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채에 마굿간과 방앗간, 그리고 다락이 있는 집. 제천시 수산면 지곡리 웃말에 있던 이집은, 지곡리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집이었다.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이 되는 것을 1985년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으로 옮겨 놓았다. 현재 충북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집은, 대문채와 행랑채, 헛간과 안채로 구분이 되어있다.

 

생활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문채

 

수산 지곡리 고가의 대문채만큼 특색 있는 가옥도 드물다. 우선은 대문채가 초가로 되어있는 것이야 일반 가옥에서는 많이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지곡리 가옥의 대문은 싸리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문을 열면 바람벽이 있고, 우측으로는 다락이 있다. 다락의 밑으로는 작은 문을 만들어 놓았다. 다락에는 각종 농기구들이 쌓여 있다. 대문채를 최대한으로 이용을 한 지곡리 가옥의 특징이다.

 

 

대문채를 나서 안채 쪽으로 들어가 보면 외양간과 방앗간이 대문채의 다락 밑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대문채의 밑으로 난 문은 외양간으로 바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밖에 나가 농사일을 하고 들어 온 소를 안으로 돌아 들어오지 않고, 이 문을 통하여 바로 외양간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생활의 지혜가 묻어나는 이러한 아름다운 집이 있어, 고택의 답사길은 늘 즐겁다.

 

초가로 된 행랑채

 

지곡리 고가의 대문 안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헛간채가 있고, 초가의 행랑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행랑채는 사랑채로도 함께 사용을 하였다는 지곡리 고가를 찾았을 때, 한창 초가의 지붕을 새로 입히고 있었다. 초겨울이 되면 초가의 지붕을 덧입히는 것도 큰일이다. 일꾼들이 모여 짚단을 고르고, 그것을 잘 추려낸 다음 초가에 올릴 용마름을 틀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리가 된 초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맨위는 대문채의 문인 사립문. 가운데는 대문채 외양간 위에 조성한 다락. 농기구 등을 보관한다.

 

- 자형의 이 초가는 사랑채와 같이 사용을 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행랑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판문을 달은 안채에 붙은 방이 사랑채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행랑채와 마주하고 있는 판문 밖의 안채 방에 툇마루를 달아 놓은 것을 보면, 이 방을 사랑방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판문으로 막은 안채

 

지곡리 고가의 또 다른 특징은 판문으로 만들어진 중문이다. 행랑채와 안채의 사이를 막고 있는 이 판문은 일각문 형태로 되어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솟을문으로도 보인다. 이 문을 판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담벼락이 판자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판자로 담벼락을 만들고 그 위에 기와를 얹었다. 이런 형태의 모습이 지곡리 고가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대청을 가운데 놓고 ㄱ 자형으로 구성된 안채가 있다. 안채는 좌측으로부터 사랑방과 한 칸 대청이 있고, 꺾이는 부분에 윗방과 안방, 부엌을 달았다. 전체적인 집안의 구조로 보아 안채가 협소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공간 구성을 잘 활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안방의 뒤로 비교적 넓은 툇마루를 놓은 것도 이러한 협소한 공간을 활용한 좋은 예이다.

 

판자 담벼락이 아름다운 부엌

 

지곡리 고가의 가장 아름다운 곳은 바로 부엌이다. 부엌을 비교적 크게 둔 지곡리 고가는 아래 위를 흙으로 막고, 가운데를 전체적으로 판자로 막았다. 부엌이 이렇게 넓거나, 행랑채가 안채에 비해 방을 많이 들였다는 것은, 지곡리 고가의 주인이 비교적 부농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외양간과 방앗간, 그리고 대문채의 다락 등도 이 집의 농사가 많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엌의 벽은 집 뒤편으로 난 곳을 돌출시켰다. 그리고 돌출된 부분을 까치구멍을 내어 그릇 등을 보관하게 하였다. 까치구멍을 통해 들어 온 바람이 그릇 등을 건조시키는데 일조를 한 셈이다. 지곡리 고가를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생활의 지혜가 묻어나는 집이라는 점이다.

 

좁은 공간을 활용을 한 다양한 연출이 뛰어나다. 이러한 우리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아쉽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것이 역시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삶에 정취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집안 여기저기 장작이 쌓여있다. 아궁이에는 불을 땐 흔적이 보인다. 아직도 과거의 생활모습 그대로를 찾아볼 수가 있는 초가집. 초가집이 '고래 등 같다'고 하면 이해가 가질 않을 것이다. 주로 기와집이 덩그렇게 높다는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48호 정원태 가옥은 초가집이면서도 그런 느낌을 들게 한다.

 

정원태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어진다. 넓은 사랑채가 높이 앉아, 시원하게 펼쳐진 앞을 바라보고 있다. 초가로 만든 작고 소담한 담장에 붙은 일각문이 대문 역할을 하는 정원태 가옥의 안채 역시 초가로 운치 있는 집이다.

 

 

명당에 자리한 초가

 

제천 정원태 가옥은 19세기 초에 지어졌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이 가옥은 전망이 좋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자리한 초가집은 전형적인 길지로 알려져 있다. 안채가 ㄱ자형으로 자리를 잡고 그 앞쪽으로 ㄴ자형의 사랑채가 자리해, 튼 ㅁ자형으로 꾸며져 있다. 사랑채의 날개 부분이 짧게 구성되어 있어, 서쪽이 트여져 있다.

 

안채는 작은 부엌과 안방, 윗방, 2칸 대청이 있고, 그 끝에 골방을 - 자 형으로 배치를 했다. 꺾어진 부분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두어, 이 건넌방이 집안 살림의 중심 역할을 한다. 현재는 노부부가 집을 관리를 하고 있으며, 이 부부 역시 부엌에 달린 이 건넌방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사랑채 서쪽은 시원한 2칸 대청이 있고, 한편에는 부엌방과 큰 사랑이 반대편에는 작은 사랑방을 드렸다.

 

사랑채의 큰 사랑방. 부엌이 딸린 방은 앞으로 돌출이 되어 있다

 

안채에 거주하는 여인들을 보호한 사랑채

 

정원태 가옥의 특징은 바로 사랑채다. 그 규모는 안채보다도 충실하게 지어졌다. ㄴ자 형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부엌을 동쪽에 두고 부엌과 큰사랑, 대청, 작은사랑 순으로 꾸몄다. 이 사랑채의 특징은 시원하게 꾸며졌다는 것이다. 오른쪽에는 돌출된 방이 있고, 그 방 뒤로 부엌을 달았다. 안채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사랑채의 부엌으로 드나들 수가 있도록 한 것이다.

 

행랑채 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집안에 부녀자들이 사랑채를 찾은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사랑채를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사랑채는 앞이 트여있어 전망이 좋다. 큰 사랑은 앞쪽과 대청 쪽에 문을 달아 바람이 잘 소통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작은 사랑방 역시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ㄴ 자로 지은 사랑채는 뒤편으로 돌아가면 서편쪽의 꺾인 부분을 짧게 처리를 하였다. 서쪽이 트여있어 안채의 답답한 점이 없게 꾸몄다.

 

안채는 ㄱ 자 형으로 꾸며 좌측부터 작은 부엌 사랑방, 대청, 골방을 - 자로 두고 꺾어진 부분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드렸다.

 

사랑채의 앞쪽은 전체적으로 툇마루를 내달아 부엌방이 돌출된 곳까지 연결을 하였다. 사랑채는 원래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그 뒤 스레드로 지붕을 올렸다가, 현재는 초가로 하였다. 사랑채의 뒤편 서쪽 끝에 꺾어진 곳은 광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앞면은 -자로 되어있으며, 뒤편으로 돌아가면 ㄴ자형으로 지어졌다.

 

안채 툇마루 끝에 걸린 다락

 

정원태 가옥의 안채는 꺾어진 부분에 2칸 대청이 시원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앞쪽은 모두 툇마루를 두었다. 이 툇마루는 끝 작은 부엌의 위에는 다락을 만들었다. 다락은 방에서 출입을 하지 않고, 툇마루 끝에 문을 내어 그곳으로 출입을 하게 만들었다. 현재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로는 잡동사니를 두는 곳이라는데,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이용을 할 수 있어 편리하다고 한다.

 

툇마루 끝에 걸린 다락. 방안에서 출입을 하지 않고, 툇마루 끝에 문을 달았다. 다락의 밑에는 작은 부엌을 꾸몄다.

 

툇마루 끝에 달린 다락의 밑은 작은 부엌이다. 문이 달리지 않은 아궁이를 둔 이 작은 부엌은 고개를 숙여야만 드나들 수가 있지만, 휑한 곳에서 바람을 맞지 않도록 꾸며졌기 때문에 오히려 아늑함을 준다. 정원태 가옥을 둘러보면 부녀자들이 살림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짧은 동선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다.

 

동쪽 밖의 담장과 안채의 사이에는 텃밭을 만들었다. 그런 것들이 이집을 지을 때 살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편한 공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투박한 굴뚝이 정감이 간다. 마치 거대한 함포와 같은 모습이다.

 

돌로 꾸며 놓은 배수로도 이 집을 아름답게 보이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함포와 같은 굴뚝, 투박하지만 정감이 있어

 

정원태 가옥을 들러보다가 뒤뜰로 갔다. 그곳에서 투박한 굴뚝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곳에 함포가 서 있기 때문이다. 황토로 옹기처럼 만들고 그 위에 굴뚝을 세웠다. 그리고 굴뚝을 모두 백회로 발라놓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거대한 함포처럼 보인다. 이렇게 투박한 굴뚝들이 더욱 정감이 가는 것은, 그 굴뚝과 초가와의 조화 때문인 듯하다.

 

이 집은 배수가 잘 된다고 한다.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물이 차는 법은 없겠지만, 돌로 만들어 놓은 배수로가 집안에 드는 물을 빠르게 밖으로 빠져 나가게 하였다. 사랑채와 안채의 뒤에도 돌로 꾸민 배수로가 있다. 이렇게 돌로 꾸며 놓은 배수로가 이 집과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결국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집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정원태 가옥의 문은 크지 않다. 담장에 일각문으로 만들어 놓은 초가지붕의 대문이 멋스럽다.

 

 이 집을 찾아갔을 때 사랑채 곁에 놓인 디딜방아도 정원태 가옥의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었다.

 

정원태 가옥의 대문은 일각문이다. 아마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고 주변이 훤히 트여있어, 대문으로 인한 무거움을 굳이 원하지 않았는가 보다. 담 장 사이에 붙어있는 일각문도 초가를 얹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사랑채의 곁에 놓인 디딜방아 공이가 여유를 보이는 것도, 이 가옥의 또 다른 모양새가 아닐까 한다. 초가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는 정원태 가옥. 일생에 한 번 쯤은 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을 돌아보면, 가장 눈에 띄는 전각이 있다. 밑으로 흐르는 물을 굽어보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는 정자 한벽루. 정자를 보지 않고도 '한벽루'란 말 한 마디로도, 이 정자의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있다.

 

고려 충숙왕 4년인 1317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그 역사는 700년 가까이 되었다. 당시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다. 1972년 대홍수로 무너져 내린 것을, 1975년 원래의 양식대로 복원을 하였다. 현재는 보물 제52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익랑을 달고 있는 한벽루

 

 

한벽루가 특이한 것은 정자의 오른편에 익랑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익랑은 대문간에 달아 만든 방을 말한다. 이 계단식 익랑을 통해서 한벽루에 오를 수가 있다. 익랑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지어졌다. 익랑 하나만 갖고도 충분한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가 있다. 거기에 한벽루가 더하여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단지 안편을 바라보고 있는 현판

 

강쪽을 바라보고 있는 현판

 

익랑은 뒤로 가면서 한 단계를 높였다. 누마루를 깐 익랑은 난간을 놓고, 한벽루에 오르기 전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맛 볼 수 있는 예비 공간이다. 익랑의 주추는 1단의 주추 위에, 또 다시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석축을 사용했다. 주추가 이단으로 되어있는 익랑은 보기가 힘들다. 그 모습 하나만으로도 특이함을 보이는 것이 한벽루의 축조형태다.

 

한벽루는 익랑을 달고 있다. 익랑은 대문간에 덧내어 들인 방이다.

 

익랑의 주추는 특이하다. 일단의 주추 위에 마름모꼴 주추를 더 올렸다.

 

자연적 주초석 위에 서 있는 배부른 기둥

 

한벽루는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배가 부른 기둥을 세워 운치를 더했다. 누마루를 깐 정자는 정면 4칸, 축면 3칸이다. 멀리서보면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밑의 기둥을 지나면서 마루를 올려다보면, 참으로 꼼꼼히도 지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복원을 했다고 하지만 기존의 자재를 그대로 이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벽루의 가치를 새삼 느낄 수가 있다. 하나의 전각이 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중히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 아름다운 정자가 한 번의 아픔을 당했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만일 홍수로 인해 무너지지만 않았다면, 지금보다도 더 아름다운 한벽루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자연석 주추 위에 배가 부른 기둥을 놓고 그 위에 마루를 놓았다

 

사방이 트인 아름다운 정자

 

한벽루는 모두 3단으로 보인다. 앞에서 바라보면 익랑이 2단으로 차이 있게 만들었으며, 본 정자는 조금 더 높게 난간이 설치가 되어있다. 돌계단을 올라 익랑을 들어서면, 조금 높아진 익랑의 마루가 있다. 그리고 한벽루의 마루는 익랑보다 한 계단 높게 만들어졌다.

 

한벽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의 도도함과, 저 멀리 보이는 산 능선들이 아름답다. 이러한 곳에 서 있는 한벽루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히 일경이라 할만하다. 육각형의 기둥들이 나란히 줄을 맞추고 있다. 이곳에서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하는 것은 이 아름다운 주변 경관 때문이다. 아마 우리 선조들도 이곳에 올라 이렇게 눈길을 딴 곳으로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돌계단을 올라 익랑을 들어서면 계단식으로 된 마루가 있다

 

익랑에서 본 정자로 오르는 마루는 또 다시 계단으로 되어있어 운치를 더한다

 

봄에서 겨울까지 한벽루의 아름다움은 어느 계절에도 빠지지 않는다. 누안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인 한벽루. 예전 같으면 이곳에 올라 글 한자 남기든지, 아니면 거나하게 취하도록 술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 풍취에 젖어 찬바람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한벽루의 또 다른 흥취려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한 자료가 이제는 CD로 3,000장이 훨씬 넘었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으니, 아마도 김정호 선생만큼은 안되도 이제는 구석구석 꽤 돌아다닌 듯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 문화재의 10분지 1도 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꼭 쓰고 싶은 책이 4권 정도이다. 하나는 정자요, 또 하나는 고택이다. 그리고 마애불에 대한 책도 한 번은 내고 싶다. 그리고 끝으로 성곽이다. 성곽은 가는 곳마다 힘든 것을 마다하지 않고 한 바퀴를 돈다. 그것은 언젠가 성에 대한 역사이야기가 아니라, 성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쓰고 싶어서이다.

 

 

덕주공주가 청건했다는 덕주사를 가는 길

 

성을 보면 그 성곽이 얼마나 견고하게 쌓여졌는지 알 수가 있다. 월악산에 있는 덕주사를 오르다가 만나는 덕주산성.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덕주공주가 신라 말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덕주사를 오르는 길목에 만날 수가 있다.

 

원래 이 덕주산성은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덕주공주는 이곳 덕주사에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성은 고려 고종 43년인 1256년에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덕주산성의 동문인 덕주루의 밖과 성안

 

월악대왕의 가호가 있다고 전하는 덕주산성에는 얽힌 이야기가 많다. 조선조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전한다.

 

3개의 성문이 남아았는 덕주산성

 

덕주산성은 둘레가 32,670척(9,800m)에 이르렀던 성이다.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인 월악루, 동문인 덕주루, 북문인 북정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한창 복원을 하고 있는 덕주산성의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다. 아름답게 조성을 한 월악루는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나 된다.

 

 

덕주루 성문의 안편 무지개아치와 덕주산성의 성벽 외부

 

덕주골 입구에 서 있는 동문인 덕주루는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 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외 5겹의 성벽으로 쌓여있다. 아는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시대에 따른 성을 쌓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5겹으로 된 철옹성에는 슬픈 사연이 많아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싼 상성(내성으로 제1곽), 상, 하 덕주사를 감싼 중성(제2곽 동문주변), 그 외곽으로 하성이 있으며(제3곽) 송계 계곡인 월천의 남쪽을 막아 쌓은 남문과 북쪽의 북문을 이루는 관문형식의 외곽성(제4곽) 등 첩첩히 쌓여진 철옹성이다. 이러한 성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는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하여, 성문을 축조한 것일까? 권력이 무엇인지 참 슬픈 우리 역사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덕주루라고 현판이 붙은 동문. 보기에도 견고한 성이다. 문루 위로 올라가면 주변으로 쌓여진 성곽이 얼마나 첩첩이 쌓았는지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단단하게 쌓은 성곽이 어떤 일로 다 무너져 내렸을까? 역사란 이렇게 모든 것을 피폐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북문인 북정문과 문 위에 복원한 문루

 

송계리에 소재한 덕주사를 돌아보고 명오리를 지나 나오면 새터 말 도로변에 북문인 북정문이 있다. 최근 보수를 한 북정문은 평지에 있어서인가 동문인 덕주루보다 더 견고하게 축조가 되어있다. 북정문 곁에 놓여진 돌들을 보면 그 크기가 2m 가 넘는 것들이 있어, 이 덕주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북문 주변에 놓인 옛 성돌의 크기를 보면 덕주산성의 견고함을 알 수가 있다(위) 아래는 돌 축대를 쌓기 위해 사용한 석주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 역사의 훼손된 부분을 보는 것은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저 어디를 가나 온전히 보존이 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역사들. 그 안에는 우리 선조들의 땀과 피와 한이 맺혀져 있다. 그런 것 하나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과연 먼 후대에 우리의 자선들에게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그러한 역사의 죄인으로 남지 않는 길은, 우리의 것을 온전히 보존하여 전해주는 길 뿐이다.

옛 고택 중에는 한데 부엌이라고 부르는 구조물이 있다. 한데 부엌이라고 하면 건물 안에 속한 부엌이 아닌 밖으로 노출이 된 부엌을 말한다. 이런 부엌은 비가 많이 내리거나 습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옥의 구조이다. 충북 제천 청풍 후산리 고가에는 이 한데 부엌이 있다. 한데 부엌은 기존의 가옥 건물 한편을 안으로 집어넣어 그곳에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후산리 고가는 툇간을 달아낸 한데 부엌이다.

 

대청에 재실을 배열한 후산리 고가

 

 

현재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소재한 후산리 고가는 원래 제천시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던 조선 말기의 가옥이다.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문화재단지 안으로 1985년에 이건했으며, 현재 충북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ㄱ 자 팔작집으로 지어진 후산리 고가는 좌측으로 부엌과 2칸 크기의 윗방이 있고, 꺾어진 곳에 두 칸 대청이 두었다. 이 대청의 윗방과 접한 부분을 안쪽으로 돌출을 시켜 재실을 배열했다. 이러한 경우는 드문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집 뒤쪽으로 돌출을 시켜 재실 등을 배열하고 대청을 넓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는 넓지 않은 후산리 고가의 조금은 답답한 듯한 구성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부엌에 특별함이 있다

 

후산리 고가의 부엌은 남다르다. 그저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칠 만한 것들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엌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엌이라는 것이 부녀자들의 공간이다 보니 나름대로 세사한 부분까지 정성을 쏟은 듯하다. 우선 부엌에 난 까치구멍이 색다르다. 일반적으로 살창으로 구성하는 까치구멍이지만, 윗방의 다락 아랫부분에도 까치구멍이 나 있다. 그럼에도 부엌문 위에는 창처럼 끝을 만든 살창을 내고 있다.

 

부엌의 뒤편으로 나 있는 퇴칸 위로도 칸이 넓은 살창을 내어 놓았다. 또한 뒤편의 벽을 밖으로 돌출을 시켜 문을 달아 부엌의 기물들을 넣어 놓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그런가하면 후산리 고가의 부엌 천정은 나무를 가로, 세로로 가로질러 '정(井)'자 모양의 문양이 드러나게 했다. 작은 것 하나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 부엌이다.

 

 

한데 부엌과 툇마루의 용도, 감탄을 하다

 

한데 부엌이란 말 그대로 밖으로 노출이 되어있는 부엌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건물의 한편 위를 돌출시키고, 그 아래쪽에 아궁이를 들이는 것이 한데 부엌의 모습이다. 그러나 후산리 고가의 한데 부엌은 툇간을 달아냈다. 후산리 고가는 대청에서 오른쪽으로 건넌방과 사랑방을 두고 있다. 건넌방과 사랑방의 툇마루를 높이하고, 그 밑에 함실아궁이를 드렸다.

 

한데 부엌은 한 칸 정도의 규모로 달아냈는데, 사랑방의 앞쪽으로만 툇간을 달아냈다. 이는 사랑방에 손님들이 찾아들 것을 대비해, 불을 자주 땔 수 있도록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즉 건넌방은 윗방이 있어 겨울철에는 불을 자주 땔 필요가 없지만, 사랑방의 경우는 다르다. 겨울철에도 사랑방에 손님이 찾아들면, 방을 뜨듯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데 부엌을 툇간으로 달아낸 것이 후산리 고가의 특징이기도 하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이용

 

사랑채를 별도로 구성하지 못한 후산리 고가는 나름대로 사랑채의 용도를 꾸며냈다. 그것은 바로 사랑채의 옆으로 두 곳의 문을 내고, 그 앞에 넓은 툇마루를 놓았다는 점이 색다르다. 툇마루는 처마를 길게 빼어 마루 끝과 처마 끝이 일직선상에 놓이게 하였다. 툇마루는 사랑방의 옆면 전체를 모두 낮게 깔아, 이곳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넓은 툇마루에 앉아 술 한 잔에 시 한수를 읊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멋이리라.

 

 

 

이 사랑방의 툇마루만이 아니고 후산리 고가의 툇마루들은 일반 가옥마다 넓은 것이 특징이다. 그런 이유는 비교적 넓지 않은 후산리 고가이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활용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인 듯하다.

 

집은 그리 크지 않지만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추구했고, 사용하기에 편안하게 구성한 후산리 고가. 조선조 말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민가 가옥의 구성을 보이고 있는 후산리 고가는 낯익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좁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그 공간의 구성을 적절히 하여, 집안사람들이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볼수록 정감이 가는 가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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