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종교가 그럴 수 있을까? 요즈음은 그저 종교란 것들이 어째 제 갈 길을 찾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다가 보니 마음이 불편해지면 사람들은 곧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는 한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소재한 고려암. 집 대문 앞에는 ‘경기안택굿보존회’란 간판이 걸려있다. 벌써 이 집터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온 지가 40년 가까이 되었다는 고성주(남, 56세). 크지 않은 몸짓에 천생 여인네 같은 모습이다.

말을 하는 것이나, 집안에 먼지 하나 돌아다니지 않는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도대체 이 넓은 집을 언제 다 쓸고 닦는 것인지가 궁금하다. 18세에 신내림을 받고 지금까지 한 결 같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그저 묵묵히 하고 있다. “무녀가 할 일이 무엇이겠어요. 수양부리들 잘 건사하고, 늘 마음 편하게 살게 해달라고 비는 일 빼고는” 그래서인가 이 집의 단골들은 대개가 대물림 단골네들이다.


“아버님, 저희 아이가 잘될까요?”

나이가 동년배 인듯한 여인이 고정주에게 하는 말이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곧잘 귀를 의심하게 된다. 비슷한 나이에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저렇게 스스럼없이 쓰다니. “어멈아, 걱정하지마. 올 해는 잘 될 거야. 3~4월까지는 조금 힘들겠지만, 그 달 지나면 다 풀릴 테니.” 아버님이란 호칭이나, 어멈이라는 호칭이 그저 불편함이 없이 들린다. 그 또한 이 집의 내력인 듯하다.

“예전에 신부모님들이 그렇게 수양부리들을 불렀어요. 저도 그렇게 듣고 배운 것이죠. 우리 집은 대개 대물림 단골네들이라 오히려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단골네들이 불편하다고 해요”

그저 곁에서 듣고 있노라면 그 나긋한 목소리 안에 대단한 카리스마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춤 잘 추고, 소리 잘하고, 굿 잘하고. 도대체 빠질 것이 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는 고성주라는 사람은 어쩌다가 신내림을 받은 것일까?


맞이굿에서 신나게 창부를 놀고 있는 고성주(위) 신령을 모신 전안(아래) 전안은 밝고 먼지 하나가 바닥에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신령을 모신 전안은 어둡고 더럽다면 그 곳에 무슨 좋은 신령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저는 어려서부터 신병을 앓았어요. 그런 일로 인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다고 보아야죠. 저희 증조할머니께서 만신이셨고, 고모 또한 만신이었죠. 고모는 박씨네 집으로 시집을 갔는데 저는 어릴 때부터 고모가 데려다 키우는 바람에, 남의 성을 갖고 살기도 했어요. 어릴 적부터 몸이 아파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를 못했어요. 한 달이면 고작 일주일이나 학교를 갈 수 있었으니, 무슨 공부인들 제대로 했겠어요.”

그런 그가 그 많은 굿에서 사용하는 문서를 외우고 있는 것을 보면, 타고난 무당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 타고난 끼도 다 그런 길을 가기위해 준비를 한 듯하다. 수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그냥 보낸 적이 없다. 하다못해 바쁘게 준비한 음식 하나라도 대접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18세에 받은 신내림,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도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거짓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그런 일을 속속들이 본 사람들이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처음 내림을 하고 난 후 신령님들의 화분을 이천에 가서 모셔왔어요. 그런데 한 겨울인데도 뱀들이 득실거리는 거예요. 그러다가 제가 들어가니까 어디로 슬그머니 사라지데요.”

함께 동행을 했던 사람들이 정말이라고 맞장구를 친다. 하기야 고성주의 기이한 행적으로 본다면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동안 수양부리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책으로 몇 권을 엮어도 모자랄 판이다. 하기야 40년 가까운 세월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명과 복을 주었으니, 그 많은 이야기들을 필설로 어찌 다하랴.


운 맞이 굿에서 수양부리에게 운시루를 건네주는 고성주(위) 굿판에는 악사와 무녀들이 함께 동참을 한다.


“그동안 정말 많은 수양자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는 했죠. 매일 보다시피 했던 사람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그들의 극락왕생을 위한 지노귀굿을 하면서 속으로 울기도 많이 했죠. 그럴 때마다 제가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슬퍼했죠.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축원을 해주면서, 자식들이 모두 잘 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아마 전 다음 세상에도 우리 수양자식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남의 본이 되는 것이 만신의 길이라고 하는 고성주

지노귀굿을 할 때면 유난히 공을 들이는 만신 고성주. 그가 가진 품성은 평소 하는 행동을 보면 그대로 보인다. 벌써 30년 가까이 자비를 들여 경노잔치를 열었다. 고기를 삶고, 음식을 하고 술과 음료를 대접한다. 거기다가 자신이 가르친 춤꾼들이 모여 춤을 추기도 한다. 구경을 하는 어르신들도 절로 흥이 난다. 한 해도 거르고 넘어간 일이 없다.

함께 굿을 하고 있는 신딸인 이정숙. 이들은 영적인 부녀관계이다.


“아버님 여기 있던 밥 통 어디갔어요?”
“고장 나서 내다 버렸는데”
“멀쩡한 것이 왜 고장이 나요?”
“위에서 떨어졌어”
“아니 그 무거운 것이 떨어졌으면 장판이 흠집이라도 났어야죠.”

이쯤 되면 그 밥통이 어디로 갔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남을 준 것이다. 문제는 그 밥통이 고가의 밥통이라는 것이다. 뒤에서 이야기를 한다.

“그럼 어떻게 해. 어멈이 나이가 먹어서 밥을 하기도 힘들다고 하는데, 있는 것 주어야지”

그렇게 집에 있는 물건들을 남을 주기를 좋아한다. 물건을 하나 사겠다고 하면, 수양자들이 먼저 알고 있다. ‘얼마나 갖고 계시겠느냐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다. 집안을 깨끗이 하고, 남을 도우면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만신의 할 일이라고 제자들에게 누누이 강조를 한다.


3월 23일 금요일. 지동에 소재한 고성주의 집 전안(신령들을 모셔 놓은 곳)에서는 ‘운맞이 굿’이 열렸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일이 잘 풀리지를 않아 운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운맞이도 아무나 할 수는 없다. 운이 들어야 한다고 한다. 이 집을 드나들다가 보면 이상한 일을 보게 된다. 수양자들이 굿 날짜를 안 잡아준다고 삐치기도 한다. 딴 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3대를 대물림을 하는 신도들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고성주에 대해서 잘 안다.

“평생 혼자 사시는 분이잖아요. 신령님과 결혼을 했다고 늘 말씀을 하시니까요. 아버님은 평생을 아마 자식들 걱정하다가 저렇게 늙으실 겁니다. 굿을 하나 가르치셔도 적당이가 없어요. 굿을 해도 나쁜 소리를 못하게 하시죠. 만신이 악담을 하면 그렇게 된다고요. 무조건 좋은 소리만 하라고 하시죠.”

함께 굿판에서 굿을 하던 신딸(내림을 받은 사람을 신딸 혹은 신아들이라고 부른다. 영적인 부모가 되는 것이다)인 이정숙의 말이다. 비슷한 나이면서도 정말 친 부모를 모시듯 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만신 고성주의 삶의 모습이다.

“내 잘되게 도와줄게. 다 힘들다 오 해후 년에는. 그래도 너의 대주 하는 일 잘 되게 해주마. 내가 불려주시마.”

지노귀굿(천도굿)을 할 때는 더 많은 신경을 쓴다는 고성주


듣기만 해도 힘이 솟아날 듯하다. 7시간 정도를 지나 굿은 끝이 났다. 제단에 차려졌던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돌아가는 수양부리의 얼굴에는, 집안에 들어설 때 얼굴에 가득했던 그늘이 보이지를 않는다. 굿을 하기 위해 차렸던 음식들을 말끔히 치우고 나서, 한 마디 한다.

“만신은 세상 사람들 마음속에 모든 시름을 다 받아야 해요. 그리고 그것을 다 풀어주어야죠. 만신이 먼저 제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떤 신령이 도와주나요? 요즈음 종교가 도대체 제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해 마음이 아파요. 아마도 신령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두려울 텐데 말이죠. 건성으로 신령 탓만 하는 것 같아요”

3월 28일. 자신의 수양부리들이 신령님들께 올리는 진적굿을 앞두고 온갖 집안치장에 한창이다. 도배를 새로 하고, 부엌에 기물도 정비했다. 더 깨끗한 마음을 갖고 신령을 섬기기 위한 작업이라고 한다. 언제나 그런 마음가짐이 오늘까지 대물림 자식이라는 수양부리들과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 같다.

칠보공예작가 김난영의 칠보사랑

칠보란 ‘금·은·구리 바탕에 유리질의 유약이나 그 혼합물을 발라 구워서 여러 가지 무늬를 나타낸 세공’을 말한다. 보석의 대용품으로 처음 등장한 칠보는 후에 영구적인 색감과 독특한 기법으로 예술적 경지에 다다르는 칠보화(七寶畵)·갑옷, 장신구, 성배, 성골함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를 걸쳐 다양한 모습의 장식 목적으로 널리 발달되어왔다.

이 칠보에 마음을 뺏긴 사람이 있다. 수원시 팔달구 '아름다운 행궁길‘에서 나녕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난영 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제 칠보를 시작한지는 7년 정도이지만, 누구보다도 칠보에 대해서만큼은 뒤처지지 않는다. 스스로를 말하기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표현을 할 정도이다.


다양한 칠보의 아름다움

칠보의 기법은 다양하다. 가는 금속선을 디자인의 외곽선을 따라 바탕금속 위에 붙이고 이 외곽선 안쪽을 유약으로 채워 소성시키는 기법인 유선칠보. 유선칠보는 식은 다음 표면을 연마하여 광을 내며, 금장신구에 많이 쓰인다. 유선칠보(有線七寶 cloisonné)· 조금칠보(彫金七寶 champlevé)는 유선칠보와 반대 기법으로, 금속물의 표면을 디자인대로 파내고 그 안에 주엽을 채운 후 소성하는 것이다.

채유칠보는 칠보색이 금속의 외곽선이나 선으로 그려진 홈에 의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기법은 앞에서 언급된 기법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기법에서는 젖은 유약을 쓰더라도 우선 건조시켜야 하는데, 이는 젖은 상태에서 유약이 흘러 서로의 경계선이 흐려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한 7년 정도 되었나요. 원래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처음에는 악세서리를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칠보의 매력에 빠져들었죠. 2006년도에 처음으로 공방을 개설하였는데, 이상하게 저는 적자를 보지는 않았어요. 만들어 놓으면 많은 분들이 좋다고 사가고는 했으니까요.”

왜 초보를 벗어나지 못했을 때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 것일까? 아마도 작가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좋으면 남들도 좋다는 말이 정설인 듯해요. 저는 처음부터 차별화된 작품을 만들었어요. 상품과 작품을 철저히 구분을 한 것이죠. 그러다가 보니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셈이 되었죠.”



철저한 프로근성이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칠보공예를 배우기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작품을 만들기 시작헸다고 한다. 정작 본인이 이렇게 칠보공예에 빠지게 된 것은 스스로도 놀랍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시작을 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정말 제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예요. 작업을 하느라고 해와 달이 어떻게 뜨고 지는지를 몰랐다고 하면, 남들이 믿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도 저는 계절이 어떻게 바뀌어가고 있는지 잘 몰라요. 그저 칠보공예의 화려함에 빠져 들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까요”

칠보는 얼마나 오래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 작업에 몰입을 했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1년을 했으면서도 남들의 10년같이 작업을 했다는 김난영. 벌써 자신에게서 칠보공예를 배워 나간 사람들 중에 사범이 될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만 15명, 그리고 100여명의 제자들이 있다고.



“저는 정말이지 제가 생각해도 칠보공예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을 해요. 작업만 하고 있으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감에 밀려 오거든요. 이 칠보공예는 결국 제 인생의 행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죠”

칠보공예 박물관을 이룩하고 싶은 꿈


김난영의 경력을 보면 재미있다. 원래 글을 쓰는 사람이다. 글을 쓰기 위해 뒤늦게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를 들어갔다. 창작 21 문학 동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칠보공예에 빠져 든 2006년부터응 온통 칠보에 관한 내용을 수를 놓고 있다. 본격적으로 공방을 차리고 칠보공예를 시작한 2007년부터의 경력이 A4용지 두 장에 빼곡하다.

“문학은 칠보공예를 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글을 쓰고 표현을 하다보니, 사람들에게 칠보공예를 설명을 할 때도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저는 김천에 박물관을 짓는 것이 꿈이에요. 난영칠보박물관을 짓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죠. 앞으로 몇 년 후면 아마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을 해요”

참으로 이야기를 해도해도 끝이 없을 듯하다. 아마도 몇 년 후 칠보공예가 김난영을 보기위해 김천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동안 노력을 해온 결과가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주요약력)

2007, 1, 17 나녕공방 개업
2007, 10, 12 금하칠보 지도자과정 수료
2007, 12 제12회 온고을 전통공예 전국대전 장려상 및 입선
2008, 12 제2회 불교문화상품 공모전 특선
2009, 2, 27 제30회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 입선
2009, 4, 21 불교 탬플스테이 홍보관 개관식 및 수상작 입점
2010, 7, 두 번째 김난영 칠보공예전
2011, 11, 10 남원 실상사 가을바람전
2012, 2, 24 제34회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장려상

<무예도보통지>는 무예 이십사반(武藝二十四般)을 그림으로 풀어 설명한 책이다. 조선조 정조(正祖)의 명으로 편찬되었으며, 간행 연대는 미상이다. 모두 4권 4책으로 된 무예도보통지는 정조(正祖)의 명에 따라 이덕무·박제가·백동수 등이 편찬했다. 선조 31년인 1598년에 한교가 편찬한 〈무예제보 武藝諸譜〉와, 영조 35년인 1759년에 나온 〈무예신보 武藝新譜〉를 증수하여 조선의 무예를 집대성한 책으로, 정조 14년인 1790년에 완성되었다. 일반적으로 〈무예통지 武藝通志〉,〈무예도보〉,〈무예보〉라고도 한다.

무예도보통지는 실제로 무기를 다루는 그림을 통해서 해제를 기록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무예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무술까지 기록하고 있어, 무예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 24반의 무예는 본국검, 예도, 제독검, 쌍수도, 쌍검, 마상쌍검, 등패. 쾌검, 왜검교건, 월도, 마상월도, 협도, 장창, 기창, 죽장창, 기창, 당파, 낭선, 권법, 곤봉, 편곤,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의 24반이 수록되어 있다.

24반 무예를 보여주는 사람들

3월 10일. 수원 화성 행궁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오전과 오후 주말이 되면 하루에 두 차례씩 정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병기총서인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되어 있는 각종 무술을 보여주는 24반 무예의 시연이 잇기 때문이다. 행궁 앞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아니라 외국인들까지 모여, 시연을 보면서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친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24밤 무예를 시연을 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조 이산이 장용영의 군사들을 통해 강한 왕권을 추구하였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무예도보통지를 만들기 위해 140여권의 각종 서책을 인용할 만큼 다양한 무예에 대한 모든 것을 적었음을 보아도, 이 한권의 책이 대단한 무예총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4반 무예보기>














참 당차다.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에게서 느낀 생각이다. 두 마리 토끼를 쫒기에는 참 왜소하다. 가냘프기만 한 사람이 어찌 그리 당찬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일까? 3월 8일 오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131-2에 소재한 ‘임 아트 갤러리’에서, 이곳의 대표이면서 섬유공예 작가인 임하영(여, 38세)을 만났다.

작은 10평 남짓한 갤러리 안에는 벽면을 그리 크지 않은 그림들이 채우고 있다. 갤러리라고 하기보다는, 마음 편하게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면 좋을 듯한 분위기이다. 벽면에는 여인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가득하다. ‘누드스케치 18인전’이 한창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연신 사람들이 드나든다. 그 와중에도 반갑게 사람들을 맞이하는 그녀 임하영은, 올 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단다.


 


섬유공예, 양모작업에 빠져버렸네.

임하영은 상지대학교 공예학과에서 섬유공예를 전공하고, 건국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텍스타일디자인을 전공하였다. 그동안 많은 그룹전들을 해오면서 지역에서는 이미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섬유공예가이다. 사실 섬유공예란 낯선 부문이다. ‘섬유를 재료로 하여 만드는 공예. 또는 그 작품. 직물, 편물, 염색, 자수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는 것 정도의 사전적 지식이 내가 알고 있는 전체이기 때문이다.

“섬유공예를 하게 된 것은 회화를 그리다가, 대학에 들어가 그 섬유가 주는 질감의 감촉에 반한 것이죠. 그것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그런 매력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섬유공예를 택하게 되었죠. 이제 섬유공예를 시작한지는 한 15년 정도가 되었나요? 아직은 이렇게 내 놓을만한 실력을 갖춘 것도 아닌데요.”


누드스케치 18인전이 열리고 있는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131-2 <임 아트갤러리> 내부 


스스로의 길을 열어가는 사람, 임하영

우선 임하영의 면면을 살펴보자. 임 아트갤러리 대표인 임하영은 수원미술협회 회원이면서 수원섬유예술연구회 회원이다. 섬유공예가라고 하기보다는 ‘섬유예술가’라는 말을 즐겨 쓴다. ‘공예가’와 ‘예술가’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의 대답에서 쉽게 들을 수가 있다.

“저는 아직 공예가란 말을 쓰기가 버거워요. 적어도 공예가란 말은 그 분야에 장인의 경지에 올라, 깊이 있는 작품을 낼만한 분을 지칭하는 것이란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니고,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 것이죠. 그리고 예술가란 말에 재미를 느끼는 것은, 섬유를 갖고 하는 설치미술이 재미도 있고요”



요즈음 들어 섬유를 이용한 설치미술에 푹 빠져 있단다. 1999년부터 설치미술로 많은 전시회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드린 그녀이다. 2004년 수원화성연극제의 일환으로 장안공원 성벽일대에 설치미술을 펼쳐 호평을 받았다. 2005년 경기도 문화의 전당과 수원미술전시관, 2006년 화성 행궁 봉수당, 2007년 수원미술전시관, 2010년 수원화성홍보관 등에서 설치미술로 사람들과 조우를 했다.

섬유공예 작품으로 그룹전도 매년 거르지 않았다. 2006년에는 대안공간 눈에서 제1회 개인전 ‘꽃들의 초대’를 열었으며, 2011년에는 제2회 개인전 ‘화성행궁에서 혜경궁마마를 알현하다’를 자신이 운영하는 임 아트갤러리에서 열었다. 날마다 변화하는 작품세계를 즐긴다는 그녀. 자신은 항상 더 나아지는 작품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고 한다.


“작가가 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작품을 관람하러 오는 관객들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해요. 무엇인가 늘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자세라고 생각을 합니다. 직물을 갖고 하는 섬유공예를 하다가 보니, 양모의 감촉과 아름다움에 반해버렸죠. 그렇기에 섬유공예는 무한한 변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작품을 구상하고 작업을 하다가 보면,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작품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생각보다 미치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 밖의 작품 하나를 만들었을 때의 희열이 있어 늘 작품을 구상하게 된다는 것.


2011년 제2회 개인전 "화성행궁에서 혜경궁마마를 알현하다 전"에서 선을 보인 작품들(위는 양모)


“올해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어요.”

공예작품을 하기 위해 필요한 양모는 국산이 없단다. 모두 수입을 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양모를 이용한 작품을 하기 위해 만만치 않은 경비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충당을 한단다. 늘 바쁘게 살아가는 임하영이 당차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그래서인가 보다.

“대학에 다닐 때부터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학비도 벌어야 하고, 저도 재료 등을 구입해야 하니까요. 지금도 아이들을 일주일에 두 번 가르치고 있어요. 물론 적은 돈이긴 하지만, 제 작업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니까요. 이 갤러리도 원래 작업실로 쓰려고 했는데, 위치도 그렇고 제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곳을 갤러리로 꾸몄죠. 친구들과 함께 일일이 제 손으로 다 꾸몄어요.”

갤러리 운영과 섬유공예 활동을 다 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눈에 잠시 우수가 깃든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이지만, 아마도 작업을 하다가 닥치게 되는 어려움 때문인가 보다.



“처음에 이곳에 문을 열었을 때는 하루 종일 기다려도 한 두 사람도 들어오지를 않았어요. 그래도 일 년 동안 꾸준히 문을 열고 전시를 하다가보니, 입소문으로 이제는 고정 관람객들이 늘어났죠. 올해는 갤러리에 정말 색다른 작품들을 전시하려고 고민을 하고 있어요. 제 개인전도 준비를 하고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임하영.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으면서, 벽면을 채운 그림을 설명을 한다. 참 저 작은 체구에서 어찌 그런 열정이 나오는 것일까? 그 노력으로 인해 올 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하다.

건물 안에는 많은 악기들이 진열이 되어있다. 편종과 특종, 편경과 특경, 운라, 공후 등. 화성 행궁에서 비장청을 지나면, ‘외정리아문’이란 현판을 달아놓은 문이 보인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한편은 담장인 ㄷ 자로 막힌 건물의 마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문의 좌우에는 ㄱ 자 건물을 반으로 나누어, 아래는 빈 공간이고 위는 다락과 같이 꾸몄다.

그 건물 끝에는 방을 하나 드렸는데, 방 안에는 한 사람이 앉아(인형) 무엇인가 서류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앞으로는 유기그릇들이 나열이 되어있다. 이곳을 처음에는 정리소라고 하였으며, 정리소는 1795년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다.



역대 임금이 행차 시 행사를 준비하던 곳

이 정리소는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내영에 설치하였는데, 정조 20년인 1796년에 화성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아마도 ‘아문’이란 현판을 달아 놓은 것도, 유수가 이 정리소를 관장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외정리사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화성 유수가 겸직 하였다. 그만큼 이 행궁에 대한 정조의 관심이 깊었다는 것을 뜻한다. 마당을 지나 외정리소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마루를 놓은 전각이 보이고, 그 안에는 ㄱ 자로 지은 광채와 같은 곳이 있다. 이 건물 안에 편경 등 제례나 연례에 사용하는 악기들을 진열하였다.




12차례에 걸친 정조의 능행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의 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 이산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정조 24년인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행사 때, 이 외정리소에서 행사를 맡아하던 곳이다. 이곳에 많은 악기와 유기그릇 등이 보이는 것은, 행사 때 사용하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연희를 베풀면 상당한 인원과 많은 준비를 하여야 한다. 그렇게 준비를 해서 연희를 베풀 때는 아마도 외정리소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왕래를 했을 것만 같다.


외정리소에 진열되어 있는 악기들. 시계방향으로 편종, 편경, 아래는 우측부터 특종, 특경, 운라


행궁 안 한편에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도에 보면 수 많은 무희들과 악사들, 그리고 조정대신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행사 역시 외정리소에서 담당을 하였다는 것이다.

왕의 모든 행사를 담당한 외정리소

외정리소의 행사 담당은 정조가 승하한 뒤에도 계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순조 1년인 1801년에는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 하였다. 아마도 이런 제의례를 할 때도 외정리소에서 맡아했을 것이다. 또한 그 뒤로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행궁에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외정리소는 많은 왕의 행사를 맡아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 모형. 외정리소는 이런 행사를 맡아하던 곳이다.


1998년 12월에 옛 모습대로 복원이 된 외정리소. 행궁을 돌아보면서 만난 외정리소에 진열되어 있는 편경 등 많은 악기가 낯설지 않음에서인가(사실 나는 중, 고등학교 시절에 국악을 전공했고, 고등학교 졸업을 한 후에는 국립국악원에 재직을 한 적이 있기에 늘 이런 악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외정리소라는 곳이 정감이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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