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 답사란 반갑지가 않다. 우선은 장비가 빗물에 젖을까봐 신경이 쓰이기도 하지만. 바짓가랑이를 척척하게 감겨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루를 그냥 포기하고 일요일 일찍 길을 나섰지만, 지난 토요일 내린 비로 인해 걸음을 온전히 걸을 수가 없다. 무작정 걸어야 하는 문화재 답사란 늘 곤욕을 치르게 마련이다.

왜 문화재는 꼭 그렇게 산이나 골짜기에 있나? 누군가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하지만 숨은 듯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은, 스스로 내세우지 않기 위함이다. 석불이건 마애불이건 아니면 석탑이 되었든지, 장인 스스로가 남에게 자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그렇게 숨을 죽이고, 하나의 대단한 작품을 완성을 하는 그런 겸손함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요즈음처럼 내놓고 자랑 같지 않은 자랑을 하지 않아서 좋다. 그것이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려니 한다.


부처님, 몸은 어디에 두시고

원주에서 횡성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으로 소초면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있다. 소초면 소재지를 지나 횡성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소초면 교항리가 나온다. 이곳에는 길가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그 밑에 보면 자연 암석 위에 불두(佛頭)가 한기 모셔져 있다. 바위 위에 올려 진 석조 불두.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4호이다.

바위에는 이끼가 가득 끼어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높이 1.05m 정도나 되는 커다란 불두가 올려져 있다. 이 석조 불두는 원래 이곳의 자연 암석위에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바위에는 선각으로 옷 주름등이 그려져 있었다고 하지만, 그 돌이 매몰되어 알 수가 없다. 왜 이렇게 자연 암석 위에 불두만 조각을 하여 올려놓은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천안시 삼태리마애불 등과 같이, 자연 바위 위로 머리 부분만 솟아나게 제작한 불상과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불상은 고려 시대의 형태로, 이 지역에서 보이는 거대석불과 같은 종류로 볼 수 있다.

이끼가 낀 자연 암석, 그리고 고목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 그 그늘아래 놓인 석조불두. 그저 예사롭지가 않다. 사각형의 넓적한 얼굴에 눈은 수평으로 굳게 그려져 있다. 코는 폭이 넓고 두터워 전체적인 얼굴의 형태에서 과하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입은 두툼하게 표현을 해 과묵한 형상이다. 머리 위는 평평하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서, 그 위에는 평평한 사각형의 판석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고려시대 석조불의 형태를 지녀

옆으로 돌아 귀를 보니, 두텁게 표현을 해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뒷면은 조각을 하지 않고 쪼아낸 그대로 놓아두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토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석조불두는, 고려 시대 이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거대석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머리 위에 평평한 돌을 얹어두는 형태도 고려시대 석불의 특징이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석조불두만 자연암석 위에 올려 진 교항리 석조불두. 그러나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느티나무 곁으로 돌아가 불두를 본다. 그 모습이 아주 오래 전 어느 날 꿈속에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이다. “몸조차 무거워 버리셨습니까? 우리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석조불두의 귀에 대고 떠들어보지만, 굳게 다문 입이 열릴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세상사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어느 장인이, 천 년 전 이미 이 시대를 보고 있었나보다.

요즈음 들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이는 고택만이 아니고, 각종 문화재나 먹거리, 심지어는 우리의 정서가 그대로 남아있는 길과 동, 식물 등 다양한 방면에서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이렇게 무궁한 소재를 갖고 있는 것 중에서, 아무래도 문화재라는 것은 약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해 있는 고택. 그것이 사적이던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던 간에, 그저 찾아가 보는 것보다는 이모저모를 따져보는 것이 한결 재미있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이냐를 먼저 생각하고 그 집의 특징을 살펴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집이 눈앞에 그려지기도 한다.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소재한 경남유형문화재 제407호 오담 고택을 돌아보면서, 우리 고택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살펴본다.



함양 오담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깉은 형태로 구성이 되어있다. 건축물을 볼 때 그 형태를 보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그리고 주변의 대지(아래)를 살펴보면 과거 그 집의 가세를 판단 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종가에서 분가한 양반저택인 오담 고택

오담 정환필(1798~1859) 선생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12대손이다. 선생은 종가에서 분가해 와 정여창 선생의 고택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종두리에 기록된 상량문을 보면 사랑채는 1838년에, 안채는 1840년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었으며, 자연석을 3~4단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오담 고택은 종가에서 분리해 온 영남 양반집의 전형적인 주택으로, 조선 후기 주거건축의 양식과 가구기법을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오담 고택은 최근 복원과 보수를 한 듯한데, 이런 면을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 고택이 좀 더 자세히 보인다.

1) 먼저 집의 전체적인 구조를 알아보자




집의 전체적은 구조란 와가인지 초가인지를 본다. 이런 형태야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와가에도 팔작지붕, 맞배지붕, 합각지붕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위 오담 고택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을 벽에 달아낸 형태로 자칫 팔작지붕으로 볼 수도 있다. 초가의 경우에도 그 이엉을 얶어 용마름을 앉는 방법이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어,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는 그 집의 툇마루나 대청, 방의 꾸밈과 기단, 기둥 등을 자세히 살펴본다. 기단은 장대석을 사용했는지, 아니면 일반 부정형의 돌을 사용했는지를 본다. 기둥은 배흘림기둥인지, 팔각이나 사각,혹은 원형기둥인지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집의 구성고 알아보아야 한다. 대개 고택에는 수 많은 집이 있다. 사랑채를 비롯해 안채, 행랑채, 대문채, 아래채, 광채, 별당채 등 그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2) 집의 뒤편도 꼼꼼히 살펴야 한다.




고택에는 많은 문들이 있다. 대문을 비롯해 중문, 협문, 쪽문 등 큰 집의 경우에는 집 안에 문에 10여 개가 되는 수도 있다. 하기에 그 문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느 용도로 사용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중문의 경우에는 바깥 중문과 안 중문이 있고, 때로는 담에 쪽문을 내어 사용하기도 한다. 하기에 그 문의 특징을 살펴보고 그 쓰임새를 알아보아야 한다.


오담 고택에는 문이 그리 많지는 않다. 최근에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이는 사랑에서 안채로 통하는 협문은 나무로 꾸몄다. 대문의 경우에는 소슬대문 옆에 쪽문을 달아낸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문은 대개 대문을 열지 않고, 집안의 식솔들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우리 고택은 문 하나라도 그냥 내는 것이 아니다. 문을 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거기에 따른 내적 사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집 뒤편을 돌아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대개는 정면을 많이 보는데, 집 뒤편에는 굴뚝을 비롯해 벽의 형태, 배수로 등 볼 것이 많다. 또한 굴뚝은 어떤 형태로 만들어 졌는지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3) 볼품 없는 작은 것 하나도 글이 된다.





고택을 둘러보면 가재도구가 있다. 실생활에 사용했을 이런 것들은 고택을 둘러보면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툇돌은 어떻게 놓았는지, 마르 밑의 공간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도 보아야 한다. 부엌은 창문을 어떻게 내었으며, 환기를 돕는 까치구멍은 어떤 형태인지도 살펴보자. 그리고 시렁은 어디에 놓았는지, 시렁 위에는 무엇을 올려 놓았는지도 빠트리지 말아야 한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 널려있는 많은 가구들과 문짝의 형태, 또는 난간은 어떻게 꾸며졌는지도 보아야 하다. 그런 것을 하나하나 찾아보다가 보면, 집집마다 나름대로 특징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4) 제대로 꾸민 집인지를 알아보자



오담 고택을 돌아보면서도 그렇지만 복원을 하면서 정확하게 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 복원이란 말 그대로 예전에 형태를 원형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복원이 되었다는 집을 찾아가 보면, 황당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오담 고택의 경우에 사랑채와 안채 중간 한편에 장독대를 마련하였다. 시멘트로 바른 것은 그렇다치고 장독대에 담장을 둘러 놓았다. 보기가 좋은 수도 있지만, 문화재란 항상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담장을 둘러 놓은 것도 보기가 껄끄러운데, 사랑채 뒷방을 보면 앞쪽 방보다 방바닥이 낮게 되어있다. 그리고 방의 층 간격이 넓어 오르내리기도 버겁게 보인다. 원래 이런 형태였는가를 알아보니, 복원을 하면서 형태가 달라졌다고 한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원형이 변형이 되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돌아보면서, 그 소중함을 먼저 깨우치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이런 문화재 답사는 단지 사진을 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를 알아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쉽지 만은 않은 문화재 답사. 앞으로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답사를 하시는 분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벌써 현장을 돌아다닌지가 햇수로 30년은 되었나보다. 그 동안 전국을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남들은 이런 나를 두고 '미쳤다'고도 이야기를 한다. 누구말마따나 처음부터 시작을 한 것이 참 묘하게도 굿판이었다. 무용음악을 작곡의뢰를 받아 작곡을 하다가, 우리 민초들의 정서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찾은 것이 바로 굿판이었다. 왜 굿판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벌떼처럼 달려들고는 했을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찾아보고 싶어서였다.

그런 세월이 벌써 30년이나 지났다. 물론 처음에는 사진을 찍고 자료를 모으는 것이 지금처럼 블로그를 하고, 기사를 송고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각 지자체 등에서 의뢰를 받은 책을 쓰기 위해서였다. 한 곳에 들어가면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를 답사를 하고, 그것을 책으로 엮기위해 수많은 시간을 현장답사를 다녀야만 했으니 말이다.

어제 박살이 나버린 렌즈. 배터리는 물속에 빠져버렸다.

답사 최악의 날이 되다.

때로는  산속에서 길을 잃어 밤을 새우는 날도 있었고, 빗길에 몸이 모두 젖어 물에 빠진 새앙쥐꼴이 된 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눈길을 걷다가 숨이 차고 손발이 얼어들어,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그 수많은 날들을 현장에서 가장 소중하게 챙기고 다니는 것은 역시 장비였다. 동영상을 많이 촬영하던 나로서는 그동안 동영상에 필요한 장비만 해도 수십번은 갈아 치웠을 것이다.

요즘에는 문화재를 많이 촬영하다 보니 카메라를 주로 사용을 한다. 산으로 들로 돌아치기 때문에 늘 장비를 신경을 써서 다루어도, 가끔은 고장을 내고는 한다. 오늘 오후 카메라를 챙겨들고 느즈막하게 모악산을 올랐다. 비가 오고나면 모악산 계곡에는 많은 폭포들이 생겨난다. 그 아름다운 정경을 카메라에 담아 블로그에 올리리라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모악산 게곡을 따라 조금 오르다가 보면 '선녀폭포'가 나온다. 좀 더 아름다운 모습을 찍기 위해 가까이 들어갔다. 사진을 찍고 돌아서 나오려는데, 앗뿔싸 그만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바위 위에 이끼들이 물이 찼다가 빠지면 기름칠을 한 것보다 더 미끄럽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두 다리는 허공으로 나르고 몸은 바위 위로 나가 떨어졌다. 

렌즈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재생불능이라고. 휴대폰으로 찍었다.

아픈 것은 둘째치고 카메라가 손에서 미끌어지면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놀라서 먼저 카메라를 들여다보았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렌즈는 박살이 나고 배터리는 저만큼 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배터리를 찾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또 미끌어졌다. 이번에는 된통 바위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등산로에 사람들이 다니지만 창피한 것보다, 먼저 카메라가 박살이 난 것이 마음이 아파 어쩔줄을 모르겠다.

답사 30년만에 넘어지고 미끌어지기를 셀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렇게 박살이 날 정도로 넘어져 본적은 없었다. 남들은 답사를 다니는 나를보고 부럽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장답사는 늘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거기다가 많은 문화재는 높은 곳에 자리를 한다. 때로는 몇 시간을 산을 올라야만 할 때도 있다. 그것이 바로 문화재의 현장답사다.

오늘 최악의 답사를 하면서 그래도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어디 부러진 곳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장 내일부터는 어떻게 하나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올것만 같다. 부서진 렌즈를 앞에놓고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다. 몇 시간 째. 참 그동안 많이도 나를 도와주었는데.           

2년 전인가 4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락거리던 다음 블로그와 티스토리를 떠났다. 그리고 1년 6개월 만에 다시 돌아왔다. 많은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문화재를 알리려면, 다음 뷰에 글을 송고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다.

티스토리 초대장을 받은 것이 올 4월인가 보다. 티스토리는 개설을 해놓고도 글도 쓰지 않고 송고도 하지 않았다. 그 때 당시 책을 쓰는데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정확히 이야기를 하자면, 술 마시기에 급급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한 달이면 10여 차례나 현장답사를 하면서, 쌓여만 가는 문화재답사 자료들을 보면서 한숨만 내쉴 수는 없는 일. 친분이 있는 블로거 한 분의 종용이 가장 컸을 것이다. 다시 돌아오라는.

한달 동안 60편의 글을 썼다. 매일 두편씩 쓴 것이다. 그리고 1,200개가 넘는 댓글을 달았다.
 
한 달간 송고한 포스팅이 60편

2010년 8월 2일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쌓인 글이 60편. 하루에 두 편 씩을 송고를 한 셈이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글을 쓰느냐고 한다. 현장 답사를 다니면서 쓰는 글은 앉아서 감상문을 쓰는 것과는 다르다. 시간과 경비가 만만치 않게 깨진다. 하지만 문화재를 내 눈으로 보지 않고 어떻게 느낌을 쓸 수 있을까? 그래서 힘이 들어도 현장을 나가 돌아다녀야 한다.

낮에는 근무를 해야 하는 나로서는 시간이 밤 밖에 나질 않는다. 점심시간을 잠시 이용해 전날 써 놓았던, 두 번째의 글을 올려놓고 부리나케 나가야 한다. 아니면 미리 예약송고를 해놓던지. 보통 두 편의 사진을 고르고 글을 쓰려면 두 시간 정도가 필요하다. 그래놓고 이웃 블로거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인사를 하다가 보면 시간은 두 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다. 그렇게 보낸 한 달이다.

어느새 이렇게 순위가 매개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별 의미가 없다.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는 노력을 따라 온다.

먼저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식 잘난 체는..’이란 생각이 드시는 분들은 바로 글을 그만 읽으셔야만 한다. 계속 그런 쪽으로 흘러 갈 수도 있으니. 처음 글을 송고하고 난 뒤 우연히 여기저기 다니다가 보니 순위라는 것이 있다. 굳이 순위를 매겨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전체 9287위>란다. 두 편의 글을 송고하고 난 뒤니, 적어도 그 앞에 글을 쓰시는 분들이 그만큼은 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싶다.

순위 매김에 마음을 쓰는 인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한 번씩 드려다는 본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400 등으로 올라 있다. 아마 현장을 다니면서 쓴 글이고 전통문화를 쓰는 분들이 많지 않아서, 다음 측에서 나름대로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꼬박 한 달을 블로그에 매달려 살았다.

순수문화의 글을 쓰는 분들이 많지가 않아 오히려 득이 되었다.

난 한 달 동안 이렇게 치열한 싸움을 했다.

처음 글을 송고하면서 15편의 글을 쓸 때 까지만 해도 베스트에 걸리지가 않는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난 15번 째 글이 열린 편집 베스트에 걸리더니, 그 뒤로 하루에 두 편의 글이 모두 베스트에 걸리기도 했다. 순수문화를 쓰는 블로거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글을 자주 쓰는 나로서는 그것이 득이 되었던 것만 같다. 하지만 추천이나 구독은 아주 미미한 정도이다. 하루에 고작 100 ~ 200명이 들려가는 곳일 뿐이다. 추천은 많아봐야 40 ~ 60 정도이니, 내가 찾아간 분들의 절반 정도뿐이다. 그래도 끊임없이 찾아가는 노력을 한다.  

그 한 달 동안 나는 나름 무수한 블로그를 방문을 했다. 그들이 오건, 오지 않건 그것은 그들의 몫이다. 물론 티스토리를 떠날 때 황금펜을 갖고 있었으니, 그도 다시 돌아와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찾아보지 않아도 그들이 찾아올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일 뿐이다. 지금도 난 아침이면 거의 100명에 가까운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추천을 하고 댓글을 단다. 그러면 내 글에도 추천이 100개는 기본적으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렇게 다녀도 고작 30% 정도만이 답방을 오는 정도이다.

티스토리와의 기나 긴 싸움이다. 아니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이용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전쟁이라고 해야 옳다. 난 요즈음 세대들이 이야기하는 컴퓨터의 기능조차 모른다. 그저 사진을 작업하고 그것을 글을 써 올리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자신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답답할 때가 많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물어물어 하면 된다. 우리 문화재를 한 사람이라도 더 볼 수가 있다면, 난 그것으로 다시 시작한 티스토리의 덕이라는 생각이다.

현장을 찾아다니는 답사글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도전해볼 만 하다. 다음측의 배려도 고맙다.

이렇게까지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에 재미를 붙였던 것도, 알고보면 매일 거르지 않고 들려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알음부터 지금 새롭게 알아가는 모든 분들의 힘이 되는 그런 글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 이 자리의 공은 모든 그분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분들이야 말로 문화재에 대한 글은 쓰지 않아도 나와 함께 우리 문화를 답사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진정한 전도사라고 나는 생각을 한다.  

답사를 많이 다니는 나로서는 장거리 여행이 기본이다. 버스를 많이 탈 때는 5~6시간 정도가 기본이기 때문에, 차로 이동을 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터미널에 있는 공중화장실이다. 일단 속을 비워야 장거리 여행을 해도 안심을 하게 되니까.

버스는 대개 출발을 하고나서 2시간 정도가 지나야 휴게소에 들린다. 하기에 2시간 정도 참을 만큼은 속을 비우는 것이 편하다. 8월 29일 일요일, 대전에 가서 일을 좀 보고 천안으로 향했다. 버스를 이용해 답사를 하다가 보면 시간이 곧 돈이다. 버스를 자주 갈아타다가 보면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답사를 하느라 29일 오전 9시 반에 길을 나서 대전을 거쳐, 천안지역을 답사한 후 돌아왔다.

공중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사람

어제따라 천안지방은 국지성 호우가 줄기차게 쏟아졌다. 그래도 나선 길이 아니던가. 몇 곳의 답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천안시외버스 터미널로 들어섰다. 표를 사놓고 보니 시간이 20분 정도 여유가 생긴다. 늘 하던 버릇대로 공중화장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 순간 한 젊은이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나온다.

마침 그 칸만 비어있는지라, 방금 나간 칸이지만 들어섰다. 그런데 웬 봉지가 하나있다. 안을 보니 신발이 들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 밑으로는 옷도 있다. 한 마디로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입었던 것은 버리고 가 버린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유를 알 수는 없다. 멀쩡한 신발과 옷이다. 그런데 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입었던 것을 버리고 간 것일까?

옷 보따리를 들고 따라 나가 보았지만,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버려진 옷가지가 아깝기도 하거니와,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야 검정고무신을 신고 학교를 다닐 때 사람이다. 흰 운동화 한 켤레를 사면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도착지의 공중화장실에서도 신발이 든 봉투가 있었다.

하기야 그때와 지금은 세상이 다르다. 하지만 멀쩡한 옷가지를 공중화장실에서 갈아입고, 입었던 것을 버리고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 옷을 들고나가 분리수거함에라도 넣으려고 하니, 한 분이 그냥 버리란다.

“아깝지 않으세요?”
“하루에도 그런 옷가지 수도 없이 나와요”
“옷가지가 왜 나와요?”
“낸들 알겠소. 갈아입고 그냥 버리고 가요. 돈이 남아돌아가는지”

할 말이 없다. 그냥 놓아두고 나오면서도 영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힘들여 번 돈일 텐데. 그리고 이렇게 멀쩡한 것인데. 목적지에 도착을 해 일부러 공중화장실을 한번 열어보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엇이람? 봉지가 있어 열어보니 그곳에도 운동화가 하나 들어있다. 이것 역시 멀쩡하다. 세상이 어찌 이렇게 변했을까? 공중화장실이 이렇게 변장을 하는 곳으로 변하다니. 이곳에서 변신을 하고 이성친구라도 만나러 가는 것일까? 그래서 벗은 옷가지를 갖고 다닐 수 없으니 버린 것은 아닐까? 별 생각이 다 든다.

굽이 조금 닳았지만 멀쩡한 신발이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다고 하지만, 멀쩡한 옷가지를 공중화장실에서 바꾸어 입고 버리고 가는 사람들. 앞으로는 시외버스터미널에는 헌옷 수거함과, 신발 수거함이라도 비치를 해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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