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하나를 복원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가 된다. 한 부분이 사라졌던 것을 제 모습으로 되돌리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9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에는 국보 고달사지 승탑을 비롯해 보물과 유형문화재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는 봉황암이라는 불렸다는 고달사는 혜목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이 고달사지에 분포가 되어있는 발굴된 유적지를 돌아보아도 당시에 얼마나 큰 절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신털이봉이라고 전해지는 곳에 쌓인 흙더미라는 작은 산을 보아도 이 곳에 얼마나 많은 사부대중이 생활을 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는 고달사. 고려 고종 20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중창을 했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90세로 입적하였다.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갈 때의 귀부

 

대개 탑비 등에서 보이는 귀부의 머리는 시대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난다. 보물 제6호로 지정 되어있는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의 귀부의 머리는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거북이의 몸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 형태이다.

 

 

받침돌인 귀부에 조각된 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 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눈은 부라리고 콧구멍에서는 금방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앞다리는 마치 땅을 박차고 나가려는 듯 힘이 있어 보이며, 발톱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해 땅을 누르고 있는 듯하다. 마치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기세이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귀부모양을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돌출시켜 놓았다. 이 원종대사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비의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은 짧고 두 눈방울이 둥그렇게 부라리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 점. 그리고 귀두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넘어가는 전형적인 시대적 특징을 지닌 귀부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깨어져 사라졌던 몸돌을 복원시켜

 

원종대사 탑비의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과 출생, 행적과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 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이렇게 소중한 기록을 담아 놓은 비가 일찍이 무너져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이곳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귀부와 이수의 중간에 사라진 몸돌인 탑비가 이번에 복원이 된 것이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몸돌의 비문은 부러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태가 양호하여 글자의 판독이 가능했다고 한다. 탑비에는 원종대사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비문은 김정언이 짓고, 장단열이 전액을 썼다. 또한 비문은 해서로 바둑판같은 선이 그어진 네모 칸 안에 썼으며, 글자는 이정순이 새겼다.

 

 

이렇게 원종대사 탑비의 몸돌이 복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러진 부분의 상태가 양호했다는 점이다. 다시 원형으로 복원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원종대사탑비. 비록 그 색깔이 달라 조금은 어색한 점도 있지만, 이렇게 복원이 되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감출 수가 없다.

 

830일 찾아간 고달사지. 이렇게 복원이 된 원종대사탑비를 돌아보니 눈물이 흐른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문화제들이 훼파가 되었나? 사고가 틀리다고 종교성향이 틀리다고, 거기다가 나라가 부실한 탓에 수많은 문화제들이 제 자리를 떠났다. 앞으로 훼손이 되어있던 더 많은 문화재들이 이렇게 제 모습을 찾아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전남 곡성군 오산면 가곡리 2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1322곡성 가곡리 오층석탑오산면 가곡리 매봉 북쪽 경사면에 위치한 절터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얹은 모습이다. 가곡리 오층석탑은 그동안 보아왔던 많은 석탑과는 달리 처음 본 순간부터 발길을 붙든 탑 중의 하나였다.

 

가곡리 오층석탑은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곡리 석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형 석탑의 양식은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건립되던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곡리 오층석탑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각 층의 지붕돌 위에, 또 다른 돌로 몸돌받침을 만들어 몸돌을 괴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몸돌에 조성한 감실에는 누가 있었을까?

 

가곡리 오층석탑은 2단의 기단을 조성했다. 아래기단은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해 3단으로 쌓아올렸다. 아래기단에는 탱주와 양우주 등 기둥 모양이 없으나, 윗기단에는 모서리기둥인 양우주가 새겨져 있다. 2단으로 된 기단석 위에 5층의 비몸인 몸돌을 쌓아올렸는데, 1층 몸돌에 비해 2층서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몸돌에 비해 5층의 지붕돌은 알맞은 비례로 줄어들었는데, 1층 몸돌은 4매의 돌, 2층 이상의 몸돌은 1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각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인 양 우주를 새겨 넣었으며, 2층부터 5층까지의 몸돌 남쪽 면에는 네모난 홈을 파서 감실의 효과를 내었다. 아마도 이곳에는 작은 부처의 상을 모시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몸돌 밑에 받침돌을 조성

 

오층석탑의 1층부터 4층까지의 지붕돌의 받침은 3단이고, 5층 지붕돌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지붕돌 윗면의 경사는 완만하나 양끝의 귀마루가 매우 두텁게 표현되어 있다. 백제계 탑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백제계 탑의 특징으로, 이 가곡리 오층석탑이 백제계 석탑을 모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지붕돌의 처마 선은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 이르러 위로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런 모습이 비상하는 듯한 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 가곡리 오층석탑은 특징은 층마다 지붕돌 위에 또 다른 돌로 몸돌받침을 만들어 몸돌을 괴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이렇게 층마다 몸돌받침을 조성해 놓아, 탑의 높이가 한층 더 높아졌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탑

 

이 석탑은 맨 위부분인 상륜부를 제외한 각부의 부재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형 석탑의 양식은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건립되던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석탑은 담양 남산리 오층석탑(보물 제506)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탑신과 지붕돌에 나타난 표현양식과 더불어 몸돌받침이 있는 점은 고려시대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백제탑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멋을 보여주고 있는 가곡리 오층석탑. 해는 벌써 긴 그림자를 남기고 있는데, 그곳을 떠나기가 아쉽다. 조금만 더 살펴보았으면 하는 것이, 답사를 하면서 매번 이렇게 조급한 걸음에서 오는 조바심이다. 언제나 마음 편하게 관람을 하는 마음으로 문화재를 대할 수 있으려는지.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가끔 볼멘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기야 내가 문화재 담당자가 아니니, 그런 소릴 들었다고 무엇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일이 우리 문화재가 얼마나 소중한 가를 이야기하다가 보면, 실실 울화가 치밀 때도 있다. 막무가내로 돌덩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열을 올리는 사람들 때문이다.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 681번지에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인 장남리 삼층석탑이 소재한다. 인제에서 홍천으로 오다가 보면 군계를 벗어난 고개에서 조금 내려와, 삼층석탑의 사진을 곁들인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안내판을 보고 찾아들어간 장남리 삼층석탑. 그러나 몇 번을 이리저리 돌아서 겨우 만날 수가 있었다.

 

 

그 땅 꼭 그렇게 차지하고 있어야 하나요?”

 

장남리로 들어가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물어본다. 어디로 이렇게 가면 있다는 삼층석탑. 길에서 보인다고 하는데 정작 탑은 찾을 수가 없다. 몇 번을 그 앞으로 지나쳤으면서도 볼 수가 없었다. 탑은 작고 그 앞에 나무 한 그루가 풍성하니 탑을 막고 있어, 길에서 보인다는 탑은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탑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니 한 사람이 곁으로 와 이야기를 한다.

 

저 탑을 치울 수 없어요?”

탑을 치우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탑이냐고 어디 탑 같지도 않은데 땅만 잔뜩 차지하고 있잖아요.”

, 그래도 소중한 우리 문화재이니까요

그래도 꼭 그렇게 넓은 땅을 사용도 못하게 만들어야만 하나요?”

아마도 이곳이 옛날 절터라 보존을 해야 하나 보네요. 그리고 문화재는 보물이 되었건, 이렇게 작고 볼품없는 탑이 되었건 다 소중한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보호철책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면서도 영 기분이 찝찝하다. 물론 땅 주인이야 문화재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땅을 넓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다.

 

나 그래도 문화재야

 

전국을 다니면서 국보와 보물 등으로 지정이 된 수많은 석탑들을 보았다. 그 중에는 정말로 그 아름다움에 눈물이라도 날 것만 같은 것들도 보았다. 그런가하면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도, 이런 문화재도 있구나 할 정도로 초라한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화재는 다 그 나름대로 그 시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남리 삼층석탑은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석탑의 각 부재들을 수습하여 쌓아 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탑의 높이는 전체가 1.3m 정도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맨땅 위에 막돌과 기다란 돌 2개를 깔아 바닥돌을 삼고, 그 위에 아래층 기단, 위층 기단, 탑신의 1층 몸돌과 지붕돌 3개를 차례로 올려놓았다.

 

기단부 이하의 석재들도 제짝이 맞지를 않아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2개씩의 안상을 새겼으며, 일층 몸돌에는 양편에 양우주를 조각하였다. 두툼한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위로 치켜져 올라갔으며, 지붕돌의 밑면에는 2단의 받침을 두었다. 고려시대 후기 석탑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장남리 삼층석탑. 비록 특별한 것도 없고, 제대로 부재가 맞지를 않아 볼품없는 모습이긴 하지만, 그래도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석탑이다.

 

 

문화재를 답사할 때마다 종종 마음이 아픈 것은, 이런 문화재라고 하여서 푸대접을 받는 일이다. 그러나 장남리 삼층석탑은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고, 넓은 대지에 보호철책을 만들어 놓아 그나마 위안이 된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가 모든 사람들에게서 온전히 제대로의 대접을 받으려는지.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국립부여박물관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이 된 두 기의 비가 서 있다. 그 하나는 보물 제107호인 <보광사대보광선사비>이교, 또 한 기는 당나라 장수인 <당유인원기공비>이다. 이 두 기의 비는 층이 진 곳에 서 있으며, 두 기의 비 모두가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가 따로 있지 않다는 점이다.

 

원명국사의 유언에 의해 몸돌만 세우다.

 

부여군 임천면 가신리 보광사 터에 소재하고 있던 비를 옮겨 국립부여박물관 경내에 세워 놓은 보물 제107호인 <보광사대보광선사비>는, 고려시대에 보광사를 크게 부흥시킨 원명국사의 공적을 기록한 비이다. ‘보광사 중창비’라고도 부르는 이 비는 부여 성주산 보광사 터에 서 있던 것을, 1963년 박물관으로 옮겼다. 현재 비는 몸돌인 비만 남아있다.

 

이 비문의 앞면은 건립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뒷면에는 조선 영조 26년인 1750년에 비문을 새겼다. 이 비에 적힌 비문에 의하면 원명국사는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뜻을 펴오다가, 공민왕 원년인 1351년에 입적을 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기의 단조로운 비

 

원명국사는 죽으면서 제자들에게 비나 탑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였는데, 이 비는 국사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지난 후에야 세워졌다. 이 비는 고려시대 후기의 간략한 석비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편마암으로 조성한 대보광선사비는 여기저기 금이 가 있다. 비의 가장자리에는 넝쿨문양을 띠 모양으로 둘러놓았다.

 

머릿돌인 이수가 없는 비는 몸돌만 남아있는데, 윗면은 양편을 비스듬히 깎아내었다. 비의 위편에는 고려시대 대보광선사비임을 적고 있으며, 앞면과 뒷면에 원명국사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뒷면의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비를 모셔놓은 전각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록을 적은 비도 알아볼 수 없으므로 주지인 석능일이 고쳐 새긴다고 되어있다.

 

 

당나라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록한 비

 

대보광선사비 아래쪽에는 전각 안에 또 하나의 보물로 지정된 비가 서 있다. 이 비는 보물 제21호인 유인원기공비이다. 당나라 장수인 유인원의 공적을 기록한 비로, 원래는 부여 부소산성 안에 세 있었던 것이다. 부소산에 세 조각으로 깨진 채 흩어져 있던 것을, 그 자리에 비각을 세워 복원해두었다가 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비는 비 몸돌의 앞면이 조금 깨어져 나갔고, 머릿돌도 부분적으로 깨어져 있으며, 비문은 몸돌 앞·뒷면에 새겨져 있으나 심하게 닳아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신높이 3.35m, 이수높이1.14m이며 해서체로 몸돌의 앞뒷면에 글자를 새겼으나, 뒷면은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의 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 부분은 각이 없이 둥글다.

 

당나라 전기의 조각수법을 보이는 유인원기공비

 

이 비는 유인원의 출생과 가문, 생애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당태종에게 유인원이 발탁이 되어 645년 고구려를 공격할 때 뛰어난 공을 새웠으며, 660년에는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후 유민들의 백제부흥운동을 평정하였다는 내용들이 적혀있다. 이 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시대인 문무왕 3년인 663년으로 밝혀졌다.

 

 

이 비는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록한 아픔을 안고 있는 비이다. 그러나 그 비문 중에는 백제의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명이 당으로 압송된 사실과, 부흥운동에 고나한 내용, 그리고 폐허가 된 당시 부여 도성의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에 소중한 문화적인 사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몸돌과 머릿돌을 하나의 돌로 꾸미고, 여섯 마리의 용이 세 마리씩 양편에서 올라오면서 여의주를 다투고 있는 유인원기공비. 그러나 이런 해설이 없었다고 하면 머릿돌 부분에 조각이 되어있는 것이 용이란 사실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가 되었다. 이 두 점의 비에 얽힌 부분적인 사연에 마음이 아프다. 전쟁 통에 지워진 기록과 외침에 의해 망가져버린 국토를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역사의 아픔도 서러운데, 거기다가 수많은 문화재들이 개발이라는 허울을 쓰거나, 종교적인 이질감 등으로 훼손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이래저래 마음만 미어진다.

우리의 옛 탑 중에서 벽돌로 쌓은 탑을 ‘전탑’이라고 부른다. 이와는 달리 모전탑이란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쌓은 탑을 말한다. 대표적인 모전석탑은 분황사지 9층 석탑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음성군 읍성읍 읍내리 설성공원 경내에 있는, 향토자료전시관 앞에는 오층 모전석탑이 서 있다. 균형 있는 형태로 서 있는 모전석탑,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무엇인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

 

부서진 채로 발견된 모전석탑

 

음성 오층 모전석탑은 본래 음성향교 앞 옛 절터에 무너진 상태로 있었던 것을, 1956년 수봉초등학교 이철세 교장이 학교 안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그 후 1995년 향토 민속자료전시관 앞으로 이전하여 현재의 모습대로 조성한 것이다.

 

이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가 있는데, 현재 2층과 5층의 탑신석이 사라졌다. 그리고 상륜부는 모두 사라져 조금은 정형화되지 않은 상태로 서 있다. 탑의 지대석은 4각 2매로 되어 있으나 한편이 훼손되어 있다. 기단은 단층으로 조성이 되어 있으며, 일석의 돌에 각 면에 양우주가 돌출이 되어있다. 갑석에는 부윤이 정연하며, 상면에 각형으로 1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1층 탑신 사면에는 감실을 음각해

 

1층 답신에는 각 면의 중앙에 장방형의 감실을 음각 하였다. 1층 탑신에는 직경 9cm, 깊이 10cm 의 사리공이 있다. 탑의 옥개석은 낙수면이 층단을 이루고 있어, 전탑의 형태를 모방하고 있다. 이러한 모전석탑을 조성하면서도, 벽돌로 쌓은 전탑모양의 형태로 꾸몄다는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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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 몸돌 위에 올린 옥개석은 2매의 돌로 조성했으며, 옥개받침이 3단으로 되어 있다. 2층 이상의 옥개석은 모두 한 장의 돌로 조성을 했으며, 2층과 3층의 옥개받침은 3단이다. 2층과 3층 낙수면의 층도 3단으로 되어있다. 4층 옥개석은 옥개받침과 낙수면 층은 2단이며, 5층 옥개석은 옥개받침만 2단이다. 이렇게 위로 올라 갈수록 폭이 좁아지면서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5층 옥개석의 중심에 찰구공이 있으며 그 위에 상륜부는 멸실되어 있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의 석탑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사라진 석재가 안타까워

 

우리나라에 모전석탑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더욱 전탑의 형태를 석탑으로 모방한 이 음성 5층 모전석탑의 경우에는, 그 형태도 안정감이 있게 조성이 되었다. 각 층의 옥개석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있어, 처음 조성을 했을 때는 그 어떤 탑보다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 석탑이 언제 훼파가 되었는지, 또 어떤 이유로 이 모전석탑이 존재하던 절이 사라졌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이 모전석탑이 음성향교 앞 절터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일대에 고려시대까지 꽤 웅장한 사찰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아 모전석탑의 일부 부재가 사라진 것도, 그렇게 무너져 내려져 있었을 당시 사람들에 의해 훼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석조물에 사용했던 부재들이, 어느 시기에 문화재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채취가 되고 심지어는 집안의 주추나 축대, 디딤돌 등으로도 사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205호인 중원고구려비의 경우에도 그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마을입구에서 발견 당시 이 비를 빨래터의 빨래판으로 사용을 하여, 사면에 새겨진 비면이 마모가 심해졌다고 한다. 이 음성 모전석탑도 이와 같이 주변 사람들에 의해 석물의 일부가 훼손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낸다는 것은, 어느 특정인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깊이 느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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