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다양한 문화재에 관련된 영상을 제작해 올리는 ‘헤리티지 채널’에서 영상 제작을 한다고 해서 함께 답사를 나가보았다.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쓰는 사람을 소개하는 <러브人 문화유산>이라는 코너에, 소개가 된다는 것이다.

이번 촬영을 하면서 그동안 20년 가까이 전국을 돌며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문화재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남들은 그런 나를 두고 ‘미쳤다’라고 곧잘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그 ‘미쳤다’ 라는 표현이 그리 듣기 싫지가 않았다. 스스로도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늘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사적 파사성 / 2009, 10, 18 답사

‘힘들다’ 느낄 때에 채찍질이 되다

사실 요즈음은 힘들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모든 여건이 점점 그렇다. 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체력적으로도 많이 떨어진다. 역시 세월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그래도 아직은 ‘팔팔한 청춘’이라고 말은 하지만, 남몰래 저려오는 팔다리는 어쩔 수가 없으니 말이다.

촬영 중에 프로듀서가 묻는다. ‘왜 문화재 답사를 하는 것인가?’를. 그렇게 질문을 하면 딱히 대답을 찾지 못하겠다. 왜? 라는 질문이 참 낯설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문화재 답사가 ‘왜’가 아닌, ‘당연’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적부터 그렇게 당연히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문화재 답사는 일상이요, 당연이다. 답사를 하지 않으면 도대체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렇게 돌아다녔는데도, 돌아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다. 그렇기에 늘 마음이 조급하다.

나에게 문화재 답사는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겨울에 찾아간 수옥폭포 / 2010, 2, 15 답사

나는 왜?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한다. ‘문화재 답사란 나에게 있어서는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이라고.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석불이며, 탑, 마애불 등을 돌아보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문화재는 과거 선조들과 나를 연결해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 생명이 없는 돌과 바위, 그리고 나무들과 스스로 대화를 하면서, 지금의 내가 과거의 선조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난 답사를 할 때마다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에서 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왜'가 아닌 '당연'이라는 해답을 찾는다.

내가 선조들에게 묻는 것이 바로 ‘왜?’이다. 왜? 무슨 마음으로 이것을 조성하였을까? 왜? 그 오랜 세월을 이렇게 피땀을 흘린 것일까? ‘왜’는 바로 내가 만난 문화재에게, 그리고 그것을 조성한 낯모르고 이름 모를 선조들에게 묻는 말이다.

그 왜는 때로는 엉뚱한 해답을 가져오기도
한다. 물론 그 해답이라는 것이, 나 스스로의 답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문화재로 인해 선조들과 이야기를 한다. 그 안에서 왜? 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재는 바로 남의 것이 아닌 우리 것

문화국가, 문화재사랑. 참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저 마음으로나마 문화재를 소중하게 알아야한다는 생각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그러나 과연 마음으로나마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 아마 다만 몇 사람만 있어도, 그 마음들이 모아지면 상당한 힘을 가질 것이란 생각이다.

단종이 귀향길에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여주 골프장 안에 있다) / 2009, 11, 11 답사 

문화재가 국가소유, 지자체소유, 아니면 개인소유일까? 아니다. 그것이 비록 법적인 주인은 국가나 지자체, 혹은 개인일지 몰라도, 그것은 남의 것이 아닌 바로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하기에 우리가 지켜내야 한다. 혹 우리 것이니까 함부로 해도 된다는 멍청이 같은 생각을 하지는 말자. 우리 것이기에 소중히 보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재 답사. 아마 그런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했다면, 벌써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난 내가 살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오늘도 짐을 싸들고 길을 나선다.


 

강원도 산간지방에 4월 18일 오후 3시 30분 현재 눈이 내리고 있다. 오후 2시경부터 널리기 시작한 눈발은 3시가 지나면서 점차 많은 양이 내려, 도로에 눈이 쌓이고 있다.

이 눈으로 인해 강원도 인제군 원통을 오후 2시 40분에 출발해, 한계령을 넘어 양양, 속초로 운행하는 직행버스를 미시령으로 우회를 시키기도 했다.


이 눈은 인제 등 산간지방으로 내리며 속초와 강릉지방은 약한 비가 오고 있는 실정이다. 한계령은 눈이 점차 쌓이고 있다고 하며, 월동장구를 갖추지 않은 차들은 미시령터널로 우회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4월 중순에 산을 아름답게 수 놓은 꽃들도 눈이 쌓여가고 있는 실정. 연분홍으로 아름답게 핀 진달래들이 하얗게 변하고 있다. 이 눈은 내일까지 내릴 것이라고 한다.

속초기상청에서는 오늘 눈이 한계령 부근에 10~20cm 정도가 내릴 것이라고 예보를 하면서 많이 내리는 곳은 30cm 가 넘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 지역을 운행하는 차량들은 각별히 주의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국보나 보물이라고 하면, 아름다운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국보나 보물 중에는 상당히 많은 전각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로 지정된 전각들은 거개가 절이나 궁궐, 능 등에 자리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은 역시 사찰에 있는 전각일 것이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에 의상이 처음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이 귀신사의 처음 명칭은 ‘국신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사적기 등이 전하지가 않아서 정확한 창건 년대나, 창건주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신라 말에 도윤이 중창한 뒤, 귀신사라고 개칭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보물 제826호 귀신사 대적광전

고려 때에는 원명국사가 중창을 한 귀신사는, 임진왜란 대 전화로 폐허가 된 것을 다시 복원하였다. 고종 10년인 1873년의 일이다. 귀신사에는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이 있다. 대적광전은 귀신사의 본 건물로, 현재 보물 제82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귀신사 대적광전은 사찰의 대웅전 등에서 많이 보이는 팔작집이 아닌 맞배집이다.

2월 17일, 저녁 무렵에 갈음을 재촉한 귀신사. 2월 중순의 해는 짧다. 조금만 늦으면 해가 질 것 같은 길을 재촉해 귀신사에 들렸다. 겨울의 설원 속에 있는 대적광전을 보기 위함이다. 사찰은 여름과 겨울의 풍광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한 곳을 사계절을 모두 둘러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귀신사의 대적광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것을, 고종 때 다시 복원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뒤 1823년과 1934년에 중수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몇 번의 보수를 거치는 동안, 대적광전은 단청을 칠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처음부터 단청이 없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다.

맞배지붕의 멋을 느끼게 하는 건물

17세기에는 사찰의 불전이 맞배지붕으로 많이 지어졌다. 아마도 그 당시에 유풍일 것이다. 논산의 쌍계사 대웅전, 월성의 기림사 대적광전 등이 그 당시 지어진 맞배지붕의 전각이다. 귀신사 대작광전은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으로 두는 구조가, 기둥 위에 하나씩 있는 주심포계가 아니다. 중간에 장식을 더 넣은 다포계로 구성이 되었다.

대적광전을 한 바퀴 돌아본다. 눈이 하얗게 덮인 지붕이나, 하얀색을 칠한 담벼락이 하나가 된 듯 조화를 이룬다. 역시 겨울에 보는 정경은 남다른 멋을 풍긴다. 귀신사 대적광전의 벽에는 위에서 아래로 기둥을 내렸다. 죽죽 내려놓은 듯한 기둥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아,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가 있다.




창호도 색다르게 조성을 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지어진 대적광전은, 앞면의 세 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아냈다. 그리고 좌우의 퇴칸은 조금 좁게 구성해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다. 양편 측면으로는 문을 달아내고, 뒷벽으로는 중앙 하단 부에 문을 달아냈다. 우측으로 돌아보니 뒤편에 까치구멍이 나 있다. 왜일까? 환기를 시키기 위한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전각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사진촬영 하시면 안돼요’

대적광전 안으로 들어가 먼저 향을 피우고 삼배를 한다. 답사를 다닐 때마다 늘 하는 차례이다. 천정을 올려다보니 대적광전은 원래 중층으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보물제1516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존불은, 진리의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에 모셨다. 그리고 협시불로는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모셨는데, 모두 소조불이다.


상당히 큰 규모의 삼존불을 불단에 모시기 위해서는 중층으로 건물을 들였을 것이다. <귀신사중수기>에도 법당이 중층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눈에 발이 빠지는 것도 마다하고, 여기저기 눈밭을 뛰는 짐승처럼 빠르게 이동을 하며 돌아보고 있다. “사진촬영하시면 안돼요” 귀신사에서 일을 보고 계신분인가 보다. “예”라고 대답은 했지만, 이럴 경우 참 답답하다.

명색이 문화재를 답사하러 다니는데, 일일이 허락을 받기도 버겁다. 그러다가보면 시간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돌아 나오기는 했지만, 내내 아쉬움에 속이 아프다. 봄철이 돌아오면 다시 한 번 귀신사에 들려, 소조부처님들을 담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 열미리 산 174번지는 곤지암천을 끼고 있는 곳이다. 98번 도로를 따라 곤지암에서 여주군 산북면 쪽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에 '백인대(百仞臺)'라는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백인대가 무엇인지 궁금해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 안에는 축산물등급판정소가 있다. 그 앞을 지나면 곤지암천이 흐른다. 그곳에서 아래쪽으로 보니 건너편에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작은 정자가 하나 서 있다. 바로 백인대이다.

백인대를 바라보면서 밑으로 내려가니 소의 분뇨를 버린 듯 냄새가 코를 짜른다. 아직은 눈이 녹지를 않고 설 연휴에 며칠간 날이 푹하다 보니, 개울에 얼었던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른다. 건너갈 곳이 마땅치가 않다. 그렇다고 포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할 수 없이 돌을 집어 물에 던져 넣었다. 수십 개의 돌을 큰 돌 중간에 던져놓고, 그 돌을 밟고 기우뚱거리며 겨우 내를 건넜다.



송시열이 제자와 강학을 논하던 곳

물을 겨우 건너고 보니 이번에는 녹은 얼음으로 인해 발이 빠진다. 겨우 벗어나니 눈길이다. 그래도 저 앞에 보이는 백인대를 올라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눈에 미끄러지면서 겨우 벼랑 아래에 도착을 한다. 계단은 절벽에 돌을 쌓아 놓았는데, 눈과 낙엽이 가득 쌓여 있다. 눈을 헤치고 낙엽을 밀어내며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계단은 경사가 급해 자칫 한발만 실수를 하면 저 밑 곤지암천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바위를 잡으며 겨우 오른 백인대. 백인대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송시열이 충청도에서 상경할 때는 반드시 들렸던 곳이라고 한다. 송시열은 이곳에서 광주 출신의 제자인 구문찬과 더불어 경학을 강론하고 시를 지었다. 백인대는 곤지암천이 흐르는 절벽 위에 지었는데, 물이 많아지면 배를 타고 건너고, 물이 마를 때에는 걸어서 건넜다고 한다.




아슬아슬한 계단을 올라 백인대 가까이 다가가 본다. 밑으로는 곤지암천이 휘감아 흐른다. 이곳에서 대학자인 송시열과 강론을 한 구문찬. 1937년에 구문찬의 후손들이 이곳에 육각형의 정자를 지었다고 하나, 훼손이 되고 말았다. 현재의 백인대는 시멘트로 지었으며, 1996년에 신축한 것이다. 백인대는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제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렇게 위험한 답사는 정말 × 같아요'

백인대를 돌아보고 내려오려는데 난감하다. 도저히 미끄럽기도 하고 가팔라서 내려갈 길이 막막하다. 할 수 없이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잘라 쌓인 낙엽과 눈을 치운다. 그래도 서서 내려가기는 도저히 불가능할 듯하다. 할 수없이 엉덩이를 계단에 붙이고, 한발씩 자리를 잡으면서 엉금엉금 내려오는 수밖에.



그렇게 한참이나 고생을 한 끝에 밑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동행을 한 일행은 건너편에서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절벽을 기어오르듯 올라간 것도 위험한데, 내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손에 땀이라도 날 정도였다는 것이다.

"누가 이렇게 답사를 하는지 알아주나요?"
"알아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정말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이렇게 × 같은 경우를 당하는 것인지 몰랐네요."
"이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닌데 멀 그리 야단이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정말 이런 답사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팔자가 그러려니 하고 웃고 말아야지.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그렇게 편안하리란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젠 '× 같은 답사'라는 소리까지 듣다니. 글쎄다. 앞으로는 편한 글을 쓸 수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백인대의 기억은 아마 두고두고 남을 듯하다.


영주시 가흥1동 264번지에는 보물 제221호인 영주 가흥동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앞으로는 서천이 내려다 보이는 거대한 바위 윗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마애삼존상이다. 이 마애삼존상은 앞에서 보면 바위에 조각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삼존불이 새겨진 돌이 바위와는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존불의 주변으로는 크기 20㎝내외의 사각형 흠이 나있고, 삼존불상 앞으로도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마애삼존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삼존불 중앙에 본존불은 좌상으로 표현을 하였으며, 좌우에 협시불은 입상으로 조각을 하였다.



영주시 가흥동 마애삼존상과 참례를 하는 사람들

통일신라 초기의 우수한 석조물


삼존불 중 중앙에 좌정한 본존불의 높이는 330cm 정도이다. 우협시보살은 198cm, 좌협시 보살은 약간 작은 195cm이다. 이 삼존불상은 두텁게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처음부터 암반을 파들어가면서 조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본존불을 거대하게 조각을 하고, 양편에 협시불은 본존불 쪽으로 약간 기울 듯 조성을 하였다.


본존불은 소발로 육계가 뚜렷하다. 두터운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으며, 수인을 보면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다. 이 마애삼존불에 새겨진 불상은 비교적 살이 올라 통통한 편이며, 둥근 얼굴의 상호가 지역적인 특징으로 보인다. 양편에 서 있는 협시불 역시 얼굴이 통통하다. 중앙의 본존불은 앙련을 새긴 연화대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았으며, 좌우 협시불 역시 연화대 위에 서 있다.





본존불의 뒤편에 있는 광배는 상단이 뾰죽한 보주형이다. 연화문을 둥그렇게 중앙을 에워쌓 듯 두르고 있고, 바같으로는 꽃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마무리는 돋을새김으로 둘러놓았다. 대좌는 연화대좌로 마련을 했으며, 무릎에 닿게 연화문 8엽을 앙련으로 새겨 넣었다. 양편에 서 있는 협시불도 본존불과 같은 돋을새김으로 처리를 하였다.


누군가 눈을 다 파내


좌측에 서있는 협시불은 왼팔을 어깨 위까지 들고 오른팔은 배 앞으로 대고 있다. 우측의 협시불은 두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는데, 보관에는 보병이 새겨져 있다. 양편 협시불의 팔목에 걸친 천의 자락이 두터운데도 불구하고, 옷주름 선 등이 유연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신체 등의 비례가 알맞은 것으로 보아, 조각술이 뛰어난 우수한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삼존불상은 영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통일신라 초기의 불교조각작품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삼존불상을 보면 누군가 양쪽 눈을 모두 깊게 파버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조성이 되었을리는 없는 것이고 보면, 누군가에 의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는 것이다. 본존불만이 아니고 양편의 협시불까지 그렇게 눈을 파낸 것이다. 그렇게 훼손한 얼굴이 흉하기만 하다.


천년 세월을 높은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앞으로 흐르는 내를 바라다보면서 서 있었을 가흥동 마애삼존상. 두텁게 돋을새김을 한 형태는 전국을 다니면서 보아도, 그리 흔한 모습이 아니다. 그만큼 당대의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흉하게 눈을 다 파놓은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리다. 숱하게 훼손이 된 문화재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은 시커멓게 썩어가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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