성된 안성객사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 609 ~ 1에 소재한 안성객사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원래 안성객사는 조선 초기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지붕 위에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남아 있어, 조선조 숙종 21년인 1695년에 중수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성객사는 일반적인 객사와는 건축기법이 다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앙에 있는 정청은, 주심포계 맞배집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공포의 형식 중 주심포계 양식은 다포계양식과는 다르다. 주심포계란 공포가 기둥위에만 있는 것을 말하며, 다포계란 기둥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가 놓이는 것을 말한다. 주심포계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진 오래 된 건축기법이며, 다포계는 고려 후기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안성객사의 공포가 주심포계 양식으로 조성이 되었다는 것은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 조선 초기 이전에 이미 객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 주심포계 안성객사는 고려시대 건축법의 하나인 주심포계 공포를 사용한 몇 안되는 건물 중 하나이다.

 

이건과 일제의 훼파로 손상된 안성객사

 

안성객사는 그동안 이건과 일제의 훼파로 인해 훼손이 되었던 문화재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읍내의 관아주변에 있었던 건물을, 1932년에는 명륜여자중학교로 옮겼다가, 1995년에 해체 수리를 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해체 수리 시에 발견된 것은, 바로 1932년도에 옮기면서 기둥의 아랫부분이 잘려나가고, 기둥간 거리가 축소되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또한 기둥의 배흘림 기법이 흐트러졌으며, 기둥간의 거리의 비례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일제치하에서는 우리의 수많은 문화재가 훼파되었다. 문화재의 약탈과 함께 마구잡이식으로 문화재를 이건, 또는 자리를 옮기면서, 많은 문화재들이 제 모습을 잃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암석에 조각이 되어있는 석불의 일부분을 떼어가는 등, 문화재의 수난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안성객사도 1995년 이전을 하면서 밝혀졌듯이, 많은 부분이 일제에 의해 훼파가 되었던 것을 복원을 하면서 바로잡아 놓았다.

 

▲ 안성객사 원래 안성객사는 조선 초기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없다.

▲ 현판 정청의 중앙 위에 걸린 현판. 백성관이라 적혀있다.

 

정청의 살창문과 좌우의 날개채의 멋

 

망궐례 의식을 행하는 정청에는 백성관(白城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 정청의 앞은 살창으로 꾸몄으며, 3칸으로 되어있다. 중앙에는 살창으로 꾸민 문을 달아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청의 양편에 있는 날개체는 모두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하였다. 그러나 정청을 바라보고 좌측은 1칸의 방을 드리고, 우측의 날개채는 2칸의 방을 드렸다.

 

날개채는 마루를 깔고 정청 쪽을 항해 마루의 뒤편에 방을 드렸다. 방은 마루의 뒤쪽으로 물러서 있어, 상대적으로 날개채의 공간 확보를 하였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면 날개채의 마루가 시원한 느낌을 준다. 날개채는 정청과는 달리 익공계의 팔작집이다. 익공이란 주심포계 중에서 새의 날개모양의 살미 부재를 끼운, 공포 형식을 말한다. 공포란 지붕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데 짜 맞추어 댄 부재를 말한다.

 

▲ 살창문 정청의 중앙에는 살창문을 내어 출입을 했다.

  
▲ 좌측날개채 좌측날개채에는 방이 한칸으로 꾸며졌다

  
▲ 우측날개채 정면 2칸, 측면 2칸인 우측 날개채는 2칸의 방이 있다.

 

객사 뒤편의 여유

 

안성객사를 한 바퀴 돌아보면 뒤편의 모습에 눈길이 간다. 뒤편으로 가면 날개채에 들인 방에서 연도가 보이지 않도록 하고, 굴뚝만을 도드라지게 놓았다. 이러한 구성도 신선하다. 굴뚝은 황토와 기와를 이용해 조성을 하였으며, 위는 타원으로 막아놓았다. 또한 정청의 뒷벽과 옆벽은 심벽으로 구성을 하였다. 강돌을 이용해 심벽을 조성한 것이 아름답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상처를 안고 다시 태어난 안성객사. 우리는 이러한 문화재 하나를 복원하고 보존을 하는데 심혈을 기울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것이 아니고, 우리 후손들의 문화자산이기 때문이다. 많은 날이 흐르고 난 후에,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까? 과연 이 시대에 우리는 우리 소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간직했다고, 자랑스럽게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까? 그러한 자문을 해본다면 '최선을 다했지만 최고는 아니었다.'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 굴뚝 날개채 객방의 뒤편에 서 있는 굴뚝. 연도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의 현등사는 운악산(해발 935m) 산등성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고찰이다. 신라 법흥왕 27년인 540년에 인도에서 불법을 전하기 위해 건너온 마라가미 스님을 위해 왕이 지어준 사찰로, 오랫동안 폐사 되었다가 신라 효공왕 2년에 도선국사가 다시 중창하였다.

 

현등사는 창건 이래 많은 중창을 하였다. 신라 말 효공왕 2년인 898년 도선국사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쪽의 지세가 약해 이를 보강하기 위해 운악산을 돌아보던 중 옛 절터가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두 번째 중창은 고려 회종 6년인 1210년 보조국사 지눌이 운악산 중턱에서 불빛이 비쳐 이곳을 찾아오니 석등과 마륵바위에서 불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현등사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 태종 11년인 1411년 함허득통화상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현등사 경내에는 1619년 봉선사에서 조성한 보물 제1793호인 현등사 동종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인 삼층석탑, 183호인 목조아미타좌상, 184호 청동지장보살좌상 등 12점의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다.

 

2km를 걷는 길 겨울경치도 아름다워

 

날이 차다. 입구에서 현등사까지의 거리는 2km 남짓. 하지만 주변 경관을 들러보고 가노라면 언제 다 왔는지 일주문이 보인다. 운악산 현등사라고 현판을 단 일주문을 지나면 계단을 오르는 초입에 불이문이 서 있다. 불이문 한 옆 커다란 바위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원을 담은 작은 돌들이 빼곡히 쌓여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바쁜 일이라고는 없지 않은가? 그저 오늘은 세상 시름 이곳에 다 버리고 훌훌 털고 가야겠다는 생각이다. 조금은 안쓰럽게도 보이지만, 그래도 온갖 세월의 풍상을 다 이겨낸 지진탑이 보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인다. 그 탑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오래 전 그 탑을 조성한 장인에게 죄스런 마음 때문이다.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음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이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굴을 당한 것을 2006년 삼성문화재단으로부터 되돌려 받아, 다시 제 자리에 모셨다고 하니 탑이 더 빛을 발하는 듯하다.

 

응진전 앞에서 걸음을 멈추다

 

절이라는 곳이 명소 아닌 곳이 어디 있겠는가? 곳곳의 전각마다 부처가 아니 계신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에게 가장 눈에 띤 것은 바로 커다란 소나무 밑에 한 칸으로 조성을 한 응진전이었다. 그 모습이 왜 그리 눈물겨웠을까? 아마도 그 안에 들어가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고 있는 저 보살도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고찰들을 찾아다니다가 보니, 이제는 그 분위기만 보아도 대충은 그 절의 세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웅장하고 사람이 많다고 해서 좋은 절일까? 아니면 일 년의 수입이 많다고 해서 좋은 절일까? 물론 요즈음같은 물질만능시대에 그런 것으로 절의 가치를 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절에서 고승들이 득도를 했을까? 왜 역사에 남을만한 고승들은 모두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을까? 인간의 오욕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 부처의 참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현등사 경내를 돌아보면서 온갖 질문을 하고 그 해답을 얻으려고 애를 써본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미 내 마음과 몸이 속세의 찌들어있는데. 그저 바람 한 점이 불어 내 몸에 묻은 속세의 먼지를 훌훌 털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눈은 녹았지만 찬바람은 그대로인 한 겨울의 현등사. 그곳에서 난 잠시 동안이나마 속세를 떠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본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번지에 소재한 갑사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이 된 갑사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이란 절의 중심건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이다. 이 갑사대웅전은 원래 지금의 자리가 아닌 대적전 자리에 있던 것을, 선조 37년인 1604년에 새로 지으면서 자리를 옮긴 듯하다.

 

갑사는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 중 서악(西嶽), 고려시대엔 묘향산 상악(上嶽), 지리산의 하악(下嶽)과 더불어, 3악 중 중악(中嶽)으로 일컬어지는 명산 계룡산의 서편에 자리한다. 갑사는 백제 구이신왕 1년인 420년에 고구려 승려인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설과, 556년에 혜명이 지었다는 설 등이 전한다.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한 갑사

 

갑사는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최초 사찰인 선산 도리사를 창건하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 땅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단다. 갑자기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찾아가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는 것. 이로써 탑 아래에 배대에서 참례를 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백제 구이신왕 원년인 420년이다.

 

위덕왕 3년인 556년에는 혜명대사가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으며, 679년에는 의상이 수리해서 화엄종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가 되었다. 의상대사는 천여 칸의 당우를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으로 삼아 전국의 화엄 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크게 번창되었다.

 

 

진흥왕 원년인 887년에는 무염대사가 중창한 것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임진왜란 와중에도 융성하였다. 그러나 선조30년인 1597년이 일어난 정유재란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37년인 1604년에 인호, 경순, 성안, 보윤 등이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했고, 효종 5년인 1654년에는 사정, 신징, 경환 등이 중수하였다.

 

이 후에도 부분적인 개축과 중수를 거쳐 고종 12년인 1875년에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1899년에는 적묵당이 신축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갑사에는 조선 후기 들어 새롭게 조성된 불상과 탱화 경판이 남아있다. 또한 갑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를 배출한 호국불교 도량으로도 유명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맞배지붕에 다포계 양식인 대웅전

 

갑사의 대웅전은 859년과 889년에 새로 지었으나, 1597년의 정유재란으로 인해 건물이 모두 불타 버린 것을 선조 37년인 160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인 갑사대웅전은 정면 5, 측면 4칸으로 옆면이 사람인자 모양으로 생긴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양식이다.

 

가운데 3칸은 기둥 간격을 양 끝 칸보다 넓게 잡아 가운데는 공포를 2개씩 놓았고, 끝 칸에는 1개씩을 배치하였다.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되어있으며 불단에는 충남유형문화재 제165호인 석가여래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모시고 있다. 삼세불의 뒤편에 걸린 탱화는 보물 제1651호로 지정된 영산회상도와 약사회상도, 아미타회상도가 걸려있다. 또한 국보 제298호인 삼신불괘불탱이 불단 뒤편에 보관되어 있다.

 

 

갑사를 답사한 지가 꽤나 시간이 흘렀다. 107일 가을 단풍이 계룡산 아랫자락을 물들이기 시작했을 때니 벌써 두 달이 더 지난 셈이다. 하지만 문화재 답사를 하고 바로 정리를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한 번 답사에 많게는 20여 가지가 넘는 문화재를 보고오기 때문이다. 갑사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우선 몇 가지만 소개를 하고 미루고 있던 것이, 이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앞으로 며칠간은 그동안 소개하지 못했던 갑사의 문화재를 소개하려고 한다, 문화재는 어느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의 모습은 바뀐다고 해도, 문화재가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눈이 오는 날 떠나는 답사 길은 아무래도 힘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든다고 해도 답사를 멈출 수는 없으니, 내친 김에 몇 곳을 둘러보고는 한다. 충북 증평군 증평읍에 있는 남하리 사지 마애불상군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남하리 3구 염실마을 뒤편의 남대산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 없는 문화재 찾기가 힘들어

 

도로변에 적혀있는 남하리 사지 마애불상군의 표지를 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들어가는 것도 힘들지만, 입구에만 안내판이 있는 경우에는 온 마을을 샅샅이 뒤져야만 한다. 한 시간 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찾다가 마을주민들에게 길을 물었다. 우리가 찾는 곳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에 마애불상군이 있다는 것이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 차를 놓고 걸어 올라간다. 눈길에 발목까지 빠지고 길도 질척거린다. 그래도 전각이 보이는 곳에 마애불이 있다는 생각에 힘이 드는 것도 모른다. 앞에 전각 안에는 마애불이 있고, 그 옆에는 바위 위에 선 삼층석탑이 보인다. 발걸음을 재촉해 가까이 다가간다. 이렇게 문화재를 찾아가는 길은 늘 가슴이 뛴다. 어떠한 모습으로 나를 반길 것인가가 늘 궁금하기 때문이다.

  

신라 말의 마애불상군에 반하다

 

남하리 사지로 밝혀진 이곳에는 1954년 까지도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절은 폐사가 되어 없어지고 충북 유형문화재 제197호인 마애불상군과, 유형문화재 제141호인 삼층석탑만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준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 바위를 바라보고 좌측에는 크게 부처를 새기고, 우측으로 작은 보살을 입상으로 새겼다. 처음에는 이 마애삼존불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 후 정밀 조사를 하면서 삼존불 좌우로 여래입상과 반가사유상이 밝혀졌다.

 

 

모두 두 덩이의 바위에 새겨진 5구의 마애불. 중앙 정면에 삼존불이 있고, 그 우측으로 돌아서 여래입상 1기가 새겨져있다. 그리고 좌측의 떨어진 바위에 반가사유상이 새겨져 있으나, 흐릿해서 구별조차 하기가 어렵다. 중앙 3기의 삼존불은 형태를 알아볼 수 있으나, 좌우에 새긴 반가사유상과 여래입상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당당의 체구로 새겨진 점과 목에 삼도가 생략된 것 등으로 보아서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5기의 마애불상군은 거의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여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바위 위로는 최근에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전각이 서 있다. 삼존불이 새겨진 뒤로는 작은 통로가 보인다. 통로는 바위를 돌아 나올 수 있을 정도의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삼존불과 반가사유상 앞을 보니 누군가 초를 켰던 흔적이 보인다. 많은 초들이 타다 남은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 누군가 치성을 드렸음을 알 수 있다.

 

 

삼존불의 아래는 발을 표현하느라 움푹 양편을 파 놓았다. 전체적인 모습은 당당하다. 늘 여기저기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지만, 보는 것마다 다 새로운 느낌이 든다. 증평읍 남하리 사지에서 만난 5기의 마애불상군. 그 당당한 모습이 반갑다. 그리고 눈길에 발을 빠트리며 몇 번인가 미끄러졌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지방 장인의 손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남하리 사지의 마애불상군. 오늘 답사 길에 만난 마애불상군은 천년 지난 세월 그렇게 서 있었다. 그 당당함에 반하다.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118-1에 소재한 백제시대의 고찰인 무량사. 일주문을 지나면 담장 옆에 서 있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인 무량사당간지주(無量寺幢竿支柱)’가 서 있다.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기 위한 것이다.

 

이 깃발을 걸 수 있도록 길게 만든 쇠 등으로 만든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양쪽에 서서 이를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청주,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 등에 드물게 철당간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당간을 붙들어 매는 버팀돌인 두 기둥만이 남아 있다.

 

고려 전기에 마련한 무량사 당간

 

이 당간지주는 무량사 천왕문 동쪽에 남아 있는 것으로, 두 개의 돌기둥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기둥 끝은 안쪽면 에서 바깥쪽으로 둥글게 다듬었고, 앞뒷면의 가장자리에는 테두리 선을 돌렸다. 또한 양 옆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돌출된 띠를 새겨 넣었다. 마주보는 기둥의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2개의 구멍을 위 아래로 각각 뚫어 놓았다.

 

돌기둥 사이에는 당간을 세울 수 있는 받침돌이 끼워져 있는데, 그 중앙에 당간을 받는 기둥자리를 파고 그 주위를 둥글고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무량사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통일신라시대에서 굳어진 제작방식을 따라 고려 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천년 세월 그 자리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그 눈을 밟는 것만으로도 죄스럽다. 당간을 보기 위해 담장 밑으로 다가선다. 당간을 받는 중앙에 돌 위에도 눈이 수북이 쌓였다. 눈을 대충 손으로 쓸어내니, 가운에 당간을 받는 자리가 보이고, 주변은 둥그렇게 돋을새김을 해 놓았다. 이렇게 돌로 다듬어 세워 놓은 당간지주.

 

남들은 그저 두 개의 돌기둥을 왜 세워놓았을까 조차도 생각지 않는 듯 무심하게 지나친다. 하지만 이 두 개의 기둥은 나름대로 절의 크고 작은 행사 때 당을 매달기 위한 구조물이다. 이 당간에 얼마나 많이 당이 걸렸던 것일까? 천년 넘는 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당간지주가 새삼 경이롭다.

 

 

많은 문화재로 인해 선조들을 만난다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 그리고 그 오랜 세월을 자리를 지켜낸 석조물들. 절을 찾을 때마다 그런 옛 문화재들에 대해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지난 선조들과의 조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찾아다녀 무엇을 할 것이냐고 질문을 한다. 그렇게 문화재를 찾아 사철을 돌아다니고 있는 내사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문화재를 만나면서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선조들의 장인정신과 마음을 만난다. 그리고 그 선조들의 숱한 정성을 만난다. 그런 문화재들을 만날 때마다 그저 눈물이 나도록 감동적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담장 옆에 서서 비바람과 눈을 맞으면서 천년 세월을 서 있는 무량사 당간지주. 그 아무렇지도 않게 버틴 천년의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까?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고마움을 간직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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