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정말 그런지 몰랐다. 아니 몰랐다기보다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매일 발을 씻으면서도, 이것은 당연히 내발이려니 하고 살았다. 당연히 내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니 내 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오늘 왜 ‘발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달 타령이라면 혹 몰라도.

아마 나처럼 발을 혹사시킨 인간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만 같다.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이 발은 위로 자그마치 작지 않은 키에, 몸무게도 만만치 않은 몸을 싣고 팔도를 돌아다녔다. 그 발은 한 번도 나에게 불평을 한 적도 없다. 때로는 심한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아직도 나를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양말을 신었을 때는 정말 볼랐다.

알고 보니 무지하게 혹사를 시켰네.

누구에게 발을 보여 줄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일도 없다. 그저 답사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오면 찬물에 발을 담근다. 그리고 피로를 조금은 풀기 위해 오래도록 주무른다. 그리고 다음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다시 길을 나선다. 하루에 10km를 걸었다고 쳐도, 그 동안 걸었던 길은 모두 24,000km 정도라는 거리를 걸은 셈이다.

이 계산은 이렇다. 답사를 나가면 기본적으로 하루에 걷는 거리가 10km 정도이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이 걸을 수도 있고, 덜 걸을 수도 있다. 평균 잡아 한 달이면 10일 정도 답사를 한다. 그러면 한 달에 100km를 걷게 되고, 일 년이면 1,200km를 걸은 폭이다.

20년을 답사를 했으니 24,000km 정도를 걸은 셈이다. 서울서 부산은 400km로 잡을 때 편도 60번, 왕복 30번을 걸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걸으면서도 한 번도 탈이 난 적이 없었다. 이런 발에게 한 번도 미안한 감을 표현하지도 않았고, 감사를 한 적도 없다.

더운 물에 담구고 주무르면서 보니, 정말 발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다. 붓고 굳은 살 박히고, 찢어진 것이

통증 때문에 바라본 발

갑자기 발에 통증이 온다. 양말을 씻기 전에는 벗지 않는 사람인지라, 늘 맨발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발에 통증이 오는 바람에 우연히 양말을 벗었다. 따듯한 물에 발을 담구고 주무르기라도 할 셈으로. 그런데 발을 보다가 놀랐다. 내 발이 정말 형편없이 생겼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발톱은 그동안 산을 타면서 걸려 넘어지고 깨어지면서, 몇 번인가 빠지고 새로 돋았다. 그런 발톱이 제대로 생겼을 리가 없다. 주로 걸어서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그동안 발을 혹사시킨 정도가 아니라, 고문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통증이 오는 곳을 살펴보니 발 뒤꿈치다. 그것에 굳은살이 박여 터지고 피가 난다.

그래서 그렇게 심한 통증은 왔나보다. 그런데 그 발을 보면서 참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발을 보기가 미안스럽다. 아직 한 번도 발에 대해서 고마워 해 본적도 없다. 그리고 발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진 적도 없다. 그런데 양말을 벗고 들여다본 발은 충격 그 자체였다.

터지고 깨어지면서도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발. 그 소중함을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 아파서 깨우친 것이다. 아마도 나를 깨우치기 위해 아픈 것은 아니었을까? 앞으로도 얼마를 더 걸어야 하는 것일까? 과연 이 발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일까? 발을 보면서 정말 미안하다. 그래서 발에게 미안함을 이렇게라도 적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나쁜 발의 주인이 될 것만 같아서.

“발아 정말 미안하다. 그 동안 너무 혹사를 시켰나보다. 이젠 좀 쉬게 해주고도 싶다”

「안녕하세요, Daum view입니다. 2011 view 블로거대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11년 한 해 view로 송고하신 양질의 콘텐츠, 타 블로거와의 소통 능력, 네티즌 투표, 내부 심사 등을 거친 결과이며, 수상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다음 뷰에서 이메일로 블로거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받기 전에, 이미 많은 이웃 블러거님들의 축하인사를 받았다. 생각 같아서는 정말 기뻐해야 하고, 소리라도 질러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저 덤덤하니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런 참에 절친 블로거 한 분이 전화를 했다. ‘생각대로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때서야 정말 수상을 하긴 하는가보다 라고 실감이 난다.


위는 문화재 답사를 시작한지 20년이 지난 후, 방안을 가득 메운 문화재 답사 자료인 3,000여 장의 CD입니다. 아래는 그 동안 썼던 20권이 넘는 책 중 일부입니다(좌측)  


나에게 문화재는 ‘살아있다는 존재감’

길고 긴 사간이었다. 물론 상을 받자고 한 것은 아니다. 다음 뷰의 전신인 <다음 뉴스>에 처음으로 송고를 한 것이, 2005년 10월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플래닛을 하다가 다음 뉴스가 시작되면서 블로그를 시작을 했다. 그리고 티스토리로 자리를 옮겨 앉아 2007년 까지, 거의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글을 썼다.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숱하게 상처도 받았다. 때로는 분노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이도 없었다. 한 때 중단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 것은, 바로 ‘존재감’ 때문이었다.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엄청난 자료. 그것을 혼자 품고 있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다. 쉬고 있는 동안에도 자료는 늘어만 가고, 난 항상 문화재를 찾아다니느라 길 위에 서 있었다.




문화재 답사는 고통을 수반한다. 저렇게 가파른 절벽을 수도 없이 올라야 하고(맨 위) 그 위에 오르면 설악산 천불동이 눈 아래 보인다.(두 번째) 그런가하면 비가 오는 날도 답사는 쉴 수가 없다(세 번째)
그리고 눈이 발목을 덮어도 답사는 늘 계속된다. 하기에 문화재 답사는 늘 고통을 수반한다.


20년이 넘는 시간의 답사. 그리고 수없이 걸었던 길.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나게 되는 문화재들. 그런 것들이 고스란히 방에 놓여있다. 문화재 CD 3천 여 장. 자료를 위시한 책들이 2.000 여권. 그 책들을 두 곳에 나뉘어져 보관을 하고 있다. 난 이 집을 <자료실>이라고 늘 부른다. 생활공간이자, 모든 답사와 문화재에 대한 자료들을 보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늘 답사를 하러 길을 나서는 나로서는, 가족들이 함께 하는 집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항상 자료를 정리하고, 글을 쓰고, 또 다시 길을 나선다. 20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그렇게 길 위에 서 있었다. 그 20년 동안 숱한 실패와 재도전을 반복했다. 그리고 또 힘이 들 즈음에 블로거 대상 중 ‘문화연예 부분 우수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이 상은 나에게는 채찍질이란 생각이다. 나태해 져 가고 있는 나에게 ‘다음 뷰에서 주는 매’란 생각이다.


위에 사진은 현재 자료가 있는 방안 풍경이다. 아래 사진은 시계방향으로 2,000 여권의 책이 진열되어 있는 또 하나의 서재이다. 우측 위는 확대한 서책의 일부 모습이며, 우측 아래는 그동안 출간을 했던 문화에 대한 책들이다. 그리고 좌측 아래는 문화공연을 기획하고 무대에 올렸던 자료들이다. 지난 20여년, 오직 우리 전통문화와 문화재를 알리는데 온 힘을 다했기에, 집 한 칸도 없지만 후회는 없다.


달라질 것이 없는 일상

수상을 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내 힘이 자라는데 까지는 답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글을 쓸 것이다. 하나의 문화재라도 더 알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답사를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일상이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는 그런 일상이다. 길을 나서고,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쓰고, 소개를 하는 것도 그와 다를 것이 없다.

많은 이웃님들이 이야기를 한다. “그 동안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다”라고. 그러나 난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문화와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그날이, 진정한 보상이란 생각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상은 그날까지 쉬지 말고 계속하기 위한 '주마가편(走馬加鞭)'이 될 것이다. 내일도 난 또 길 위에 서 있을 것이기 때문에.

고맙습니다. 블로거 여러분. 정말로 고맙습니다.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고, 조금은 죄송하기도 합니다. 더 열심을 내지 못했음이.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깊이 머리 숙여 고마움을 전합니다. 많이 부족한 인사를 선정해 주신 다음 측에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도선(道詵)국사는 전라남도 영암 풀신이다.신라말기의 고승으로 827년에 태어나 898년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풍수설의 대가였다. 도선은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절을 창건하였으며, 그 절마다 모두 풍수에 기인하여 창건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남원지역의 많은 절들은 대다수가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남원의 풍수를 보아 적당한 곳에 절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런 도선국사의 일화는 수도 없이 많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도선은 틀림없이 신라 효공왕 2년인 89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고려 때 지은 절에 도선국사가 창건을 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생몰연대조차 정확하게 따져보지 않은 이런 류의 안내로 인해 가끔은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용담사

남원에서 운봉을 향해 가다가 보면 남원을 벗어나는 곳이 주천면이다. 이곳 도로 좌측에 보면 용담사라는 절의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에는 보물 제42호 용담사지 석불입상이 있다고 적혀있다. 용담사에 소재하고 있는 석불입상에 관해서는 두 번째 글을 쓰고 있다. 문화재란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더 안목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용담사가 언제적에 지어진 절인가는 확실하지가 않다. 용담사 경내에 있는 안내판의 설명을 보면 ‘용담사지 석불입상’이라 쓰여 있다. 이것은 예전의 절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금의 용담사는 이름만 전하는 용담사 터에 세워진 절이라는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된 절이라는 설과, 통일신라 말 선각국사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정작 석불입상 앞에 적힌 또 하나의 안내판에는 전혀 황당한 긇이 적혀있다. 용담사에 관한 내력을 적은 글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증없이 적어 놓은 글이 문화를 잘못 알려

<천년의 향기 - 용담사는 고려시대 사찰로써 천년전 절이 세워지기 전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고있어, 밤이되면 여우로 둔갑하여 사람을 잡아먹고 농작물을 해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려도 어찌할 수 없었으나 마침 도선국사께서 큰 원력을 새워 이곳에 미륵물을 모시고 기도 중에 해탈주를 독송하니 이무기가 순간 업보의 허물을 멋고 용이되어 사라졌다. 해서 용담사라는 전설이 있다>

라고 적고 있다. 이 설명 하나가 결국 절의 내력을 다 망쳐놓은 결과가 되었다. 신라 때 고승인 도선국사가 고려 때에 젏을 지었다는 황당한 설명에는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구를 적은 안내판을 석불입상 앞에 버젓히 세워놓아 문화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용담사는 고려 떄가 아닌 신라말에 지은 절이며,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여 도선국사가 조성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질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거대석불로 보이는 용담사 석불입상

보물 제42호인 용담사지 석불입상은 광배와 입상이 '일석(一石)'으로 꾸며졌다. 대개 석불의 경우에는 불상과 광배가 따로 제작이 된다. 하지만 용담사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바위를 이용해 입상과 광배를 조각하였다. 석불입상은 훼손이 심해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고려시대의 거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높이가 6m에 달하는 이 석불입상은 체구가 당당하다. 

용담사 석불입상은 이 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고려 시대 미륵의 형태이다. 머리위에 육계의 윤곽은 비교적 뚜렷하고, 귀는 긴 편이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법의는 거칠게 표현을 하였으며, 두 손 등은 정확한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다. 많은 훼손이 되어 있어서 그 형태만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석불의 안면 밑으로는 양 편 어깨부근에 구멍이 하나씩 나 있는데, 이 구멍의 용도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무슨 장식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는 자연석 위를 둥글게 조성하였다. 이곳에도 양편에 구멍이 나 있다. 아마도 이 석불입상을 보호하기 위해 전각을 지었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화재 하나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안내판 하나를 잘못 기재함으로써, 문화재의 소중함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잘못된 안내판은 하루 빨리 철거해야 할 것이다. 

‘스카우트’라는 말을 인터넷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우수한 운동선수 또는 연예인, 특수 기술자와 같은 인재를 물색하고 발탁하는 일.」이라고 적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직장을 가져보았다. 그 직장 하나하나는 그래도 꽤 보람찬 일을 할 수 있었던 곳이라, 나름대로 의미를 두고 싶다.

그러나 나이가 먹어가면서 점점 마음이 조금해지는 것은, 지금은 내가 어느 곳에 얽매어 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우선은 몸이 예전 같지가 않다. 한 시간 정도만 걸어도 숨이 차고, 다리가 뻐근하다. 아직 찾아갈 곳이 많은 나로서는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난 아직 ‘60이 갓 넘은 소년’이기 때문이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바로 ‘문화재답사’이다. 난 항상 걸을 수 있을 때까지는 답사를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이 이 세상에 나에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늘 생각을 한다. 물론 문화재라는 것이 내 전공분야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 문화재가 내 생활을 윤택하게 만든 것은 더 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문화재답사에 목을 매는 것은,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 때문이다. 문화재를 찾아다니고 그것을 사진을 찍어 글을 쓰는 것이, 어쩌면 이제 나에게는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다. 소중함이야 더 할 나위없지만, 점점 시간이 간다는 것이 마치 숨통을 조여 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나서야 할 때

그러다가 수원에 있는 신문사에서 전화를 받았다. 며칠간 곰곰이 생각을 하다 보니 어쩌면 이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은 취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제일 반가운 일이고, 그 다음에는 잘못된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글이란 써서 힘을 받아야만 한다. 그 힘이 생긴 것이다.

이제 60을 넘긴지도 몇 년이 지났다. 예전 같으면 그런 나이에 새삼스럽게 직장을 갖는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60은 소년, 70은 청춘’이라는 시대가 아닌가. 결국 난 아직도 소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소년의 마지막 열정을 이곳에서 지내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수원인터넷뉴스> 내가 새로 시작한 언론사의 명칭이다. 아직은 창간이 된지 1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후원을 하고 눈여겨보는 인터넷신문이다. 곧 지면으로도 독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수원인터넷뉴스’가 나에게 주는 의미

꼭 ‘이것이다’라고 말을 할 필요는 없다. 우선은 취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기사로 적었을 때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구 110만의 수원시 안에서만 국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넷뉴스란 특성상,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면과는 달리 실시간으로 기사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 60이 넘은 소년이 다시 찾아 둥지를 트는 이곳. 난 이곳을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끝에 몸을 의지한 곳으로 삼고 싶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을 이곳에서 다 할 생각이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들뜨고 힘이 넘치지 않는가?

말 그대로입니다. '이건 먼 또라이야' 하시는 분들. 저 또라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0.01%의 재벌님들꼐 3억을 요구합니다. 대한민국이 오늘 생긴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당당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어쩌면 이 글이 내일(지금은 토요일 11시 53분입니다)  겁나게 조회를 할 수도 있습니다. 먼 정신병자가 감히 대한민국 재벌들을 향해 3억을 달라고 하느냐고.

그런데 말입니다. 0.01%의 재벌님들은 3억이 큰 돈입니까? 물론 큰 돈입니다. 하지만 사과상자 안을 가득채우면 한 10억쯤 들어갈까요. 그 반에 반만 채워달라는 것입니다. 왜 3억이 필요하냐고 묻는 분들께, 지금부터 3억에 대한 내력을 말씀 드리렵니다.

횡갯다리입니다. 표준말로는 홍교가 됩니다. 그러나 전 홍교보다는 횡갯다리가 좋습니다.


3억 산출근거는 이렇습니다

한 20년 넘게 문화재 답사를 하다보니, 그동안 쓸 돈이 이 정도였습니다. 1박 2일에 들어가는 답사비가 300,000원 정도입니다. 숙식비, 차비 등등 해서요. 한 달에 네 번 정도 답사를 나가면 1백 2십만원 정도입니다. 그런데 주로 1박 2일과 2박 3일 정도를 돌아치면, 한 달에 약 2백만원 정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1년이면 2천 4백, 20년이면 4억 8천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답사를 한 자료는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의 한 30% 정도입니다.

이러다가보니 마음이 무지 바빠집니다. 이제 나이를 보니 앞으로 제가 답사를 할 수 있는 햇수가 약 5년 정도 잡습니다. 앞으로 매일 답사를 한다고 해도, 1,825일 정도입니다. 그동안 약 7,300일 정도에 30%이면 1,823일 정도면 매일 답사를 해보았자 25%정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합해도 55% 정도의 답사를 할 수 있습니다.


위는 미륵당입니다. 아래는 모악산 대원사에 있는 용각부도입니다. 

그 3억이 무엇을 주지?

 3억이 왜 필요할까요? 1박 2일에 300,000만원, 그러면 하루에 약 200,000만원 정도가 필요합니다. 매일 답사를 나간다고 하면 3억 5천 정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5년 동안 아플 수도 있고, 지쳐서 쉴 수도 있는 날을 제하면 3억이면 적당하단 생각입니다.

그런데 만일 정말로 누가 3억을 준다고 하면, 3억 대신 무엇을 주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제 답은 하나입니다. 줄 것 없습니다. 그런데 왜 달라고 하느냐고요. 문화재는 가치를 따질 수가 없습니다. 그 가치조차 가늠할 수 없는 문화재를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말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1,000년 세월 풍상을 겪은 이 다리. 과학과 예술을 합한 멋진 농다리입니다. 

그냥 3억 주시면 됩니다. 그 다음에는 30억의 가치가 있는 자료를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대한민국 0.01%의 재벌님들에게 당당하게 3억을 달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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