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블로그 휴가입니다

휴가 신고를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휴가 중에 삼사순례(하루에 절 세곳을 돌아 오는 행사)를 마쳤습니다.

서산 간월도 간월암, 예산 수덕사, 서산 개심시 세 곳이죠

나름대로 운치가 있고, 역사가 녹아있는 곳들입니다.

내일부터 차근히 정리하겠숩니다.

오늘 일요일 밤은 그저 좋은 길 구경이나 한번 하시죠^^

그도 힐링이라는....(솔직히 힐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이 단어는 엄청 줏어 삼킨다는^^)

 

 

미쳐도 이렇게 미치면 남들은 아예 포기를 할 것만 같다. 14일(일) 오전 9시에 집을 나섰다.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인천방향으로 가다가 서해안 고속도로로 갈아탔다. 그리고 다시 당진 대전간 고소도로를 타고 가다가 예산을 거쳐 청양읍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 40분. 관광안내도를 하나 받아들고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청양군까지 가기 전부터 난관에 봉착을 했다. 장마전선이 북으로 올라갔다는 말만 믿고 나선 답사 길이다. 하지만 평택에 들어서 서해안대교에 진입하자, 10m 앞도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비가 퍼붓는다. 그냥 들이붓는다는 말이 적당할 정도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가는 날이 장날 맞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청양군청에서 멀지 않은 청양군 청양읍 읍내리 15-37에 소재한 석조여래삼존불상. 보물인 이 삼존불상을 보기 위해 좁을 길을 몇 번이나 돌아서 찾아갔지만, 보호각 공사 중이라고 삼존불을 아예 막아놓았다. 어떻게 비집고 들여다 볼 틈도 보이지가 않는다. ‘가는 날이 장날’, 정말 딱 맞는 말이다.

 

그리고 청양군 일대를 샅샅이 비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힘들게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일반적으로 어느 지자체나 문화재 안내판이 큰길가나, 아니면 가로 안내판 등에 적혀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청양군 내의 거의 모든 문화재들은 길가에 안내판이 하나도 없다. 유일하게 도로표지판에 나타나는 것은 장곡사 등 몇 곳에 지나지 않는다.

 

 

비는 하루 종일 퍼붓고, 안내판은 찾아 볼 수 없고. 이런 답사라면 차라리 발길을 졸려버리고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왕 나선 길이 아니던가? 그리고 얼마 만에 이렇게 1박 2일로 나선 답사인가? 도저히 뒤돌릴 수가 없어 빗길에 답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난 미친 문화재 답사가라네.

 

정말 그랬다. 어쩌다가 문화재를 찾다가 근처 주민들에게 문화재가 어디 있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웬 정신 나간 미친 인간이 이 장대비 속에서 문화재를 찾아왔느냐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칠 수가 있단 말인가? 조금은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고 해도, 하루 종일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답사를 계속하는 수밖에.

 

 

그렇게 몇 곳을 돌다가 보니 벌써 시간이 오후 2시가 다 되었다. 늦은 점심 한 그릇을 먹고 다시 답사를 시작했다. 향교, 고택, 석탑, 사찰, 그리고 연암 최익현 선생을 모신 ‘모덕사’까지. 거기다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어가 있는 길과, 옛 칠갑산 고갯길에 있는 ‘콩밭 매는 아낙네 상’까지 찾아보았다.

 

저녁 6시까지 그렇게 돌아본 청양군의 문화재 답사는, 악천후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지나는 사람마다 이상한 눈으로 본다. 도대체 제 정신이라면 이런 장대비 속에서 어찌 문화재 답사를 할 것인가? 장곡사를 들려 나오는 곳에 장승공원을 들렸다. 갖가지 표정의 장승들이 웃고 쳐다본다.

 

 

빗길에서 얻어 낸 짐 보따리, 이젠 풀어야지

 

1박 2일 동안 참 많이도 돌아쳤다. 자료만 해도 17곳을 뒤졌으니 정리를 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하다. 하지만 이 많은 자료들을 하나하나 정리를 하고, 그것을 글로 옮긴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를 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하다.

 

문화재답사. 그리고 그 답사를 빗길에서 1박 2일을 보내고 돌아오면서, 괜히 속으로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고 만다. 언젠가 잘 아는 지인에게서 들은 소리가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미친 문화재답사가 한 사람이 참 여럿 즐겁게 만드네.”

 

날이 잔뜩 흐렸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와, 금방이라도 한 줄기 비를 쏟아부을 듯한 기세이다. 이런 날 문화재 답사를 한다는 것은, 평소보다 두 배는 어렵다. 그것도 포장이 되어있는 도로로 다니는 것이 아니다. 질퍽한 맨 땅을 밝고 다녀야 하니, 그 고통은 답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선뜻 이해하기가 힘들다.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5-2에 소재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경주구황동당간지주 (慶州九黃洞幢竿支柱)’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게 되는데, 이 깃발을 꽂는 높이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받침돌을 거북이인 당간지주, 이런 받침돌 처음이야

 

당간이야 절마다 볼 수가 있다. 대개는 절 입구에 세워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이곳에 당을 걸어둔다. 그런 당간은 특별한 형태를 보이지 않는다. 거의 보편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 조형하는 방법은 약간씩 차이가 난다. 구황동 벌판에 외롭게 서 있는 당간지주 한 기.

 

분황사의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별다른 조각을 두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 당간지주는 다른 면이 있다. 훼손이 되어 처음에는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기둥사이에 놓인 당간의 받침돌을 들여다보니 특이하게도 거북모양이다. 동편을 바라보고 있는 당간지주 사이의 간대가 돌거북이라니 놀랍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당간지주를 보았지만, 이렇게 받침돌이 거북의 형상을 한 것은 처음 만났다.

 

하긴 아직 우리나라에 있는 문화재의 10% 정도나 보았을까? 20년이 넘는 세월을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였지만, 이제 겨우 눈을 떠가고 있는 정도이다. 그리고 그 많은 문화재들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보았을 뿐이다. 마음이 바빠진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많은 문화재들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분황사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

 

분황사 바로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당간지주. 기둥의 안쪽 면에는 아래와 중간, 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이 구멍은 당간지주를 관통해 당간을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밋밋한 형태로 조성을 한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서 있었을 당간지주 한 기. 분황사당간지주는 아마도 숱한 신라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만나게 되는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이 발길을 붙들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문화재들이 안고 있을 이야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화를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한 맺힌 역사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으련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걸음을 재촉해 당간지주를 떠난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뒤를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것은, 그 오랜 세월 저렇게 비바람에 씻기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기 있다는 굳건함 때문이다. 오늘 따라 조금만 더워도 답사를 미루고 있는 나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는 사적 제217호인 '당성(唐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당성이 소재하고 있는 남양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라 불린 중국과의 교통 요지였다.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424(), 채인석 화성시장과의 인터뷰를 마친 후, 당성으로 올랐다. 당성은 옛 명칭으로 당항성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름 그대로 당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곳이다. 4월인데도 날이 덥다. 성벽 위로 걷는데, 숨이 가쁘다. 그도 그럴 것이 오후에 나선 답사 길을 재촉하느라, 무리를 했기 때문이다.

 

 

삼국이 번갈아 차지했던 교통의 요지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당성은 동문과 남문, 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성은 현재 복원 중이다. 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세 곳 정도로 나누어서 복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당성은 화성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3개면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이용하여 석루를 돌려 축성을 하였다. 전장이 1.148m 정도가 되는 이 당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불렀다.

 

후일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했다.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당성은 그 쌓은 시기를 달리하는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이 당성의 성벽은 테뫼식으로 쌓은 토축 산성이었다, 그 길이는 336m이다.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복원을 마친 곳 외에 드문드문 옛 성의 흔적들이 잡풀과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망해루터와 건물지, 우물터 등이 남아있어

 

얼마를 돌아보니 지대가 높은 곳에 돌이 쌓여있고, 뒤편으로는 넓은 터가 보인다. 아마도 건물이 들어있던 곳 같다. 앞에는 '망해루 터'라는 석비가 있다. 이곳에 망해루라는 누각이 서 있었다는 것이다. 망해루는 목은 이색이 지은 남양부 망해루기에 보면, 고려말 남양부사 정을경이 고을의 치소에 외관을 웅장하게 하고 찾아오는 손님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직은 복원이 되지 않은 곳에 문지인 듯한 곳이 보인다. 성을 한 바퀴 돌아 밑으로 내려오니, 우물터가 보인다. 이 우물터는 당성 안에 식수를 공급한 곳으로 추정한다. 지름이 50cm 정도에 깊이는 1m 정도로 비교적 작은 우물이다. 우물은 원형으로 땅을 판 후, 주변에 돌을 쌓아 올렸다.

 

 

당항성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

 

원효(617-686)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인 617년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이었다.

 

원효대사의 행적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당으로의 유학을 시도했던 원효대사가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대사는 45세에 두 번째로 의상대사와 함께 이번에는 해로로 해서 당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항성 아래에 도착을 하였다. 당항성 아래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원효대사는 거기서 깨들음을 얻는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며 다시 서라벌로 발길을 돌렸다. 원효대사의 이 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채인석 화성시장 대담

 

- 과거 당성의 무역항으로서의 역할과 역사적 가치는 무엇인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위치한 당성1971년 사적 제217호로 지정된 삼국시대 당항성으로 추정되는 산성으로 삼국시대 신라가 중국과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라의 특산물을 수출하던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헌 자료의 부족 등으로 그 동안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간 2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석축 성벽, 토석혼축 성벽과 망해루지 및 다각형건물지 등의 내부 건물지가 확인됐습니다. 특히, 산성 내부의 시설들은 군사적행정적 건물들뿐만 아니라 원형(다각형)의 건물지를 통해 당시 당성이 의례적 기능을 하고 있었던 국가적으로 핵심적인 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성이 원료 대사의 대오각성의 현장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661, 원효와 의상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중 토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고 그 날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진리를 깨닫고 발걸음을 돌렸다는 이야기, 즉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의 큰 깨달음을 얻은 현장이 당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입니다. 이렇듯, 당성은 문화재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우리 53만 화성시민은 물론이고 전 국민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중요한 정신 문화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 화성시의 당성 복원을 위해 그간의 노력과 향후 계획은?

우리 화성시는 그간 2차례(1998, 2000)의 발굴조사를 실시했으며, 639m의 성곽을 복원했으며, 또한, 당성을 종합적으로 정비하고자 지난해 10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 127일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화성시 주최,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당성의 황해연안교류에서의 역할(당성의 역사지리적 가치)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이 세미나를 통해 당성의 황해 교통로, 실크로드의 관문으로서의 당성의 역사적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이을 통해 우리시는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당성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동안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당성과 남양지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만들어졌으며, 앞으로 당성 정비에 있어 초석으로 작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시는 당성 종합정비계획을 통해 당성의 성벽과 내부시설물 정비는 물론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추진할 계획입니다.

 

- 당성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당성복원과 관련한 세부사업으로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해 주차장, 진입도로 등 부대시설 조성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당성 주변 토지 매입 시작하고, 2014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시작해 2017년까지 연차적으로 착수하려 합니다. 또한, 2014년부터 성곽, 건물지 복원과 외곽지역 종합정비를 위해 성내 시설물 보수 공사와 당성의 성벽과 내부 시설물, 성벽(석축), 망해루지 등의 복원을 연차적으로 착수할 계획입니다.

 

또한, 안내시설, 편의시설, 안전 및 방제시설을 설치하고 탐방로 정비, 홍보관 건립, 전시공간 등을 확보하고, 스토리텔링을 이용한 교육 및 관광 활용 방안도 마련해 당성의 역사 문화적 인식을 확대하고 타 지역의 문화재와 차별화된 전략을 통해 당성의 고유한 특성을 발현시킬 계획입니다. 특히, 당성 정비가 일정한 성과를 나타내는 2024년 이후에는 역사길 조성, 교육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역사와 생태환경 교육 등 생동감 있는 현장을 전달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를 개발할 계획입니다.

 

- 역사적인 관점에서 과거 당성의 역할을 현재의 화성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중국을 비롯한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라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통로의 역할을 했던 곳이 당성입니다. 오늘날로 보면 부산항이나, 인천항의 역할과도 같은 곳으로 무역은 물론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우리 화성시는 대한민국 최고의 역동적인 도시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시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세계로 거침없이 나가려는 도전과 개척정신의 상징이었던 당성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화성시와 화성시민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성이 상징하는 도전과 개척정신은 미래를 향해 큰 꿈을 갖고 달려 나가는 우리 시민들에게, 용기를 주는 어디에도 없는 정신문화재가 될 것입니다.

 

- 긴 시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난 해 11, 8도의 파워 소셜러들이 수원에 모였다. ‘12로 수원을 체험하고, 그것을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려 수원을 홍보하고자 하는 취지에서였다. 한 마디로 결과는 상당히 좋았다. 역시 파워 블로거들이라는 것이 실감나게 만들었다. 결국은 그런 연유로 인해 KBS-2TV 리얼 버라이어티 ‘12이 수원을 오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8도의 파워 소셜러들이 또 다시 수원으로 모인다. 이번에는 인원이 지난번과 많이 교체되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거는 기대 또한 크다. 또 다른 ‘12의 코스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물론 그 중에 화성과 무예 24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수원을 상징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노력한 만큼 대가는 돌아오기 마련

 

31(), 모처럼 맞는 쉬는 날이지만 수원시 정책홍보담당관실 SNS팀 박사승 팀장과 조남진 주무관, 그리고 본 기자가 10시에 수원시청을 나섰다. 8도 파워 소셜러들이 12로 관람을 할 동선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번 KBS-2TV 리얼 버라이어티 ‘12의 수원편을 유치하는 데는 박사승 SNS팀장의 활약이 대단했다.

 

당시 e홍보팀장인 박사승 팀장은 5일간이나 12일의 작가들과 '새피디(본명 최재형PD)' 등과 함께 수원의 여기저기를 수도 없이 돌아다니면서,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촬영 중에도 눈길에 팔달산으로 차가 올라가지 못하자, 이리저리 뛰면서 안전한 길로 인도를 하는 등 엄청난 고생을 하기도. 물론 숙소인 사랑채의 수원문화재단 식구들도 함께 고생을 했지만.

 

그러고 보면 무엇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참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합해야 한다는 것이 이해가 간다. 수원을 홍보하기 위해 정책홍보담당관실의 모두가 마음을 더했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또 다른 ‘12동선을 다녀보니

 

첫날의 일정은 화성에서 이루어진다. 316() 오후 1시에 수원시청에 집결한 8도 파워 소셜러들은, 버스로 팔달산 남측에 있는 수원중앙도서관으로 이동. 그곳에서 산길을 오르면서 경기도 문화재 자료인 고인돌군과 화성 축성 당시 성돌을 떼어 낸 흔적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용도 남쪽 끝에 있는 화양루(서남각루) 밖에서 성 밖을 따라 서장대 쪽으로 걷다가, 관광안내소 앞에서 화성의 안으로 들어간다. 다시 서남암문을 들어서 용도를 따라 화양루까지 갔다가 돌아 나와, 팔달문 방향으로 내려가게 된다.(지난 해 파워 소셜러 화성 답사 때와는 반대편을 걸었다) 중간 화성열차가 다니는 성신사까지 걸어 참례를 한 후, 행궁 앞에서 펼쳐지는 무예 24기를 관람한다.

 

무예 24기 시연을 보고 난 후, 일행은 행궁으로 들어간다. 이곳에서는 행궁의 9곳에 마련되어 있는 관람 스탬프를 찍어, 담당자에게 먼저 갖고 오는 2명에게 수원문화재단 라수홍 대표이사가 직접 기념품을 전달하게 된다. 이 또한 지난번과는 달리 관람과 재미를 두 배로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했다.

 

 

재래시장과 야경도 일품

 

행궁 미션을 마친 일행은 지동교를 거쳐 재래시장으로 이동을 한다. 이곳에서는 한 시간 정도를 각자가 재래시장의 이모저모를 촬영을 한다. 이번 8도 파워 소셜러들은 여행 전문 블로거들이 대거 참여하여, 질 높은 사진으로 수원을 홍보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지동 제일교회 노을빛 전망대에 올라 수원 야경을 다시 한 번 관람한다.

 

일몰과 야경을 관람하고 나면 수원왕갈비로 저녁을 먹게 된다. 그리고 화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의 야경을 구경한 후 서장대에 올라, 수원의 또 다른 야경을 보는 것으로 첫 날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둘째 날은 만석거와 노송지대, 해우재로 이동

 

둘째 날인 17()에는 아침을 먹은 후 만석거로 이동을 한다. 만석거에서는 영화정과 수문을 답사 한 후, 수원미술관에서 차에 승차 노송지대를 거쳐 해우재를 관람한다. 해우재에서는 또 다른 재미를 줄 것으로 기대가 된다. 이래저래 수원은 어딜 가나 볼거리 천지이다. 이렇게 8도의 파워 소셜러들이 수원을 한 번 다녀갈 때마다 수원을 홍보하게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수원을 찾아오게 된다.

 

그저 아침에 내려왔다가 저녁에 돌아가는 수원이 아니라, 오밀조밀 여러 곳을 찾아다니면서 잔잔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수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12시에 지동시장 순대타운에서 점심을 먹은 후 모든 일정을 마치게 되는 ‘8도 파워 소셜러 수원 팸투어’, 이번에도 기대가 큰 것은 지난 번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꽃샘추위가 몰려와 바람도 불고 기온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318도 파워소셜로 들이 돌아 볼 동선을 따라 걸으면서 생각을 한다. 지금 시대는 수많은 사람들과 공유를 할 수 있는 SNS, 일시에 많은 시청을 할 수 있는 방송이라는 매체가 대세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역할을 함께 하는 파워 소셜러들의 공존이 정말 필요할 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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