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덕과면 만도리 253-1 만동마을 안에는, 수령 300년이 지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의 높이는 8m에 밑동의 둘레가 2.5m 정도가 되는 나무이다. 그동안 답사를 하지 못해, 오랜만에 잠시 짬을 내어 가까운 곳에 있는 문화재라도 찾아보겠다고 길을 나섰다. 남원시 덕과면 만동마을 앞을 지나는데, 무엇인가 마을 안에 정자와 같은 것이 보인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안으로 들어가니 붉은 벽돌로 담장을 두른 안에 정자가 있는데, 문 앞에 석비가 하나 서 있다. 비석에는 이 소나무가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다는 안내판이다. 그러나 멋진 소나무와 함께 자리를 한 정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는 것을 보니, 문화재 지정이 안 된 듯하다.


600년 전에 자리 잡은 만동마을

만동마을은 조선 태종 때인 1,400년경에 진주 소씨의 ‘소석지’가 처음 이곳을 개척하고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사람들은 북쪽 1㎞지점에 소씨가 터를 잡은 곳이, 천황봉과 계룡산의 정기가 맺힌 곳이라 하여 좋은 명당자리라 칭찬해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소석지가 처음 터를 잡았을 때는 마을 이름을 ‘만적(晩迪)’이라 하였으나, 조선조 명종 10년인 1555년에 이성춘이 자포실에 살다가 이웃 산수동으로 이주한 후 만적과 산수동을 합쳐 만동이라 하였다는 것. 지금은 도로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하고 있는 마을은 1,700년 경에 마을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아마 이 소나무 한 그루의 나이가 300년 정도로 추정하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제 모습을 갖춘 시기에 심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 요즈음 시골의 형편이다. 이 소나무나 정자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 몇 분을 뵈었으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문유정’, 수많은 시판이 걸려

소나무는 한 옆으로 약간 구부러져 자라고 있다. 그 뒤편에 자리한 정자 ‘문유정(門柳亭)’. 버드나무 문이란 뜻을 가진 이 정자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을 텐데,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정자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졌다. 처마 끝에는 활주를 받쳐 놓았으며, 한 가운데는 마루방을 드렸다.




정자 안은 온통 중수기를 비롯한 게판들로 꽉 차 있다. 어림잡아 보아도 20여개가 넘는 게판들이 줄지어 달려있다. 이렇게 많은 게판이 걸려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는 것을 말한다. 지어진 지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문유정’. 특별한 그 이름만큼이나 사연이 있을 법한 정자이다.

정자 중앙에는 한 칸의 마루방을 놓았다. 사방을 약간 높게 턱지게 만들고, 문은 모두 위로 올려 달 수 있도록 하였다. 앞에 서 있는 노송 한 그루와. 펼쳐진 정경이 시원하다. 마을 끝에 조금 높게 자리를 잡은 정자. 그 모습만으로도 절로 흥이 넘쳐날 만하다. 그런데 이런 멋진 풍광을 느낄 수 있는 정자에 설명을 하는 문구 하나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문화재 이정표가 없는 남원, 답사 길에 어려움이 뒤따라

문화재답사를 가장 하기 힘든 곳이 남원이라고 한다. 오직 광한루와 만인의총 정도가 도로 안내판에 표기가 되어있을 뿐이다. 문화재는 큰길가서부터 안내판을 붙여 유도를 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남원 어디를 돌아다녀 보아도 안내판이 보이질 않는다. 심지어는 보물이나 천연기념물이 있어도 안내판 하나가 없다.

문화재 코 앞에 가야 서 있는 작은 안내판은, 글이 지워져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적지 않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남원의 문화재들은 그래서 서럽다. 사람들이 지나치다가도 들어올 수 있지만, 그런 혜택마저 누리지 못하는 남원의 문화재들이다. 300년이 지난 소나무와 어우러진 문유정. 지나는 길에 만난 이 아름다운 정자와 소나무의 내력을, 다시 한 번 찾아 들어야 할 것만 같다.

수월정(水月亭)’, 이름대로라면 정말 운치가 있는 정자일 듯하다. 산청군을 답사하는 13일, 수월정을 찾아 나섰다. 이번 답사에 유일하게 찾아보고자 했던 정자이다. 내비를 이용해 주소를 입력했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안봉리 444번지. 수월정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45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고 한다.

수월정의 지번 앞에 도착하자, 내비가 찾는 장소에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어디에도 정자가 보이지를 않는다. 안내판을 있을 텐데,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수월정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곳을 지나 수월마을로 접어들었다. 마을 분들에게 물어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다.


안내판이 없어 찾기가 어려웠던 수월정.

길가에 안내판 하나 없는 수월정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길가 쉼터에서 쉬고 계시던 어르신이, 저 아래로 내려가면 길에서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길에서 보인다는 정자는 그 어느 곳에도 보이지를 않는다. 444번지 앞에서 위로 오르는 가파른 길이 있다. 혹시나 해서 그 길로 올라가 보았다. 중간까지 가도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돌아 내려갈까 하다가, 다시 더 위로 올라가 보자고 아우를 졸랐다. 더 가파르다. 위로 올라가니 우측에 기와지붕이 보인다. 수월정이 거기 그렇게 숨어 있었다. 그런데 모든 문화재를 길거리에 안내판을 세워 놓았는데, 왜 수월정의 안내판은 없었던 것일까? 근 1시간 이상을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수월하게 찾을 줄 알았던 수월정은 그렇게 애를 쓴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수월정의 측면과 나뭇가지로 막혀버린 입구

100여 년 전에 지어진 정자 수월정

수월정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가운데에 방 두 칸을 두고, 그 앞쪽으로 툇마루를 깔았다. 정면을 마주하고 가운데 방을 둔 좌측에는, 뒤편으로 밀어 한 칸의 방을 두고 우측으로는 누마루를 깔았다. 마루 앞에는 양편 모두 난간을 둘러 운치를 더했다. 기둥은 외진주는 원형이며, 내진주는 사각형이다.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올린 정자. 앞으로는 나무가 들어차 정면에서 전체를 다 담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측면에서 비스듬히 사진에 담아냈다. 수월정은 1915년에 석초 권두희가 김재 권습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정자는 대개 마루를 중심으로 구성을 하지만, 이 정자는 추운 겨울을 맞이하는 산청지방에서 용이하게 사용하기 위해, 온돌방을 중심으로 구성을 한 것이 특징이다.



천정에 달린 말벌집과 시멘트로 발라 놓은 기둥 아랫부분. 그리고 떨어져 나가버린 판문

문화재 관리의 허점을 보다

산청군은 비교적 문화재 관리를 잘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월정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생각이 산산조각이 났다. 무엇인가 이상하다. 주추위에 세운 기둥에 시멘으로 발라 놓았다. 아마도 기둥이 부식되는 것을 막기 위함인가 보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흉하게 만들어 놓다니. 아마 시멘트가 마르면, 이것을 주추처럼 만들려고 한 것이었는지.

마루 위로 올라가 본다. 누마루 끝에 판문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 천정에는 커다란 말벌 집이 달려있다. 벽은 무너져 마루에 떨어져 있다. 도대체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인가? 명색이 문화재인데, 이렇게 관리를 했다니.


벽과 찬정에서 떨어져 내린 흙더미

이 수월정을 가파른 길을 오르기 전에 찾을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가 나뭇가지에 가려져 아예 보이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안내판도 없고, 부수어져 가고 있는 수월정. 그 이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관리를 했더라면, 아마도 제 이름값을 톡톡히 했을 정자인데 말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거목(巨木)이나 오래된 고목(古木)들 중에서, 겨울에도 잎을 달고 있는 소나무 등이 아니면 잎이 날 철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한 이유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를 찍어도, 그 위용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 산 23-1 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281호인 ‘남원 보절면 느티나무’를 찍으려고, 아마도 몇 달인가를 기다린 듯하다.

1982년 11월 4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600년 정도라고 전한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자라서 둥근 형태로 보이며, 줄기가 굵고 수명이 길어서 쉼터역할을 하는 정자나무로 이용되기도 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보호를 받아왔다.

천연기념물 제281호로 지정이 된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의 느티나무 

진기마을의 느티나무, 위용에 감탄하다

신기 마을의 정자나무와 당산나무의 구실을 하고 있는 ‘남원 진기리의 느티나무’는 수령이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 크기는 높이 23m, 가슴높이의 둘레가 8.25m이다. 뿌리 근처의 둘레가 13.5m나 되는 거목으로, 가지의 길이는 동서 25.8m, 남북 28.6m이다. 이 느티나무는 단양 우씨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올 때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선 세조 때 힘이 장사인 ‘우공(禹貢)’이라는 무관이, 뒷산에서 아름드리나무를 뽑아다가 마을 앞에 심어놓고, 마을을 떠나면서 나무를 잘 보호하라고 당부를 했다고 한다. 우공은 세조 때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 3등의 녹훈을 받았으며 그 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고 한다. 후손들은 사당을 짓고 한식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6월 2일 오후, 그동안 미루고 있던 진기리의 느티나무를 찾아 나섰다. 오후의 햇살이 따가울 정도의 날씨지만, 바쁜 일정 속에서 잠시 자리를 비워놓고 답사를 떠난 것이다. 신기마을을 물어 들어가니, 마을 한편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 위용에 압도당할 만하다.

길가에 안내판 하나 없는 천연기념물

느티나무를 찾아 촬영을 마치기는 했지만, 영 마음이 씁쓸하다. 신기마을이라는 석비가 길가에 서 있어 마을을 찾기는 했지만, 도로변에도 마을이 갈라지는 곳에도 안내판 하나가 서 있지를 않다. 마침 동행을 한 일행이 남원에 거주하는 사람이라 어렵지 않게 찾을 수는 있었지만, 만일 외지에서 혼자 찾아들었다면 낭패를 당할 뻔했다.


나무의 연륜을 말해주는 듯한 흔적

길을 지나는 몇 분의 어르신에게 길을 물어 찾아 든 신기마을이다. 자료를 미리 보았기에 보절면 진기리 신기마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마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라면 이곳을 찾아 올 리가 없다. 아니 올 수가 없다. 이곳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느티나무가 소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표식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알리는 안내판은 큰길가에 세워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느티나무가 천연기념물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느티나무가 서 있는 안쪽에 달랑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밖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장소에 서 있다. 천연기념물을 찾아 그 위용에 감탄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이런 경우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우리 문화재가 홀대를 받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무의 갈라진 줄기와 땅위로 들어 난 뿌리에 고인 물(아래)

느티나무를 만지며 소원을 빌다

거목으로 자란 느티나무는 가지가 넓게 퍼졌다. 한편으로는 축대 밑까지 가지가 뻗어있다. 나무의 뿌리는 원 줄기에서 10여m 밖까지 뻗어 땅으로 돌출이 되어있다. 나무뿌리가 땅 위로 솟아 홈이 파진 곳에 물이 괴어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럴 정도로 나무는 오래 묵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몇 개의 굵은 줄기가 하늘을 향해 오르다가 잔가지를 만든다. 밑동 근처에는 연륜을 말해주듯, 혹처럼 불거진 옹이도 보인다. 밑동 위에 처진 새끼줄에는 숯이 끼워져 있다. 아마도 제를 지내면서 금줄로 친 듯하다. 나무의 옆에는 많이 훼손이 된 솟을삼문이 보인다. 사당의 출입문이었을까? 나무는 그러게 당당하게 자라고 있는데, 이 솟을삼문은 퇴락한 모습이다.


금줄에 끼워놓은 숯과 솟을삼문

나무에 손을 대어본다. 딱딱한 감촉이 느껴지지만, 그 안에 거대한 힘이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600년 오랜 풍상을 이겨 온 나무의 힘일까? 그 세월을 이렇게 한 자리에 서서 온갖 세월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느티나무.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장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문화민족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화대국이라고 한다. 무엇이 문화대국이고, 무엇이 문화민족인지 잘 모르겠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도 왜 우리가 문화민족이고, 문화대국인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적어도 문화대국이라면 기본적인 문화의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행동의 문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다,

문화의 가장 기본은 사회예의 범절이다. 그러나 그 예의조차 모르고 있다면, 그것이 과연 문화민족이고 문화대국일까? 공중도덕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문화민족, 문화대국을 따진다는 것이 부끄럽다. 기본적인 한글조차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문화를 따질 것인가?


담배꽁초, 마시다 남은 커피 등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안내판과, 앞에 버려진 꽁초와 커피흔적(휴대폰으로 촬영해 화질이 좋지가 않다)

한글도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어느 지역을 간 후 그곳에서 다시 버스나 택시를 이용한다, 그러다가 보니 좀 멀리 나갈 때는 고속버스가 제격이다. 한 번 답사를 나갈 때마다 몇 번씩을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그것도 답사를 하면서 재미로 삼고 다닌다.

여주 쪽의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음성휴게소를 들렸다.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는데, 우연히 화단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입간판이 하나 서 있고, 이런 글씨가 적혀 있었다. ‘꽃은 싫어해요. 커피, 담배꽁초 등 이물질을 버리지 마세요.‘ 라는 글귀이다.

그런데 주변을 보니 화단 주위에 쏟은 커피며 담배꽁초, 심지어는 먹다 남은 커피를 담은 종이컵을 그대로 버려두었다. 바로 옆에는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분류수거 통이 있는데도, 그냥 꽁초를 버리고 커피를 버린 것이다. 흡사 그 글을 보고 일부로 그렇게 흘리고 버린 듯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담배꽁초며 커피를 마시다가 버렸기에, 이런 글까지 적어 놓았을까?

기본적인 규범도 안 지키면서 문화국민이라니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기본적인 질서라는 것이 있다. 이 질서는 규범을 지키기를 요구한다. 그런 규범이란 사람이 지키지 못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지킬 수가 있고, 약간의 행동을 억제할 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공공연하게 어기면서 사는 사람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앞에는 커피나 담배꽁초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적어 놓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버젓이 꽁초를 버리고, 커피를 흘려놓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조차 힘들었을까? 이런 글을 적어 놓는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 문구 앞에 담배꽁초가 널려있고, 쏟은 커피 자국이 지저분하다. 그런데도 우리가 과연 문화대국이고 문화국민일까?


마시다 남은 커피잔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주변은 커피를 버린 흔적으로 더럽게 얼룩이져 있다. 그 바로 옆에는 쓰레기 분류 통이 있었다.

이런 무관심이 문화재 훼손도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기본적인 사회질서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전국에 있는 문화재를 훼손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문화재 주변에 쓰레기를 버리고, 낙서를 하고, 단단한 끌 같은 것으로 파 놓고. 거기다가 심지어는 문화재를 훼파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행동을 우리는 내 것이 아니니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이런 모습을 아이들이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언젠가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이런 일이 있었다. 문화재 옆에 버려진 쓰레기를 들고, 조소에 찬 비웃음을 흘리며 사진을 찍는 외국인을 본 적이 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날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에만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심정이란 정말 딱 ‘부끄러워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것이 말 그대로였다.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가 먼저 솔선수범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이런 문구를 써 붙였다는 것이 부끄럽다. 제발 조금만 움직이면 해결 할 수 있는 일을,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애불 답사를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조각을 했을까? 마치 살아있는 그대로 바위벽에 붙인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아름다운 마애불을 보았다면, 누구나 그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남원시 대산면 신계리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423호 신계리마애여래좌상. 도선국사가 하루 밤 만에 조성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마애불이다.

마애불을 찾을 때부터 애를 먹었기 때문인가,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을 만났을 때의 감회는 더욱 깊었는가 보다. 도로변에 신계리 마애불이 3.0km에 있다는 이정표가 있다. 좁고 구불거리는 도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니, 그곳에서 2.2km 를 더 가야 마애불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임도’와 ‘오솔길’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산을 헤매다가 발견한 이정표 난감해

임도와 오솔길이라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없다. 주변을 한참이나 헤매다가 주민들에게 물으니, 마을 위로 산을 향해 계속 따라 올라가라는 것이다. 마을을 벗어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보니, 작은 이정표 하나가 보인다. 이곳에서 800m를 올라가면 주차장이 있고, 거기서 다시 0.45km를 가야한다는 것이다.

좁디좁은 도로를 구불거리고 올라가니 정말로 그 안에 차 몇 대가 설 수 있는 곳이 나온다. 여기까지가 임도이고, 거기서부터 오솔길을 따라 가라는 말이다. 그런 표현을 안내판 밑에 임도와 오솔길로 적어 놓았으니, 처음 이곳을 찾는 사람에게는 정말로 알 수 없는 표현이란 생각이다.



마을을 벗어나 임도와 오솔길을 지나 만날 수 있는 신계리 마애불
 
오솔길을 따라가 만난 마애불

오솔길을 따라 한참이나 올라간 듯하다. 물이라도 한 병 사들고 올라올 것을. 전날 저녁을 먹으면서 반주로 먹은 술기운이 있어서인가, 목이 더 타는 듯하다. 답사를 할 때는 가급적이면 음주를 피하는 것도, 이렇게 애를 먹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 넓은 길이 다시 나타난다. 계단을 지나 소나무 숲길을 따라 산 쪽으로 오르다가 보니, 돌로 쌓은 축대가 보인다.

가까이 가서보고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어찌 이 산속에 저런 바위가 있으며, 저렇게 조각을 할 수가 있을까? 아마 사람의 실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면 믿을 수가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조각품 하나가 그 곳에 있었다. 도선국사가 하룻밤 만에 만들었다는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전설로 남아있지만, 그 전설을 믿고 싶어진다.




역동적인 모습, 생동감이 있는 걸작품

한 마디로 걸작품이다. 어떻게 바위면을 이렇게 깎아내고, 그 안에 돋을새김을 하였을까? 사람이 했다고 하면,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공을 들인 것일까?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은 커다란 바위의 한 면을 반듯하게 쪼아내고, 그 안을 둥글게 깎아내면서 여래좌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구슬로 꿰어 광배주위를 감싸고 있다. 광배 안에는 연꽃잎인 앙화를 조각하였다. 이런 조각기술은 보기가 힘들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 걸쳐 흘러내렸는데, 비교적 단순하게 표현을 하였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살이 통통한 것이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넓은 어깨와 불룩한 가슴, 그리고 통통한 팔 등이 생동감이 있다. 입체감과 생동감이 살아있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바위 뒷면 역시 칼로 잘라낸 듯하다. 양편을 깊게 잘라내 좁은 길 하나를 만들어 두었다. 아마 축대를 쌓기 전에는 이 바위가 밑에까지 내려가, 그 윗면에 마애불이 조성된 것은 아니었을까?

힘들에 찾아온 마애불 앞에서, 안내판이 부실함을 투덜거리며 올라온 것이 괜히 부끄럽다. 이런 걸작품을 볼 수 있다면, 숨이 턱에 닿은들 어떠하리. 마애불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들녘이 시원하다. 11월 28일, 초겨울 바람 한 점이 이마에 맺힌 땀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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