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힘, 그 힘의 무한함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우리는 자연을 함부로 대했다가 수많은 아픔을 당한 기억이 있다. 개발이라는 명복으로 마구 파헤쳐진 산야가 노해, 인간들을 무참하게 만든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인간들은, 늘 자연으로부터 수많은 재해를 당해왔다.

과연 자연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그런 질문은 이제는 참으로 허황된 것이다.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으며, 자연에게서 수많은 혜택을 보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 역시, 자연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잎을 무성하게 달고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다.

놀라운 나무 한 그루를 만나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은 재미있는 것을 보기도 하다. 그것을 재미로 보기에는 어떤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다. 전라북도 정읍시 흑암동에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74호인 ‘정충사지’가 있다. 정충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전사한 충신 송상현의 위패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목숨을 잃은 신호와 김준의 위패도 모시고 있다.

이 정충사지를 찾아가는 길에 개천가에 서 있는 몇 그루의 느티나무를 만났다. 그런데 그 중 한 나무를 보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고 표현을 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무성한 잎을 달고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아마 어림잡아도 그 수령이 수백 년은 지났을 것 같다.


잎을 무성하게 달고 있는 가지와 밑동

이 나무를 지나치다가 그만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그 나무를 보는 순간, 어떻게 이 나무가 살아서 잎을 무성하게 달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이다. 도저히 불가능 할 것만 같은 모습을 보면서, 자연이란 우리 인간의 머릿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한다. 한 마디로 자연의 놀라운 생명력을 그 나무에게서 본 것이다.



속이 텅 비어버린 느티나무. 위로 난 구멍으로 하늘이 올려다 보인다.

속이 비어버린 느티나무, 그래도 잎을 무성하게 달려

도대체 이 나무가 어떻게 살아있을 수가 있는 것일까? 한편은 껍질이 없고, 속은 텅 비어버렸다. 그리고 여기저기 난 구멍으로 밖과 하늘이 보인다. 작은 구멍으로는 옆에 있는 집의 담벼락이 다 들여다보인다.

어느 정도라면 그래도 이해를 할 만 하다. 그러나 이건 아예 속이 텅 비어버리고, 그 비어버린 속에는 거미들이 여기저기 줄을 치고, 곤충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예 속이 비어있는 이 나무. 그 위로 올라가면 정충사 앞에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다. 마을 어르신 말씀으로는 이 나무도 그 정도 나이가 되었을 것이란다.


표피에 난 구멍으로 훤히 들여다 보인다.

이 나무의 수령이 얼마나 되었는지, 그리고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마을 분도 예전부터 그런 모습이었다고 하신다. 그런데도 잎을 무성하게 달고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 이런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느낄 수가 있을까? 그것은 바로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이런 생명력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속이 비어비린 채로 살아가고 있는 흑암동의 속이 빈 느티나무 한 그루, 그 나무에게서 자연의 위대함을 본다. 그리고 인간의 오만을 함께 본다.

경남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772-1번지에는 옛 가산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폐교가 된 이 초등학교 교정 안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경남 기념물 제197호로 1997년 12월 31일자로 지정이 된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500년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 35m 정도에 밑동의 둘레가 8m에 가까운 이 느티나무는, 1480년경에 훈도인 전경륜심었다고 한다. 전경륜이 이 마을에 집터를 잡았는데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이 배(=船)와 같다고 하여, 서편 냇가 남북 400m까지 느티나무 숲으로 조성하여 마음의 풍림 겸 배의 돛대로 삼았다고 전한다.



일제 말에 베어버린 숲

2,000평이나 되는 울창한 느티나무 숲. 아마도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런 넓은 장소에 서 있던 느티나무들을 일제 말에 모두 베어버리고, 현재 남아있는 한 그루만이 서 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정천, 혹은 ’샘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사후에 대사헌으로 추증이 된 전팔고 선생의 호를 따 ‘원천’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1592년에는 의병들이 이 숲에 모여 회동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런 이유로 일제에 의해 모든 나무를 베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결국 2,000여 평이나 되는 느티나무는 선비들의 풍류장소로 이용이 되다가, 임진왜란 때 수난을 당했으며, 그 뒤 한일합병의 슬픔까지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마을 사람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나무에 모여,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홀로 남은 느티나무 한 그루

지난 6월 24일 거창군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가조면 원천리. 옛 가산초등학교 교정에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갔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있고, 주변은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 놓았다. 폐교가 된지 시간이 흘렀는지, 담장에는 넝쿨이 타올라 을씨년스런 모습이다.

이리저리 들어갈 방법을 찾고 있는데, 철문 옆에 조그마한 공간이 보인다. 그 안으로 들어갔더니 바로 학교 교정 안이다. 느티나무는 옛 학교 건물과 마주한 곳에 서 있다. 낮은 철책으로 보호막을 둘러놓은 느티나무. 나무의 밑동에는 혹처럼 달라붙은 것이 흡사 사람의 얼굴처럼 보인다.




생명의 원천, 느티나무

오래된 고목에는 정령이 산다고 하더니, 저 혹에 생명이라도 깃든 것일까?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고 자랐을 느티나무가, 소리가 사라진 지금은 왠지 측은해보이기까지 한다. 나무 가까이로 가서 나무를 쓰다듬어 본다. 거친 감촉사이로 온기가 느껴진다. 생육이 좋은 이 원천 느티나무는 홀로 이렇게 폐교가 된 교정에 서 있다.

밑동 근처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 달라붙어 있는데, 위를 보니 중간이 잘려있다. 아마 원줄기의 한편이 잘려나간 듯하다. 이것도 일본에 의한 아픔은 아니었을까?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는 일제의 만행, 그리고 뒤이어 맹목적인 종교적인 훼손. 거기다가 도적 떼들까지. 도대체 이 나라의 문화재가 정말 마음 편하게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나무를 들러보고 있는데,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나무의 벌어진 틈 사이에서 기어 나온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렇게 모든 생명을 감싸고 있건만, 이제 인적 끊긴 폐교의 안마당에 서 있는 이 느티나무가 온전할 것인지. 교정을 떠나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게 된다. 불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무 밑동에 검은 자국을 보았기 때문인 듯하다.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나무가 있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나무의 수령이 600년이 지났으며, 전하는 말에 의해 이성계가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공을 들일 때, 심었다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788번지, 한재 초등학교 교정에 자리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28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느티나무는 멀리서 보기만 해도 그 위용에 압도당할 만하다. 나무의 높이가 34m, 가슴높이의 둘레가 8.78m나 거목으로 생육의 발달이 좋다. 현재는 대치리가 평지로 변하고 한재초등학교의 교정이 되었지만, 이곳의 옛 지명이 ‘한재골’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산의 골짜기에 해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조 태조는 왜 이 나무를 심은 것일까?

마을에 전하는 바로는 기도를 마친 이성계가 기념으로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때도 기념식수를 심는 버릇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많은 옛 사람들이 심었다는 나무들을 만날 수가 있다. 아마도 꼭 그런 일화가 아니라고 해도, 이성계와 연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느티나무는 보존가치가 상당히 높다.

우선 나무의 크기나 생육이 발달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당당한 위용이 사람을 압도한다. 6월 18일 오후에 찾아간 ‘대치리 느티나무’. 멀리서 보기에도 그 나무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학교 교정에는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공놀이며 각종 놀이를 하느라 소리를 치고 있다. 그런 어린 아이들에게 이 나무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성계 할아버지가 심었다는 대요”

아이들이 나무 밑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일부러 카메라 앞으로 돌아다니는 녀석들이 있다. 우리도 예전에 저랬다. 소풍이라도 가서 누가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괜히 그 주변을 맴돌다가 앞으로 뛰쳐나가고는 했으니까.

“애들아 이 나무 누가 심었는지 알아?”
“그 나무요 이성계 할아버지가 심었대요.”
“어떻게 알아?”
“거기 적혀있어요. 그렇게요. 그리고 선생님이 알려 주셨어요. 이 나무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요”




입을 모아 떠드는 녀석들 때문에 정신이 없다. 나무는 높기도 하지만, 동서로 뻗은 가지들은 땅에 닿을 듯 늘어져 있다. 버팀기둥을 받쳐 놓았는데도 늘어진 가지가 보기에도 멋들어져 보인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조선. 그러나 이 나무는 그 숱한 역사의 아픔을 보듬고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천연기념물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몰지각한 사람들

학교 문 안으로 들어가다가 보니, 천연기념물인 나무 옆에 차가 한 대 서 있다. 좀 빼달라고 부탁을 하려고 보니, 입에 담배를 물고 있다. 그것도 초등학생들이 주변에 가득한 교정 내에서 말이다. 예전 같으면 벌써 한 마디 했겠지만, 날도 덥고 그럴 생각이 없다. 일일이 그렇게 역정을 내다가보니 이젠 내가 지쳐가는 듯해서이다. 아무리 나무 아래 평상을 만들고 쉴 공간이라고 해도, 아이들도 있는데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아이들에게 무엇을 잘하라고 이야기 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느티나무를 찬찬히 돌아본다. 세월의 연륜이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밑동 쪽에 혹처럼 불어난 것들이며, 마치 거북 등짝같이 두텁고 거칠어 보이는 표피가 그러하다. 하긴 말이 600년이지 그 숱한 세월을 바람과 눈 비, 폭염에도 이렇게 버티고 있지 않은가? 이 느티나무를 보면서 갑자기 민초들이 생각이 난다. 아무리 험한 세상일지라도 이 나무처럼만 버틸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월을 먹고 산 것만 같은 천연기념물 제284호 대치리 느티나무. 그 웅장한 모습처럼 앞으로 더 많은 세월을 살아갈 수 있을까?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거목(巨木)이나 오래된 고목(古木)들 중에서, 겨울에도 잎을 달고 있는 소나무 등이 아니면 잎이 날 철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한 이유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를 찍어도, 그 위용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 산 23-1 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281호인 ‘남원 보절면 느티나무’를 찍으려고, 아마도 몇 달인가를 기다린 듯하다.

1982년 11월 4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600년 정도라고 전한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자라서 둥근 형태로 보이며, 줄기가 굵고 수명이 길어서 쉼터역할을 하는 정자나무로 이용되기도 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보호를 받아왔다.

천연기념물 제281호로 지정이 된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의 느티나무 

진기마을의 느티나무, 위용에 감탄하다

신기 마을의 정자나무와 당산나무의 구실을 하고 있는 ‘남원 진기리의 느티나무’는 수령이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 크기는 높이 23m, 가슴높이의 둘레가 8.25m이다. 뿌리 근처의 둘레가 13.5m나 되는 거목으로, 가지의 길이는 동서 25.8m, 남북 28.6m이다. 이 느티나무는 단양 우씨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올 때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선 세조 때 힘이 장사인 ‘우공(禹貢)’이라는 무관이, 뒷산에서 아름드리나무를 뽑아다가 마을 앞에 심어놓고, 마을을 떠나면서 나무를 잘 보호하라고 당부를 했다고 한다. 우공은 세조 때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 3등의 녹훈을 받았으며 그 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고 한다. 후손들은 사당을 짓고 한식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6월 2일 오후, 그동안 미루고 있던 진기리의 느티나무를 찾아 나섰다. 오후의 햇살이 따가울 정도의 날씨지만, 바쁜 일정 속에서 잠시 자리를 비워놓고 답사를 떠난 것이다. 신기마을을 물어 들어가니, 마을 한편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 위용에 압도당할 만하다.

길가에 안내판 하나 없는 천연기념물

느티나무를 찾아 촬영을 마치기는 했지만, 영 마음이 씁쓸하다. 신기마을이라는 석비가 길가에 서 있어 마을을 찾기는 했지만, 도로변에도 마을이 갈라지는 곳에도 안내판 하나가 서 있지를 않다. 마침 동행을 한 일행이 남원에 거주하는 사람이라 어렵지 않게 찾을 수는 있었지만, 만일 외지에서 혼자 찾아들었다면 낭패를 당할 뻔했다.


나무의 연륜을 말해주는 듯한 흔적

길을 지나는 몇 분의 어르신에게 길을 물어 찾아 든 신기마을이다. 자료를 미리 보았기에 보절면 진기리 신기마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마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라면 이곳을 찾아 올 리가 없다. 아니 올 수가 없다. 이곳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느티나무가 소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표식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알리는 안내판은 큰길가에 세워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느티나무가 천연기념물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느티나무가 서 있는 안쪽에 달랑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밖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장소에 서 있다. 천연기념물을 찾아 그 위용에 감탄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이런 경우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우리 문화재가 홀대를 받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무의 갈라진 줄기와 땅위로 들어 난 뿌리에 고인 물(아래)

느티나무를 만지며 소원을 빌다

거목으로 자란 느티나무는 가지가 넓게 퍼졌다. 한편으로는 축대 밑까지 가지가 뻗어있다. 나무의 뿌리는 원 줄기에서 10여m 밖까지 뻗어 땅으로 돌출이 되어있다. 나무뿌리가 땅 위로 솟아 홈이 파진 곳에 물이 괴어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럴 정도로 나무는 오래 묵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몇 개의 굵은 줄기가 하늘을 향해 오르다가 잔가지를 만든다. 밑동 근처에는 연륜을 말해주듯, 혹처럼 불거진 옹이도 보인다. 밑동 위에 처진 새끼줄에는 숯이 끼워져 있다. 아마도 제를 지내면서 금줄로 친 듯하다. 나무의 옆에는 많이 훼손이 된 솟을삼문이 보인다. 사당의 출입문이었을까? 나무는 그러게 당당하게 자라고 있는데, 이 솟을삼문은 퇴락한 모습이다.


금줄에 끼워놓은 숯과 솟을삼문

나무에 손을 대어본다. 딱딱한 감촉이 느껴지지만, 그 안에 거대한 힘이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600년 오랜 풍상을 이겨 온 나무의 힘일까? 그 세월을 이렇게 한 자리에 서서 온갖 세월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느티나무.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장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연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 그 중 연리목이나 연리지를 보면, 꼭 무엇인가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연리목이란 나무와 나무가 결합이 되는 것이고, 연리지란 가지와 가지가 결합이 되어 한 나무처럼 자라나는 것을 말한다. 남원 선원사에 가면 어미나무와 아들나무에 대한 가슴 저린 나무가 있다.

아들나무를 위해 속을 다 빼준 어미나무. 아마 우리 세상 살아가는 어머니들의 마음이 그러하지 않을까? 이 나무를 보고 어머니를 그리며,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던 것도 정말 사무치는 그리움과 부끄러움 때문이다. 나무에게서 배우는 애틋한 어머니의 사연. 과연 사람들은 그 나무에게서 무엇을 배워갈 수 있을까?


자식나무를 살리려고

과학적으로는 이야기가 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러나 전하는 이야기대로라면 그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나무의 수령을 보아도 상당히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원사는 신라 때 창건된 절이다. 언제 부터인지 현재 일주문 옆에는 큰 고목 한 그루와 작은 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작은 나무는 늘 큰 나무에 가려 햇볕을 제대로 받고 자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세상이 흘러 튼 나무는 점점 더 실하게 자라는데 비해, 그 옆에 자라는 작은 나무는 늘 잎이 실하지 못하고 주변 나무들보다 생육이 원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두 나무를 어미나무와 자식나무라고 불렀다.


담장 안에 있는 나무는 속이 텅 비어버렸다. 담밖의 가지에 걸쳐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어미나무의 가지 하나가 자식나무의 가지 사이에 걸려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바람이 분 것도 아니고 태풍이 친 것도 아닌데, 어상하게 어미나무라는 큰 나무가 자식나무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갈수록 어미나무는 점점 자식나무 쪽으로 기울어졌고, 자식나무에게 연결된 가지는 자식나무의 한 줄기처럼 단단히 붙어버렸다. 그런데 그 뒤로 이상하게 어미나무의 밑 둥이 비어가는 것을 보았다. 자식나무에게 자신의 속을 다 내주고 있는 어미나무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어미나무의 속은 완전히 비어졌다. 그 어미의 마음을 알아서일까, 자식나무는 잘 성장을 하여 커다란 느티나무로 변했다. 그 가지에는 여전히 어미나무의 가지를 붙든 체. 지금은 기운이 없는 어미나무가 자식나무에게 기대고 있는 형상이다. 늙고 병든 어머니를 부축하고 있는 자식의 모습과 같은 향상으로.


속이 텅 빈채로 살아가는 어미나무

연리목에게서 배우는 어머니의 헌신

“사람들도 저렇게 자식을 키우죠. 우리 어머니들의 마음은 다 똑 같아요. 자식을 위해 속을 저렇게 썩이는 겁니다. 저런 부모님의 마음을 자식들이 알고 있다면, 다시는 속을 썩이는 일이 없을 겁니다.”

선원사 운천 주지스님의 이야기다. 늘 저 나무를 보면서 어미의 마음을 헤아린다고 한다. 그 나무가 그렇게 속이 비어버린 까닭은 바로 자식을 위해서다. 속이 다 비어버린 고목. 껍질만 남은 나무는 벌어진 껍질 사이로 담이 보일 정도이다. 그렇게 자식을 위해 속을 비어버린 어미나무다.


속이 빈 어미나무. 껍질만 남아 갈라진 곳으로 담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참담한 마음이다. 우리 어머니도 저런 희생의 마음으로 날 키웠을 텐데. 이제 후회를 해보아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나무에게서 배우는 어머니의 마음. 내일은 꽃 한 다발 사들고 찾아뵈어야겠다. 괜한 눈물이 흐른다. 낙엽이 쌓인 모습때문이라고 우기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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