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우리 전통가옥들이 아직도 잘 보존이 되어 있다. 대개는 중요민속문화재나 지방문화재 자료 등으로 지정이 되어 있는 집들이다. 요즈음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야 생활에 불편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보존을 해야 할 중요한 문화자산이다.

 

이 집들은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지만, 일반적인 모습 외에 그 나름대로의 멋을 지니고 있다. 그 멋은 무엇일까? 집의 소개는 안내판을 읽어본다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이미 잘 나와 있다. 그래서 지나쳐 버리기 쉬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쉽게 넘겨서는 안 될, 그 숨겨진 멋을 찾아본다는 겻은 고택답사의 또 다른 재미이다.

 

 

회재 이언적 선생의 온기가 서린 집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1491 ~ 1553)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지은 사랑채다. 조선조 중종 27년인 1532년에 세운 집이니 벌써 50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집이다. 독락당은 중요민속문화재가 아닌 보물 제413호로 지정이 되어 있어, 남다른 집인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독락당은 사랑채인 독락당 건물과, 선조 33년인 1601년 이언적의 손자인 순과 준 두 형제가 화의문을 작성하고 지은 경청재 등으로 조성이 되어 있다. 경청재는 1900년대 이후에는 머슴들이 기거하기도 했다. 경청재를 지을 때, 순과 준 두 후손은 이언적에게 후손들이 누를 끼칠 것을 우려해 화의문을 작성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정과 독락당은 우리 선조고(先祖考) 문원공(文元公) 회재선생의 별서이고 이외 유택에는 우리 부모(휘 전인, 호 잠계)의 혈성이 가득하다. 당우와 담장을 수호하기 위해 우리 형제가 약간의 토지를 출현하였다. 후손들 가운데 혹 궁벽하여 토지에 대해 다투는 일이 있으면 불효로써 논단할 것이다.

 

흙 담이 자연과 순응하고

 

독락당을 돌면서 가장 편하게 보이는 것은 흙담과 흙길이다. 기와와 돌을 이용해 문양을 넣고 쌓아올린 흙담은 투박하다. 그러나 그 흙담이 주는 편안함이 있어, 독락당이 더 편한 집이란 생각이다. 거기다가 담과 담 사이에 난 흙길 또한 백미다. 독락당은 전체적인 집의 구조물을 감싼 담장 안에 또 다른 담장들이 건물을 가르고 있다. 어찌 보면 한 채 한 채가 다 별개의 집으로 조형이 된 듯하다. 집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가장 편안하게 배려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독락당을 지은 이언적은 건축에도 많은 신경을 쓴 것을 알게 된다. 한 마디로 자연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것을 적절히 이용해 집을 지었다. 독락당을 돌아보면 집의 우측에 계곡이 있다. 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쪽으로 난 담장에, 흙 담이 아닌 나무로 만든 창이 있다.

 

말은 창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창살도 나무로 만든 이 담 벽에 붙은 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시원한 계곡의 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독락당의 건축미학이 이런 곳에 있다. 계곡의 바람도 들어오고, 이 담 벽의 창으로 계곡의 경치까지 볼 수 있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길이 아닐는지.

 

 

담 벽에 붙여 지은 건물의 용도는?

 

계곡을 돌다가 보면 또 하나 볼거리가 있다. 담의 한쪽에 대를 만들고, 그 위에 반은 밖으로 반은 안으로 들어가 있는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의 용도는 무엇일까? 곁으로 지나가다가 보니 이 건물의 용도가 궁금하다.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뒷간의 용도가 아닌가 한다. 담의 밖으로 돌출을 시켜 안의 공간을 확보하도록 한 이런 여유가 독락당의 또 하나의 묘미다.

 

 

 

넌 도대체 무슨 연유로 그곳에 있느냐?

 

흙으로 올린 담장 사이로 난 길을 걸어 계곡 쪽으로 가다가 보면, 담장 끝에 난 조그마한 문 하나가 있다. 이 작은 문을 왜 이곳에 두었을까?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그 중에 하나가 이 문의 용도는 계곡으로 드나드는 문이란 생각이다. 즉 이 작은 문을 나서면 바로 계곡이다. 여름철 더위를 씻어내고 싶을 때, 이 담벼락에 붙은 쪽문을 나서 계곡에서 목욕이라도 했던 것일까?

 

 

이 문이 아니면 담장을 돌아 나와야 한다. 이 작은 문 하나가 계곡을 가기 위한 것이라면, 이 집주인의 작은 배려 하나가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가를 느낄 수 있다. 독락당은 자연이다. 어느 것 하나 자연을 거슬리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자연이 되어버렸다. 독락당의 매력은 바로 그런 점이다.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곳, 그 안에 또 다른 독락당이 있었다.

자연을 그대로 이용해 집을 짓는다는 것은, 요즈음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건축방법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범하지 않고 건물을 지음으로써,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는 방법을 택했다.

 

언젠가 어느 지인한테서 이런 말을 들었다. “환경, 환경하고 말들만 하고 입으로만 떠들 줄 알았지 과연 그런 사람들 정말 환경을 얼마나 생각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어느 나라에서는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차를 이용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하더라. 차에서 배출되는 유독가스를 줄이려고 불편을 감수하는 그 정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이 정말 환경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었다.

 

 

바위가 그대로 기단이 되다

 

예전에는 자동차가 없었으니 매연 같은 것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처럼 기반공사를 한다고 마구 파헤치지도 않았다. 암벽을 깨내고 그것을 이용해 축대를 쌓거나, 자연석을 옮겨 정원석을 만드는 과시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집을 지을 때는 지반이 단단한 바위 위라면 오히려 고마워했고, 흙이 단단하지 않으면 <지경다지기>라고 하는 작업방법을 통해서 땅을 단단하게 다져나갔다.

 

지경다지기란 커다란 돌이나 굵은 나무를 이용해 줄을 여러 가닥 묶어 그 줄을 잡아채 하늘 높이 올랐다가 떨어지면서 땅을 다져나가는 방법이다. 물론 거기에는 서로 호흡을 맞추기 위해 한사람이 북을 치면서 선창을 하면, 줄을 잡은 사람들이 뒷소리를 받아가며 일을 하는 멋까지 곁들인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자연과 친화적인 삶을 영위했던 것이 바로 우리네 선조들의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입으로 환경을 떠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환경을 지키고, 자연과 하나로 동화되면서 살아오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자연친화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 바로 보물 제213호인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오십천 가 벼랑 위에 세워진 관동 제일루라는 죽서루이다.

   

'이 건물은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다락형식의 집을 일컫는 말이며, '죽서'란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 이상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죽서루에 대한 설명 첫 부분이다 

 

 

자연암석을 그대로 기반으로 사용한 죽서루는 관동제일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

 

자연을 최대한 이용한 뛰어난 건축기법

 

죽서루는 절벽 위 암반을 기초석으로 이용해 건물을 지었다. 누 아래의 17개의 기둥 중에서 아홉 개는 자연적인 바위를 그대로 이용을 했다. 하기에 그 기둥의 길이가 다 다르다. 나머지 여덟 개의 기둥은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처름 죽서루를 보는 사람들은 왜 기둥이 그렇게 길이가 다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친환경적인 건물을 지었다는 놀라운 점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죽서루는 자연주의 전통 건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관동제일루>라 하여도 이의를 달수가 없다.

 

규모는 앞면 7, 옆면 2칸이지만 원래 앞면이 5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운데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 칸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편에 기둥은 그 배열이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죽서루에는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1662)에 부사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1711)에 부사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1837)에 이규헌이 쓴 것이다. 이 밖에도 숙종, 정조, 율곡 이이선생 등 많은 분들의 시가 누각 안에 걸려 있다.

 

죽서루 아래로 흐르는 오십천

 

죽서루, 그 보존상태도 관동 제일

 

고성부터 강원도 7번 국도 남쪽인 삼척까지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찾아 본 많은 정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보존상태를 자랑하는 것도 역시 죽서루였다. 죽서루는 누각 주변 선사암각화와 신라 30대 문무왕이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다가 어느 날 오십천으로 뛰어들어 죽서루 벼랑을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고 하는 용문바위 등을 포함해 담장을 둘러놓았다.

 

 

용이 지나갔다고 전하는 바위의 구멍

 

죽서루 경내는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어 보는 이들의 기분도 좋아진다. 여기저기 심어놓은 대가 바람에 나부끼며 잎이 부딪쳐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죽서루 밑을 흐르는 오십천, 그리고 암석 위에 자연스럽게 키 재기를 하고 있는 누각의 기둥, 이 모두가 관동제일루 죽서루의 멋을 더하고 있었다. 지금은 양양 하조대나 강릉 경포대보다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하지만 이것은 죽서루가 바닷가가 아닌 내륙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서루는 관동제일이라고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52에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이 된 윤황 선생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이 처음에 지어진 해는 정확하게 전해지지가 않으나, 윤황(1572∼1639) 선생의 6대손인 윤정진이, 조선조 영조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 종가로 내려오고 있는 집이다.

 

이 집은 一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구조는 튼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 뒤편으로는 담을 쌓아 안채와 구분을 하고 있으며, 좌측으로는 ㄱ자형의 안채가 자리하고, 우측으로는 l 자형의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우측에는 높게 앉은 사당채가 자리하고 있다. 윤황 선생의 고택은 화려하지 않으며, 간결하게 지은 옛 전통 가옥으로 중부지방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선생의 심성을 닮은 사랑채

 

윤황 선생은 조선조 선조 5년인 1572년에 태어나서, 인조 17년인 1639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다. 자는 덕휘, 호는 팔송으로, 선조 30년인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인조 때에는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내기도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하였다. 1637년 김상헌, 정온 등이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했다는 죄로 청에 붙잡혀 갈 때, 윤황 선생은 자신이 대신 잡혀 가겠다고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선생의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겠다고 자처를 할 수 있는 윤황 선생의 고택 앞으로는 - 자형의 사랑채가 6칸으로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 다섯 칸이 있고, 좌우측에는 반 칸의 높임마루를 한 방이 있는데, 사랑채를 바라보며 좌측은 앞으로 돌출이 된 작은 공간이고, 우측은 측면으로 툇마루를 달아낸 누정 방으로 꾸몄다. 중앙 좌측의 두 칸은 온돌방으로 했으며, 이어 두 칸의 대청을 두었다. 대청은 두 칸 다 네 짝 문을 달아냈다.

 

 

 

이 집은 딴 곳에서 옮겨왔다고 하는데, 대청의 기둥을 보면 목재를 재활용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대청 앞으로 나란히 선 네모난 기둥들의 위편을 보면, 나무를 끼웠던 흔적들이 있다. 당시 파평 윤씨들의 가문에서 이렇게 나무를 다시 활용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도를 부리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를 버릴 줄 아는 윤황 선생의 자손답게, 집을 옮겨 지으면서도 절약을 했다는 것이다.

 

낮은 굴뚝에 얽힌 의미

 

뒤편으로 돌아가면 배수로를 내었는데, 연도가 그 배수로를 지나 낮은 굴뚝과 연결이 된다. 굴뚝을 이처럼 낮게 만드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낮은 굴뚝을 바라보면서 늘 그 굴뚝처럼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위하라는 뜻이다. 종가집들의 굴뚝이 하나 같이 낮은 이유가 바로 그렇다. 집안에 모든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도 겸손하라는 것을 일러주는 교훈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방역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대개 한옥에서 소나무나 참나무 등을 이용해 불을 지핀다. 나무를 넣기 전에는 낙엽 등을 이용해서 불씨를 만드는데, 그때는 연기가 많이 나게 된다. 그 연기들이 낮은 굴뚝에서 뿜어져 나와, 집안 곳곳에 병충해를 잡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한옥에는 그 작은 것 하나하나도 다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안채의 단아함

 

윤황 고택의 안채는 화려하지 않다. 그저 분칠을 하지 않은 맨 얼굴처럼 정숙하다. ㄱ자 형으로 꺾인 안채는 좌측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두고, 꺾인 부분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있다. 사랑채와 같이 안채의 대청에도 창호를 달았다. 그리고 우측 맨 끝 방은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한데 아궁이를 내었다.

 

 

 

이렇게 높임마루를 놓았을 경우 그 측면에는 낮은 툇마루를 놓기도 하는데, 윤황 선생의 고택은 그 흔한 툇마루마저 없다. 그저 치장을 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억제를 한 집이다. 뒤편으로 돌아가며 보수를 하면서 새로 쌓은 듯한 축대가 있다. 그 축재 한편에는 장독대가 놓여있는데, 일반적인 종가의 장독대와는 다르다. 그저 평범한 민초의 장독대와 다를 바가 없다. 무엇하나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치장을 하지 않은 집. 그래서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한 것일까? 윤황 선생의 고택이 바로 그러하다.

 

 

 

자연이 녹아있는 사당채와 연못

 

윤황 선생 고택의 사당채는 양편에서 오를 수가 있다. 사랑채 뒤에서 일각문을 통해 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제의를 지낼 때 종친들이 사랑채에서 바로 오를 수 있도록 낸 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은 안채 뒤편 계단을 통해서 사당채로 오르는 길이다. 역시 담장에 일각문을 내었다. 이 문은 안채에 있는 부녀자들이 음식을 나를 때 동선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에 앉아 좌측 높임마루에서 보면 그 앞쪽으로 작은 연못이 있다. 지금은 주변이 정리가 안 돼 연못을 식별하기조차 쉽지가 않지만, 아마 이 연못에는 꽃이 피고 물고기들이 유영을 했을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닮은 집. 그리고 자연을 위한 집. 논산 윤황 선생의 고택은 집 안에 그렇게 자연이 녹아 있었다.

난 봄이 되면 가장 즐겨하는 답사 장소가 산으로 꼬리를 내닫고 있는 성곽이다. 유난히 봄이 되면 성곽을 즐겨 찾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산성을 오르다가 보면 주변으로 펼쳐지는 산의 모습들이 아름답다. 또한 그 산 마루로 오르는 길에 아주 가끔은 정겨운 짐승들을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봄에 찾는 산성. 우선은 평지에 쌓은 성보다는 산성을 주로 찾는 이유는 또 있다. 평지에 쌓은 성에서 맛볼 수 없는 기분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성 위로 난 길을 걷다가보면, 주변으로 달라지는 풍광에 빠져들게 된다. 그 풍광이란 것은 우리가 그냥 산을 오르다가 만나는 것과는 또 다른 묘미를 준다.

 

삼년산성

 

산성을 걷는 즐거움

 

전국에 수많은 산성들이 그동안 복원이 되었다. 하기에 산성을 따라 걷는 즐거움도 만만찮다. 산성은 각각 그 산을 에워쌓고 있는 방법이 다르다. 하기에 산성을 걷다가 보면, 많은 공부가 된다. 또한 역사 속에서 왜 우리 선조들은 이런 형태의 성을 쌓았을까를 생각하다가 보면, 꽤 길이가 있는 산성임에도 언제 돌았는지 모르게 한 바퀴를 돌게 된다.

 

산성을 따라 걷는 즐거움도 다르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보면,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그 땀을 산마루에 난 산성위에 올라앉아 식히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진다. 오염되지 않은 산마루에서의 심호흡. 그것 하나만으로도 산에 오른 효과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그런데 거기다가 공부까지 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꿩 먹고 알 먹고’ 가 이닐까?

 

 

위 단양 적성, 아래 고모산성

 

자연을 따라 자연이 되는 시간

 

우리 선조들은 성을 쌓을 때 자연을 이용한다. 산성을 걷다가보면 어느 한 구석 자연을 넘어서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서 그 자연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산성이다. 그래서 그 산성이 곧 자연이다. 그 자연을 품고 걷다가보면, 나 스스로가 자연 안에 파묻히고 만다.

 

인위적으로 성을 쌓았지만, 그 성이 곧 자연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런 것을 느끼면서 성을 한 바퀴 돌아보면, 주변 곳곳에 참으로 아름답게 펼쳐지는 자연을 만나게 된다. 가끔은 성곽 틈사이로 졸졸거리며 흐르는 맑은 물을 만나기도 한다. 그 위로는 샘이 있고, 그 아래로는 수문이 생겨난다.

 

 

위 안성 죽주산성 아래 완주 위봉산성

 

그 모든 것이 자연을 거슬리지 않았다. 참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과 얼마나 동화되는 삶을 살았는가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그런 산성 위를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이 밀려온다. 지금처럼 자연을 온통 뒤집어가며 커다란 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돌 하나를 놓으면서도, 그 돌이 자연과 동화될 수 있도록 마음을 함께 놓았다.

 

올 봄 산성을 걸어보자

 

올 봄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산성을 걸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그 산성을 따라 걸으면서 주변의 장관을 느끼고, 온통 꽃으로 덮이고 있는 아름다움에 취해보기를 권한다.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또한 그것이 자연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걷는다는 것은, 선조들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위 적성산성, 아래 홍주성

아름다운 산성 길. 가끔은 풀숲에서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를 보는 것도 즐겁고, 산짐승 한 마리가 새로 난 풀잎을 뜯다가 화들짝 놀라 뛰어가는 모습도 정겹다. 물 한 병 찔러 넣고 천천히 걷다가 보면, 그 산성 안에서 자연과 산성, 그리고 내가 결코 둘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는 사적 제156호인 무성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고 불렀으나, 숙종 22년인 1696년에 임금이 내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무성서원이라 불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전국에 4개 서원만이 남았는데, 무성서원은 그 중 하나이다. 이 무성서원이 있는 무성리에는 몇 개의 정자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성리 뒷산인 성황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송정(松亭)이다

 

송정은 절경에 자리하고 있지는 않다.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들판이 펼쳐진다. 주변에는 소나무와 산죽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무성리 정극인의 동상이 서 있는 우측, 성황산을 소로 길을 오르다가 보면 하마비(下馬碑)가 나온다. 무슨 일로 하마비가 이렇게 성황산을 오르는 길에 놓여있는 것일까?

 

 

아마 과거에는 이곳이 무성서원을 들어가던 길목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하마비를 지나 조금 오르면 단아한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현판에는 송정(松亭)이라고 새겨져 있다. 소나무 숲에 자리한 정자라는 뜻일까? 아니면 소나무처럼 그렇게 마음을 푸르게 살고 싶어서일까? 송정이란 단순한 이름을 붙인 것이 어쩌면 이 정자를 짓고, 이곳에서 세상을 등지고 세월을 보낸 7광 10현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의 폭정에 벼슬을 버린 선비들

 

송정은 광해군 재위시절 지어진 정자이다. 광해군의 폭정이 극에 이르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선비들이 모여 정자를 지었다. 광해군의 재위가 1608 ~1623년이었으니, 송정이 처음 지어진 지는 이미 400년 가까이 되었다. 이곳에 낙향한 선비들을 세상 사람들은 7광, 10현이라 불렀다. 이 선비들은 벼슬을 버리고 이 송정에 올라 자연을 벗삼아 살면서 명예를 초개같이 대했다. 아마 주변에 무성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정자를 지은 것은 아니었을까?

 

 

 

성황산 동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송정은 7광, 10현들이 모여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짓고, 읊으며 즐기던 곳이다. 7광(狂)이라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미쳐버린 7명의 선비들. 무엇이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을까?

 

아무리 질문을 해보지만 딱히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10현(賢)이란 어진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7광은 김대립,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상형, 이탁을 가르킨다. 10현이라 함은 7광에 이름이 있는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탁 외에 김관, 김정, 김급, 김우직, 양몽우 등을 말한다.

 

 

 

이들 7광 10현은 이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짓고 담소를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들 중 광해군의 재위를 마친 후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작은 정자에 모인 이들이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 자연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음을, 송정의 모습에서 알 수가 있다.

 

자연 속에 묻힌 정자 송정

 

송정은 정면과 측면 모두 2칸 정도의 작은 정자다. 사방에 마루를 놓고 그 중앙에 작은 방을 하나 두었다.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부정형의 주추를 놓았다. 마루는 난간도 없이 그저 평마루다. 가운데 들인 방은 4면에 모두 문을 내었다. 마루 한편 밑을 보니 아궁이가 있다. 여기에 불을 때서 겨울에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도록 헸다. 주변에는 노송이 자리를 하고 있고, 바람에 날리는 산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연을 거스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연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 속에 조용히 파묻혀 있다. 스스로 자연인양 자랑을 하지 않는다. 송정이란 정자의 이름이 '왜'라는 물음에 답을 하는 것만 같다. 7광 10현이 모여 스스로 자연과 같은 마음을 갖고, 사철 푸른 소나무와 같이 변함이 없는 마음, 그리고 산죽과 같이 곧은 마음을 갖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송정에 깃든 속내를 읽은 후에, 정자의 작음은 오히려 더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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