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층석탑 한 기에 12지신상과 사천왕상, 인왕상, 팔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탑에 조각된 수많은 조각들은 모두 뛰어나다. 보물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구례 화엄사 경내 보제루 앞에 서있는 화엄사 서오층석탑. 통일신라 때의 탑으로 1997년 여름에 탑을 보수 할 때, 부처님 진신사리 22점과 수저 2점, 칼 3점, 금동제방울 1점, 수정염주 1점. 소탑 3점, 금속편 31점등 총 16종 72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서 오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방형탑신을 올렸으며, 기단과 탑신부에 조각으로 장식이 가득하다. 서 오층석탑은 2층의 기단위에 5층의 몸돌을 올렸으며, 여러 장의 돌로 지대석을 놓고, 하대석과 중대석을 하나의 돌로 구성했다. 지대석의 각 면 안상 내에는 12지신상을 우수한 솜씨로 조각하였다. 이러한 조각기법은 화엄사 서 오층석탑이 보이는 특징이다.


몸돌에 돋을새김한 우수한 조각기법

기단석 위층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뜬 우주와 탱주를 새겼으며, 한 면에 두 명씩의 8부신중을 조각하였다. 팔부신중은 금방이라도 탑을 뛰쳐나올 만큼 역동적이다. 이 서 오층석탑의 탑신인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이며, 1층 몸돌의 4면에는 사천왕상을 조각 배치하였다. 탑신의 지붕돌은 각 층마다 밑면에 5단의 받침을 갖추고, 처마 밑은 수평이 되게 하였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2층의 단이 있는 받침 위로 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가 놓여 있다.


기단석에는 12지신사이 새겨져 있다.

이 서 오층석탑에 이렇게 많은 12지신 상이나 팔부중상, 그리고 사천왕상을 조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탑의 복원 시에 발견이 된 사리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즉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탑 안에 두었기 때문에, 그 사리를 지키기 위한 수호적 기능을 갖고 있는 사천왕상 등을 조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가 이 탑 안에 복장물은 하나도 도난을 당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발견이 되었다. 

이 탑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조성한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조각상을 각 부분에 새긴 점 등이다. 또한 지붕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고 있고, 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에 보이는 기단석에 안상이 보인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석탑의 남쪽으로는 안상과 연꽃이 조각된 배례석이 놓여 있다. 이 배례석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미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 면에 두 명씩의 팔부중상이 새겨진 석탑의 몸돌
 
한나절 만에 돌아본 화엄사

화엄사에는 국보와 보물들이 많다. 초가을로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한 낮의 날씨는 아직 따갑다. 구례에 볼일이 있어 길을 나섰다가(2010, 9, 16. 오후 3시 경) 화엄사를 들렸다. 그동안 수차례 다녀 온 화엄사다. 그러나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조금은 문화재에 대한 눈을 떴다고 할까? 지금까지 보아오던 문화재와는 또 다른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층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상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 힘이 있어 보인다.
 
화엄사 중심영역에는 국보 제67호 각황전을 비롯하여, 보물 제299호 대웅전, 국보 제12호 각황전 앞 석등, 보물 300호 사자탑 등이 있다. 그리고 보물 제132, 133호인 동, 서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각황전 뒤 계단으로 오르면 국보인 사사자 삼층석탑이 있다.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자리한 화엄사. 그 중에서 제일먼저 눈에 띤 것이 바로 서 오층석탑이다.

시간이 없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돌아본 화엄사. 서 오층석탑 하나만으로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듯하다. 그저 바람처럼 지나친 석탑이 못내 아쉬워지는데, 걸음을 재촉하는 소리가 그렇게 야박할 수가 없다. 시간이 되면 다시 한 번 찾아가, 하루 종일 그 문화재들을 붙들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우리는 어릴 적에 ‘은진미륵’이라는 사진을, 교과서 등을 통해 한 번쯤은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거대한 화강암 석재로 제작이 된 은진미륵은,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로 보물 제218호로 지정이 되었다. 이 관촉사 은진미륵의 공식 명칭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입상의 높이는 l8.12m나 되며, 고려 초기의 거대석불에 해당한다.

은진미륵은 커다란 불상이라는 점과, 불교적이기 보다는 토속적인 조각이라는 점에서 당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이다. 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삼각형이며, 옆으로 길게 째진 눈과 넓은 코, 일자로 꼭 다문 큰 입이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목은 굵고 삼도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고리형으로 매달린 느낌을 준다.


후천세계에 중생을 구제할 미륵불

미륵불은 56억 7천 만 년이 지난 다음에, 그 때까지도 구제가 안 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나타날 부처님이다. 흔히 부처와 보살로 불리어지는 미륵불은 미래불이다. 미륵불은 일반적으로 산이나 들 같은 바깥에 세워진다. 관촉사 미륵입상은 몸은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들었다.

자연암반 위에 허리부분을 경계로 하여,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이 보살입상은 정교하지는 않다. 몸통에 비해 얼굴이 강조되어 아름다운 균형미는 반감되고 있으며, 손의 모양이나 전체적인 꾸밈이 매우 투박하다. 오른손은 가슴께로 끌어올려 손을 안으로 향했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모습을 보아 관음보살로 생각이 든다.





어깨에 걸쳐 입은 가사는 어깨에서 양쪽으로 길게 내리고 있으며 가로무늬가 있고, 몸 중앙 부분으로 몇 개의 U자형 옷 주름을 돌렸다. 가슴께는 매듭을 묶고 있어 고려시대에 보이는 이 지역 특징인 거대불상의 초기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저렇게 큰 돌을 어떻게 올렸을까?

관촉사 사적비에 의하면 이 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광종 19년인 968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목종 9년인 1006년에 완성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륵보살입상을 제작하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38년이나 걸린 셈이다. 이렇게 거대석불을 만들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하반신의 몸체 위에 어떻게 저 큰 상반신을 올린 것일까? 지금처럼 대형 중장비로도 버거운 무게이다. 그런데 어떻게 상반신을 올릴 수가 있었을까?


거대석불을 조성하는 혜명대사가 석불의 상반신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걱정을 하던 차에, 사제촌에 나타난 동자들이 강가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동자들이 커다란 돌을 놓더니, 그 돌의 주변에 모래를 쌓고 딴 돌을 경사진 모래비탈을 굴려 올라가 위에 놓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혜명대사는 크게 기뻐하여 바삐 돌아와 동자들이 하던 그 방법대로 상반신을 올렸다는 것이다.

결국 그 동자들은 누구였을까? 아마 혜명대사가 석불의 상반신을 올리지 못해 속이 타는 것을 알고, 동자들을 보내 깨우침을 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거대한 석불의 상반신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보았을까? 아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이렇게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늘이 깨달음을 주는 것만 같다. 이렇게 큰 거대석불은 충청도 지역에서 보이는 지역적 특색이기도 하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은진미륵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그 미래불인 미륵이 도래하는 시기가 어서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절을 찾아가면 대웅전이나 석불, 혹은 부도 탑 앞 등에서 있는 석등을 볼 수가 있다. 이 등은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부처님의 자비광명으로 깨달음을 주어 어둠에서 벗어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석등은 실제로 불을 켜는 경우가 있어 실용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후대에 이르러서는 불전이나 탑 등의 앞에 세우는 장식적인 축조물로 변하고 말았다. 석등은 대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대석과 중간인 석주, 그리고 불을 밝히는 화사석, 맨 위에는 지붕돌을 얻는 형태가 석등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논산시 관촉동 254번지 관촉사 경내에 자리한 석등은 보물 제232호로, 고려시대에 조성이 된 석등이다.


거대한 석등 은진미륵과 어우러져

관촉사 미륵보살입상 앞에 서 있는 석등은 그 높이가 5,45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이다. 이 석등은 남한에서는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석등 다음으로 거대 석등으로 본다. 이 석등은 석조미륵입상이 세워진 해인, 고려 광종 19년인 968년에 조성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이 석등은 4각의 석등으로 화사석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관촉사 석등은 여러모로 특이하다. 우선 화사석이 2층으로 되어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창이 넓고 기둥이 가늘어 조금은 불안한 감을 주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석등의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으로, 아래 받침돌과 위 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다.





중앙에 둥근 기둥으로 조형을 한 기둥은 굵고 조금은 투박하게 제작이 되었으며, 위아래 양끝에는 두 줄기의 띠를 두르고 중간에는 세 줄기의 띠를 둘렀다. 특히 중간의 세 줄기 중에서 가장 굵게 두른 가운데 띠에는 여덟 송이의 꽃을 조각하여 뛰어난 조각미를 자랑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꽃이 조각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저 평범한 석등으로 제작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귀꽃이 아름다운 지붕돌

화사석이 2층으로 이루어진 관촉사 석등은 화사석 1층에 4개의 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은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지붕돌의 이랫부분은 다듬지를 않은 듯하다. 각 층의 지붕돌은 처마 끝을 가볍게 올린 듯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큼직하게 귀꽃을 조각하여 생명이 없는 찬 돌에 부드러움을 주었다. 화사석 위에 올린 머릿돌 꼭대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큼직한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두었다.




이렇게 거대한 석등을 조각하면서도 그 하나하나에 많은 공을 들인 관촉사 석등. 고려 시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이 석등은 벌써 천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겨 오랜 시간을 풍상을 겪었으면서도, 저리도 장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 또 앞으로 얼마의 시간을 저리 서 있을지, 오늘 그 석등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곳은 어디일까?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가면 사지 한 곳에 보물 5점이 있는 곳이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이 된 홍천 물걸리 사지가 바로 그곳이다. 이 사지에는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인 불대좌,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5호인 3층 석탑이 있어 강원도 내에서는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절터이다.

이곳에 어떤 절이 있었는가는 모른다. 다만 절은 흔적이 없고, 보물 5점이 남아있을 뿐이다. 전하는 말에는 ‘홍양사터’라고 하지만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1967년 4월에 이 절터를 발굴하면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금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철불 조각, 청자편, 수막새와 암막새 기와, 토기조각, 청자조각, 백자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이는 이 절터가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절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보호각 안에 자리한 보물

1982년에 보호각을 짓고, 3층 석탑을 제외한 4구의 보물을 보호각안으로 모셔 놓았다. 절터에서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석조물 들이 발견이 된 것과, 한 곳에 4기의 대형 석불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절집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보물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물론 그 문화재의 가치를 보아 보물로 지정을 했다고 하지만, 석불과 불대좌, 광배 등을 보면 많은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걸리를 찾아 나선 길은 정말 한 낮 더위가 30도를 웃도는 날이다. 홍천에서 44번 도로를 이용해 인제로 가다가 보면 철정검문소가 나온다. 그곳에서 우측 다리를 건너 내촌면 소재지를 향하다가 보면 경치가 그만이다. 내를 끼고 여기저기 전원주택들이 보인다. 물걸리는 학교를 지나 좌측으로 꺾어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좁은 길은 겨우 차가 드나들만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보호각이 한 동 서 있고, 마당에는 석탑 한 기가 보인다.


흔적없이 사라진 절

안내판을 보니 물걸리사지라고 적혀있다. 보물이 다섯 점이나 있다니, 어찌하여 이리 큰 절이 흔적도 없이 석불과 불대좌, 석탑과 석물들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마당 한편을 보니 석물이 놓여있다. 그 규모를 보아도 이곳이 상당히 번성했던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절집 이름마저 전하지 않는 것일까?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친다면 어디엔가 사지(寺誌)라도 있지 않을까? 궁금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보호각 안으로 들어가니 석불 2기와 불대좌 2기가 있다. 모두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통일 신라 후기의 것이라고 한다. 석물들이지만 그 조각 수법이 정교하다.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낼만하다. 천년 넘게 온갖 비바람에 마모가 되었을 텐데 저리도 그 형상이 남아있다니. 참으로 우리 문화재 하나하나가 왜 소중한 것인지 알 것만 같다. 석불 앞에 누군가 절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위로부터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인 불대좌,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5호인 3층 석탑

어찌 그 오랜 풍상 이렇게 온전히 보존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이 절터에 있던 절이 무엇인지,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모른다고 하니, 우리의 기록문화가 왜 그토록 허술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수많은 문화재가 잇는 나라, 그리고 스스로 문화대국임을 자랑하는 나라. 그러나 정작 자신의 소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조차 못하는 나라. 물걸리사지를 떠나면서 마음만 아프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불교 석탑 중에서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탑은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일제에 의해 수난을 당하다가 복원이 된 개성 인근의 경천사 십층석탑, 그리고 공주 마곡사의 오층석탑 등이다.

보물 제799호로 지정이 된 마곡사 오층석탑은 고려 말기의 세워진 석탑으로, 당시 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라마교는 티베트에서 발생하여 중국 원에서 크게 융성한 불교의 한 종파이다. 이 탑의 상륜부에는 라마탑에서 보이는 풍마동 장식을 두어 특이하다.


훼손이 심한 마곡사 오층석탑

마곡사 오층석탑은 대광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이라 고찰을 찾은 사람들도 그늘을 찾아든다. 나뭇가지도 늘어져간다는 삼복더위에 찾아간 마곡사다. 그래도 마음을 먹고 찾아간 곳이니 뙤약볕이라도 찬찬히 훑어볼 수밖에. 첫눈에 보기에도 여기저기 많이 훼손이 되었다. 이 탑이 이렇게 훼손이 된 것은, 석탑 뒤편에 자리 잡은 보물인 대광보전이 불이 났을 때 많이 훼손이 되었다고 한다.



풍마동 높은 기단부와 탑머리에 장식한 풍마동은 라마교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층으로 된 기단부는 일반적으로 보이는 기단부보다 월등히 높다. 그리고 그 위로 오층의 탑신이 있는데, 지붕돌의 변화가 없어 불안정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많이 보이는 고려 석탑들보다 안정감이 떨어져 보이는 것도 상륜부에 있는 풍마동의 무거움 때문은 아닌가 모르겠다.

몸돌에 새겨진 사방불은 백미

탑 주위를 돌아보니 기단석과 몸돌, 지붕돌 등이 많이 훼손이 되었다. 아무리 석탑이라고 해도 불에는 견디기가 어려웠나보다. 그래도 오랜 세월 이렇게 마곡사 경내에 자리잡고 있는 석탑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움을 느낀다. 1972년도에 해체 수리를 하였고, 1974년도에 이 자리로 옮겨왔다고 하는 것을 보니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보다.

마곡사는 처음에 세워진 년대가 정확하지는 않다. 신라 선덕여왕 9년인 640년에 자장율사가 창건을 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643년에 세웠다고도 한다. 또한 그보다 200년이나 뒤인 840년에 보조 체징스님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사방불 이층 몸돌에 새겨진 사방불은 이 탑의 백미로 꼽힌다

천년고찰 마곡사 대웅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 그 이층 몸돌에 보면 사방에 좌불을 새겨 넣었다. 부처와 보살 등을 몸돌 사면을 파내면서 돋을새김으로 윤곽을 주었다.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으며, 연화대와 법의 등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천년 세월을 그 모습 그대로 좌정을 하고 있는 사방불. 그 아름다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탑이 훼손이 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가치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적인 풍화에 의해서 훼손되는 것만도 가슴이 아픈데, 인위적인 훼손까지 더해 망가져 가고 있는 수많은 문화재들. 오늘 우리가 반성해야할 일들이 아니던가.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것도 그러한 죄스러움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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