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과 고려 초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 한 기.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지평리 지평초등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좌측 담장 앞에 자리하고 있다. 삼층석탑의 주변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어, 나름대로 이 탑 주변의 조경에 애를 쓴 듯하다. 이 탑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지평의 한 야산에 있었던 것을, 1945년 현 위치로 옮겨 2001년에 복원을 하였다고 한다.

발견 당시 석탑의 부재는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는 탑신석 1개와 옥개석 2개만 남았던 것을 새로이 조성하면서, 이층과 삼층의 탑신석을 새로 만들고, 삼층의 옥개석도 새롭게 조형했다. 맨 위에는 부도의 상륜부로 추정되는 팔각노반석을 놀려 놓았는데, 이 노반석은 이 탑의 것은 아니다.



뛰어난 조각, 대단한 석탑

삼층석탑의 1층 몸돌에는 사면으로 여래상이 부조되어 있다. 여래상은 사면 모두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형태로 앉아있는 좌불상이다. 이 부조로 조각한 불상을 자세히 보면, 그 조각을 한 솜씨가 뛰어남을 알 수 있다. 몸돌 위에 높인 옥개석은 밑을 4단으로, 위로는 2단으로 층을 만들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하면서도 날렵하게 표현을 하여, 이 삼층석탑이 제대로 형체가 있었다면 뛰어난 문화재였을 것으로 보인다. 남아있는 부분을 보아 이 석탑의 원 모습을 그려본다. 아마도 처음 이 석탑을 축조했을 때에는 상당히 뛰어난 석탑이란 생각이다. 석탑을 보면서, 이렇게 제대로 간수가 되지 않은 수많은 문화재들로 인해 마음이 씁쓸해 진다.



사면의 여래상은 부조의 극치

몸돌에 새겨진 사면불은 모두 머리 부분에 두광을 표현하였다. 육계가 뚜렷하고 나발의 머리에 목에는 삼도를 표현했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배 부분에는 모두 띠 매듭으로 처리를 하였다. 수인도 각각 달라 이 탑을 조성할 때, 어떤 염원을 갖고 조성된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탑이 서 있는 방위로 보아, 남쪽면의 여래상은 왼손은 내려 단전 부근에 두었고,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어 올렸는데 손에 기물을 지녔다. 서쪽면의 여래상은 남쪽과 수인의 형태는 같지만 기물을 들지 않았다. 북쪽면의 여래상은 왼손은 단전에 두고 오른손은 무릎에 두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별인인 항마촉지인을 표현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이란 모든 악마를 굴복시켜 없앤다는 수인이다. 동쪽면의 여래상은 왼손과 오른손을 모두 들어 가슴께에 두고 있다. 이렇게 사면에 여래불을 조성한 형태나 옥개석의 받침의 모습 등으로 보아,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조성된 탑으로 보인다.



사라진 우리의 문화재들, 마음 아파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탑의 높이는 2m 70cm 정도이다. 하지만 이 탑에서 보이는 현재의 1층의 몸돌은 기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삼층석탑을 조성하면 기단을 이층으로 쌓아, 이층 기단부에 조각을 하는 것이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의 석탑에서 보이는 형태이다. 그렇다면 이 탑에서 사라진 것은 3층의 몸돌 전체와 2개의 옥개석이 없어진 것이다. 우선 기단과 옥개석이 발견이 되었는데, 나머지 몸돌과 옥개석, 노반은 어디로 간 것일까?


우리 문화재는 일제에 의해 수없이 찬탈을 당했다. 양평지역의 많은 문화재들이 일제에 의해 찬탈이 되었다는 것을, 양평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많은 분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양평의 많은 문화재들이 사라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양평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양평은 강을 이용한 수로의 운송수단이 원활했던 지역이다. 양평의 많은 문화재들을 배로 옮겨 일본으로 가져갔을 것이란 생각이다.

수없이 일제에 의해 찬탈되고 사라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 그 많은 문화재들이 제 자리로 돌아올 수는 없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 영암사지에는, 보물 제480호인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다. 높은 축대 안쪽에 서 있는 이 탑은, 쌍사자 석등이 서 있는 금당터 앞에 있다. 영암사지는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로 알려져 있다. 절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014년에 ‘적연선사’가 이곳에서 입적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 기록으로 보아 영암사는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정비중인 절터에는 석탑을 비롯하여 보물인 쌍사자석등과 귀부 등 각종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황매산의 바위산을 배경으로 조성된 영암사지는 아직도 정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8월 20일 비를 맞으며 찾아간 영암사지. 그곳에서 삼층석탑을 만났다.




무너져 있던 탑을 복원하다

이 삼층석탑은 영암사지에 탑신부가 무너져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쌍사자석등을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주민들이 막아냈다고 하는 점으로 보아, 아마도 이 삼층석탑도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해체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일제치하 하에서는 이렇게 수많은 문화재들이 해체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1969년에 복원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삼층석탑은, 화강암재로 조성을 하였다. 기단은 상당히 높은 편이며, 몸들은 1층에 비해 2, 3층이 유난히 낮다. 기단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인 우주와 탱주를 새겼으며,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몸돌의 모서리에는 우주를 새겼으며, 지붕돌 밑면의 층급받침은 4단씩이다. 몸돌의 비례가 정형을 벗어나 있으며, 처마 밑은 수평으로 조성하고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내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갔다. 탑의 상륜부인 머리장식부분은 모두 없어졌으며, 3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쇠막대인 철주를 끼우던 구멍이 있다.

간결하고 규모가 작은 영암사지 삼층석탑

비를 맞으며 영암사지의 이곳저곳을 돌아본다. 과거에는 이 영암사라는 절이 얼마나 대단한 가람이었는가를 추정해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석등 뒤에 조성한 금당터와 위쪽에 있는 또 하나의 금당터, 그리고 석등과 삼층석탑. 귀부와 각종 석재 등을 보아도 상당한 절이었을 것이다.


그런 영암사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전체적으로 볼 때는 위층 기단과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균형을 잃지 않고 있으며, 각 부재의 짜임새 또한 간결하다.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잘 이어받고는 있으나, 기둥 표현이 섬약하고 지붕돌의 층급받침수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건립 시기는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보물 제480호인 영암사지 삼층석탑. 기단부와 머릿돌 등이 깨어지긴 했지만, 간결하면서도 나름대로 품위가 엿보인다. 삼층석탑 한편에 미륵형태의 조형물이 있다. 이 석조물은 무엇일까? 혹 이 탑을 조성하면서 공양상으로 함께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석탑의 부재가 여기저기 한편씩 깨어져 있는 것도, 혹 이 석탑을 해체해 운반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비를 맞으면서도 석탑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석탑이 무너져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양양군 서면 황이리, 양양에서 출발을 하여 구룡령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선림원지는, 미천골이라는 계곡 곁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선림원지에는 4종의 보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선림원지 한 편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446호는, 홍각선사의 탑비 귀부 및 이수이다. 이 탑비는 홍각선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탑비이다.

2004년 10월에 선림원지를 답사 갔을 때는 비 받침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이 남아있었다. 이번 11월 14일 답사를 할 때는 새롭게 조성을 한 비가 새워져있어 완전한 옛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문이 파편만 남아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재현하여 세웠다고 한다. 이 홍각선사 탑비의 재현된 비는 가로 94cm, 세로 173.5cm 정도로 1,340자 내외가 있던 것 중, 710자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새로 몸돌인 비를 세운 이번 답사 때의 모습과(위) 지난 2004년 10월 귀부와 이수만 있을 때의 모습(가운데와 아래)

통일신라 때 세워진 홍각선사 비

보물 제446호인 홍각선사 비는 통일신라 때인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탑비는 비받침인 거북이인 귀부와 몸돌, 그리고 머릿돌인 이수로 구분한다. 홍각선사 비의 받침의 거북은 목을 곧추세운 용의 머리모양으로 바뀌어있다. 이런 형태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로 넘어가는 시대에 많이 보이는 형태이다.

이 거북이는 땅에 납작 엎드린 형태이며, 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문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네 발은 모두 날카로운 발톱을 갖고 있어, 거북이의 발톱이라고 보기보다는 용의 발톱에 가깝다. 이 거북이의 또 하나 특징은 바로 네발에 있는 수염 같은 형태이다. 발에서 나온 이 수염 같은 형태의 조각은 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이 수염 같은 것은 날개를 대신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다리에 붙은 저 조각은 수염인지? 혹은 날개를 상징한 것인지 궁금하다.

특징 있는 홍각선사비의 조각예술

귀부의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비의 몸돌을 세우는 자리이다. 이곳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소라형의 무늬 위에 안상이 새겨져 있다. 비머리인 이수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중앙에는 네모난 안에 ‘홍각선사비명’이라는 전액을 양각하였다. 그 주변에는 온통 운용문을 새겨, 신라 하대 석비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비 머리에 보면 두 마리의 용은 서로 마주하고 입을 벌리고 있으며, 두 마리의 용은 머리를 아래로 하고 양편에 자리하고 있다. 비명을 사이로 대각으로 마주하고 있는 형태이다. 사실적으로 묘사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 힘찬 조각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새로 조성된 몸돌인 비와 머릿돌인 이수의 앞과 뒤

홍각선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비의 파편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홍각선사는 경서에 해박하고, 수양이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비문은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다른 곳에서 모아 새긴 것이라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비명과 비문의 찬술 관련자, 홍각선사의 생애와 선사가 입적 후 비를 새우게 된 내력 등을 적고 있다.

처음 찾았을 때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 한편에 엎드린 듯 보이 던 홍각선사 탑비. 새롭게 조성을 한 탑비로 인해 제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국에 이렇게 비문이 사라진 수많은 문화재들이 제 모습을 찾을 수 있기를 고대한다.

도선국사가 처음으로 절을 지었다는 만복사지. 이 만복사지 안으로 들어가면 동편에 높다랗게 서 있는 5층 석탑이 보인다. 그 옆으로는 석불을 모신 전각이 있어, 5층 석탑을 찾기가 수월하다. 보물 제3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만복사지 5층 석탑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일반 석탑과는 다른 형태로 꾸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여기저기 널린 석탑의 부재들을 한 곳에 쌓아 놓은 듯하기도 하다.

원래 만복사에는 절터 중앙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 때 많은 건물지와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5층 석탑은 현재 4층까지만 남아있고, 5층 이상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몸돌을 괴기 위한 네모난 돌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는 하층 기단부는 2단으로 얇게 조성을 했으며, 그 위에 우주를 새긴 커다란 돌을 올린 상층 기단부가 자리하고 있다. 몸돌은 1층이 대단히 높고, 2층 이상은 약 3분의 1로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인 우주를 조각하였고, 지붕돌은 밑면 전체가 위로 들려 있다. 이러한 형태는 마치 목조건축의 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보아도 일반적인 석탑과는 무엇인가 다르다. 석탑을 몇 번을 돌면서 무엇이 이 석탑의 특이한 점인가를 찾아본다. 바로 저것 때문이다. 각 지붕돌 위에 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네모난 돌이 하나씩 끼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네모난 돌로 인해 석탑의 모형이 일반적인 5층 석탑과는 판이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런 형태는 당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하지만,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몸돌 삼층에 특이한 형태의 감실이 있다. 만복사지 5층 석탑은 고려 문종 때인 11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1968년 이 탑을 보수하다가,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5층 석탑의 또 다른 특징은 3층 몸돌의 사방에 작은 소물을 모셔놓았던 감실이 있다는 점이다. 감실의 경우 이렇게 탑의 상부에 두는 경우가 잦지 않아, 이러한 감실 하나에서도 만복사지 5층 석탑의 특이함을 엿볼 수가 있다.




이 감실은 그다지 크지가 않다. 3층의 몸돌 자체가 그리 큰 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3층 몸돌의 사방에 겨우 소불 하나가 들어갈 만한 감실을 내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마 이곳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사리함을 지키기 위한 소불을 모시느라 조성한 감실로 보인다.

많은 문화재들. 그 나름의 특징과 멋을 자랑하는 문화재야 말로, 우리가 이 시대에 온전히 보존해야 할 문화자산이다. 만덕사지를 찾아 또 하나의 특이한 보물을 발견했다는 것과, 조금은 그 특징에 대해 알았다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땀을 흘리며 걷는 답사 길은, 늘 기대에 차 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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