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돼지족발이라고 하면 먼저 ‘장충동 족발’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인 족발과는 전혀 다른 족발이 있다고 해서 화제이다. 글쎄다, 순수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무엇인가 색다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 족발을 맛을 본 사람들은 딴 것에 눈을 돌리지 않을 듯하다. 물론 이 생각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맛을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두 “짱이다”, “대단하다” 혹은 “퓨전 같다”는 등의 별별 이야기를 다 한다. 한 마디로 요약을 하자면 ‘맛이 기가 막히다’ 라는 표현으로 이 족발의 맛을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난 이 족발을 처음 대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거 정말 족발 맞아?”


일부러 맛을 보러 간 족발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정말로 족발인지 몰랐다. 접시에 담아 내 놓은 것을 보고 족발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주인이 족발이라고 하니까 ‘족발인가 보다’ 하고 먹었을 뿐이다. 맛도 족발의 일반적인 맛이 아니다, 한 마디로 족발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차원이 다르다.

이렇게 색다른 변신을 한 족발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 글로 설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 때문이다. 난 음식전문가는 아니다. 또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음식 맛을 보러 다니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저 답사를 하거나 취재를 하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맛이 있는 음식’을 보면, 아주 가끔 음식 소개를 하고는 한다. 그런데 이 족발은 일부러 소개를 하기 위해 다시 들렸다.


조리를 하는 '엄마생각'을 운영하는 이정순씨. 엄마생각을 찾아가면 엄마의 손맛을 볼 수 있다. 그릇 하나에도 정성을 


주변 사람들은 참 별일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만큼 난 음식에 대해서 색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라는 인간이 원래 음식에 대해서는 무조건 잘 먹는 편이다.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어떤 음식을 먹어도 다 꿀맛이기 때문이다. 그저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한 감사를 하는 나이기에.

족발의 무한변신은 무죄

우선은 그냥 접시에 담아 놓은 것을 보면, 족발이기 보다는 양념치킨으로 착각을 할만하다. 족발을 먹기 좋게 잘라 양념을 해서 내 놓기 때문이다. 이 기가 막힌 족발을 먹을 수 있는 곳은 수원시 팔달구 행궁 옆 골목 공방들이 늘어 선 행궁 길 안에 자리하고 있다. 화성 행궁의 문인 신풍루를 바라보고 좌측에 주차장을 지난 골목길이 바로 새롭게 태어난 ‘아름다운 행궁 길’이다.


삶은 족발을 양념을 발라 다시 조리를 한다. 먹기 좋을만큼 잘라낸 족발


그곳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걷다가 보면 좌측에 ‘엄마생각’이라는 상호를 단 식당이 보인다. 우선은 이 상호부터가 마음에 든다. 엄마생각으로 음식을 차린다는데, 그것보다 더한 마음이 어디 있으랴. 2월 27일 저녁에 찾아간 행궁 길. 안으로 들어가면 넓지 않은 식당 안은 테이블이 4조 정도가 놓여있다. 10여명이 들어앉으면 꽉 찰 듯한 공간이다.

엄마생각의 주인 이정순씨는 원래 커다란 식당을 운영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 행궁 길로 들어왔다. 엄마생각의 주 메뉴는 돈가스라고 한다. 하지만 행궁길의 공방 예술가들이 이 집을 안방처럼 드나들면서 저녁이면 술 한 잔씩을 나눌 수 있도록 족발을 마련했다고 한다. 족발은 3인 정도가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인 한 접시가 15,000원이다.

행궁 길 공방식구들의 축제 개막 뒷풀이에 동석을 하는 바람에 머릿고기도 한 접시


주문을 할 때 매콤한 맛을 달라고 하면, 그저 딱 먹기 좋을 정도의 매운맛으로 해준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땀이 날 정도의 맛을 즐길 수가 있다. 상호처럼 푸근한 곳에서 맛있는 음식까지 곁들일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있을까? 수원을 찾아 화성 행궁도 돌아보고, 엄마생각으로 찾아가 변신을 한 족발도 즐길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닐까?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돈을 많이 벌면 남을 돕는 일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남성들만의 공간인 사랑채와 외별당

99칸 양반집은 독립된 전각만 해도 9동이나 된다. 그 독립된 건물들이 대지의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나름대로의 특성에 맞게 건물이 지어졌다. 현재는 한국민속촌 안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이 많은 건물들이 수원 팔달산을 배경으로 남아있었다고 하면 장관이었을 것이다.

2월 18일 답사를 한 한국민속촌. 사진을 촬영하면서 양반집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만도, 아마 족히 한 시간은 더 걸린 듯하다. 솟을대문을 들어가 우측으로 바라보면 바깥사랑채와 줄행랑이 이어진 곳이 있다. 그곳에 문이 있으며, 그 문을 나서면 사랑채가 있고, 담장을 사이로 외별당이 있다.

사랑채

바깥사랑채 뒤편

교육과 생활을 위한 사회적 공간


사랑채는 ㄱ 자형이다. 9칸 정도의 큰 공간을 마현한 사랑채는 집안의 가장이 사용하는 곳이다. 이곳은 바깥사랑이 손님들이 묵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사랑채는 집 주인이 기거를 하면서 자녀들의 교육을 시키는 곳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이곳은 남자의 사회적 공간이다.

99칸 집의 사랑채는 큰 대청을 사이에 두고 사랑방인 큰 방과 건넌방이 있다. 큰 방 아래는 복도를 통해 마루방으로 된 서고가 있으며, 옆에는 상노가 거처하는 작은 온돌방이 한 칸 마련되어 있다.

너른 대청과 마루방을 둔 사랑채

건넌방 끝에도 마루방을 두고 있다

일각문을 통해 대문을 거치지 않고도 출입이 가능했던 사랑채

이 사랑채의 특징은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은 맞배지붕이다. 큰 방인 사랑방은 주인이 사용하지만, 건넌방은 자녀들 중 남자아이들이 이곳에 묵으면서 학습을 하던 곳이다. 건너방 옆으로는 넓은 마루방이 또 마련되어 있다. 일반적인 반가의 사랑채보다 그 규모가 더 크기 때문에, 6,25 한국전쟁 뒤에는 이 사랑채를 검찰청으로 사용을 하기도 했다.

풍류를 즐기던 외별당

아마 이 99칸의 남창동 양반집에서 가장 멋스러운 건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외별당이 될 것이다. 외별당은 남자들의 공간이다. 사랑채에서 일각문을 통해 담장 너머로 있는 외별당은 안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풍류를 즐기던 곳 외별당

외별당 앞에는 무정과 연못 등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세운 외별당은 양반집 안에서 가장 멋지게 구성이 되었다 

외별당은 ㄱ 자형의 마루 중심의 건물이며, 온돌방과 대청, 누마루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 외별당은 한편에 작은 방 4개를 꾸며놓고, 대청과 누마루를 드렸다. 이 집에 이렇게 작은 방이 많거나 대청을 넓게 둔 것은, 특별한 손님을 맞이하거나 모임, 풍류 등을 즐기던 곳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외별당은 주인의 사회활동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날렵하게 처마가 솟아오른 팔작지붕도 아름답지만, 외별당 앞에는 누정과 연못을 두어 온치를 더했다. 누마루는 장초석을 밑에 놓고 올려 지었으며, 남은 면은 기단을 높이 쌓아올려 외별당을 지었다. 외별당은 또 다른 특별함이 있다. 바로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돌계단을 놓아 어느 곳에서나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마도 풍류를 즐기다가 쉽게 건물의 밖으로 이동을 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팔작지붕의 날렵한 처마 끝이 아름답다

풍류를 즐기던 외별당은 사방에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별한 남성들만의 공간인 외별당. 독립적인 공간으로 가장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곳이다. 수원 남창동 팔달산 밑에서는 한 때 이 외별당에서 흘러나오는 풍류소리가, 팔달산을 울리지나 않았을까? 괜스레 외별당 주위를 맴돌면서 별별 생각을 다해본다.

우리는 흔히 큰 대궐 같은 집을 ‘99칸집’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99칸이란 궁을 뺀 일반 가옥에서는 가장 큰 집으로, 이런 큰 집을 가졌다는 것은 집 주인의 세도를 알만한 것이다. 한국민속촌 안에 가면 흔히 ‘중부지방 양반가’라는 22호 집이 있다. 이 집이 바로 99칸의 대명사처럼 불리고 있는 집이다.

‘99칸 집’이라고 부르는 이 가옥은 철종 12년인 1867년에 유학자인 이병진 선생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수원 화성내에 팔달산 아래 지은 이집은 (현 수원시 남창동 95번지 일대) 1973년에 원형 그대로 민속촌으로 옮겨 복원시켜 놓은 것이다.

사당 앞에서 바라다 본 한국민속촌의 99칸 양반집



중부지방의 양반가옥을 대표해

이 99칸 집은 당시 중부지역 민간에서 지을 수 있는 최대 규모로 지어졌다. 우리나라의 전통 양반가옥을 대표하는 남창동 가옥은, 1910년대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이근택(1865~1919)이 사용했던 집이기도 하다. 이 가옥의 사랑채는 지난 1950년 한국동란 때 9, 28 서울을 수복 후에는, 수원지방법원 지방검찰청의 임시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여인천하' '대장금' '다모' 등 역사 드라마물 촬영지로 자주 이용되고 있으며, 민속촌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꼭 들리고는 하는 집이다. 남창동가옥을 보면 솟을대문을 둔 대문채, 줄행랑채, 바깥사랑채, 안행랑채, 안사랑채, 내당, 초당, 내별당, 큰사랑채, 외별당, 정각, 사당, 전통정원 등 큰 집 살림에 필요한 모든 공간이 규모 있게 갖추어진 전형적 대가이다.


22호 집인 수원 남창동 99칸 집의 솟을대문(위) 와 행랑채 앞마당


건물 전체에는 마루공간이 많이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굴뚝을 건물에서 떨어져 설치하여 난방의 효율과 함께 조형미를 살린 점은 전형적인 중부 상류층 가옥의 형식이다. 2월 18일 찾아간 이 99칸 집을 한 번에 소개하기는 어렵다. 모든 건물은 각각 독립건물로 구성되어 있어 몇 회로 나누어 소개를 하고자 한다.

바깥사랑과 행랑으로도 규모에 놀라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줄행랑이 좌우로 펼쳐진다. 우측의 행랑과 바깥사랑채 사이에는 후원인 뒤편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 ㄷ 자로 된 줄행랑은 모두 19칸이며, 그 안에는 마굿간을 비롯하여 마부방, 측간, 하인방과 부엌, 곳간 등으로 꾸며져 있다. 이 대문과 연결이 된 줄행랑만 보아도 이 집의 규모가 짐작이 간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ㄷ 자로 꺾인 행랑채가 있다. 이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어 '줄행랑'이라고 부른다. 맨 아래는 큰 사랑이 있는 후원으로 나가는 문이다. 


바깥사랑은 이 집을 찾아 온 손님들이 머물거나 유숙을 하는 곳이다. 사랑채가 공간이 부족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는 이 바깥사랑은 다섯 칸으로 지어져 있으며, 후원으로 나가는 문을 사이에 두고 행랑채와 연결이 된다. 하지만 이 바깥사랑은 엄연히 독립된 공간으로, 행랑채와 구별이 되게 하였다.



바깥사랑채. 행랑채와 문을 사이로 이어져 있으며 손님들이 유숙하는 곳이다.



바깥사랑은 사랑을 바라보면서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리고, 두 칸은 대청마루이다. 그리고 우측 한 칸 역시 방을 드려 손님들이 유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바깥사랑과 줄행랑의 앞으로는 너른 바깥마당이 있으며, 중문채를 가기에도 거리가 상당하다.

양반집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수원 남창동 99칸 집. 독립적인 전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우리 고택의 전형적인 미를 갖추고 있는 집이기도 하다.


동영상 제작은 한국민속촌 답사에 동행한 '수원 씨티넷'의 김홍범 부장이 제작했다

행궁(行宮)’이란 임금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과 휴양, 혹은 능원 등에 참배를 하기 위해, 정궁을 벗어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행궁은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다. 왕의 병의 치료를 위해서 다니던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이다. 기록에 의하면 온양행궁은 조선 세종 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남군영의 건물과 신풍루에서 바라다본 남군영의 지붕(뒤편 좌측), 그리고 신풍루에서 바라다 본 북군영의 지붕(뒤편 우측. 맨 아래)


능원의 참배와 정조의 힘을 보이기 위한 곳

화성 행궁은 왕이 지방의 능원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다. 화성 행궁은 단지 능원의 참배뿐이 아니라, 정조대왕이 양위를 하고 난 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직접 살기 위해 지은 별궁이다. 그만큼 딴 행궁에 비해 정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어진 곳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행궁과는 그 규모와 격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화성행궁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명당 중 명당으로 꼽히고 있다. 한남정맥의 중조산인 광교산과 백운산의 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남진하여, 광교저수지에 모이게 된다. 이 물은 다시 화성의 중심부를 관통하며 수원천으로 남진해 서해로 흘러든다.


남군영의 행각. 장용외영의 기마병들이 묵는 곳으로 방과 광(무기고, 식량창고 등), 100명의 장용외영의 기마부대가 묵었던 곳이다.


산과 물이 일체가 되어 있는, 그 기가 모이는 곳에 행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는 화성 행궁을 지으면서, 진남루라는 행궁 정문의 이름을 ‘신풍’으로 바꾸어 달게 하였다. '신풍'이란 명칭은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 마디로 제2의 고향으로 화성을 마음속에 둔 것이다.

정조의 위엄은 군영에 있었다.

정조대왕이 화산으로 행차를 할 때보면, 장용외영의 군사들의 위엄을 느낄 수가 있다. 아마도 정조는 강력한 군주가 되길 원했다. 정조는 자신의 금군이었던 장용외영을 화성에 주둔시켰다는 것만 보아도, 정조가 생각한 화성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장용영은 정조의 즉위 초에 설치된 숙위소를 혁파 한 후, 정조 9년인 1785년에 설치된 금군 조직이다.


남군영의 현판과 남군영 대청에 전시가 되어있는 당시의 갑주들


정조는 호위친병 장용위(壯勇衛)를 확대, 발전시킨 군영을 조직하여, 막강한 군사조직으로 편제를 조성했다. 이 장용영은 내영과 외영으로 구성되며, 외영을 위주로 하였다. 이 장용외영이 바로 화성에 주둔하였다. 화성 행궁의 정문이었던 신풍루 좌우에는 군영이 자리하고 있다. 신풍루를 바라보고 좌, 우측에 자리한 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가 좌, 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원래 이 군영은 정조 13년인 1789년에 처음으로 지었으며, 정조 18년인 1794년에는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정조 22년인 1798년에는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 2, 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정조가 이렇게 친위부대인 장용외영의 기마부대를, 화성과 행궁을 위주로 주둔시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화성을 거점으로 한 강력한 군주상을 세우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것만이 정조가 세우고자 했던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무엇보다 먼저 충직하고 강력한 군권만이, 강한 군주를 만들기 있었기 때문에.

화성행궁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신풍루(新豊樓)’이다.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정조 14년인 1790년에 세운 누문이다. 처음에는 6칸으로 된 문을 세우고 조심태가 편액을 써서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정조는 1795년에 문의 이름을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명칭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정조는 이름을 고치고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를 벌리기도 했다.



2월 13일, 신풍루에 오르다

정조 18년인 1794년 가을 행궁을 대대적으로 증축할 때는 누대 양편에 군영을 설치하고, 정조 19년인 1795년에는 누문 앞으로 길이 114척, 넓이 35척의 돌다리를 설치하여 ‘신풍교’라 이름하였다.

2월 13일(월) 화성 행궁을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간 곳이지만, 신풍루는 아래에서만 사진을 찍었을 뿐, 위로는 한 번도 올라가지 못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출입을 금한다는 푯말 때문이다. 화성사업소에 들려 신풍루를 촬영하겠다고 허락을 받고 신풍루로 올랐다.

1907년 헤르만 산더의 사진


신풍루는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123번지에 소재한다.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중인 1907년 헤르만 산더의 사진에는 신풍루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신풍루 위로 올라보니, 팔달문 밑으로 놓인 행궁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문밖으로는 팔달문에서 장안문으로 가는 도로와, 건너편 창룡문 쪽으로 가는 도로가 보인다.

아마도 이 행궁을 짓고 난 정조 당시에도 이곳 신풍루 앞은 이렇게 길이 나 있었을 것이다. 뒤로는 팔달산을 끼고, 앞으로는 넓은 도로를 볼 수 있는 곳, 이 신풍루의 누각에 올라 정조는 마음속에 담은 큰 뜻을 펼치려고 했을 것이다.




장초석으로 바친 기둥, 장엄함의 상징

6칸 규모의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신풍루는 위로는 누마루를 놓고, 아래는 3개의 얼문을 설치하였다. 정조는 나중에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내려와 살 생각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행궁의 정문 또한 남다른 신경을 써서 축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어른 키만한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려 이층 누각을 받치게 하였다. 안쪽으로는 바깥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장초석을 사용하여 웅장함을 더했다. 삼문은 판문으로 해서 달았으며, 문의 좌우에도 판벽을 둘렀다. 이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누각은 가파르다. 그만큼 누각을 높였다는 것이다. 누마루를 깐 이층에는 사방을 둘러 난간을 달아냈다.


이층 누각으로 오르면 좌우로는 남군영과 북군영의 지붕들이 보이고, 팔달산 쪽으로는 시원하게 공간을 내어 정전의 바깥 출입문인 좌익문을 만나게 하였다. 화성 행궁은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그 행궁의 문인 신풍루. 아마도 이 신풍루의 이름을 직접 지은 정조는, 이 누각 위에서 강한 군주가 통치하는 나라를 그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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