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리, 마을 입구를 들어서면서 마을 이름을 보고 한참이나 웃었다. 다방리라니, 참 별 마을이 다 있다는 생각에서다.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 운주산에 소재한 신라 때의 절인 비암사. 비암사는 공주 마곡사의 말사로 창건연대는 확실치가 않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비암사는, 극락전 앞의 3층 석탑에서 소중한 문화재가 3점이 발견이 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이 3층 석탑에서 나온 문화재는 국보 제106호인 비암사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비상과 보물 제367호인 비암사기축명아미타불삼존비상, 그리고 보물 제368호인 비암사석조비상반가사유상이다. 이 중 보물 제368호는 통일신라로 이어진 반가사유상의 조성과 미륵신앙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곳 충남과 전북일대는 미륵신앙과 관련되는 문화재가 유난히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야기꺼리가 많은 절 비암사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전각을 벌려놓은 비암사. 돌계단을 오르다가 보면 우측으로 수령 840년이 지난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느티나무의 수령이 800년이 지났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높이 15m, 나무의 둘레가 7.5m나 되는 이 나무는, 흉년이 들면 잎이 밑에서부터 피어 위로 올라가고, 풍년이 들 해는 위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온다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풍년과 흉년을 알려주는 나무로 유명하다.

수령 840년인 보호수 비암사 느티나무

느티나무 계단을 오르면 바로 앞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충남 유형문화재 제11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3층 석탑은 화강암으로 조성이 되었으며, 고려 때 제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는 이 석탑은 기단부가 없어진 것을, 1982년에 보완하여 현재의 자리에 세웠다. 이 3층 석탑에서 위에 열거한 문화재 3점이 발견되었다.


상륜부에서 국보와 보물 등이 발견 된 비암사 3층 석탑

3층 석탑 뒤편으로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79호인 극락보전이 자리하고 있다. 극락보전은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다.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한 원형기둥을 사용했는데, 밑 부분을 보면 오랜 세월 보수를 한 흔적이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인 극락보전은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아미타좌상을 주불로 모신 극락보전과 소조아미타좌상

극락보전에 주불로 모신 아미타불은 영원한 수명과 무한한 광명을 보장해 준다는 부처님으로 서방극락의 아름다운 정토세계로 인도한다고 한다. 극락보전에 모셔진 아미타좌상은 소조로 제작이 되었으며,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18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아미타불좌상은 전체 높이가 196cm로 좌상으로는 큰 편이다. 이 아미타불의 특징은 결가부좌를 한 무릎의 높이가 유난히 높다는데 있다.



이어붙인 기둥이 역사를 말하고 있다. 대웅전 현판 양옆에는 멋진 용이 조각되어 있다

이 외에도 비암사에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182호인 영산회괘불탱화가 있다. 이렇게 소중한 문화재와 800년이 넘는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있는 비암사. 가파른 비탈 위에 세워진 산신각으로 올라보니, 사람들이 정성들여 작은 돌을 쌓아올려 놓았다. 절집을 찾아 간절히 기원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간구하는 것일까? 아마 이렇게 오래된 고찰에서 수많은 시간을 빌고 간 사람들의 기운이 정성을 들어주는 것은 아닐까?



산신각에서 내려다보는 비암사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저 멀리 떠가는 한 점 흰 구름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혹 아미타불이 계시다는 극락정토를 가는 것은 아닌지. 그 구름을 따라 길을 나서고 싶다. 복잡하고 늘 머리가 아파야하는 이러한 세상을 왜 '고해'라고 했는지 이해가 간다. 살아가는 나날이 고통속에서 살고 있다는 인간들이다. 작은 고통 하나 없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저 가을 하늘처럼 저렇게 파아란 물살을 헤치고 고해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던가? 비암사 산신각 앞에서 내려다 본 절집의 지붕들이, 뒤집기만 한다면 고해를 벗어날 수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비암사를 찾는 것이나 아닌지. 

500년이면 강산이 50번이나 변하는 시간이다. 이 긴 시간 동안 한 자리에 뿌리를 박고 사는 나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 그 나무가 꼭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소중한 천연자원임에는 강조할 필요가 없다.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용곡리 407-1에 소재한 수령 520년의 느티나무. 보기에는 그리 오래된 나무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나무를 한 바퀴 돌아보면, 괴이한 모습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고유번호는 강원 원주 10호이다. 1984년 6월 13일에 보호수로 지정이 되었다. 나무의 높이는 20m에 이르고, 둘레는 6,2m나 되는 거목이다. 나무 밑동에서 윗부분의 줄기에는 여기저기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인다. 나무는 일반적인 느티나무들이 가지를 위로 뻗는데 비해, 마치 춤을 추듯 둥긇게 뻗기도 해 기괴한 느낌마져 준다.



호저면 용운사지 곁에 서식해

호저면은 칠봉과 용운사지가 있어 유명하다. 여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흐르는 물가를 찾아 모여든다. 칠봉은 섬강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곱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물가에 서 있어 절경이다. 이 칠봉을 지나 들어가면 용곡리가 나오며, 이곳은 예전에 용운사지가 있던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탑과 석불이 나란히 있는데, 이 느티나무는 그 옆에 서식하고 있다.

느티나무의 옆으로는 맑은 하천이 흐르고 있어, 늘 풍부한 수분이 나무를 자라게 하고 있다. 느티나무는 그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줄기에 가득한 이끼들을 보아도 깊은 세월을 느낄 수가 있다. 나무를 올려다보면서 나도 몰래 침을 삼킨다. 그것은 이 나무가 살아온 세월이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오랜 세월이기 때문이다. 이 나무가 처음으로 싹을 티었을 당시는 조선조 성종 때였으니, 그 세월이 짐작조차 가질 않는다.




500년 성상을 살아온 나무답게 나무는 기이한 모습으로 서 있다.

나무를 보며 기운을 얻다

나무를 보면 무엇인가 기운을 얻는다고 한다. 무슨 기운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그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 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킨 용곡리 느티나무.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수 많은 보호수들이 있다. 이 나무도 그 중 한 나무일뿐이다. 그러나 용곡리 느티나무는 조금은 특이해보인다. 밑동서부터 여기저기 혹같은 것이 돌촐이 되어있다. 아마 오랜 역사의 흔적인 것만 같다.

줄기에는 푸른 이끼가 덮고있어, 이 나무가 얼만 오래되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그 뿐이 아니다. 혹은 또 다른 혹을 만들어내며, 두껍잔등 같은 표피를 보호하는 듯하다. 자연적으로 스스로를 치유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보면 볼 수록 그 경이로움에 감탄을 한다. 수많은 천연기념물을 보아왔지만, 조금도 부족하지가 않다. 그래서 이 느티나무에게서 받는 기운이 남다르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느티나무.  그러나 그 나무마다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호저면 용곡리의 느티나무는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보이면서, 50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을 그렇게 서 있다. 이러한 나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연의 위대함을 배운다.

자연은 스스로를 정화하고, 치유하는 힘을 갖고 있다. 하기에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 서서 나름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이 느티나무는 그 오랜 성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앞으로도 또 얼마나 오랜시간을 우리와 함께할 지 모른다. 그것이 바로 나무에게서 우리가 받아야 할 기운이란 생각이다.

비가 오는 날 답사란 반갑지가 않다. 우선은 장비가 빗물에 젖을까봐 신경이 쓰이기도 하지만. 바짓가랑이를 척척하게 감겨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루를 그냥 포기하고 일요일 일찍 길을 나섰지만, 지난 토요일 내린 비로 인해 걸음을 온전히 걸을 수가 없다. 무작정 걸어야 하는 문화재 답사란 늘 곤욕을 치르게 마련이다.

왜 문화재는 꼭 그렇게 산이나 골짜기에 있나? 누군가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하지만 숨은 듯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은, 스스로 내세우지 않기 위함이다. 석불이건 마애불이건 아니면 석탑이 되었든지, 장인 스스로가 남에게 자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그렇게 숨을 죽이고, 하나의 대단한 작품을 완성을 하는 그런 겸손함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요즈음처럼 내놓고 자랑 같지 않은 자랑을 하지 않아서 좋다. 그것이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려니 한다.


부처님, 몸은 어디에 두시고

원주에서 횡성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으로 소초면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있다. 소초면 소재지를 지나 횡성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소초면 교항리가 나온다. 이곳에는 길가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그 밑에 보면 자연 암석 위에 불두(佛頭)가 한기 모셔져 있다. 바위 위에 올려 진 석조 불두.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4호이다.

바위에는 이끼가 가득 끼어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높이 1.05m 정도나 되는 커다란 불두가 올려져 있다. 이 석조 불두는 원래 이곳의 자연 암석위에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바위에는 선각으로 옷 주름등이 그려져 있었다고 하지만, 그 돌이 매몰되어 알 수가 없다. 왜 이렇게 자연 암석 위에 불두만 조각을 하여 올려놓은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천안시 삼태리마애불 등과 같이, 자연 바위 위로 머리 부분만 솟아나게 제작한 불상과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불상은 고려 시대의 형태로, 이 지역에서 보이는 거대석불과 같은 종류로 볼 수 있다.

이끼가 낀 자연 암석, 그리고 고목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 그 그늘아래 놓인 석조불두. 그저 예사롭지가 않다. 사각형의 넓적한 얼굴에 눈은 수평으로 굳게 그려져 있다. 코는 폭이 넓고 두터워 전체적인 얼굴의 형태에서 과하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입은 두툼하게 표현을 해 과묵한 형상이다. 머리 위는 평평하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서, 그 위에는 평평한 사각형의 판석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고려시대 석조불의 형태를 지녀

옆으로 돌아 귀를 보니, 두텁게 표현을 해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뒷면은 조각을 하지 않고 쪼아낸 그대로 놓아두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토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석조불두는, 고려 시대 이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거대석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머리 위에 평평한 돌을 얹어두는 형태도 고려시대 석불의 특징이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석조불두만 자연암석 위에 올려 진 교항리 석조불두. 그러나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느티나무 곁으로 돌아가 불두를 본다. 그 모습이 아주 오래 전 어느 날 꿈속에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이다. “몸조차 무거워 버리셨습니까? 우리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석조불두의 귀에 대고 떠들어보지만, 굳게 다문 입이 열릴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세상사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어느 장인이, 천 년 전 이미 이 시대를 보고 있었나보다.


전북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에 가면 전북 유형문화재 제93호인 여산동헌이 자리하고 있다. 이 동헌 건물은 조선 시대에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보던 청사이다. 이 건물은 3단의 계단식 건물 제일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맨 아래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을 피로 물들인 병인박해로 인한 아픔의 장소이다.

조선 고종 3년인 1866년 정월에 대원군은 전국에 천주교의 탄압 교령을 포고했다. 병인사옥, 혹은 병인박해라고 하는 이 천주교의 탄압 포고령으로 인해 여산 동헌의 맨 아래 뜰에서는 천주고 신도들을 잡아와,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여러 겹 붙여 호흡을 못하게 만드는 백지사를 행한 곳이다.


한식 건물의 아름다움을 지닌 동헌

여산동헌은 조선 조 말기에 벽과 방의 구조를 일부 개조하기는 했지만,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특히 추녀와 대청마루에서 한옥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동헌 앞뜰 우측에 서 있는 수령 600년이 넘는 느티나무는 이 동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전북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느티나무는 여산 동헌과 주변에 7그루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여산 동헌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느티나무를 보면 여산 동헌은 조선조 태종 조에서 세종 조대에 설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느티나무는 가슴 높이 둘레는 4.5m, 높이는 22m 정도이다.



여산동헌은 한옥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여산동헌을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었다. 동헌을 바라보면서 좌측 2칸은 뒤로 물린 방을 드리고, 우측 세 칸은 마루로 놓았다. 이 대청에서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맡아 본 것이다. 여산은 고려 공양왕 3년인 1391년에는 감무를 두었고, 조선 태종 2년인 1402년에는 여산현으로 불렀다. 그 뒤 세종 18년인 1436년에는 원경황후의 외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이 되기도 했다.




동헌은 장주추를 써 높였다. 그리고 기둥은 보수를 한 흔적이 역력하며, 대청의 뒷벽은 판벽으로 구성했다.
 
동헌 한 편에 남아있는 아픔, 척화비

동헌은 구조가 간단하면서도 한옥의 멋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대청마루 밑은 앞을 벽으로 막아 그 안에 아궁이를 내고, 주초는 장초석을 사용했다. 마르를 높게 만들고 그 밑으로 아궁이를 낸 것도 이 건물의 특징이다. 대청의 뒷벽은 모두 판벽으로 마감을 했으며, 판자문을 내었다. 3단으로 구성된 축대 맨 위에 자리한 동헌. 아마 이곳에서 호령을 한다면 밑 뜰에 모인 사람들은 오금이 저렸을 것이다.


동헌 앞뜰에 서 있는 느티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넘었다

동헌의 우측에는 일각문이 있는데, 그 사이에 비석이 줄지어 서 있다. 송덕비라도 모아 놓은 것일까? 그런데 그 앞에 철책으로 둘러 친 한 기의 비석이 눈에 띤다. ‘척화비’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펴면서 전국에 세운 척화비 중에 하나이다. 그 비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다, 저 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이 앞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인지.

더위는 한풀 간다고 하지만 아직 한 낮의 더위는 따갑다. 동헌마루에 올라 앉아 그늘을 드리운 느티나무를 바라다본다. 철 늦은 매미 한 마리가 목청을 돋는다. 저 매미도 이 여름이 가는 것이 안타까운가 보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어도 동헌 앞마당의 느티나무가 변하지 않듯, 이곳의 아픔도 쉬이 가라앉지는 않을 것만 같다.

동헌의 경내에 서있는 송덕비와 그 앞에 섰는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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