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는 진전사지가 있다. 진전사지는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곳 진전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사찰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니 8세기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진전사는 우리나라 선종을 일으킨 도의선사가 신라 헌덕왕 13년인 821년에 귀국하여 오랫동안 은거한 곳이다.

이 진전사에서는 염거화상이나 보조선사와 같은 고승들이 많이 배출이 되었으며,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선사도 이곳에서 체발득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진전사는 16세기경에 폐사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진전사지에는 국보 제122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439호인 부도탑이 있다.

양양군 강현면에 소재한 국보 제122호 진전사지 삼층석탑

거대사찰이었을 진전사

국보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보물인 부도탑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상당하다. 또한 둔전리를 나오다가 보면 절의 축대로 사용되었을 만한 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아마 이 진전사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현재 둔전리 야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 삼층석탑은 현재의 진전사로 가는 길 우측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이번 답사가 4번째이다. 2004년과 2006년, 그리고 2008년 비가 오는 날과 이번 11월 14일이다. 다행히 갈 때마다 시기적으로 다르게 찾아갔는데, 가을에 찾아간 것은 처음인 듯하다. 갈 때마다 달라지는 분위기 때문인가? 아니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가?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언제나 감탄을 하게 만든다.


하층 기단에 조각되어 있는 비천좌상

도대체 여래불의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그동안 수많은 문화재를 답사를 하면서도, 지금 다시 찾아가보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문화재를 쉽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창피스럽다. 지금처럼 문화재 한 점에 적게는 30장, 많게는 60장 정도의 사진을 담는 것이 아니고, 고작해야 5~6장의 사진만 달랑 담아왔으니 지금 생각해도 낯이 부끄럽다. 하지만 그런 지난 사진이라도 있으니 문화재의 변화를 알 수 있어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국보 제122호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높은 지대석 위에 이중기단을 설치했다. 밑 기단에는 연화좌 위에 좌정한 비천상을 각 면에 2구씩 조성을 해, 총 8구의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윗 기단에는 한 면에 2구씩 8구의 팔부중상을 조각하였다. 일층 탑신에는 한 면에 한 구씩 여래좌상을 조각되어 있다. 진전사지 석탑의 특징은 모두가 좌상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천인이나 팔부중상의 경우에는 입상을 조각하는데, 이 석탑은 돋을새김한 모든 상이 좌상이다.


기단 상층에 조각되어 있는 팔부중상 좌상. 이 탑에는 모든 조각이 좌상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런데 이 여래좌상 중에 서편으로 앉은 여래좌상의 얼굴이 사라져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지난 사진자료를 찾아보니, 역시 그 자료에도 여래좌상의 안면이 없다. 그저 희미한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이번 답사를 하면서 ‘도대체 이 여래좌상의 안면을 누가 떼어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내 땅에 소재한 문화재부터 관심을 가져야.

딴 면은 다 괜찮은데 서쪽 편의 여래좌상과 그 아래 팔부중상 중 왼편의 얼굴도 보이지가 않는다. 이 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탑이다. 만일 일부러 훼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저렇게 깨끗하게 안면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 여래좌상과 팔부중상의 안면을 일부러 떼어낸 듯하다.

기단부와 몸돌 1층에 세련된 조각들이 있어 국보로 지정이 될 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안면이 사라지다니. 혹 세월이 오래되어 자연적으로 마모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보지만, 그렇다면 딴 조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 한 편의 여래좌상과 팔부중상의 얼굴이 사라진 것일까?


돋을새김한 여래좌상은 안면부분만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마치 떼어낸 것처럼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문화재들. 세월이 지나 자연적으로 변화가 되고, 풍우에 씻겨 그 아름다움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도 안타까운데, 이렇게 누군가 일부러 훼손이 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문화재의 반환도 중요하지만, 내 땅에 있는 문화재부터 간수를 해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선림원,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생활을 했기에, 쌀을 씻은 물이 앞을 흐르는 내를 모두 쌀뜨물처럼 만들었을까? ‘미천(米川)골’이란 명칭은 바로 쌀 한 끼 밥을 하기 위해 쌀을 씻은 물이, 하류까지 흘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오대산 자락을 깊숙이 들어가는 곳에 자리한 선림원지. 이곳은 흥각국사가 804년경에 창건한 선림원이 있었던 곳이다.

선림원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선수련원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는 대규모의 절로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10세기 경 홍수와 산사태로 매몰이 되었다고 한다. 11월 14일 양양군을 한 바퀴 돌아 해가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미천골로 향했다. 몇 번을 들른 선림원지다. 선림원지는 매몰이 되었던 곳인 만큼, 지금도 금당지의 주추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선림원지에 있는 보물 제447호 부도의 기단부와 금당지(아래)

보물로 지정된 부도 안타까워

선림원지를 오르는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앞에 삼층석탑이 한 기 서 있다. 그 뒤편에는 금당지가 있고, 여기저기 석물들이 널려져 있어 이곳이 대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금당지 동편 산 밑에는 부도의 기단이 한 기 서 있다. 원래는 북쪽으로 50m 정도 위편에 서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에 있는 부도의 기단은 정교한 조각과 함께, 화려한 문양 등을 자랑하고 있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으나 정교하게 조성이 되었다. 이 부도의 건립연대는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부도는 지대석 위에 상중하로 구분된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탑신석, 옥개석, 상륜부를 올려놓는다.




일제의 훼파로 사라진 부도 몸돌

일제는 침략기에 무수한 우리의 문화재를 강탈하고 훼파를 시켰다. 요즈음 문화재 반환운동을 하면서 일부가 돌아온다고 하지만, 그들이 강탈해 간 우리의 문화재는 30여 만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도 거의 국보급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이다. 이 선림원지 부도 역시 일제 강점기에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이다.

1965년 각 부재를 수습하여 복원한 것으로 겨우 기단부만 남아있다. 이 부도의 지대석을 훑어보면서 만일 이 부도가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라고 질문을 해본다. 지대석만 보아도 상당히 걸작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재를 훼파한 일제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가 없다.


연화대석에 조각이 된 용은 금방이라도 돌을 박차고 나올 것만 같다.

운문룡의 조각은 상상을 초월해

기단부만 남아있는 선림원지 부도. 보물 제447호로 지정이 될 만큼 대단한 걸작이다. 이 기단부는 네모난 지대와 팔각의 하대까지 같은 돌 2매로 구성되었다. 지대석은 땅 위에 들어난 부분만 다듬어,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하대 8각의 각 면에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상 안에는 교대로 사자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하대 위에는 둥근모양의 연화대석을 놓았다.

연화대석 위에는 간주모양의 중대석과 원형의 상대석이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위에 부도가 놓여 있어야 하나, 일제에 의해 조각이 나 사라져버린 것이다. 연화대석 표면에는 서로 다투듯 조각을 한 운문룡이 있다. 구름과 함께 조각을 한 용은 발을 힘차게 뻗치고, 금방이라도 연화대석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이렇게 대단한 기단부였다면, 그 위에 올려 진 부도는 어떠했을까? 생각만 해도 사라진 부도가 아쉽기만 하다. 수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문화재들. 오늘 선림원지의 부도가 주는 안타까움이, 여행자의 발길을 재촉하는가 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또 한 번 통곡을 한다. 아직도 그치지 않는 문화재의 훼손이 마음이 아파서.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 1번지에 소재한 보물 제439호 진전사지 부도. 부도이기 보다는 탑이라는 느낌이 든다. 일반적인 부도가 탑형이나 석종형 등으로 나타나는데 비해, 이 진전사지 부도는 아래에 탑처럼 이중의 기단부를 설치하고 그 위에 부도를 놀려놓았다. 현재는 탑 옆에 진전사라는 절이 있다.

이 진전사지 부도는 조성시기를 9세기 중반으로 추정하는데, 신라 선종의 종조인 도의선사의 부도탑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몇 번이고 찾아간 부도탑이지만, 볼 때마다 그 느낌이 새롭다. 아마 이 부도의 생김이 여느 부도와 같지 않은 모습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보물 제439호 양양 진전사지 부도

진전사지 부도 기단부는 탑

이 진전사지 부도의 기단은 이중으로 조성을 하였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하나의 돌로 짜 4매를 붙여 놓았다.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겨 넣어 석탑과 같은 형태이다. 갑석 역시 4매로 짜놓았다. 상층기단 중석은 2매로 조성을 하였으며, 각 면에는 우주를 표현하였다. 갑석의 아랫면에는 부연이 있다.

탑과 같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단부는 지금도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 틈이 벌어졌을 뿐이다. 그만큼 진전사지 부도는 정교하게 제작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보인 진전사지 3층 석탑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 당시에 이 진전사가 어느 정도 세를 갖고 있었는지 가늠이 된다.



앙련을 새긴 뛰어난 부도의 받침

2단의 기단 위에 올린 탑신은 8각으로 조성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다. 다만 탑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8각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이 굄돌에는 16연의 앙련이 돌려져 있어 뛰어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옥개석 역시 8각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처마가 날렵하게 표현이 되어 자칫 무거운 부도를 무게를 탈피하게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반적인 탑과 부도를 합쳐놓은 것만 같은 진전사지 부도. 뛰어난 조각을 조성하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부도를 특색 있게 꾸며놓았다. 탑 위에 올린 부도, 그리고 그 위에 올린 옥개석 등의 반전이 부도를 보는 사람들을 빠져들게 만든다.




옛 선인들의 놀라운 조형술

이 진전사지 부도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내세우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생각을 한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절제된 미를 갖고 있으며, 그렇다고 밋밋한 것도 아니다. 수많은 부도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탑과 부도를 합한 특색 있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 이런 부도를 조성을 했다는 것에 대해, 옛 선인들의 뛰어난 조각술에 감탄을 한다.



부도탑을 돌아보는데 절에서 키우는 백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쫒아온다. 절에서 키우는 대개의 개들은 사람들에게 길이 들어 있는가보다. 낯선 사람이 와도 짖지를 읺고, 오히려 함께 놀아달라고 조르기가 일쑤다. 이 개도 부도탑 주위를 돌면서 영역표시라도 하는 듯 떠나지를 않는다. 무료한 문화재 답사에서 가끔은 이런 풍경이 있어,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보물 제439호 진전사지 부도. 선조들의 솜씨에 감탄을 하면서 떠나는 길에, 절집 백구가 배웅을 한다.

전라북도 모악산. ‘어머니의 품’ 이라는 모악산은 김제에는 금산사가 있고, 완주 구이에는 대원사가 자리한다. 금산사야 조계종 제17교구 본사로 국보인 웅장한 미륵전을 비롯하여 수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고찰이다. 그러나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에 소재한 또 한 곳의 고찰인 대원사도 그에 못지않은 신라 때의 고찰이다.

대원사가 유명한 것은 바로 ‘곡차’라는 말을 사용하신 진묵스님께서 이 절에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무셨고, 증산도의 강증산이 이곳에서 도를 얻었다는 곳이다. 그만큼 대원사는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봄이 되면 흐드러지게 벚꽃과 함께 열리는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가 있어 5만 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모악산 입구의 단풍터널. 7일(일요일) 최 절정에 달했다.

붉은 가을이 아름다운 절

모악산 대원사의 가을은 붉은 빛으로 도배를 한다. 입구에서부터 늘어진 아기단풍의 붉은 빛이 온통 붉은 터널을 이룬다. 가을이 되면 그 단풍에 빠져 든 사람들이 줄지어 오르는 곳이다.

“정말 이곳보다 아름다운 단풍은 보기 힘들어요.”



단풍구경을 하려고 몰려드는 사람들.

사진을 찍는 젊은 연인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돌아보지도 않고 이야기를 한다. 그만큼 이곳의 단풍을 놓치기가 싫은 까닭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부도 붉게 물든 단풍 아래서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본다. 꼬마들은 단풍잎을 주워 모으느라 정신이 없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단풍잎을 모은다.

“무엇에 쓰려고 그걸 모아?”
“언니한테 주려고요”
“언니가 이런 것을 좋아하나보지?”
“아뇨 언니가 아파서 같이 못왔어요. 그래서 보여주려고요”

단풍만큼이나 아름다운 어린 소녀의 마음이다. 그래서 모악산 대원사의 가을은 아름다움이 더한다. 일요일(7일) 절정을 맞은 모악산 대원사 입구의 단풍. 하루 종일 사진을 찍는 발길들이 멈추지를 않는다. 이런 아름다움이 있어 좋은 모악산 길. 가을이 되면, 그 단풍의 붉은 기운에 취해 절로 얼굴이 붉어진다.


단풍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에 바쁜 사람들. 이구동성으로 하는 감탄사는 '야~ 정말로 아름답다'라는 말이었다.


붉은 단풍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을 보았다고 사람들은 이야기를 한다. 꼬마들이 떨어진 단풍잎을 모으고 있다.

대나무로 만든 솟대 뒤편에도 붉은 단풍이 있다.


400년이 나 된 집이 있다면, 먼저 어떻게 아직도 그런 집이 보존이 되어 있을까하고 궁금해 할 것이다. 물론 그 동안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겠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집이 신라 때는 절터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또한 집안에 잇는 석물들도 신라 때의 것이 아직도 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경주시 탑동 633번지에 소재하는 중요민속자료 제34호인 ‘김호장군 고택’은 장군이 태어났다는 집이다. 이 집은 개인의 집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김호장군은 임진왜란 때 부산첨사로 큰 공을 세운 분이다.


생각 밖으로 조촐한 가옥

중요민속자료라고 하면 우선은 그 규모가 상당하리란 생각을 한다. 그러나 김호장군의 고택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안채가 있고, 그 우측으로는 뒤편에 사당이 자리한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초가로 마련한 아래채가 서 있을 뿐이다. 그저 평범한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공간구성으로 마련한 가옥이다.

안채도 그리 크지가 않다. 임진왜란 당시의 첨사면 이보다는 더 큰 집에 살 것이란 생각을 하고 들어간 것이 내 한계였다. 집을 들어보는 순간 ‘참으로 조촐한 집이로구나’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큰 집일 것이란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움을 먼저 느낀다. 장군의 단아한 심성을 보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솟을대문과 안채의 부엌(가운데) 그리고 초가로 된 아래채(아래)

5칸의 안채는 마루조차 없어

안채는 솟을대문과 마주하고 있는 - 자형의 구조이다. 모두 5칸으로 구성이 된 안채는 측면도 한 칸으로 지어졌다. 서쪽부터 부엌과 방, 대청과 방으로 꾸며진 단출한 집이다. 건물은 옛 남부지방 가옥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으며, 대청에도 문을 달았다. 현재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조금은 안으로 손을 본 듯하다.

장군의 집을 찾아들어 갔을 때는, 마침 무슨 모임이라도 있는 날인가 보다. 집을 좀 촬영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들이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안채가 이렇게 단순한데 그 외에 건물이라고 특별한 것이 있을까 싶다. 부엌을 뺀 안채는 모두 4칸으로 툇간조차 달지 않았다.



안채 동편과 안방, 장독대

솟을대문은 후에 다시 복원을 하였는지, 양 옆으로는 한 칸씩을 달아냈다. 한편은 곳간으로 사용하고 한 편은 방을 드렸다. 아래채는 정면 3칸, 측면 한 칸으로 초가집이다. 두 개의 방을 드리고, 안채 쪽에 한 칸의 부엌을 달아냈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음식을 준비하는 듯 분주하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더 이상은 돌아다니기가 미안스럽다.


우물과 사당(아래)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물

이 집안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바로 우물이다. 아주 오래된 것 인양 고풍스럽다. 돌로 주변을 놓고, 가운데를 좁게 오므려 놓은 특이한 우물이다. 안에는 맑은 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이 집에서 원래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이 집이 신라 때의 절터였다고 하면, 저 우물의 역사는 도대체 얼마나 된 것일까?

사람들이 집안에 있는데도, 마치 비어있는 집인 듯 조용하다. 집안에 모인 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다. 다과를 들고 있는 듯하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담장이 특이하다. 돌로 만든 담장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참으로 조촐하고, 운치 있는 집을 보았다는 생각이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는데, 장군의 절제된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운치가 있는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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