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덕과면 만도리 253-1 만동마을 안에는, 수령 300년이 지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의 높이는 8m에 밑동의 둘레가 2.5m 정도가 되는 나무이다. 그동안 답사를 하지 못해, 오랜만에 잠시 짬을 내어 가까운 곳에 있는 문화재라도 찾아보겠다고 길을 나섰다. 남원시 덕과면 만동마을 앞을 지나는데, 무엇인가 마을 안에 정자와 같은 것이 보인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안으로 들어가니 붉은 벽돌로 담장을 두른 안에 정자가 있는데, 문 앞에 석비가 하나 서 있다. 비석에는 이 소나무가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다는 안내판이다. 그러나 멋진 소나무와 함께 자리를 한 정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는 것을 보니, 문화재 지정이 안 된 듯하다.


600년 전에 자리 잡은 만동마을

만동마을은 조선 태종 때인 1,400년경에 진주 소씨의 ‘소석지’가 처음 이곳을 개척하고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사람들은 북쪽 1㎞지점에 소씨가 터를 잡은 곳이, 천황봉과 계룡산의 정기가 맺힌 곳이라 하여 좋은 명당자리라 칭찬해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소석지가 처음 터를 잡았을 때는 마을 이름을 ‘만적(晩迪)’이라 하였으나, 조선조 명종 10년인 1555년에 이성춘이 자포실에 살다가 이웃 산수동으로 이주한 후 만적과 산수동을 합쳐 만동이라 하였다는 것. 지금은 도로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하고 있는 마을은 1,700년 경에 마을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아마 이 소나무 한 그루의 나이가 300년 정도로 추정하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제 모습을 갖춘 시기에 심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 요즈음 시골의 형편이다. 이 소나무나 정자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 몇 분을 뵈었으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문유정’, 수많은 시판이 걸려

소나무는 한 옆으로 약간 구부러져 자라고 있다. 그 뒤편에 자리한 정자 ‘문유정(門柳亭)’. 버드나무 문이란 뜻을 가진 이 정자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을 텐데,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정자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졌다. 처마 끝에는 활주를 받쳐 놓았으며, 한 가운데는 마루방을 드렸다.




정자 안은 온통 중수기를 비롯한 게판들로 꽉 차 있다. 어림잡아 보아도 20여개가 넘는 게판들이 줄지어 달려있다. 이렇게 많은 게판이 걸려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는 것을 말한다. 지어진 지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문유정’. 특별한 그 이름만큼이나 사연이 있을 법한 정자이다.

정자 중앙에는 한 칸의 마루방을 놓았다. 사방을 약간 높게 턱지게 만들고, 문은 모두 위로 올려 달 수 있도록 하였다. 앞에 서 있는 노송 한 그루와. 펼쳐진 정경이 시원하다. 마을 끝에 조금 높게 자리를 잡은 정자. 그 모습만으로도 절로 흥이 넘쳐날 만하다. 그런데 이런 멋진 풍광을 느낄 수 있는 정자에 설명을 하는 문구 하나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문화재 이정표가 없는 남원, 답사 길에 어려움이 뒤따라

문화재답사를 가장 하기 힘든 곳이 남원이라고 한다. 오직 광한루와 만인의총 정도가 도로 안내판에 표기가 되어있을 뿐이다. 문화재는 큰길가서부터 안내판을 붙여 유도를 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남원 어디를 돌아다녀 보아도 안내판이 보이질 않는다. 심지어는 보물이나 천연기념물이 있어도 안내판 하나가 없다.

문화재 코 앞에 가야 서 있는 작은 안내판은, 글이 지워져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적지 않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남원의 문화재들은 그래서 서럽다. 사람들이 지나치다가도 들어올 수 있지만, 그런 혜택마저 누리지 못하는 남원의 문화재들이다. 300년이 지난 소나무와 어우러진 문유정. 지나는 길에 만난 이 아름다운 정자와 소나무의 내력을, 다시 한 번 찾아 들어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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