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군 지역을 답사하다가 답사하는 중에, 길가에 서 있는 아주 작은 전각이 하나 눈에 띤다. 앞에는 오래되어 바란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곁에 서 있는 소나무 몇 그루가 그래도 이 전각이 역사적인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무슨 전각일까? 궁금한 것도 있으려니와, 이런 길가에 서 있는 전각에 우리가 모를 슬픔이라도 있을까보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775-1에 해당하는 작은 전각. 앞으로는 사석삼거리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우측으로는 청주와 오창으로 향하는 17번 도로이고, 좌측으로는 진천읍과 진천IC로 나가는 21번 도로이다. 전각 앞으로 가니 ‘일문사충(一門四忠)’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말 그대로 한 집에서 네 명의 충신을 배출했다는 뜻이다.



쇠스랑충신의 충혼을 배우다


사각형으로 마련한 전각에는 일문사충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그 안에는 충신들의 정려가 걸려있다. 위와 아래로 두 개의 정려에 걸린 4명은 바로 이 지역에서 충혼을 불태운 분들이다. 조선조 영조 4년인 1728년에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청주와 진천을 함락시키고, 이지경이란 자가 자칭 진천현감이 되어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때 사석리에 거주하던 김천주는 이들의 횡포를 참지 못하고, 동생 천장과 아들 성추, 그리고 조카 성옥 등이 마음을 합해, 이인좌의 무리들에게 대항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무기도 없이 이인좌의 무리들과 혈전을 벌였다. 맨손으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이라, 쇠스랑과 괭이 등으로 무장을 하고 진천을 탈환하기로 했다.





이인좌는 남인의 명문출신이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남인들이 정계에서 소외된 것을 불만을 삼은 이인좌는 남인명문가들의 후광을 업고,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728년 3월 15일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켜 청주성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에 이르러 도순문사 오명항이 지휘하는 관군에게 패하였다.


이 와중에 진천에서 이지경이란 자가 스스로 현감이라 칭하고 백성들을 괴롭히자, 동생과 아들, 숙질과 힘을 합하여 반란군을 섬멸하자고 뜻을 모은 것이다. 쇠스랑과 괭이 등으로 무장을 한 이들은 진천을 탈환하기 위해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족으로 패배하여 모두 전사를 하였다.


네 분의 충혼 앞에 머리를 숙이다.


정려에는 위편 우측에는 <충신 가선대부 김천주 지려>라 쓰고, 그 옆으로는 <충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김천장 지려>라고 적혀있다. 형제가 나란히 정려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뒤 늦게 이들의 충심을 알게 된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고 향제케 하였다. 그 뒤 고종 22년인 1885년에 아들 성추와 조카 성옥도 정려를 내려 함께 병정케 하였다.





밑의 정려에는 우측에 충신 김성추를, 좌측에는 김성옥을 배향하였다. 일문에서 네 명의 충신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것을 알려주는 작은 전각이다. 이 전각은 안내판에 적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문화재 지정은 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어디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야만 소중한 것일까? 이 네 분의 나라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마음이란 생각이다.


길가에 서 있는 외로운 작은 전각하나. 쇠스랑과 괭이를 들고 무장을 한 반군들과 혈전을 벌이다가 장렬히 죽음을 당한 이분들의 그 충정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새롭게 조명을 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이 땅 한 귀퉁이 한 뼘이라도, 이런 충혼들의 뜨거운 피가 서려있기 때문이다.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제일 힘든 것이, 제 시간에 맞추어 식사를 하는 것이다. 어던 날은 아예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할 때가 많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라도 더 촬영을 해야 한다는 욕심 때문이다. 그러다가 시간을 내어 인근에 있는 식당을 찾아들어가면,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그저 허겁지겁 먹고 또 딴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하기 대문이다. 

참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물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언제부터인가 우리 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되고, 그것을 찾아 하나하나 어디엔가 소개하는 것이 나의 일처럼 되어버렸다. 남들은 이런저런 일로 음식을 소개하고, 그것으로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재에 대한 고집스런 글을 올리다가 보니, 맛집을 발견해도 늘 식당문을 나서고 나서야 '소개를 할 껄 그랬나'라는 생각을 한다.

서로 상을 차리겠다고 하는 아이들.
 
원주시의 문화재를 답사하던 날, 이미 점심시간을 지나 배도 고프다. '한 가지만 더 찍고...' 라는 생각으로 돌아치다가 보니, 오후 2시가 넘었다. 아침을 7시에 먹었으니 배도 고프고 허기도 진다. 길가에 있는 식당들이 많지만, 그 중 한집이 눈에 띤다. 안으로 들어가니 살림집을 식당을 사용하는터라, 여느 식당처럼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냥 내집처럼 편안함을 주는 그런 곳이다. 밥 한상에 7,000원이라는 가격표가 보인다. 주변에 마당한 식당도 없는터에 이것저것 따질 수는 없다. 그래도 늦게나마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고마움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식당 집의 아이들인 듯, 누나와 남동생이 서로 상을 차리겠다고 주장을 한다. 서로 미루겠다고 다둘 나이인 듯 한데, 서로 상을 차리겠다는 아이들을 보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주거니 받거니 차린 소박한 밥상

누나와 동생이 서로 반찬을 들고나와 상을 차린다. 누나가 반찬을 놓고가면 동생이 다시 바구어 놓는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반찬을 놓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놓아야 손님이 먹기 좋을까를 안다고 하는 식당집 아들녀석의 이야기에 조금은 의아하기도 하지만, 그도 역시 기분 좋은 이야기다. 손님이 오면 찬을 준비하느라 음식이 조금은 늦게 나오는 편이다.
시장을 참는 것도 힘든데, 음식 냄새가 코를 간지럽히니 허기가 더 지는 듯하다. 얼른 밥을 달라고 하니, 밥을 새로 하느라 늦는 것이란다. 둘이서 하나하나들어다가 놓고 간 밥상. 화려하지도 않다. 가지수가 상 다리가 휠 정도는 더욱 아니다. 그저 시골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상차림이다.



특별한 것이 없다. 반찬이라야 10여가지. 거기다가 고급스런 반찬은 없다. 가갹에 비해 비싼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든다. 하지만 허기진 배에서는 연신 들어오라고 난리다. 조금 있으니 된장 냄새가 구수하게 나는 찌개를 갖다 놓는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돌솥밥을 새로 하느라고 조금 늦었다고 정중히 이야기를 하는 남자녀석의 행동에 웃음이 난다. 하지만 반찬을 하나하나 먹어보니, 어디선가 많이 먹어 본 맛이다. 아주 오래전에 어머니가 텃밭에서 구해다가 만들어준 반찬맛이랄까? 그런 맛이 난다. 거기다가 식당이 가정집 거실이니 더 더욱 그러하다.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은 조금은 텁텁하고 깔깔한 맛. 참으로 오랫만에 보는 맛이다.

 
찬의 종류도 그렇다. 전문적인 식당에서 내어놓는 반찬이 아니라, 집에서 늘 먹을 수 있는 그런 반찬이다. 집앞에 있는 밭에서 직접 농사를 지은 것들로 마련한 찬이라고 하니, 그 안에서 어머니의 손맛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지 모른다. 기분좋은 밥 한상. 아침부터 돌아치느라 피곤하고 허기진 배가, 따듯한 정성이 담긴 밥 한 상으로 인해 오랫만에 호강을 하는 것만 같다.

답사를 다니면서 온갖 맛이 있다는 집은 많이도 들려보았다. 집의 전면을 덮고있는 '무슨무슨 방송국 무슨무슨 프로 출연' 등의 문구가 적힌 곳도 수없이 들어가보았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조미료를 싫어해서인지, 그런 곳도 그렇게 맛있게 느끼지를 못한 것만 같다. 오히려 소박하면서도 어머니의 손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집. 어느 가정의 점심상처럼 편안한 식단. 그래서 이 식사 한끼로 피로를 잊은 것만 같다.

        
밥 한끼를 먹으면서 감동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것도 식당 밥을 먹으면서는 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 밥 한 상으로 피로가 말끔히 가셔졌다고 하면, 조금은 과장일까? 하지만 이렇게 소박한 밥상과, 상을 차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어 너무 고맙다. 아마 정이 가득한 집이어서 더욱 반찬이 맛이 있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혼자 웃고는 한다. 특히 전국의 사찰에서 만날 수 있는 석불 등, 불상을 볼 때 그렇다. 어떻게 시간에 따라 그 표정의 느낌이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누구는 그 때의 마음이라고도 한다. 즉 내 마음이 편하면 불상의 표정이 편하고, 내가 화기가 있으면 불상도 찡그린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공감이 가는 것은, 같은 불상을 보면서도 수시로 그 표정이 변하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고, 어느 때는 준엄한 얼굴이기도 하다. 때로는 노여움을 탄 얼굴이기도 하고, 그런가하면 자비로운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불상의 표정을 보면서 스스로 내 마음을 추스르고는 한다,


진리의 상징, 비로나자불좌상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용곡리. 호저면 중에서도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한다. 이곳은 칠봉이라는 계곡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봉우리를 지나 들어가는 막다른 마을이다. 마을 끝에는 탑과 불상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용운사지 석불 좌상과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용운사지 석조비로나자불 좌상’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고려 전기인 11세기경에 조성된 불상이다. 최근에는 불상 뒤편에 세우는 광배가 발견이 되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용운사지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을 보면 늘 기분이 좋아진다. 매끄럽지 못한 조각이지만, 그 얼굴은 늘 웃음이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석불의 얼굴은 광대뼈가 두드러지게 표현을 하였다. 입은 약간 앞으로 튀어 나왔으며, 입 끝이 처져있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큰 편이고 약간 앞으로 구부정한 모습이다. 코는 한쪽이 떨어져나갔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왔는데, 한쪽 끝은 파손이 되어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비례가 잘 맞지 않고 조각 기법은 세련되지 못하였지만, 고려 초기에 이 지역에서 보이는 석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렇게 즐거운 일이 무엇인지

석불의 손은 가슴께로 모아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하여 왼손의 둘째손가락을 오른손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수인을 지권인이라고 하며, 이는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상의 모습이다. 대좌는 밑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마련하였는데, 아래위로 연꽃을 큼지막하게 조각하고, 중간의 돌에는 안상을 하나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시대 조각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투박하고 세련미는 없지만 우직한 모습으로 편안함을 주는 용운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난 언제나 마음이 울적하거나 결정해야 할 일이 생기면 이곳을 찾는다. 항상 안면에 미소를 띠우고 있는 이 석불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가 치밀 일이 생겨도 이곳이 와 이 석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노여움이 눈 녹듯 사라지기 때문이다.

늘 이 용운사지 석불좌상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한다. ‘부처님, 세상이 그리 즐거우세요?’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언제나 한가지이다. ‘그럼 즐겁지 않으면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나?’ 그 대답을 들으면 모든 노여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갖가지 표정으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불상들. 그 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린다. 그런 문화재를 보고 어찌 생명이 없는 조형물이라고 할 것인가? 오늘도 답사를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당야한 표정을 만나기 위해. 


답사를 하다가보면 아주 가끔이지만, 주변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헤매는 수도 있다. 만일 그 문화재가 있는 곳이 산속 같다면, 이렇게 헤매다가는 날이 저물기 일쑤다. 그래서 답사를 나갈 때는 늘 비상용 손전등을 지참을 해야만 한다. 이번 원주 지역 답사는 비가 온 뒷날이라 힘도 들었지만, 보이지 않는 마애삼존불을 찾아 인근을 이 잡듯 뒤져야만 했다.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에는 고려 전기에 조형된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길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만날 수가 있다. 큰 길에서 마애불을 찾아 걷는, 비가 온 뒤의 시골길은 기분이 좋다. 물기가 축축하게 젖은 풀들이 가끔 발길을 붙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한 땀을 흘리지 않아도 좋기 때문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8호 마애삼존불이 선각되어 있는 바위(우측)

갑자기 사라진 이정표

큰길가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마애불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려준다. 몇 km 쯤이야 답사를 나가면 늘 걷는 길이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보니 마을이 끝나는 곳에 이정표가 서 있다. ‘수암리 마애삼존불상’이라는. 가슴이 뛴다. 답사를 하면서 늘 새로운 문화재를 만날 때는 이렇게 가슴이 벅차다. 수암리 마애삼존불은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길을 꺾어들어 작은 도로를 따라간다. 저수지가 보인다. 그런데 양 갈림길인 이곳에는 정작 이정표가 없다. 할 수 없이 앞으로 향하는데 길이 막혀있다. 원주시청에 전화를 걸어 길을 물어보고 다시 주변을 살핀다. 여기저기 한참 찾다가보니, 저 건너편 길 끝에 이정표가 보인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었다.


걷고 또 걸아야 하는 답사길. 과수원 길을 지나(위) 발이 빠지는 논둑길을 걸어 찾아갔다(아래)

젖은 길에 빠지며 찾아간 마애불


저수지를 끼고 논길을 따라 걷다가 보니 과수원이 나온다. 올해는 잦은 비로 과수농가가 피해를 많이 당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그래도 열매가 실하게 달려있는 것 같다. 이정표에는 마애불이 100m 전방에 있다고 표시를 하였다. 그런데 마땅한 길이 없다. 할 수 없이 논둑 길을 올라서니 젖은 논둑은 발이 푹푹 빠진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빠지는 발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마애불 안내판이 서 있는 곳까지 들어갔다. 근처에는 큰 돌이 없는데, 이곳만 큰 바위가 모여 있다.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마애불이 눈에 뜨이지가 않는다. 한참을 주변을 돌다가 보니, 위쪽에 있는 바위에 선으로 죽죽 그은 것 같은 선각한 마애불이 보인다. 그저 얼핏 보아서는 누군가 바위에 날카로운 것으로 낙서를 한 것처럼 보인다.



마애불이 선각되어 있는 바위군과(위) 흐려서 찾기조차 힘든 마애불(가운데) 확대된 사진(아래)

형태를 알아볼 수조차 없는 마애삼존불

이 마애삼존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는 좌불상을 선각하고, 양편으로 보살상을 새겨 넣었다. 입상으로 처리된 불상의 좌측보살상은 알아보기도 힘들다. 아예 있었다는 자취를 찾기도 힘이 들 지경이다. 연화대 위에 좌정을 한 부처는 얼굴은 마모가 되었다. 아래쪽에 대좌를 그리고 그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았는데, 손은 가슴께로 끌어 올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왼손은 아래로 오른손은 약간 위로 한 것으로 보아, 지권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의 형태이다.

불상의 우측에 서 있는 보살상도 얼굴의 형체는 알아보기가 힘들다. 굳이 이 마애불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강원도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삼존불이 선각으로 조성이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심하게 마모가 되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법의를 나타낸 선이 유려하고,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아 뛰어난 마애불임을 알 수 있다.


중앙의 불상은 연화대 위에 앉아있고(위) 양편에는 보살입상이 선각되어 있다(아래)

걷고 또 걷고 한참을 헤매고 난 뒤에도, 발목까지 빠지는 길을 걸아 찾아간 마애삼존불. 비록 그 정확한 모습은 찾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하나의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뛴다. 그런 가슴 벅찬 느낌이 좋아 답사를 계속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바위군에는 풍화작용으로 인한 바위와(위) 마애불을 새겨 넣을만한 벽이 보인다.

 

“왜 답사가 어렵다고 생각을 하세요?"
“어렵죠, 날도 안 좋은데. 가만히 앉아서도 글은 쓸 수 있잖아요?”
“저는 앉아서 쓰는 그런 글을 쓸 줄 몰라요”
“아니 한 때는 방송국에서 일도 하셨다면서요?”
“예, 그러기는 했죠. 그래서 더욱 더 방송에 대한 글은 쓸 수가 없어요.”

아는 분이 전화를 하셨다. 늘 블로그를 보고 있다는 분이다. 그런데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분은 나를 보고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남들처럼 약지 못하다고 퉁명스레 이야기를 한다. 남들처럼 약은 짓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홍성군 홍주성 안에 소재한 여하정

난 내 길을 가렵니다. 그냥 놓아두세요.

언젠가도 그랬다. 죽어라하고 발품을 팔고 적지 않은 경비를 들여서 글을 쓰면, 이건 만날 저 꽁다리에서 허우적거리기가 일쑤다. 하루 종일 방문객이라고 해보았자. 고작 100명 안팎이다. 슬그머니 열도 뻗치고 성질 급한 내가 참기도 어려워, 가끔은 불쾌한 이야기를 내뱉기도 했다. 그러나 대안이 없지 않은가?

배운 것이 무엇이라고,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그리고 판단은 그것을 운영하는 분들이 알아서 하면 된다. 한 사람이 들어와도 좋단 생각이다. 그저 꼼꼼히 글을 읽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 문화재에 대해 조금만 이해를 더 해줄 수만 있다면 만족한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여기저기 광고를 붙이는 것도, 다 부질없음을 알고 있다. 어차피 방문객도 저조한 블로그에 무슨 딱 부러진 수입이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원주 부론면 정산리에 있는 석장승. 눈이 쌓여도 답사는 계속된다.

푸념은 늘 즐겁답니다.

난 가끔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는다. 아마 그것마저 하지 말라고 한다면, 열이 뻗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요즈음 우리들은 우리의 문화재나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참으로 남의 것을 들여다보듯 한다. 그런데 비해 드라마나 연예인의 이야기에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러다가 보니 그런 기사를 메인에 띠우고. 그것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영업이다. 영업은 당사자들의 고유권한이다. 이러쿵저러쿵 침범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연예기사는 TV만 보고도 쓸 수 있잖아요?”
“아뇨. 그것도 무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머리도 아프고요”
“그래도 그런 것을 쓰셔야 득이 될 텐데요.?”
“그 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데요?”
“....”

괴산 삼방리 마애여래좌상. 눈길에서 죽을 뻔한 일도 수 십차례이다.

물론 그 득이란 수입을 말하는 것인 줄도 안다. 하지만 난 그것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문화재를 답사하고, 그것을 잘 다듬어 글을 쓰는 것이 좋다. 그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책을 쓴 것이 20여권이 넘는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쓴 것은 단 한 권도 없다.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더 우리 것에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문화재란 우리의 정신적인 지주이기 때문에, 오늘도 그 줄을 놓지 않으려는 혼자만의 아집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것이 나이길 바란다.

이번 답사에도 비가 오네요!

답사를 하는 날이 다 좋을 수많은 없다. 어떤 날은 국지성 호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강행군을 해야만 한다. 때로는 태풍이 오는 날 답사를 나갔다가 길까지 잃은 적도 있다. 눈이 발목을 넘어 무릎까지 차 있어도 들어가야 한다. 때로는 길이 사라진 곳도 있다. 그래도 들어간다, 그것이 답사의 어려움이자 묘미이기도 하다.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로 들어가는 길. 한 겨울이라고 답사를 멈추면 무슨 글을 써야할까?

이번 답사에도 비를 만났다. 이 계절이면 늘 만나는 비다. 이젠 그 비도 반갑다. 함께 동행을 할 수가 있으니. 차라리 비가 내리는 날이 더운 날 몸에서 쉰내가 나는 것보다는 좋지 않을까? 그렇게 답사를 하고 정리를 해서 글을 쓴다는 즐거움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그런 행복이 있어 남들이 들려주질 않아도 답사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항상 갓 찌어낸 찐빵처럼 따끈한 기사를 쓰기 위해서.

송강 정철이 속미인곡을 집필했다는 담양 송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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