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 자신도 아직 어떻게 취재를 하는 것이 정석인가를 이야기하라고 하면, ‘이것이 정석이다’라고 할 수는 없다. 현장 취재라는 것이 취재를 하고자 하는 현장의 성격, 그리고 내용, 인물 등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기본적인 것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는 것인지만 논하기로 한다.

 

우선 취재라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다는 것은, 취재를 하고 글을 써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가 있다. 하지만 준비만 철저하다면 그리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하기에 취재를 하고 그것을 기시화 하려면, 이것만은 꼭 알아두었으면 한다.

 

 

1. 사전준비에 소홀하면 안 된다.

어떤 축제장이나 전시장, 혹은 공연장 등에 취재를 하고자 할 때, 혹은 답사를 하거나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할 때, 가장 먼저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취재를 할 대상에 대한 사전 준비이다. 사전 준비란 그 대상에 대한 것을 철저하게 먼저 파악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전 준비에 소홀하면, 무엇부터 해야 할 것인지조차 정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2. 현장의 자료를 세심하게 취하라.

행사장(축제장 이하 전시회, 발표회 등)에 가면 반드시 운영본부라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그곳을 가면 그 취재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가 비치되어 있다. 그런 것부터 먼저 취합을 해야 한다. 만일 그런 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운영본부의 담당자에게 행사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듣는 자세가 중요하다.

 

만일 문화재 등을 답사를 하고 후기를 쓴다고 하면, 문화재 앞에 있는 안내판을 꼭 촬영을 하기 바란다. 또한 문화재는 반드시 그 앞에 관리소 등이 있어, 그곳에서 자료를 얻을 수가 있다. 사람과 인터뷰를 한다고 하면 그 인물에 대한 철저한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것을 준비를 하면, 수월하게 취재를 할 수 있다.

 

3. 첫 느낌을 중요하게 기억하라.

어딜 가나, 무엇을 보나, 누구를 만나나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느낌이다. 그 느낌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글이 빡빡해질 수밖에 없다. 취재대상을 보고 느낀 첫 느낌은 반드시 기억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다듬을 수만 있다면, 그 누구보다 좋은 기사를 쓸 수가 있다.

 

요즈음은 ‘감성기사’를 쓴다고 한다. 감성기사란 정해진 육하원칙에 의해서 글을 쓰기보다는, 글을 읽는 사람들이 공감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감성기사를 쓰기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느낌이다.

 

4. 메모는 필수.

머리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취재를 한 내용을 다 기억을 할 수가 없다. 하기에 기자들이 수첩을 항상 지니고, 적을 것을 갖고 다니는 것은 기본이다. 그것은 중요한 것을 몇 자만 기록을 하여도, 나중에 기사를 쓸 때 생각해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도록 현장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미 취재를 하면서 기사가 다 머릿속에 그려진다고 하지만. 그것은 전문적인 기자들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기에 취재를 할 때는 무조건 기록하는 버릇이 중요하다.

 

5. 꼭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라.

현장에 나가서 취재를 할 때는 꼭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라.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하기에 단 한 사람에게라도 취재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묻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항상 나 자신의 생각으로 기사를 쓰기보다는, 보편타당적인 생각을 적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글을 쓸 때 내 개인적인 생각에 치우치다가 보면, 기사가 아닌 ‘소설’이 되고 만다. 철저하게 사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글을 쓰다가 보면, 이런 소설을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사는 항상 기사다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길을 가다가 갑자기 취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다. 사전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대상을 취재하려고 하면, 참으로 난감하다. 그럴 때는 가급적 많은 자료가 될 만큼 충분히 사진을 찍어 놓거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는 것이 좋다. 이런 점만 충분히 준비를 한다면, 누구나 좋은 기사를 쓸 수가 있다.


 

2박 3일, 짧은 시간 동안 기나 긴 여행을 했다. 금요일은 공포라고 했던가. 그러나 난 그러한 것은 애당초 염두에 두지를 않는다. 우리 전통에서는 금요일도 아무런 두려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야기는 장사꾼들의 상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박 3일 동안 소득을 정리해본다. 중요민속문화재 4점, 사적 2점, 천연기념물 2점, 보물 1점, 지방문화재 2점, 그리고 지방문화재자료 3점. 이 정도면 2박 3일의 답사치고는 꽤나 짭짤한 소득이란 생각이다.

 

상주를 거쳐 차 한 대 만나지 못하는 산길로 접어들어, 충북 영동으로. 영동을 출발해 무주, 진안을 거쳐 남원. 남원에서 전남 구례를 거쳐 보성 벌교. 벌교에서 보물인 벌교 홍교를 촬영한 후, 다시 목포로. 그리고 무안을 거쳐 정읍, 곰소, 그리고 다시 여주로 돌아오면서 2박 3일간 총 1340km가 넘는 대장정을 마쳤다. 그리고 그 답사의 끝은 꽃무릇으로 명성을 얻은 전남 함평 해보면의 용천사였다.

 

  
용천사 사천왕문 앞에 있는 단풍나무. 붉다 못해 빨강 물감을 뚝뚝 떨구고 있다.


용천사에서 본 것은 꽃무릇이 아닌 단풍이다. 마지막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단풍. 그것은 단풍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울음이었다. 그 아름다운 색. 어찌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있을까? 그저 색이 아닌, 어느 신선이 그림을 그리려고 물감을 들고 가다가 엎어놓은 색. 만색(晩色)이 한 폭의 그림 안에 자리를 잡았다. 누가 이것을 색이라고 표현을 하겠는가.

 

단청 그리고 단풍. 단청도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운 단청이 고개를 숙였다

  
늦은 가을산의 단풍. 그것은 차라리 눈물이었다
 


용천사는 꽃무릇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정작 용천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입바른 소리다. 가을, 그것도 가을. 단풍철이 지난 다음 용천사를 가보라. 진정한 단풍은 그때 용천사에서 시작한다. 내가 가을에 용천사를 찾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용천사에는 진정한 가을이 있기 때문이다.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좋다. 오래도록 보다가 눈물 한 둘기가 흐르면 더욱 좋다. 그것이 용천사의 가을 단풍이다.

  
초록과 붉은 색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뛰는 단풍. 보다가 보다가 눈물 한 줄기가 덜컥 볼을 타고 내린들 어떠하리. 용천사의 초록색 무릇과 붉은 단풍이 연애를 한다. 그래서 용천사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아름다운 용천사의 단풍

  
산길, 바위와 낙엽, 그리고 무릇과 단풍. 그저 말 한마디 안해도 드 안에 온갖 이야기가 다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그저 아무말 없어도, 눈빛 하나만으로 모든 이야기가 다 이루어지지 않을까? 숨 한번 쉬지 않아도, 같은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긴 여정을 마치고 당도한 곳에서 진정한 가을을 만난다.

 

혼자 남은 단풍이 자태를 자랑한다. 그래서 흐드러진 것 보다, 다 아름다운 단풍이다,

 

누가 자연을 논하랴. 어느 누가 그 자연을 감히 세치 혀로 논하랴. 자연을 늘 거기에 있었고, 우리는 늘 그 자리에서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아왔다. 어느 순간, 인간이 스스로 자연이 아니라고 한들, 자연이 인정을 할까? 괜히 바보가 되지 않는 길은, 이 자연속에 나를 파묻는 것이거늘. 2박 3일의 여정의 끝에 난 자연으로 돌아간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종교적인 편향을 갖고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문화재를 함부로 취급할 경우는 정말 짜증스럽다. 9월 7일 안성에 취재를 하는 길에 고찰 칠장사에 들렸다. 칠장사는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번지에 있는 칠현산에 소재한다.

 

칠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이며, 경기도 문화재 자료 24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찰이다. 현재 칠장사가 위치한 칠현산은 본래 아미산 이었는데,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7명의 도적을 교화해 일곱 현인을 만들었다고 하여 칠현산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현재는 칠현산을 칠장산이라고도 한다.

 

 

 

 

문화재의 보고 칠장사

 

칠장사는 7세기 중엽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현종 5년에는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칠장사를 중창했고, 고려 우왕 9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의 역조실록을 이곳으로 옮겨와 보관하기도 했다. 그만큼 칠장사는 불교문화를 지켜내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 고찰이다.

 

칠장사에는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원통전을 비롯한 15동의 전통건축물과 석탑, 동종 등이 있으며, 국보 296호인 오불회 괘불, 보물 1256호 삼불회 괘불, 보물 488호 혜소국사비를 비롯, 보물 983호 봉업사 석불입상, 보물 1627호 인목왕후어필 7언시와 경기 지방문화재 114호인 칠장사 사천왕, 경기도 지방문화재 39호인 칠장사 철당간 등이 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칠장사

 

칠장사는 여느 절과는 다르다. 절 안에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사람들은 꼭 불자가 아니라고 해도 칠장사를 즐겨 찾는다. 칠장사 명부전 벽화는 색다르다. 벽화에 임꺽정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궁예가 활을 쏘는 모습도 있다. 이는 궁예가 칠장사에서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또한 의적 임꺽정과 7명의 도적이 가바치 스님인 병해대사의 설법에 마음을 바로잡고 의적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칠장사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이다. 암행어사 박문수는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타난 나한이 과거시험 구절을 가르쳐주어 장원급제 했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칠장사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볼거리와 들을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에, 수시로 사람들이 찾아들고는 한다. 접에서 키우고 있는 커다란 개는 사람들이 찾아와도 무신경하다. 딴 곳이 여기저기 출입을 통제시키는데 비해, 칠장사는 모든 곳을 개방하고 사람들이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도 이 절의 특징이다.

 

“선생님, 거기서 담배를 피우시며 안됩니다.”

 

이런 칠장사이다가 보니, 지나치는 사람들이 누각에 올라가 앉아 쉬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개방을 한 전각 마루에 걸터앉아 쉬는 것은 좋은데, 버젓이 담배를 피워 물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경내에서 담배는 금하고 있다. 더구나 칠장사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더 더욱 화재 등에 민감한 곳이다.

 

“선생님 거기서 담배 피우시면 안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대개는 ‘몰랐다’거나 ‘미안하다’고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양반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슬슬 부아가 치민다. 얼굴 사진이라도 찌거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저씨 거기 담뱃불 끄세요.”

 

 

 

 

말이 조금 험악해지니 그때서야 슬그머니 담배를 비벼 끄고 절 마당에 휙 집어 던진다. 이 정도면 참을 만큼 참았다는 생각이다. 버린 꽁초를 주어 다시 가져다주었다. 경내를 나가서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물론 오지랖 넓게 별 것을 다 신경 쓴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같이 문화재를 힘들여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용납이 되질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버렸지만, 답사 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가 않다. 이 소중한 문화재들이 자칫 화재라도 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동화사 사태 등으로 내내 심기가 불편한 사람인데 말이다. 도대체 언제나 제대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들이 들을 것인지. 맑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깊은 한숨만 쉰다.

수원 행궁 - 화서문 뒷골목에서 만난 이야기들

 

뒷골목을 걷다가 보면, 의외로 재미가 있다. 우중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뒷골목에는 의외로 이야기꺼리들이 숨어 있다. 요즈음 수원의 뒷골목을 ‘기웃거리는 재미’에 푹 빠진 것도, 그런 재미를 붙여서이다. 그리고 그 뒷골목에서 만나는 음식 한 가지 정도나, 살아가는 이야기가 하나 덤으로 붙어 온다면 그야말로 재수있는 날이란 생각이다.

 

어제 줄기차게 퍼붓던 비가 밤늦은 시간에 그쳤다. 오늘은 모처럼 아침부터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넘어 들어온다. 이런 날이면 좀이 쑤셔 붙어있을 수가 없다. 수첩과 카메라 한 대 달랑 들고 뒷골목을 찾아 나섰다. 화성 행궁 앞에서부터 화서문까지 가는 골목길은 고작 700m 정도이다. 그 안에는 어떤 모습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시장님 하늘에서 우리학교를 지켜주세요‘

 

행궁 앞을 벗어나 화서문 쪽으로 길을 시작하면 신풍초등학교 정문이 나온다. 그 앞으로는 요즈음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진 찍기에 바쁘다. 해바라기와 수세미, 호박 등이 달려있는 커다란 화단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잘 가꾼 텃밭이 있다. 신풍초등학교는 수원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이다. 그런데 그 담장에 현수막 하나가 눈길을 끈다.

 

‘우리 신풍초교 동문이신 고 심재덕 시장님, 116년 역사 이 학교 하늘에서 꼭 지켜주세요’

 

이런 문구가 조금은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116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신풍초등학교가 2013년까지 광교신도시로 옮겨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신풍초등학교는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오래된 학교다. 1896년 수원군 공림소학교로 개교하여, 일제 수난기와 6·25사변을 거치면서 도내에서는 최초로 초등교육의 뿌리를 내린 터다.

 

 

 

수원교육청 앞에는 심심찮게 신풍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이 학교자리는 원래 화성행궁이 서 있던 곳이다. 행궁 복원을 시작할 때부터 이전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학부모와 선생님들, 그리고 동문들까지 이전을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화성 행궁의 복원도 생각해보아야 할 국책사업이다. 서로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야 할 때인 듯하다.

 

이야기꺼리는 찾아보면 되는 것이지

 

짠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몇 발자국만 걸으면, 외형상으로는 지저분한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된다. 수원시에서 매입을 하여 부수려던 건물 하나를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준 곳이다. 레시던시 입주작가들은 나름 활발한 활동을 한다. 이 건물 벽에는 작은 그림 도판들이 빼꼭 들어차 있다. 그것을 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좌측으로 난 차도를 따라 걸으면 화령전 솟을 문이 나온다.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이다. 화령전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인 1801년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화령전 앞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다. 아마도 신풍초등학교 아이들인 듯하다. 크고 작은 아이들이 모여서 번호를 따라 외발로 뛰는 놀이가 재미있다. 그런 놀이를 잃어가고 있는 요즘 아이들이 왠지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걷다가 보니 전봇대를 타고 오르는 넝쿨이며, 대문 앞 화분에 심어놓은 고추들이 보인다. 그 또한 길을 걷는데 감초역할을 한다.

 

고추 화분이 놓인 집 대문간에는 이런 문구가 걸려있다. ‘주의 소독함‘, 얼마나 지나가면서 고추들을 따가기에 이런 푯말가지 붙여 놓았을까? 남의 고추를 말도 않고 따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겠다.

 

 

 

길 끝에서 만난 초가집, 선술집이 따로 없네.

 

길 끝에 화성이 보인다. 꺾인 길을 돌아서니 그 끝에 초가집 한 채가 보인다. 주인장의 말로는 한 30여년 정도 된 집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음식과 술을 판다. 그야말로 화서문과 어우러진 선술집처럼 느껴진다. 낮 시간이라 술을 한 잔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붙어있는 가격표가 재미있다.

 

뒷골목, 난 왜 침침한 뒷골목이 좋은지 모르겠다. 혼날 말이지만 뒷골목은 낙후된 곳일수록 정겹다. 그런 곳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인가 보다. 그 뒷골목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 역시 난 뿌리부터가 서민인 듯하다. 하기야 좋은 집에 좋은 차타고 거들먹거려보았자. 땅 속에 들어가면 한 줌 흙이 되기는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참 내가 생각해도 팔자소관이다. 어째 집구석에 가만히 붙어있질 못하는 것인지. 그저 가만히 앉아서 그동안 조사한 자료만으로도 얼마든지 글을 쓸 수가 있는데, 하루만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 좀이 쑤셔 견디지를 못한다. 비가 오고 나더니 아침저녁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다. 열어젖힌 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침부터 이리저리 궁리를 해댄다. 그동안 가고 싶었던 곳들을 정리해 놓은 수첩을 뒤적인다. ‘오늘은 이곳을 가볼까? 아니면 이곳이 더 좋을 듯도 한데, 여기는 한 번 다녀오면 너무 많은 경비가 깨질 것 같아 엄두가 나질 않네.’라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다. 사실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갈 곳을 따져보는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답사에 꼭 지참하는 수첩. 일년이면 몇 권씩 사용을 한다.

 

화상을 입어 등이 다 까져지면서 한 답사

 

올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그 찜통더위 속에서 몇 날을 답사를 다녔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이 등이 따끔거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여름철에 땀을 많이 흘려 땀띠라도 난 것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옷만 스쳐도 따끔거려 신경이 쓰인다. 아픈 것은 둘째 치고 움직이는 것도 쉽지가 않다.

 

등 뒤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니 상태가 어떤지를 모르겠다. 손을 뒤로 돌려 피부를 만져보니 허물이 벗겨진다. 도대체 등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동료에게 등을 좀 보아달라고 했더니, ‘허물이 벗겨지고 상처가 났네요.’란다. 여름 더위에 햇빛을 쏘이며 돌아다니다가 보니, 모자 그늘이 지지 않은 등이 허물이 다 벗겨졌는가 보다.

 

올 찜통더위에 답사를 하다가 화상을 입은 등. 이런 일은 처음이다. 

 

세상에 해수욕장이나 물에 한 번 들어가 보지도 못한 체 등에 허물이 벗겨지다니. 올 여름 날씨 한 번 나에게는 참 고된 날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찜통 속에서도 답사를 다니고, 기삿거리가 될 만하면 무조건 사진을 찍어댔다.

 

내 아이들을 위해서 난 길을 걷는다.

 

아침부터 부산을 떤다. 여기저기 전화도 걸어보고, 날씨 등을 알아본다. 곁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동료가 한 마디 한다.

 

“문화재답사 왜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돈도 안 되는데. 차라리 연예나 연애기사를 쓰시면 돈이라도 될 텐데”

“글쎄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네...”

“등 좀 보세요. 까져서 다 벗겨졌는데, 또 나가신다고요”

“선선하잖아”

“암튼 누가 말리겠어요. 병도 아주 지독한 병인가 봐요.”

“그런가보지 그래도 이 병은 고치고 싶지 않네.”

 

찜통더위에 찾아간 문화재는 발굴을 하기 위해 금줄을 쳐 놓았다. 이럴 땐 정말 맥이 풀린다.

 

그냥 웃어버리고 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동료들의 시선이다. 남들은 에어컨을 틀어놓고도 덥다고 난리를 피울 때, 나는 찜통더위 속에서 길을 걸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것은 오랜 나와의 약속이었다. 걸음을 걸을 수 있을 때까지는 답사를 계속하겠다는 약속.

 

물론 기사를 올려도 보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그리고 더 더욱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 달 내내 답사를 하고 기사를 죽도록 써 보지만, 여기저기 들어오는 돈을 다 합해보아야 단 하루치 답사비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해야 하는 것은 내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사죄를 하기 위해서이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시간 한 번을 보내지 못했다.

 

7월 25일, 40도를 육박하는 찜통더위에서 마애불에 치성을 드리는 여인. 저 분도 나와 같이 다급한 마음인지 이 더위에 쉴 새 없이 절을 하다니. 

 

그런 아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답사를 한 자료를 책으로 엮어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30권의 책을 채우겠다고 마음속에 다짐을 했다. 책도 책 나름이겠지만, 그동안 여기저기서 낸 책이 22권이나 된다. 남은 것은 몇 년 더 답사를 마치고 나면, 하나하나 정리를 할 생각이다. 그날 까지 힘들어도 견뎌내야만 한다. 오늘은 바람이 시원하다.

 

“아침저녁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네. 그럼 또 보따리 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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