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94호 사자빈신사지 석탑. 이 석탑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충주와 제천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 지나던 길에 두 번째로 들린 빈신사지. 문화재란 볼 때마다 조금씩 느끼는 바가 다른 것은, 아마 그만큼 우리 문화재에 대해 나름대로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제천시 한수면의 빈신사지 석탑은, 국보 제35호인 구례 화엄사에 있는 사사자 석탑과 같은 유형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사사자 석탑이 몇 기가 전하고 있는데, 제천 빈신사지 석탑은 시기적으로 보아 신라 때 석탑인 화엄사 석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성 연대와 이유가 확실한 빈신사지 석탑

 

문화재는 대개 그 형태 등으로 보아 연대를 추정한다. 그만큼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이들기 때문이다. 문화재의 복장물 등이 모두 도난을 당하거나 도난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덤에서 빈신사지 석탑은 조성 연대와 목적이 확실하다는데 특징이 있다. 그것은 기단에 명문을 음각해 놓았기 때문이다.

 

 

명문에 적힌 것을 보면 빈신사지 석탑은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에 조성을 했으며, 왕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 불법의 융성으로 인해 적국인 거란족을 영원히 물리칠 수 있기를 염원해 세웠다고 적고 있다. 이 석탑은 명문을 보아 처음 조성했을 때는 9층 석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받침돌 위에는 사각의 하대가 놓여있고, 상부에는 두터운 테를 둘렀다. 그 밑에는 각 면을 파서 3개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꽃문양이 그려진 안상은 고려시대 석탑 등의 기단에서 보이는 수법이다. '몹쓸 적들이 영영 물러갈 것을 기원하며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에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구층 석탑을 세웠다'1079자의 글이 명문으로 음각되어 있다.

 

 

아름다운 상층 기단은 뛰어난 작품

 

상층 기단의 중석은 이 빈신사지 석탑의 백미라고 보여진다.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에 갑석을 이고 있는데,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다르게 조형이 되었다. 갈기를 세운 네 마리의 사자 중 앞쪽에 있는 좌우 두 마리의 사자는,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돌려 사선으로 밖을 보고 있다 뒤편의 두 마리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네 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는 안에는 비로자나불의 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로 알려져 있다. 왜 거란을 물리치기 위한 서원을 담은 탑에 비로자나불을 조각한 것일까? 아마도 비로자나불의 원력이 온 세상에 미치듯, 북방정벌을 위한 고려의 염원이 그렇게 온 세상에 미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네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옥개석의 밑면 중앙에는 연꽃이 양각되어 있다. 이 연꽃은 가운데 연밥을 두고 주변에 꽃잎을 새겨 넣은 것으로, 그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현재는 위로 5층의 몸돌과 4층의 옥개석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현재의 탑만으로도 고려 시대 석탑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간직하고 있다.

 

네 마리의 돌사자는 그 모습이 다르게 조성이 되었다. 정면 좌우에 있는 두 마리의 사자는 입을 벌리고 금방이라도 무엇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은 모습으로 조각하였다. 뒤편에 있는 두 마리는 입을 다문 형태이다. 이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갈기가 있어, 수사자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사자는 힘차게 조성이 되었는데, 아마도 고려의 기상을 담은 듯하다.

 

 

고려 현종 때에 조성된 사자빈신사지 석탑. 이 석탑을 조성하면서 새겨 놓은 명문대로 거란을 영원히 물리치기를 빌었다. 그리고 왕이 장수할 것을 바랐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탑의 기능은 호국탑으로 세웠을 것이란 생각이다. 천년이나 되는 세월을 그렇게 서 있는 빈신사지 석탑. 오늘 이 빈신사지 석탑이 더욱 마음 안에 다가오는 것은, 혼란한 이 시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산중에 무엇이 있을까

산마루에 흰 구름 많이 머물러 있구나.

다만 나 홀로 즐길 수 있을 뿐

그대에게까지 바칠 수가 없구나.

 

금수산(1,016m) 산자락 신선봉에서 청풍방향 도화리로 가지를 뻗어 내린 산자락에 자리한 정방사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법주사의 말사이다. 경내에는 1825년에 중수한 인법당과 산신각, 명부전, 나한전, 그리고 석조관음상과 유운당이 있으며, 최근에 새로 건립한 정자와 종각이 있다.

 

 

금수산, 얼마나 그 모습이 아름다웠기에 금수산이라 이름을 붙인 것일까? 그 금수산 한편 봉우리 바로 아래 자리를 틀고 앉은 정방사. 말 그대로 신선이나 들어와 앉을만한 곳에 절을 지었다. 절 마당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눈 아래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진다.

 

절벽 밑에 가람을 틀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밑에 자리한 정방사. 청풍호반을 끼고 달리다가, 우측으로 2.5km 정도를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 정방사는 신라 문무왕 2년인 66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후, 몇 차례 중건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숨이 차다. 아직은 날이 덥지가 않다고 하지만 2.5km를 걸어 찾아간 정방사. 그야말로 하늘 끝에 닿았다고 표현을 해야 할까. 땔감을 나르는 사람들도 숨을 헐떡인다. 정방사 밑에서는 길이 비좁아 사람이 물건을 나르지 못한다. 기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좁은 바위 틈 사이를 지나니 커다란 바위 밑에 자리한 정방사가 나타난다. 얼른 위로 올라 합장을 하고 밑을 바라본다. 저 멀리 청풍호가 보이고, 몇 개의 산봉우리들이 발밑에 있다.

 

땅뙈기 한 평 없는 곳에

 

어찌 이 높은 산, 바위 밑에 이렇게 절을 지은 것일까? 의상대사의 제자인 정원스님이 대사를 만난 후 이곳에 와서 불사를 했다고 한다. 아무리 주변을 돌아보아도 마땅히 밭 한 뙤기 맬만한 곳도 없다. 그저 어쩌다가 구름 따라 들린 객들이 놓고 간 쌀과 음식으로 시장기를 달래며, 기도에만 정진했을까?

 

 

인법당인 원통보전 뒤로 돌아가니 바위 절벽 밑에 장독 몇 개가 보인다. 아마 이곳이 냉장고 역할을 하는가보다. 곁에는 암반 사이에서 흐르는 물이 고여 있다. 천혜의 샘이다. 식수로 사용한다고 하는데, 한 모금 들이키니 속이 시원하다. 땀을 흘리고 올라온 고찰에서 마시는 냉수 한 그릇의 맛이 천하에 비길 바가 없으니, 따로 신선이 되는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

 

여기저기 볼 것이 많다. 한 바퀴 돌아본 후, 내려오는 길에 해우소를 들린다. 일반적으로 해우소는 문 쪽을 향해 앉게 되어 있다. 그런데 정방사 해우소는 출입문을 등지고 앉는다. 그리고 앉은 방향의 앞 벽에는 커다란 공간이 있다. 그리로 저 아래 계곡과 산이 보인다. 이곳에서 일을 보면서도 선문답 한 자락 놓치지를 않았나 보다. 바람도 쉬어가고, 구름도 헐떡거리며 넘는 금수산 정방사. 오늘 정방사에는 신선이 되고 싶은 객 한사람 찾아들었다.

 

어재 서울 경기지역에 첫 눈이 내렸다. 첫 눈이라고 하지만 눈이 온 표시도 나지 않게 조금 내리는가 싶더니 그쳐버렸다. 한 겨울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은 가급적이면 고택답사는 피하고 있다. 그것은 눈에 덮힌 고택의 정취는 아름답지만, 곳곳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오리 고가를 찾아 간 날은 눈이 발목까지 빠지게 쌓여있는 날이었다.

 

제천시 한수면 소재지에서 597번 도로를 따라 한수면에 있는 덕주사를 찾아가기 전, 좌측으로 보면 도로에서 조금 들어가 한송초등학교가 있다. 그 학교 교문 옆에는 초가 한 채와 기와 한 채가 나란히 보인다. 이 초가가 충북 민속문화재 제5호인 한수 명오리 고가이다. 이 명오리 고가는 초가로 꾸며졌으며, 원래는 한수면 명오리 303번지 풍무골에 있었던 것을, 충주댐의 건설로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눈밭에 집 주위를 몇 바퀴나 돌아

 

명오리 고가를 찾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 세 번째 찾아가는 집이지만,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었다. 대문 안으로 보면 슬리퍼 등도 보이고, 패널을 여기저기 쌓아 놓은 것이 사람이 사는 집 같은데 항상 문이 자물통으로 채워져 있다. 이곳도 눈이 꽤나 내렸는지 집 뒤편으로 돌아가니, 밭에는 발목까지 빠지는 눈이 쌓여있고 담장의 초가위에도 눈이 쌓여있다. 할 수 없이 눈밭을 몇 바퀴를 돌면서, 집의 구석구석을 촬영하는 수밖에. 고가를 찾아다니다가 보면 이렇게 문이 잠겨 있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명오리 고가는 튼 ㅁ 자형의 집이다. 대문을 사랑채로 삼아 대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에는 두 칸 방을 드렸고, 대문을 지나 남쪽으로는 방과 외양간, 방앗간, 광으로 배열하였다. ㄴ 자형의 이 대문채는 사랑과 대문채를 겸한 집이다. 이 지역의 일반적인 민가의 형태를 갖고 있는 명오리 고가는 특별한 점은 없으나, 나름대로 중부지방 민가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는 고가이다.

 

 

건넌방에 낸 까치구멍의 용도는?

 

명오리 고가의 안채는 ㄱ 자 형으로 대문채와 마주하고 있다. 삼단의 돌로 쌓은 기단위에 지은 안채는, 안방을 기준으로 하여 정남향을 하고 있다. 안방의 좌측으로는 부엌이 있고, 우측으로는 윗방이 있다. 꺾인 부분에는 한 칸 대청과 건넌방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부엌 앞에는 누군가 패널을 가득 쌓아 놓아, 밖에서는 부엌문을 확인할 수가 없다.

 

밖을 몇 바퀴를 돌았지만, 안방이 있는 곳은 가려서 보이지를 않는다. 이럴 때는 할 수 없이 안방의 뒤편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고가를 답사하면서 생긴 나름대로의 답사방법이다. 이제는 웬만한 집은 밖에서 한 바퀴만 돌아보아도 집안 구조를 알 수 있으니, 그도 다행이랄 수밖에.

 

 

안채는 평범한 민가의 꾸밈이다. 그런데 안채의 건넌방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건넌방의 앞쪽에는 툇간으로 달아낸 한데 아궁이를 두었는데, 그 아궁이 우측에 까치구멍이 있다. 바람을 막으려고 종이로 발라 놓았지만, 이렇게 건넌방에 까치구멍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이 까치구멍의 용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냥 작은 쪽문이라면 이 문을 통해 음식물 등을 들여보낼 수 있다고 하지만, 까치구멍이라니.

 

건넌방의 옆문 밖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다. 뒤로 돌아가니 대청의 뒤편에는 판자문이 있다. 옆과 뒷면을 보고나서야 이 까치구멍의 용도가 이해가 간다. 일반적으로 건넌방에도 뒷벽에 문을 하나정도 내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건넌방은 툇마루를 놓은 곳과, 대청에서 드나드는 곳 밖에 문이 없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작은 까치구멍을 한데 아궁이쪽에 하나 내어놓음으로써 환기를 원활하게 한 것이다. 작은 것 하나에서도 느낄 수 있는 지혜다.

 

 

판자굴뚝이 아름다운 집

 

명오리 고가는 굴뚝이 모두 판자굴뚝이다. 이 판자굴뚝이 이 초가집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다. 판자굴뚝은 네모난 판자로 길게 사각의 연기통을 만들고, 그 중간에는 역시 나무로 움직이지 않게 고정을 시켰다. 그리고 맨 위에는 사방을 트이게 해, 위를 꺾은 판자로 마감을 하였다. 흡사 고깔을 쓴 것처럼 만들었는데, 모든 방의 뒤편에는 이 판자굴뚝이 서 있다. 이 판자굴뚝이 서 있어, 초가집이 더욱 여유 있게 보인다.

 

명오리 고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집은 전체적으로 크지 않지만, 이용을 잘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조금 흐트러진 사각형으로 쌓은 담 안에 집을 놓았는데, 대문채에서 북쪽 담 끄트머리에 측간을 두었다. 그리고 안채 부엌 밖에는 또 다른 한데 아궁이를 놓았다. 이렇게 전체적인 조형을 생각한 것이 명오리 고가의 특징이다. 비록 화려하지도 않고 남다를 것도 없는 초가이지만, 그 안에 한껏 여유를 부린 집이다.

판서 김세균(1812~1879)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공익(公翼)이고 호는 만재(晩齋)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헌종 7년인 1841년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대사헌을 거쳐 고동 8년인 1871년에 이조판서를 지냈다. 후에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관찰사를 거쳐, 수원유수가 되었다. 왕명으로 <기년아람>의 속편을 편찬하였으며, 저서에 <완염통고(琬炎通考)>가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

 

자리를 옮기면서 안채와 떨어진 사랑채

 

현재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뒤로 덕주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김세균 판서고가는, 원래 한수면 북노리에 있었던 고가다.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1983년 이곳으로 옮겼으며,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집은 본래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어 있었다. ㄱ자형의 현재 집은 사랑채고, 안채는 이전 시 딴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지역에 있던 많은 문화재들이, 이전을 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은 고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택들은 워낙 옮기는 것도 쉽지 않은 데다가, 일반적인 문화재들처럼 한 부분씩 떼어 옮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집을 전체로 옮기는 기술이 발달이 되었지만, 아마 1983년경에는 그럴 수가 없었을 테니, 집의 기둥 하나, 기와 하나도 다 해체해 옮긴 후 다시 조립을 했을 것이다.     

 

돌담이 아름다운 집.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김세균 판서고가는 아름다운 돌담이 눈길을 끈다.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지역에서 이곳으로 1983년에 옮겼다. 안채는 딴 곳으로 가고 사랑채만이 이건되었다.

 

사랑채만 남은 김세균 판서고가

 

김세균 판서고가는 몇 번을 찾아갔다. 갈 때마다 문이 잠겨있고 안에 사람이 없어, 매번 주변을 돌면서 촬영을 해야만 했다. 어떤 것이든지 속 시원히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으면 답답하다. 김세균 판서고가 역시 안으로 들어가 마음껏 휘젓고 다니면서 보아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월장을 할 수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밖에서만 보는 수밖에. 이럴 때는 정말 난감하다. 많은 고택을 돌면서 이렇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현재 김세균 판서고가는 사랑채와 광채만이 있다.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한 이집은 돌계단을 올라 일각문으로 마련한 대문이 있고, 대문의 우측에 광채가 자리하고 있다. 밖에서 본 광채는 세 칸 정도로 지어졌으며, 두 개의 판자문을 두고 있다. 생활공간인 사랑채는 ㄱ자 형으로, 앞으로 ㅡ자 형 네 칸으로 되어있고, 뒤로 날개를 붙여 세 칸을 달아내었다. 이 날개채의 끝은 사랑방으로 제사의례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문 옆에 자리한 광채. 세칸으로 지어졌으며, 두개의 판자문을 달고 있다.

일각문으로 된 대문. 이 대문은 집을 옮길 당시 집안의 일각문을 가져와 대문으로 삼은 듯하다.

 

한 끝에 놓은 개방된 대청이 특별해

 

김세균 판서고가의 특징은 개방된 대청을 한 끝에 놓았다는 것이다. 안을 자세히 볼 수가 없어서, 겨우 발 하나 디딜 틈도 없는 축대 위에 발끝을 붙이고 안을 들여다 볼 수밖에. 안의 사랑채는 그래도 특별함이 있다. 대문간에서 바라다보는 사랑채는 좌측 끝에 툇마루를 더하여 뒤로 길게 대청을 드렸다. 이 대청은 위로 들어 올리는 문을 내어 개방이 되어 있고, 밖의 벽으로도 전체를 문을 내어 누정과 같은 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옆으로는 두 칸의 방을 드렸는데, 그 앞에는 툇마루를 넓게 깔았다. 그리고 맨 끝의 한 칸은 툇마루에 연결해 판자벽을 달아 마감을 하였다. 앞에서 보면 방과 같은 이곳은, 오래도록 손을 보지 않았는지 벽의 일부가 떨어져 내렸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이곳의 뒤편엔 까치구멍과 판자문이 있다. 아마 부엌의 용도로 지어진 구조물인 듯하다. 앞으로 보면 방인데, 뒤로 돌아가면 부엌인 이 방은 이 집의 구조가 특이함을 알게 해준다.

 

 사랑채 한 끝에 자리한 대청. 문을 위로 올리게 조성이 되었다. 바깥벽을 모두 문으로 낸 것으로 보아 누정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앞으로 두 칸의 방을 드렸다. 그리고 맨 끝에는 부엌인데도 앞에서 보면 방과 같이 꾸며졌다

 

사랑채가 안채의 구실에 제몫을 다하는 집

 

김세균 판서고가의 특징은 사랑채이면서도 안채의 구실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부분의 ㅡ자 형의 공간 네 칸에 두 칸의 방이 있고, 뒤편에 꺾인 부분에도 두 칸의 방을 두어 충분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아마 이 집이 원래의 안채와 사랑채를 그대로 다 옮겨왔으면, 지금보다도 더 품위가 있는 집이 되었을 것이다.     

 

많은 고택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기에 조금이라도 불편함이 있으면 손을 보는 듯하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자신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잃고 조금씩 변해가는 고택을 보면서 마음이 허전한 것은, 난 역시 있는 그대로가 더 좋다는 사고를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인가 보다.

 

사랑채 뒤편이 맨 끝방을 사랑방으로 두고, 제사의례를 하는 공간으로 마련하였다.

 눈이 쌓인 담장과 장독이 조화를 이룬다.

 

김세균 판서고가를 돌아보면서, 툇마루에 놓인 메주뭉치가 보기 좋아 혼자 웃는다. 남들이 보면 무엇이라고 할까? 아마 고택답사를 하면서 이렇게 혼자 웃으면서 다닌 적이 꽤나 많은 듯하다. 그만큼 고택에 빠져 있기 때문이지만.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있는 보물 제546호 청풍 석조여래입상. 높이 3,41m의 이 여래입상은 통일신라 말기인 10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석조여래입상을 찾은 날, 한 여인이 쉬지 않고 합장을 하고 석조여래입상의 전각을 돌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저렇게 열심히 빌고 있는 것인지. 하기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으니, 정성을 다하면 무슨 원이든지 이루어 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후덕한 모습의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청풍 석조여래입상은 얼굴 모양이 풍부하고 자비로운 상이다. 눈은 옆으로 길게 찢어져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후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코는 한편이 마모가 되어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되었으며, 콧방울이 무너져 내렸다. 인중이 뚜렷하고, 양 볼은 두툼하다. 귀는 길게 내려져 양 어깨까지 내려져 있다. 그저 바라다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상이다. 그러한 석조여래입상의 주위를 그렇게 오랜 시간, 쉬지도 않고 도는 이유는 무엇인지.

 

"날이 많이 차네요."

"예."

"무슨 소원을 그렇게 비세요."

"아이 아빠가 많이 아파서요."

"그래요. 그렇게 열심히 빌면 좋아지실 겁니다."

"예,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여기 와서 이렇게 빌고 갈 때마다 많이 나아지는 듯해요."

"다행입니다. 얼른 나으셔야죠."

 

 보물 제546호 청풍 석조여래입상. 높이 3,41m의 이 여래입상은 통일신라 말기인 10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

 

더 이상은 말을 이어갈 수가 없다. 정성을 다해 남편이 병이 치유되기를 바라는 분에게 더 이상의 이야기는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다. 석불에 정성을 드린다고 정말로 나아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저렇게 열심히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란다면, 무슨 소원인들 이루어지지 않을까. 아마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아직도 회자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투박한 모습에서 전해지는 정다움

 

목에는 삼도가 너무 깊고, 목이 두툼하여 자칫 비대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는 석조여래입상. 법의는 앙 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걸치고, 안에는 내의를 받쳐 입었다. 배에서 매듭을 지어 V 자 형으로 발목까지 덮고 있다. 두발은 발가락까지 표현을 해 바깥으로 내밀고 있으며, 밑에는 대좌를 밟고 있다. 전체가 일석으로 조성이 된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여래입상이다. 누군가 단주 하나를 발 등에 올려놓았다. 아마 저렇게 단주를 놓고 간 사람도, 마음속에 간절히 비는바가 있었을 것이다.

 

청풍 문화재단지 안에 소재한 석조여래입상은 전체적으로는 투박하다. 그럼에도 그 안에 자애로움이 있다. 생명이 없는 돌로 조성한 석불에서 따스한 기운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장인의 정성이 그 안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된 청풍면 읍리에 서 있던 것을 1983년 이곳으로 옮겨 전각을 조성하고 복원을 한 것이다.

 

목에는 삼도가 너무 깊고 굵게 표현이 되어 비대한 감마져 있다

통견으로된 법의는 v 자형으로 발목까지 덮고 있다.

누군가 발들 위에 단주를 올려놓고 갔다.

 

사연도 많은 문화재

 

전국을 다니면서 불교문화재와 고택, 정자, 고분, 능원 등 다양한 것들을 접하고 다녔다. 벌써 그 시간이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가는 곳마다 새로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이, 나를 늘 밖으로 불러낸다. 자다가도 문화재 답사라면 벌떡 일어나 달려가고는 했다. 그 많은 문화재 안에는 정말 따듯한 이야기도 있었고, 가슴 시린 사연도 많이 있었다. 그 많은 사연을 글로 다 표현 할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어찌하랴. 내 능력이 거기까지인 것을.

 

답사를 다니다 보면 어느 문화재는 일부러 훼손을 한 흔적이 역력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어느 문화재는 파손된 부분을 보수를 하면서 엉망으로 해놓아, 헛웃음을 흘릴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날이 춥거나 덥거나 누군가 문화재를 정성스럽게 돌보는 사람들도 있어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도 문화재를 찾아 길을 떠나지만, 이번 답사 길은 제발 마음 아픈 일을 당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오늘도 문화재의 인녕과 함께, 이 여인 제발 서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전히 비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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