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 보련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보탑사. 보탑사란 명칭은 이 곳에 3층 목탑으로 지어진 보탑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이 보탑사 주변에는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곡리에는 우리나라에서 단 3기 밖에 전하지 않는 비문을 새겨 넣지 않은, 보물 제404호인 백비가 있기 때문이다.

보탑사를 짓기 전에 실시한 지표조사에서는 와당 등이 출토되었으며, 보련산이나 연곡리 등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지어지는 명칭이 보이는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진천읍에서 서북쪽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는 보탑사를 가는 길에는 김유신장군의 생가터가 있는데, 이곳에 있던 옛 절이 김유신의 사적지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장엄함이 느껴지는 보탑사의 3층 목조보탑

현대에 들어 가장 아름다운 목조 3층보탑

보련사를 들어가는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드나들만한 길이다. 보탑사를 향하던 중 몇 번이나 차를 물려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휴일에다가 버섯채취가 한창인 시기인지라, 여느 때보다 몇 배가 더 복잡하다고 한다. 겨우 보탑사 입구에 들어설 수가 있다. 주차장을 들어서면 우측으로는 보탑사의 일주문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 듯 수령 300년이 지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보탑사 입구에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위)와 보탑사 일주문(가운데) 보탑으로 오르는 계단

보탑사 일주문을 지나 돌계단 위로는 3층 목탑의 상륜부가 삐죽이 얼굴을 보인다. 계단 위 좌우에는 범종각과 법고각이 서 있다. 밑에서 보기에는 팔각으로 보였으나, 막상 오르고 보니 법고각은 9각으로 지었고 범종각은 7각으로 지어졌다. 앞으로 보이는 거대한 3층 목조보탑. 그 웅장함에 압도를 당한다.


사방불을 모신 장엄한 3층보탑

보련산 보탑사의 3층 보탑. 3층 보탑의 높이는 42.71m나 된다고 한다. 탑신인 1층부터 3층까지의 높이가 108자인 32.72m 이고, 상륜부가 33자인 9.99m이다. 이 보탑은 사방에 문을 내고 그 안에 주불을 모셨는데, 3층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보탑이다. 그저 놀라울 수밖에 없다.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춘 후, 한편에 서서 고개를 딴 곳으로 돌리지를 못한다,


보탑의 상륜부와(위)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불을 모신 보탑의 1층(아래)

예전 신라가 새로운 국가를 열기 위해 황룡사 9층탑을 세우듯, 고구려와 백제가 더 강한 국가를 염원한 많은 목탑을 세우 듯, 그런 마음으로 남북통일은 물론, 옛 고구려의 위용을 다시 한 번 떨쳐내기 위한 염원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 모습만으로도 아름다운데, 그 안에 담긴 뜻이 깊어 더욱 장엄을 더하고 있다. 또한 황룡사 9층 탑 이후 최초로 3층까지 오를 수 있게 축조된 탑이기도 하다.

보탑을 한 바퀴 돌아본다. 행여 발자국 소리라도 들릴까보아 조심스럽다. 1층은 금당이다. 사방불을 모신 금당은 이 보탑의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불을 모셔 놓았다. 동방에는 약사보전, 서방에는 극락보전, 남방에는 대웅보전, 북방에는 적광보전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 현판의 명호대로 그 안에 모셔진 주불과 협시불이 각각 다르다.



범종각과 법고각(가운데) 그리고 와불을 모신 적조전(아래)

2층은 법보전으로 팔만대장경을 모신 윤장대가 있으며, 3층은 미륵전으로 미륵 삼존불을 모셔 놓았다. 보탑주변을 한 바퀴 도는데, 적조전 앞 바위에 모셔진 석불이 빙그레 웃는 듯하다. 마치 ‘무엇을 깨달았는가?’를 묻는 것만 같다. 이 3층 보탑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는 와불을 모신 적조전, 부처님의 제자와 나한을 모신 영산전, 지장전과 법고각, 범종각 등이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



산신각으로 오른다. 통나무 귀틀집으로 지어진 산신각은 너와지붕을 얹어 특이하다. 산신각 앞에 앉아 바라다보는 3층보탑. 그 상륜부 위로 저만큼 가을의 푸른 하늘이 보인다. 뜬구름 같은 인생을 어디서 머물 것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련산 보탑사에서 영원한 발길을 머물고 싶다’고.

통나무 귀틀집으로 지어진 산신각

당간이란 절에서 커다란 행사를 할 때 내거는 깃발을 말한다. 대개는 절 앞에 당간을 내 걸게 되며, 이 당간을 거는 지주 대를 ‘당간지주’라고 한다. 당간을 세우는데 필요한 버팀기둥인 당간지주는 돌을 양편에 세우고, 위아래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받쳐주는 빗장을 끼워 당간을 고정시킨다.

전국의 절을 찾아가면 이 당간을 볼 수가 있다. 당간은 대개 나무로 만들어 세우는데, 어느 곳에는 철로 만든 당간이 있는 곳도 있다. 국보 제41호 용두사지 철당간은 당간지주를 세우고, 깃대를 세우는 당간을 철로 만들었다.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에 자리한 용두사지는 고려 광종 13년인 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 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된 절이다.


당간지주 하나에도 불심이 깃들어

남원 만복사지 한편에 동서로 마주하고 있는 이 당간지주는 지주 사이에 세웠던 깃대는 남아있지 않고, 이를 고정시켰던 구멍이 세 군데에 뚫려 있다. 현재 아랫부분과 기단이 땅속에 파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다. 땅속에 묻힌 것을 감안한다면 이 당간지주의 전체 높이는 5m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은 커다란 장대석을 거칠게 다듬었으며 별 다른 장식이 없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당간지주의 조성 시기는 고려 전기로 보인다. 당간지주를 살펴보면 거칠게 맞은 돌을 깨낸 흔적이 보인다. 지금처럼 돌을 다루는 공구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망치와 정 만으로 이 당간지주를 다듬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 커다란 석물을 조성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단순한 이 당간지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가늠이 간다.



정유재란이 앗아버린 만복사

남원시 왕정동에 자리하고 있는 만복사지. 만복사지는 기린산 아래에 자리한 절로 일설에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 세운 것으로 보인다. 더욱 보물 제32호로 지정이 된 이 당간지주가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을 보아도 만복사가 고려 문종 때 창건이 되었음을 뒷받침 하고 있다.

당시 이 만복사의 사세는 대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만복사지 부근에는 백뜰, 썩은 밥배미, 중상골 등의 지명이 있어 당시의 사찰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백뜰은 만복사지 앞 제방을 말하는데, 승려들이 빨래를 널어 이곳이 온통 하얗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고 썩은 밥배미는 절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는 장소로 승려의 수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복사지에서 세월을 탓하다.

이렇듯 장엄한 사세를 자랑하던 만복사는 정유재란 시 남원성 싸움 때 소실이 되어버렸다. 금오신화의 저자 김시습은 만복사를 배경으로 한 『만복사저포기』를 남겨, 한문소설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도 당시 만복사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잘 정리가 되어있는 만복사지. 여기저기 전각이 서 있던 터가 도드라지게 자리하고 있고, 주춧돌은 아직도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숙종 4년인 1679년에 남원부사 정동설이 복원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방치되었던 만복사. 그 한편에 서 잇는 당간지주를 보면, 아마 이 곳 앞으로 절의 일주문이 있었을 것이다.

옛날 남원8경 중에 <만복사 귀승>이 있다. 시주를 마치고 저녁나절에 만복사로 돌아오는 승려들의 행렬이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는 것에서 아름다운 경치로 꼽았다고 한다. 교룡낙조, 축천모설, 금암어화, 만복사 귀승, 선원모종, 광한추월, 원천폭포, 순강귀범을 팔경 중에 네 번째로 만복사 귀승을 꼽을 정도였다.


세월은 그리도 무심한 것인지. 저녁 무렵 찾아간 만복사지 한편에 자리한 당간지주. 옛날 커다란 돌을 쪼아 이 당간지주를 만든 석공은 어떤 마음으로 이 당간지주를 만들었을까? 눈을 감고 당간의 투박한 표면에 손을 대본다. 행여 당시 석공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으려니 하지만, 무심한 초가을 바람만 손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전남 구례 화엄사, 하왐사상의 중심지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을 널리 알리던 절이다. 신라 후기에는 도선스님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다. 회엄사가 더욱 그 사세를 떨친 것은 고려 문종 때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화엄사에 매년 곡물을 바치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하니, 당시 화엄사의 사세를 알 수가 있다. 이는 고려가 국교를 불교로 했고, 화엄사는 화엄사상의 중심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화엄사 일주문 밖에는 큰 창고를 짓고, 경상도와 잔라도에서 실어오는 곡물을 저장했다고 한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7년 만에 여러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뒤로도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많은 전각들이 중창되었다.



각황전 한편에 자리한 사자탑

화엄사 각황전 앞에 난 계단을 오르면 우측에 탑이 서 있다. 보물 제30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탑은 <화엄사 사자탑>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조성한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형태를 사찰에서는 '노주'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일설에는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기단은 이층으로 꾸며졌으며,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에 받침돌을 이고 그 위에 비를 받치고 있다. 그 모습은 각황전 뒤 효대에 있는 국보 제35호인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을 모방했으니, 조각수법 등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조성시기도 사사자삼층석탑보다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비의 형태로 만들어진 탑이 독특해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은 2단이다. 아래층 기단은 문양이 없는 단순한 석재를 이용해 꾸며 놓았다. 소박하면서도 꾸밈이 없는 모습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로 넘어갈 당시의 석조물인 듯 하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의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비스듬히 밖을 바라다보고 있으며, 그 표정이 각각 다르다.

네 마리의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아마 불교적인 형태를 강조하기 위한 조각품으로 보인다. 이런 조각을 보아 이 사자탑ㅁ이 사리탑이었을 것이란 조심스런 추정을 해본다. 네 마리의 사자가 몸돌의 받침돌을 이고 있는데, 탑신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몸돌에는 네모나게 판 후 그 안에 신장상을 조각하였다.

무엇에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화엄사 사자탑. 아마 당시에는 소중한 절의 기물로 여겼을 것이란 생각이다. 수많은 불교 유물이 전하지만, 아직은 지식이 모두에 미치지 못함이 안타깝다. 사자탑을 돌아보면서도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지만, 짧기만한 지식을 어찌하랴.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더 지체를 못하고, 아쉬움으로 뒤만 연신 돌아본다.

남원시 도통동 392-1 선원사 약사전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보물 제422호로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철조여래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촘촘히 돋아 나있고, 이마 위쪽에는 고려시대 불상에서 유행하던 반달 모양을 표현하였다.

선원사(禪院寺)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절이다.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 1,135년이나 지난 고찰이다. 원래 객산인 교룡산의 지기를 누르고, 주산인 백공산의 기운을 돋우어야 남원이 발전한다고 하여 지어진 절이다. 선원사는 만복사에 버금가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이 되었다. 그 뒤 영조 30년인 1754년에 남원부사 김세평이 복원을 하였다.

보물 제422호 선원사 철조여래좌상

뛰어난 주조기법이 돋보이는 철불

선원사는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남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람이 펼쳐 있으며, 앞으로는 주공 1, 2단지가 자리하고 있다. 도로변에 접하고 있는 선원사는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것은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약사전과 문화재자료인 대웅전 때문인가 보다.

약사전 안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전통적인 고려 철불의 형태로 주조 되었다. 삼각형의 얼굴은 일반적인 불상에서 보이는 인자함이나 유연함은 보이지 않는다. 날카로운 코와 꽉 다문 입, 조금은 앞으로 내민 턱 등에서 보이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쳐 얇게 표현이 되었는데, 넓은 옷깃을 오른쪽으로 여민 것은 마치 한복을 입은 것처럼 표현되어 매우 독특하다.



철조여래좌상을 모신 선원사 약사전(좌측)과 대웅전(우측) 맨 위사진 

팔과 다리에 나타난 옷 주름은 V자 모양으로 간략하게 처리를 하였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반듯해 당당한 느낌을 주며, 잘록한 허리에는 두 팔이 붙어 있다. 현재 철조여래좌상의 손은 최근에 다시 만들어 붙인 것이라고 하는데, 팔의 형태로 보아 원래는 오른손을 무릎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가지만 서원을 빌어야 해요”

남원을 답사한 이유도 바로 이 선원사 철조여래좌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주변의 절을 다니시는 많은 불자들이 선원사의 철조여래좌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딱히 무슨 효험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과다하게 소문을 내고는 하지만, 이상하게 선원사 철조여래좌상에 대해서는 웃음으로 말을 피하고는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것이 더 궁금해서 찾아간 선원사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지 않는 절집이다. 그러나 약사전 안으로 들어가니, 철조여래좌상의 표정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고려시대의 불상이라면 이미 천년 세월을 훌쩍 넘었다. 그 많은 세월동안 철불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원을 했을까? 아마 그 기운만으로도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있을 듯하다.




“세 번만 찾아와 엎드리면 알음이 있다”
“한 가지 서원을 빌어보세요. 딱 세 번만 와서요. 그러면 정말로 그 서원이 이루어져요”

멀리서 일부러 신원사 약사전을 찾았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다. 정말일까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약사전에 좌정하고 계시니,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데 영험함이 있는 것일까? 그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지성으로 빌어본다면, 그도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근엄한 부처님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기운이 뻗쳐 나오는 것만 같다.


천년세월을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 속에서 지켜 낸 신원사 철조여래좌상. 고려 시대에 주조가 된 철조여래좌상, 그 소중함이야 어디다가 비길 것인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마음속으로 빌어보는 것은, 이 땅에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인가 보다. 세 번만 찾아가면 정말로 마음 아픈 사람들의 그 아픔이 가셔질 수가 있을까?


어제(9월 16일) 오후에 구례 화엄사를 찾아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참 낯 뜨거운 일을 당하고 말았다. 구례구역은 구례에서 벗어난 순천에 자리를 한다. 이 역은 구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어 ‘구례구역’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전남 순천시 황전면 선변리에 소재한다. 구례읍내에서는 6km나 떨어져 있는 곳이다.

차를 타려고 가보니 내가 타야하는 열차가 기관차 고장으로 인해 30분이나 연착을 한단다. 그렇다고 딴 방법이 없으니 역사 앞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역 앞을 보니 구례군 관광안내도가 보인다. 어디를 가나 역 앞에는 이런 지도가 붙어있다. 그 지역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를 하기 위해서다.

구례구역 앞에 서 있는 구례군 관광안내도

“정신 빠진 사람들, 얼마나 오래 방치한거야.”

그런데 이 지도를 보다가 이상한 점이 있다. 아마 딴 사람들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부분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는 나로서는 문화재를 먼저 찾아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같은 문화재가 두 곳에 있다고 나와 있다. 같은 논곡리 삼층석탑이 두 곳에 있다는 것이다. 지도를 보니 그나마 한 곳은 석탑이 분명한데, 한 곳은 신도비인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삼층석탑도 ‘삼층’인지 ‘상층’인지 구별이 안 갈만한 글씨이다.

지도의 아래에 있는 삼층석탑은 구례읍 논곡리에 소재한 보물 제509호 삼층석탑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도 위편에 있는 논곡리 삼층석탑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산동면 이평리에 소재한 보물 제584호인 윤문효공 신도비이다. 그림도 신도비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논곡리 삼층석탑이라고 쓰여 있다. 이건 도대체 어찌 설명을 해야만 할까?



관광안내판에는 논곡리 삼층석탑이 두 곳에 있다고 그려져 있다.

구례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특히 가을이 되면 열차를 이용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그들은 관광지도를 보고 갈 곳을 정하기도 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은 승용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역 앞에 있는 지도를 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간판을 언제 세운 것인지는 몰라도 아직 담당자가 한 번도 이 관광 안내판을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제발 문화재 푸대접 그만하세요. 부탁합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 그동안 이런 것에 대해서 지적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지나는 사람들이야 관광을 목적으로 왔으니,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적어도 구례군의 관광이나 문화 담당자들은 이 지도를 한 번 쯤은 살펴보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이렇게 엄청난 과오를 저지르고 있다면,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지도의 아래편에 있는 삼층석탑은 구례읍 논곡리에 소재한 보물 제509호 삼층석탑이다.(사진 위) 그리고 위에 있는 논곡리 삼층석탑은 산동면 이평리에 소재한 보물 제584호인 윤문효공 신도비이다(아래). / 사진출처 :구례군


우리 땅에 있는 수많은 문화재들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 지역에 있는 보물들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이 정도인데, 그렇지 않은 문화재는 또 얼마나 방치되고 있을까? 전국을 돌면서 수많은 문화재들을 찾아다니지만, 이런 경우에는 그저 할 말이 없다. 행여 아이들이라도 볼까봐 주변부터 살피는 내가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 안내판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구례군은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너무 많은 문화재가 있어서 문화재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인지. 적어도 이 안내판이 설치된 이후에 한번이라도 담당자가 나와 보았더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만 같다.


다음 스카이뷰에서 찾아보았다. 위는 논곡리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다, 그리고 아래 붉은 원은 삼층석탑, 위 하늘색 원은 보물 제584호인 윤문효공 신도비가 서 있는 곳이다.


제발 부탁합니다. 우리 문화재에 대해 신경을 조금만 더 써주세요. 우리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어야 할, 후손들의 것입니다. 이 안내판을 보면서 우리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하고 싶다. ‘정말로 부끄럽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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